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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재전경(星山齋全景)
성산재·삼오당(星山齋·三五堂)
처음 이 자리에는 조선 숙종(肅宗) 6년(1680)에 건축된 재실이 있었다 하나 현재의 건물은 1915년에 건립하고, 1926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일자형 평면 춘양목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오량가 홑처마 팔작와가로 구성되어있으며, 삼오당(三五堂)이라는 당호는 시조공이 삼한 통일에 크게 功을 세우고, 고려 태조로부터 개국공신으로 책봉을 받아 오현(五縣-加利.壽同.谿子.新安.都山)을 통합하여 경산부를 설치하고,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2008년 번와(翻瓦)를 하고 보수하였다.
경원사(景源祠)
시조공 능일(能一)과 현손(玄孫)인, 대경(大卿)公 견수(堅守)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있는 건물로서 1978년에 건축되었으며, 매년 한식(寒食)날에 전일입제(前日入祭)하여 한식날 묘(卯)시에 춘향(春享)을 봉행(奉行)하였으나, 지금은 교통의 편의로 인하여 당일 오전 10시경에 봉행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사방에 토석 담장이 둘러 처져있다. 여재문은 경원사의 출입문(出入門)으로 정면 3칸으로 된 일주문(一柱門)이다. 여재(如在)라는 말은 시조공의 혼(魂)이 항상 여기에 계시다는 뜻으로, 자손들이 경원사에 출입 할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는 모듬발로 오르내리고, 동입서출(東入西出) 즉 동문(밖에서 보아 우측 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와야하며, 2008년 번와(翻瓦)와 배례석(拜禮席)을 확장하고 여재문을 악간 아래로 내려세웠다. 경내에서는 절대로 뛰어다니거나 하여서는 아니 된다.
여재문(如在門)
시조공 능일(能一)과 현손(玄孫)인, 대경(大卿)公 견수(堅守)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있는 건물로서 1978년에 건축되었으며, 매년 한식(寒食)날에 전일입제(前日入祭)하여 한식날 묘(卯)시에 춘향(春享)을 봉행(奉行)하였으나, 지금은 교통의 편의로 인하여 당일 오전 10시경에 봉행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사방에 토석 담장이 둘러 처져있다. 여재문은 경원사의 출입문(出入門)으로 정면 3칸으로 된 일주문(一柱門)이다. 여재(如在)라는 말은 시조공의 혼(魂)이 항상 여기에 계시다는 뜻으로, 자손들이 경원사에 출입 할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는 모듬발로 오르내리고, 동입서출(東入西出) 즉 동문(밖에서 보아 우측 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와야하며, 2008년 번와(翻瓦)와 배례석(拜禮席)을 확장하고 여재문을 악간 아래로 내려세웠다. 경내에서는 절대로 뛰어다니거나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저존당(著存堂)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서, 1900년대 초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며, 삼오당(三五堂)을 짖기 전에는 본당(本堂)으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춘추향사(春秋享祀)에 필요한 제기(祭器)등을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으로 쓰여지고 있으며, 저존(著存)이라 함은 예기(禮記) 제의(祭儀)편에 나오는 말로(禮記曰致其愛則存致其慤則著-예기왈치기애즉존치기각즉저) 사랑을 극진히 하면 있는 것 같고, 정성을 극진히 하면 나타나는 것 같다는 데에서 취한 말이며, 2008년 대대적인 번와와 개수(改修)를 하였다.
시조공 단비(始祖公壇碑)
1900년에 종의(宗意)가 준발(俊拔)하여, 1905년 단소를 처음 조성하고 비(碑)를 세웠으며, 1913년부터 경원사 남쪽에 단(壇)을 설치하고 단향(壇享)을 봉행하여 왔으나, 2008년 인주공파 장환(壯桓) 종인의 성금으로 단비(壇碑)를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 초 1일에 벽진 솟질(鼎谷)의 대경공 단소와 동시에 추향(秋享)을 봉행(奉行)한다.
시조공 유허비((始祖公遺墟碑)
구비(舊碑)는 임인(壬寅-1902)년에 세웠으며, 비각(碑閣)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와가(瓦家)로 외부 벽면은 碑가 들여다보이는 창살 구조로 되어있으며, 경원사 계단아래 우측에 있던 것을 2008년 저존당 좌측으로 옮기고, 인주공파 장환(壯桓)종인의 성금으로 삼오당 좌측에 신비(新碑)를 건립하였다.
시조공 유허비문(始祖公遺墟碑文)
성주(星州)고을의 중앙(中央)에 성산재(星山齋)가 있으니, 서남(西南)으로 바라보면 칠봉산(七峯山)의 군봉(群峰)이 열(列)을 지어 장엄(莊嚴)하고 수려(秀麗)하게 병풍(屛風)을 두른듯하고 동북(東北)에는 이천(伊川)의 맑은 물이 백리(百里)를 달려와서 고을을 감싸고 굽이쳐 흐르는 가운데 아늑한 구릉(丘陵)에 둘러싸인 천혜(天惠)의 비경(秘境)이 있으니 이곳이 우리 시조공(始祖公)께서 악강(嶽降)하시어 기거(起居)하셨던 신령(神靈) 스러운 유허(遺墟)이다. 천여년(千餘年)을 지난 지금(至今)에도 당시(當時)에 음용(飮用)하시던 우물이 완전(完全)하게 보존(保存)되어있으니 실(實)로 신비(神秘)한 일이다. 공순(恭順)히 돌아보건대 시조공(始祖公)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초휘(初諱)는 능(能)으로 신라(新羅)의 국운(國運)이 쇠(衰)하고 고려(高麗)가 용흥(龍興)하는 시대(時代)에 태어나시니 그 선세(先世)는 대대(代代)로 성주(星州)에 웅거(雄據)하였던 이 지방(地方)의 호족(豪族)이었다. 천성(天性)이 영민(英敏)하고 지략(智略)이 출중(出衆)하여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보좌(保佐)하여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여 고려 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이 되시고 왕녀 정순대장궁주 호국개경부인(王女淨順大長宮主護國介景夫人)을 배필(配匹)로 삼아 부마(駙馬)가 되셨다. 고려 태조 8년 을유 동(高麗太祖八年乙酉冬)에 고려 태조(高麗太祖)와 후백제 견훤(後魄濟甄萱)이 조물성(曹物城)에서 접전(接戰)하여 자웅(雌雄)을 겨루고 있던 때에 최언 등(崔彦等)과 함께 민병 600여명(民兵六百餘名)을 거느리고 태조(太祖)를 도와 본부장군(本部將軍)이 되어 견훤(甄萱)을 정복(征服)하는데 공(功)을 세웠다. 태조 19년 병신(太祖十九年丙申)에 후백제(後百濟)를 평정(平定)하므로서 삼한통일(三韓統一)의 대업(大業)을 성취(成就)하고 공신(功臣)들에게 대상(大賞)을 내릴 때 통일(統一)의 공(功)을 높이 평가(評價)하여 휘 능자(諱能字)에 일자(一字)를 가(加)하여 능일(能一)로 사명(賜名)하고 벼슬을 삼중대광사공(三重大匡司空)으로 올렸으며 휘함(諱銜)을 개경(開京)의 종(鐘)에 새겼다. 태조 23년 경자(太祖二十三年庚子)에 개성(開城)의 신흥사(新興寺)에 새로 공신당(功臣堂)을 짓고 당내 동서 벽상(堂內東西壁上)에 삼한공신(三韓功臣)들의 화상(畵像)을 그릴 때 시조공(始祖公)의 화상(畵像)도 같이 그려졌다. 이 해에 전국(全國)의 주군제도(州郡制度)를 변경(變更)함에 좌명(佐命)의 공(功)을 길이 기념(記念)하기위하여 거주지(居住地)인 성주군(星州郡)에 신안(新安) 도산(都山) 수동(壽同) 계자(谿子)등 4현(四縣)을 통합(統合)하여 경산부(京山府)로 승위(陞位)하고 성산군(星山君)으로 봉(封)하니 이로 인(因)하여 본관(本貫)을 성산(星山)이라 하였다. 현손(玄孫)인 대경공(大卿公) 휘(諱) 견수(堅守)에 이르러 한때 성주 서 명암 정곡리(星州西明岩鼎谷里)에 이거(移居)하였다가 만년(晩年)에 구거(舊居)로 돌아와 자손만대(子孫萬代)로 눌러 살았는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어 성주(星州)를 목(牧)으로 승격(昇格)하고 목사(牧使)를 두어 관아(官衙)를 남(南)으로 옮기는 바람에 주민(住民)들도 거주지(居住地)를 떠나게 되고, 그 터에 사창(司倉)이 건립(建立)되었다. 창리(倉吏)가 시조공(始祖公)의 위덕(威德)을 추모(追慕)하여 성황사(城隍祠)를 짓고 매월삭일(每月朔日)에 제사(祭祀)를 지냈으며 인근(隣近)의 주민(住民)들이 질병(疾病)이나 재난(災難)이 있으면 찾아와서 기도(祈禱)하면 효험(效驗)이 있었다 한다. 숙종(肅宗) 오년기미(五年己未)에 목사신학(牧使申㶅)의 꿈에 신령(神靈)스러운 위장부(偉丈夫)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곳 사창(司倉)의 땅은 나의 옛 거주지(居住地)로 음정(飮井)이 있는데 허다(許多)한 우마차(牛馬車)의 난답(亂踏)으로 더러운 웅덩이가 되었으니 원컨대 목사(牧使)는 다시 준정(浚井)하여 깨끗하게 해주시오 하였다. 목사(牧使)가 꿈을 깨고 옛 관리(官吏)에게 고사(故事)를 물어 깨닫고 준설(浚渫)하여 석축(石築)을 쌓고 석판(石板)으로 덮개를 하고 정각(井閣)을 세워 이공신정(李公神井)이라 현판(懸板)하였으니 이 얼마나 신기(神奇)한 일인가? 아! 아름다워라 연원(淵源)이 멀면 류파(流波)가 길고 뿌리가 깊으면 지엽(枝葉)이 무성(茂盛)한 법(法)이다. 우리 시조공(始祖公) 유덕(遺德)이 심원(深遠)하여 여택(餘澤)이 무궁(無窮)하니 자손(子孫)이 번연(蕃衍)하여 그 수(數)가 십여만명(十餘萬名)에 이르고 고려(高麗)를 지나 조선(朝鮮)을 거치고 일제(日帝)를 겪고 광복(光復)에 이르기까지 홍유석덕(鴻儒碩德)이 계작(繼作)하고 명관거작(名官巨爵)을 배출(輩出)하여 진충보국(盡忠報國)하고 문호(門戶)를 천양(闡揚)하니, 이 또한 면면(綿綿)히 이어온 조선(祖先)의 공덕(功德)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릇 후손(後孫)된 자 어찌 추원보본(追遠報本)하고 숭조목족(崇祖睦族)하는 성의(誠意)가 없겠는가? 광무 6년 임인(光武六年壬寅)에 유허비(遺虛碑)를 수립(竪立)하고 단소(壇所)를 설치(設置)하여 세향지소(歲享之所)로 삼았으며, 종안(宗案)을 작성(作成)하고 명전(名錢)을 갹출(醵出)하여 1915년 을묘(一九一五年乙卯)에 재사삼간(齋舍三間)을 비각(碑閣)의 좌편(左便)에 건축(建築)하였으니 지금(至今)의 저존당(著存堂)이다. 그 십여년후(十餘年後)에 또 재당(齋堂)을 건립(建立)하여 성산재(星山齋)라 편액(扁額)하고 당호(堂號)를 삼오당(三五堂)이라 한 것은, 태조(太祖)를 보좌(補佐)하여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고 오현(五縣)을 통합(統合)하여 부(府)로 한데서 취의(取義)한 것이니 여기에 우리는 선부노(先父老)의 술선(述先)의 정신(精神)이 얼마나 투철(透徹)하였으며 유후(裕後)의 가모(嘉謨)가 또한 굉원(宏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日帝)의 수난기(受難期)를 겪으면서도 숭조사업(崇祖事業)이 더욱 활기(活氣)를 띠어 위선사업(爲先事業)의 중요성(重要性)을 공감(共感)하고 종의(宗議)를 수렴(收斂)하여 성산재(星山齋)를 중건(重建)하였던 사실(事實)에 고개를 숙여 감읍(感泣)할 따름이다. 그 후 1978년 무오(一九七八年戊午)에 통승루(統陞樓)를 건립(建立)하고 1981년 신유(一九八一年辛酉)에 경원사(景源祠)를 창건(創建)하여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대경공(大卿公)을 배향(配享)하여 매년 한식일(每年寒食日)에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음력 십월 일일(陰曆十月一日)에 단향(壇享)을 봉행(奉行)하며 대경공(大卿公) 유허(遺墟)에도 설단(設壇)하여 동일(同日)에 행사(行祀)한다. 2005년 을유(二千五年乙酉)에 순수(純粹)한 종인(宗人)의 성금(誠金)으로 대동(大同)이란 거각(巨閣)을 건축(建築)하여 회의실(會議室)로 사용(使用)하고 있으며, 통승루좌우(統陞樓左右)에 장진각 수성사(藏珍閣守星舍)를 건립(建立)하였다. 작금 양년(昨今兩年)에 열번째의 세보(世譜)를 발행(發行)하고 있으며, 그 잉여금(剩餘金)으로 성역(聖域)을 크게 정화(淨化)함에 단소(壇所)를 이설확장(移設擴張)하여 단비(壇碑)를 개수(改竪)하고 기왕(旣往)의 유허비(遺墟碑)가 심(甚)히 왜소(矮小)하고 기록(記錄)이 소략(疏略)하므로 랑사(廊舍)가 있던 자리에 자좌 오향(子坐午向)으로 15척(十五尺)의 융비(隆碑)를 새로 수립(竪立)하여 시조공(始祖公)의 위상(位相)을 드높이고 숭조(崇祖)의 정신(精神)을 고취(鼓吹)하고자 한다. 불인불명(不仁不明)한 내가 대종(大宗)의 중임(重任)을 맡아 사업(事業)을 추진(推進)함에 첨종(僉宗)이 비명(碑銘)을 강청(强請)하거늘 무문(無文)하다하여, 고사(固辭)하지 못하고 감(敢)히 시조공(始祖公)의 유풍여적(遺風餘跡)을 천양(闡揚)하고 저간(這間)의 경과(經過)를 약술(略述)하는 바이니, 원(願)컨대 모든 종인(宗人)은 이를 계기(契機)로 시조공(始祖公)의 무량(無量)한 음덕(蔭德)에 더욱 감사(感謝)하고 합심단결(合心團結)하여 종사(宗事)의 발전(發展)에 협심(協心)하여 주시기 바라며, 금반수비(今般竪碑)에 있어서 33세 인주공파 장환종인(三十三世仁州公派壯桓宗人)이 단비(壇碑)와 본비(本碑)를 헌성(獻誠)하였으므로 그 성효(誠孝)가 가상(嘉尙)하여 말미(末尾)에 기(記)하고 구비(舊碑)의 명(銘)을 국역(國譯)하여 옮겨 여기에 새긴다. 숭양(崇陽)에는 종(鐘)이 있어 성명(姓名)과 관작(官爵)을 새긴 유서(由緖)가 있고, 성산(星山)에는 유정(遺井)이 있어 자취가 남아 있는데 우리 이문(李門)이 번창(繁昌)한 것은 시조공(始祖公)이 끼친 덕(德)이니 그 덕(德)을 돌에 새겨 영세(永世)로 이를 보게 하리라.
서기(西紀) 2007년(年) 정해(丁亥) 국추(菊秋)
진기(震基) 삼가 글을 짓고 종택(鍾澤) 제자(題字)를 쓰고 경식(景埴) 음기(陰記)를 쓰다
이필문(履必門)
이필문은 경원사에서 단소쪽으로 들어가는 일주문(一柱門)으로, 이필(履必)의 의미는 예기(禮記)에 상로기강군자이지(霜露旣降君子履之) 필유처창지심(必有悽愴之心) 서리가 내리는 계절에 선대 묘사를 지낸다는 뜻에서 “履”자와 “必”자를 취한 것으로써 매년 음력 10월 초1일 10시경 추향을 봉행한다.
이공신정(李公神井)
조공이 마시던 우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숙종 6년(1680) 성주목사 신학(申㶅)이 꿈에 현몽(現夢)을 얻어 우물을 준설(浚渫)하고, 정각을 세워 “이공신정-李公神井”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음정(飮井)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원형으로 쌓고, 지상돌출부는 다듬은 화강석으로 1m 정도로 둘려져있고 정각(井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으며, 2008년 번와를 하고 보수하였다.
대동각(大同閣)
1997년에 발의하였으나 동년 12월 7일 국가적인 경제위기 I.M.F로 모금을 중단하였다가, 2000년 5월부터 전국 종인을 대상으로 모금을 시작하여, 69개 종중산하단체와 630명의 종인이 5억4백6십9만원을 모금하여 2005년 2월 10일 준공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와가로서 냉난방(冷煖房)이 되어있으며, 춘(春), 추(秋) 향사(享祀)와 각종 종중 행사시, 숙소(宿所)와 각종회의 시 회의실과 숙소(宿所)로 사용되고 있으며, 40여평의 내부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이 건축 되었으며 위에 얹힌 대들보는 한 개의 무게가 약 4ton이나 된다.
흥경문·통승루(興敬門·統陞樓)
<統陞樓重修記>-통승루 중수기
성주읍 경산리 성주군청의 서편(西便)에 아려(雅麗)한 구릉(丘陵)에 둘러쌓인 천혜(天惠)의 비경(秘境)이 있으니, 우리 성산이씨의 시조(始祖)공이신 고려 개국벽상좌명공신삼중대광사공(高麗開國壁上佐命功臣三重大匡司空)으로, 태조(太祖)의 부마(駙馬)가 되시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諱 能一께서 탄강(誕降)하신 영지(靈地)요, 후손(後孫)이 번연(蕃衍)하여 천여년을 수호(守護)한 전통(傳統)이 면연(綿連)한 명소(名所)이기도 하다. 경내(境內)에는 시조(始祖)공을 봉향(奉享)하는 경원사(景源祠)와 단소(壇所)를 위시(爲始)하여 저존당(箸存堂), 성산재 삼오당(星山齋三五堂), 이공신정(李公神井), 신,구 유허비(新舊遺墟碑), 대동각(大同閣)등이 건립(建立)되어 있으며, 그 주출입문(主出入門)인 흥경문(興敬門)이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2층 구조(構造)로 되어있다. 기둥은 화강석(花崗石)으로 석환주(石丸柱)이며, 2층은 강원도 산(産) 육송(陸松)을 운반(運搬)하여 청판(廳板)을 깔고 주위(周圍)에는 사방으로 란함(欄檻)을 부착(附着)하여 장식(裝飾)하였다. 천장(天障)에는 룡(龍)의 형상(形狀)을 조각(彫刻)하여 통승루(統陞樓)라 현액(懸額)하였으니, 통승(統陞)이라 명명(命名)하였음은 태조(太祖)를 보좌(補佐)하여 삼국통일에 위훈(偉勳)이 있어 작위(爵位)가 승급(陞級)하였다는 통(統)자와 승(陞)자를 취한 것이다. 이 루(樓)는 1976년 병진(丙辰)에 성산이씨 아홉 번째의 족보(族譜-戊午譜)를 간행(刊行)함과 동시(同時)에 기공(起工)하여 3년의 공정(工程)을 거쳐, 1978년 무오(戊午)에 낙성(落成)하였으니, 실(實)로 무오보와 시기(時期)를 같이 한 것이다. 그 후에 세월이 유구(悠久)하여 청판(廳板)은 파손(破損)되고, 풍우(風雨)가 침루(浸漏)하여 퇴락(頹落)이 심(甚)하더니, 2008년 무자(戊子)보를 편찬(編纂)함을 계기(契機)로 경내(境內)를 정화(淨化)하고, 삼천만원의 예산(豫算)으로 양질(良質)의 개와(蓋瓦)를 구입(購入)하여 번와(藩瓦)하고 판자(板子)를 보수(補修)하고, 승강(乘降) 계단(階段)을 신설(新設)하여 사용(使用)을 편의(便宜)하게 하였으며, 좌우(左右)에 장진각(藏珍閣) 수성사(守星舍)를 창건(創建)하니, 일경(一境)이 환명(煥明)하여 우리 종중을 천양(闡揚)하는 상징(象徵)이 된다. 이 또한 후덕(厚德)한 조선(祖先)의 음우(陰佑)가 아니겠는가? 무릇 후손(後孫)된 자 숭조보본(崇祖報本)의 정신(精神)을 계승(繼承)하여 이를 강령(綱領)으로 삼는다면, 통승(統陞)의 대의(大義)가 성산재(星山齋)와 더불어 백세장전(百世長傳)하리니, 우리 10만 종인은 이로 인(因)하여 더욱 화합(和合)하여 종사(宗事)의 발전(發展)에 기여(寄與)하지 않겠는가? 향자(向者)에 영돈(永燉) 전 회장과 경식(景埴) 현 회장이 동반(同伴) 내방(來訪)하여 중수(重修)의 전말(顚末)을 기(記)하여 줄것을 책(責)하거늘 생각하니, 동조(同祖)의 후예(後裔)로 무문(無文)하다. 하여 고사(固辭)하지 못하여 외람(猥濫)함을 무릅쓰고 여우(如右) 기술(記述)하여, 후세(後世)에 귀감(龜鑑)이 되고자 하는 바이다.
서기 2010년 경인(庚寅) 입추(立秋)절 후손 진기(震基) 謹記
오천(烏川) 정낙용(鄭洛鎔) 謹書
장진각(藏珍閣)
대종회 종중문서를 보관하고 수합된 유물을 보관 전시하기위하여 건축한 건물로, 대동각 건립과 병행하여 모금된 자금의 일부로 2004년 10월에 준공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한?양 절충식으로 철근콘크리트로 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수성사(守星舍)
성산재를 관리하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건물로, 대동각 건립과 병행하여 모금된 자금의 일부로 2004년 10월에 준공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한·양 절충식으로 철근콘크리트로 지붕에 기와를 얹었으며, 3칸은 관리인 사용공간이고 1칸은 방문자의 화장실로 구성되어있다.
대동각 건립 헌성비(大同閣建立獻誠碑)
- 대동각 헌성 비문(大同閣獻誠碑文)
성주(星州)는 성산이씨(星山李氏)의 발상지(發祥地)요 세거지(世居地)이다. 천년(千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와 전통(傳統)을 자랑하는 우리 성산이씨(星山李氏)는 선부노(先父老)께서 이미 사우(祠宇)와 재사(齋舍)를 건립(建立)하여 숭조목족(崇祖睦族)의 사업(事業)을 전개(展開)해왔다. 그 뜻을 이어 이번에 순수(純粹)한 자손(子孫)의 성금(誠金)에 의(依)하여 전통(傳統) 한옥(韓屋)으로 거각(巨閣)을 신축(新築)하여 대동(大同)이라 명명(命名)하고 선세(先世)의 유훈(遺訓)을 강론(講論)하며 후손(後孫)의 번영(繁榮)과 화합(和合)을 도모(圖謀)하니 실(實)로 누대(累代)의 숙원(宿願)을 금일(今日)에 성취(成就)한 것이다. 이에 헌성인(獻誠人)의 정성(精誠)을 이 돌에 새겨 길이 전(傳)하여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귀감(龜鑑)으로 삼고자한다.
대경공 단소(大卿公壇所)
정곡(鼎谷)은 대경공께서 고려초기 이 마을에 살았었다고 전하여져 오며, 1984년 정언공파(正言公派) 오도(吾道)중중에서 위토답(位土畓) 827평을 기증(寄贈)하여 조성하였다가, 2008년 성산재 성역화시 다시 비(碑)를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출처;성산이씨 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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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일만 함께 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