2024년 3월 24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강성웅 집사 ▶시편찬송 시편76편(제네바) 다같이 ▶경 독 시편76편 고린도전서11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95편(제네바) * 사도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12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1편(B)(연합) 헌 상 강성웅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요일2:12-17⑩ 요한일서 강해(32) 주의만찬 요6:34-40 다함께 * 찬 송 찬송가 493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 오후 교리공부: “성경과 교리”(58) 교리와 함께 읽는 야고보서 본문연구 |
제2부 인간의 구원 제12주일 하나님 아들에 관하여 제31문: 왜 예수님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까? 답: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으심으로 우리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과 뜻을 완전하게 계시해 주는 위대한 선지자가 되셨고 자기 몸을 화목제로 드려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죄에서 승리하시는 삶을 살도록 늘 지켜 보호하시는 영원한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제32문: 그러면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웁니까? 답: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한 지체가 되어 그의 기름부음에 동참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주의 이름을 시인하고 나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며 선한 양식을 가지고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며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만물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
▣성찬본문/ 요6:34-40
▶『 (요6:34-40)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설교본문/ 요일2:12-17⑩
『 (요일2:12-17)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가장 결정적이고 또 유일한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했던 단어는 ‘머물다’라는 단어(mevnw)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핵심은 ‘머무는 것’입니다. 생명적인 연합과 함께 그 교제 안에 머물며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과 전인적인 연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궁극적인 평화, ‘샬롬’의 상태이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평화’, ‘에이레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갈등도 분쟁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완전한 평화와 안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축복의 선언 안에 이 평안 안에 거하라고 한 것입니다.
▶(민6:25-26)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살후01:0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와 참된 안식이 없는 이 세상에 관하여 사도는 말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간다!(paravgetai,파라게타이,passing away)’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사라져갑니다. 성경은 이 허무한 세상의 질서아래서 만물이 허무한데 복종한다(롬8:20)고 말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도가 던지는 이 한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메노’(머물다!)는 것 말입니다. ‘떠내려가지 않고 머무는 상태, 소멸되지 않고 머무는 상태, 사라지지 않고 머무는 상태’ 이것이 복음이고 구원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되고, 사라지고 잊여질 것입니다. 반면에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가득한 세상 안에서 우리가 저지른 수많은 죄악과 허망하기 짝이 없는 삶에 집착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모든 자원과 은사를 낭비하며 살았던 갚을 수 없는 채무들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참담한 삶의 현실을 향해 사도는 ‘영원히 머무는 길’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찰나(刹那) 같은 인생, 영원한 말씀
▶‘젊다’라는 단어는 ‘젊음’이라는 명사가 원형이고, ‘늙다’라는 단어는 동사가 원형이랍니다. 젊음은 일정한 시기에 한정된 개념이기 때문에 명사로 정의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늙다’는 단어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고 특정한 시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날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물리학자는 죽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주는 죽음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합니다. 이 지구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만 생명이 경험되는 것이니 오히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삶이 이상한 경험이라는 말이죠. 삶이 찰라적이고 순간적인 경험이라서 이것을 설명할 시간에 우리는 이 소중한 삶의 불꽃놀이를 즐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통찰이지만 과학자들의 말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가끔 저는 인문학자들, 특히 역사학자들의 말에 경청하면 그들의 정직하고 겸손한 통찰에 연민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과 경건한 신학자들의 가르침 안에서 찾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이 진리가 얼마나 우주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인지 더 확신하게 됩니다. 특히 정직한 역사학자들의 글을 읽는 것은 정말 유익합니다. 오직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자신의 학문과 양심을 추구하는 학문은 아마도 역사학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제가 어떤 역사학도로부터 한국사 자료를 얻었습니다. 그 자료의 앞부분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선생님, 한국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이자 나의 믿음과 신뢰를 담은 역사입니다!”
정직하게 세계와 인류와 역사를 관찰하면 우리는 즉시로 이런 통찰을 얻게 됩니다. 인간의 삶은 찰나적이지만 역사는 영원하다는 것 말입니다.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 이 삶이 증발되거나 인간처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와 역사 속에 오롯이 새겨진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정직한 역사학자들의 양심과 지성은 이 역사의 진실에 자신의 삶과 삶의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학자의 신념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 찰라 같은 삶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써내려가는 과학자의 관찰과 역사학자들의 서술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답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인류의 양심, 고뇌, 통찰, 희망은 모두 허무한 좌절과 절망으로 끝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상정하지 않고 인류가 고민하고 몸부림치는 삶에 관한 의미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정직한 과학자들은 이 찰라 같은 삶의 의미는 몰라도 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것이니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고 위로할 뿐입니다. 정직한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삶의 이력들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라지고 역사적 경험만이 남아 후세의 인류에게 과거를 반복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철학과 과학은 결국 현재의 삶에 멈추고, 역사학자는 과거로의 회귀를 가로막을 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이야기하거나 과거보다는 더 나은 현재를 이야기하지만 미래에 무엇이 있을지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왜 신학이 모든 학문의 꼭대기에 있다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모든 인류의 탐구와 발견과 질문들에 유일한 답을 주는 것은 성경과 참된 신학자인 그리스도인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애써서 우리의 지나가는 이 안개 같은 삶을 미화하거나 변명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은 찰라 같습니다. 번개처럼 사라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약0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나 사도는 단지 소중한 삶이니 열심히 살라는 방식으로 격려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찰라 같은 삶에 집착하거나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약4: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렇습니다. 사도는 이 하찮아 보이는 삶에 엄청난 의미와 무게를 실어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하나님, 그 영원하신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삶의 소명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에게 영원한 삶을 향해 살도록, 이 어두움에 속한 인간을 영원한 빛 가운데로 초청하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존재로,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도덕적 존재요 하나님의 아드님의 거룩한 성품 안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형상된 존귀한 존재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을 살라고 독려하십니다. 보십시오, 요한도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은 영원을 삽니다. 그래서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요6:63)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들어왔던 것처럼 역시 생명이란 그 말씀(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순종하는가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 신비는 광야의 교회에게 40년 동안 가르치신 진실이었습니다. 만나가 이슬과 함께 내려 이슬이 마를 때 거두어 먹도록 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출16:14) 신학적인 의미는 홍해를 가르시고 그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걸어 나오게 하신 출애굽을 40년간 상기시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실존적으로 이스라엘은 죽음으로 가득 찬 광야라는 공간 안에서 유일한 생명의 양식을 이슬이라는 그릇을 통해서 받아먹어야 했습니다. 죽음으로 가득한 광야(미드라르)라는 공간에서 이슬 같은 찰나적인 물방울 안에 담긴 만나를 먹는 것입니다. 이 역설의 신비를 우리는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이슬 같은 우리네 삶에 주어집니다. 우리의 육신과 지상적 삶이란 이슬처럼 잠정적이고 찰나적이지만 우리가 소유한 그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시며, 사도는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룩한 선지서의 말씀(사40:6-8)을 인용하여 다음같이 말합니다.
▶(벧전1:23-25)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데려감을 당한 자들과 남겨진 자들
사도의 표현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십시오.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지나가다’와 ‘거하다’라는 단어는 분명히 대조적입니다. ‘지나간다’는 말은 이 땅에서의 삶의 허상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은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것처럼, 우리가 지나쳐야하는 허망의 도시이고 이 세상의 영광은 허영의 시장에 불과합니다. 어거스틴 신학의 대가인 K. 스미스는 나그네정체성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속화된 대형교회를 ‘쇼핑몰과 경기장(아레나)’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정주형(도시형) 기독교의 특징은 순례자정체성을 상실한 교회로 소비와 경쟁적 소유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고 말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pavroikoi,파로이코이)라고 불렸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농노들은 거주권을 가진 외국인이었는데, 사도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천국의 국적을 가진 존재로 잠시 이 세상에 머무는 외국인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외국인은 이 세상에 머무는 자가 아니라 ‘지나는’(passing a way)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코스모스)에 머물지 않으며 세상의 질서와 악마적 질서들에 순응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세상을 향한 ‘성화된 무관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진리의 말씀의 길을 따라서 우리의 본향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도는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자들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단과 마귀와 타락한 죄의 질서가 지배하는 이 세상(코스모스)는 잠정적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아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간으로서의 세상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창조의 공간 안에는 모든 어두움과 죄악들은 추방되고 이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들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이 세상은 사라지고 오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이 세상은 영원합니다. 신자는 이 타락한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는 세상 안에서는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두 세상 안에서 두 왕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항하고 거절하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은 반드시 신자의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구속받아야 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될 것입니다. 그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는 그 구속된 세상안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적 스토리안에 이 극적이고 감격적인 미래가 그려집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이 세상에는 선명한 분리와 가름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24:40-41)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한국교회는 이 본문을 통상적으로 휴거(携擧-끌어올림) 사건과 관련하여 해석합니다. 데려감을 당한 사람(수동태)는 휴거된 교회를 의미하고, 버려둠(남겨진)을 당한(수동태) 사람은 심판에 던져진 지상의 불신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휴거본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근거리 예언으로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재림으로서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되고, 원거리 예언으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재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본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심판은 ‘데려감’은 죽음과 심판을 의미하는 일종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고 ‘버려둠’(?)-남겨짐을 의미함- 이란 언약의 땅에 남겨지는 것 곧 구원받은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본문은 1차적으로 로마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사건과 관련됩니다. 일종의 전쟁상황에서 적군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죽음과 도륙이 시행될 때 어떤 자는 ‘죽음’으로 그 땅에서 제거되는 것을 ‘데려감을 당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어떤 자들에게는 ‘죽음’이 면제되어 그대로 ‘내버려둠’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버려둠’(ajfivhmi)이란 단어는 ‘면제되다, 혹은 보내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죽음의 위협에서 놓여 ‘놓여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하실 때 가깝게는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사건을 예언하고 멀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주는 영원한 구원과 심판을 가름하는 우주적 재림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별연습, 삶을 이해하는 경험
여러분, 이것을 사도요한은 ‘머무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속된 세상에 낯선 나그네로 지나는 자가 되지만, 그 날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정욕은 지나가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던 신자들이 남겨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나그네들입니다. 그러나 심판이후에 그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을 때 그들이 바로 구속받은 이 땅의 참된 주인으로 이 땅에 남겨진(머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방주를 짓던 120여 년간 노아는 언제나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임박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부패함과 포악함이 가득한 땅(창6:11)에서 떠날 것을 날마다 촉구했습니다.(벧후2:5) 이 노아홍수의 때와 같이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모두가 공통적입니다. 그들은 예외 없이 그들이 태어난 이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이별연습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이민자’로서 ‘페레그리니’(peregrini)라고 불렀습니다. 이 용어는 그리스도인의 지상적 삶이란 단순히 종교적 순례자가 아니라 정치적 이민자에 가까운 삶으로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노고와 부담으로 가득차 있고 불확실하며 길고, 배고픔과 목마름, 선동과 유혹, 사막이며, 한숨과 눈물, 통곡과 환란으로 가득차 있다.”(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로 므두셀라를 낳고 그 이래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창5:21-24)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동행하다(&l'h;)라는 단어는 ‘걷다’는 의미뿐 아니라 ‘가다’라는 의미로 ‘외국에 가다, 돌아다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 ‘데려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녹을 ‘데려가심(jq'l;)으로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창5:24) 이 지상에서 날마다 에녹은 하나님과 길을 떠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날마다 에녹을 이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심판의 날(홍수)에 완전하게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홍수가 시작되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120년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 방주 안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악인들은 홍수로 인해 ‘데려감’을 당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심판을 통해 땅에서 추방되었고, 홍수가 그친 후 노아의 가족들은 다시 그 언약의 땅에 남겨진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고백하며 살았고, 모세도 장차 누릴 영광을 위해 애굽의 사람이기를 포기했고, 자기백성 곧 히브리인들과 함께 고난 받는 나그네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다.(히11:13;히11:24-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세상과의 이별연습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갈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늘도 길을 떠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지탱하는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지나가는 나그네였던 우리가 어떻게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거룩한 세계 안에서 모든 악인들과 마귀와 죽음이 추방되고 부패한 질서가 일소된 후에 이 세상의 참된 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이 승리적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잠2:20-22)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21)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22)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이 영광스럽고 복스러운 소망 안에서 오늘 사도의 증언을 듣기 바랍니다.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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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한 용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고가 있다. ▶(요12:32-34)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주님은 자신이 들려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들리다는 말은 ‘죽음’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들려야 함을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주목하라.(요12:34)
2) ‘이민자’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페레그리나시오’(peregrinatio)라는 말에서 유래되는데 이것은 여행 편력을 가진 삶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정주할 수 없는 나그네적 성향을 본성적으로 갖는다는 의미이다.
3) ‘히브리인’이란 이름은 ‘강 건넌 사람’이라는 뜻이나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정착한 것에서 유래된 의미일 수 있다. 어떤 의미이든 ‘히브리인’이라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은 외국인, 혹은 거류인이라는 ‘나그네 정체성’을 반영한다.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77편
1.오 전능하신 하나님,
이런 어려운 시절에 우리는 계속 당신을 바라봅니다. 교회가 그토록 큰 위험에 직면해 있는 동안에, 성가실 정도로 우리는 날마다 열렬한 기도와 약속을 당신에게 올려드리며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신 당신에게로 날아갑니다. 지난 시절들을 기억할 때 우리의 슬픔과 비애가 적지 않게 증가하며 자라갑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마음의 안녕과 영혼의 무사함 속에서 평화롭고 고요하게 당신의 가르침과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신 일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같은 풍성한 안전과 심원한 고요함이라는 선물을 심각하게 오용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의 엄중하고 공의로운 손길을 체험하는 것은 올바르고 공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하신 아버지여, 이제 우리가 기도하오니,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저질렀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면,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크신 긍휼로 불쌍히 여기시는지 우리는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약속들은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므로, 당신의 긍휼을 우리에게서 거두어가지 마옵소서.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셨을 때 당신이 보여주신 일들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목도하였을 때, 바다의 물이 일어나 경이로운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악한 자들에 대항하여 당신은 짙은 구름과 천둥과 번개와 바람과 캄캄한 폭풍으로 싸우셨습니다.
그때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것처럼, 이제도 그렇게 교회를 사탄의 분노와 그의 앞잡이들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