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편지 72신]'전라도닷컴' 끝까지 가야 하네
황형, 황국장, 아니 황대표 보시게.
엊그제 한겨레신문은 당신이 다달이 내는 ‘전라도닷컴’이 문화관광부 우수잡지로 선정되었다며 아래와 같은 기사를 썼더군.
“<전라도닷컴>은 2000년 10월 웹진(jeonlado.com)으로 시작해 2002년 2월부터 다달이 80여쪽 분량으로 통권 79호를 발행했다. 전라도 전역의 따뜻한 사람과 숨겨진 문화를 발굴해 정감있는 남도 사투리로 풀어내며 호평을 받아왔다. 최근에는 재정적 어려움에도 전국의 독자·후원자 4000여명의 도움으로 발간작업을 해왔다. 잡지를 발간하면서 단행본 8권을 출판하고, 다달이 문화마당을 펼치는 등 잡지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하여간, 선정소식에 무조건 축하의 인사를 보내네. 감축의 말씀을 드리네.
대한민국에 몇 백 개의 잡지가 있지만, 님이 내는 잡지는 한 마디로 엄청 독특하다고 해야겠지. 그 옛날 암울한 시절 50-60년대 장준하선생의 ‘사상계가’가 그랬듯, 70년대 함석헌선생의 ‘씨알의 소리’와 한창기선생의 ‘뿌리깊은 나무’가, 80년대 간신히 맥을 이은 ‘샘이 깊은 물’이 그랬듯, 잡지 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네. ‘전라도 전역의 따뜻한 사람과 숨겨진 문화를 발굴해 정감있는 남도 사투리로 풀어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정말로 대단허이. 나의 별명이 ‘알록달록’이자만, 어찌 이리 알록달록한 잡지가 있단 말인가. 그 잡지를 내가 ‘친히’ 아는 님이 만든다는 것이 아닌가. 그 소식을 문자로 접하고 두 어깨가 으쓱으쓱해지더군. 님에게 모처럼 이메일 편지를 쓰는 까닭이 여기에 있네.
님에게 거의 처음으로 쓰는 편지, 여기에서 고백하겠네.
나의 책읽기는 실제로 잡지로 시작되었다네. 어디 깡촌, 농사짓는 집에 책이 있었겠나. 동네 사랑방에 굴러다니는 ‘새농민’잡지가 거의 유일했다네. 초딩시절, 정말로 ‘글’이 고팠다네. 언젠가 ‘학원’이라는 잡지가 보여 눈이 번쩍 띄이더군. 아,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학교나 동네에 책 좀 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작가가 되어 있었을 거네.
몇 년 전 형이 던져준 ‘전라도닷컴’ 잡지는 나의 ‘글 욕심’을 충분히 충족시켜주었다네. 어찌나 글이 맛있었던지. 머리말을 쓰는 편집장 ‘황풍년’이 누구인지, 왜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 또 남인희기자, 남신희기자는 누구인지? 아마도 자매일 터인데, 무슨 놈의 글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쓰는 것인지? 당신이 내는 잡지를 손에 쥐면 솔직히 일주일, 아니 보름은 행복했다네. 그렇게 알게 된 잡지 ‘전라도닷컴’을 주변에도 많이 권했었지. 오죽하면 1월 어느날 휴가를 내고 님들만을 만나러 남도여행을 했겠는가. 감격의 그날, 나는 님과 함께 꼬박 9시간을 같이 있었지.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몽땅 만난 즐거움에다 덤으로 광주의 열혈시인 김준태선생까지 만나 차를 대접받을 줄이야. 시쳇말로 기분이 완전 따봉이었다네.
편집권이 독립 보장된 상태에서 돈 걱정 하지 않고 잡지 만들기. 그것 또한 나의 꿈이었다네. 전라도닷컴이 신나게 그런 자유를 누리다. 지난해 10월부터인가, 길거리에 나앉았다는 소식은 청천벽력이었지. 다행히 눈밝은 어느 독지가 만나 건물을 공짜로 빌리고, 이대로 말수는 없다며 기자 4명이 허덕허덕 몇 호를 만들다, 세상에 다시 없을 광주에서의 ‘후원의 밤’이 열리고, 희망제작소 대표 박원순님이 “이런 잡지 하나 정도는 대한민국에 있어야 한다. 나부터 주머니를 털겠다”고 나서고, ‘천재 철학자’ 도올 김용옥선생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잡지”라고 극찬하며 나서는 바람에 쪼깨 숨통이 틔였다고. 대체 올 한 해는 한 호, 한 호, 어떻게 냈을까. 우리야 일개 독자로서 한 달에 3000원, 4000원 내고 보니까 알 수 없지만, 그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인 잡지를 접하며 ’한숨‘이 나오곤 하더군. 과연 이 엄혹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런 귀한 잡지는 계속 나와야 할 터인데, 백범 김구선생은 세 가지 소원을 모두가 우리나라를 부강한 나라보다 문화적으로 훨씬 성숙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문화를 헌 신짝 버리듯 천대하고 무시하며 살까, 그 틈새에 끼어 고군분투하는 전라도닷컴은 생존을 어찌해야 할까. 게다가 편집장이라는 님은 글만 잘 썼지 꼬박 ’고리짝 샌님‘으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마디 못하는 위인인 것을.
실제 두 번밖에 보지 않았어도, 몇 십 년 지기(知己)나 되는 듯한 님에게 축하인사를 드린다는 게 너무 장황했네. 요즘에야 어디 필기구로 편지를 쓰던가? 참으로 망할 놈의 세상이지만, 나부터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게 엄청 편한데 어떡하겠나? 님이 보내온 메일이 어느 꼭두새벽 너무 감동을 안겨 어느 공기업 사보에 전문을 인용하며 대외적으로 자랑친 적도 있다네. ‘군자지교 담여수 소인지교 감약례’(君子之交 淡如水 小人之交 甘若醴‘라고 님이 썼었지. 그렇지, 모름지기 사귐은 이래야 되겠지. 9월 초순 회사 동료들과 남도행 KTX를 탔었지. 바쁜 가운데에도 송정리역으로 마중나온 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겠네. 님과나는 몇 달 만에 두 번째 보는 데도, 어제 본 듯 이무럽게 대하니, 동료들이 굉장히 이상한 눈으로 보더군. 무슨 재주가 그런 재주가 있느냐고 어느 동료가 말하자, 한 친구가 “사람을 진정성(眞情性)으로 만나고 대하면 이런 관계가 될 수 있다”며 ’정답‘을 말하더군. 그렇네. 사람이 살면서 여러 관계 속에서 ’진정성‘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처음부터 ’빈 손‘이긴 하지만 님을 진정성으로 대했고, 님도 그랬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이런 ’우정‘(友情)이 저절로 생긴 게 아니겠나. 서로 조금이라도 위해 주려고 안달복달하니 말이야.
정말로 님과 님의 식구들이 잘 됐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겠지. 님들의 순수한 열정으로 ‘전라도닷컴’의 생명력이 오래오래 지속되어야 할 터인데, 그것도 너무 어려운 일이겠지. 그러나 나는 믿네. 님의 잡지를 아끼는 4천여 독자의 마음이 모여 모여서 거대한 강을 이루고 산이 될 것을 말이네. 님의 잡지가 내세우는 ‘전라도의 사람, 문화, 자연’이 역사의 증인이 될 걸세. 나는 전라도에 태어난 것을 무한한 축복으로 생각하네. 어디 경상도라고, 충청도라고, 제주도라고 그렇지 않겠냐만, 문화가 살아 숨쉬는 호남, 멋과 맛의 고향, 풍류남아가 한 세상 살다 가기에 안성맞춤인 나의 고장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네. 경상도 사투리도 나름 그러겠지만, 아, 나는 전라도 사투리와 방언이 너무 좋다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쓰는 탯말이 너무너무 좋다네. 조정래선생이 ‘태백산맥’과 ‘아리랑’에서 유감없이 펼친 우리들의 말은 그야말로 ‘언어의 성찬’(盛饌)이 아니던가. 편협된 마음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나는 죽어서도 전라도말을 쓸 걸세. 동상, 안 그렁가. 시방. 우리 말처럼 편허고 좋은 말이 어디 있당가. 진짜로 거시기해불지 않은가.
나는 님의 우직함을 아네. 명문대를 나와 ‘큰 물’에서 놀지 않고 지방신문 기자 되려고 고향으로 내려간 것부터가 그렇지. 문순태선생과 김준태선생이 기자로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남일보’를 서슴없이 택한 님의 무욕(無慾)은 칭찬해줘야 할 일이지만, 세속적으로 보면 님의 재주가 안타깝고 바보같은 짓이겠지. 하지만, 님이 역사에 남을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같은 속물은 한없이 부러울 뿐이네. 요즘에 가끔 생각하는 것은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는 말이 역시 맞구나 싶네. 누구나 다 성철스님같은 선지식(善知識)이 될 수는 업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나같은 친구는 아들들에게나 애비의 진정을 남기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닌가 싶다네. 하지만 님은 전라도의 ‘문화 지킴이’가 아닌가. 힘들어도 그 생각으로 다시 또 힘을 내시게. 체질적으로 어려워도 그 생각으로 남들에게 고개도 숙이소. 지금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은가. ‘큰 사업’을 하려면 넉살도 있어야 하네.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는 말도 진리일세. 언제나 낙천적인 생각으로 ‘낯꽃’도 좋게 하며, 몇 안되는 글쟁이 식구들을 챙기며 ‘따복따복’ 만들어가는 전라도닷컴, 오래도록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차피 님의 책무인 것을. 때로는 그 짐이 너무 무거워 금방이라도 내려놓고 싶겠지만, 아직은 우리가 그럴 때가 아니라네. 박경리선생처럼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할 때가 아니라네. 우리에게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할 날이 새털처럼 많이 남았으니 말이네.
엊그제 우리 고등학교 동창 홈페이지에 님의 ‘함께 어울려서는 안되는 놈, 국곡투식허는 놈’ 11월호 머릿말칼럼을 옮겨놓고 ‘글을 쓰려면 딱 이렇게 쓰렷다’라고 썼다네. 어느 친구가 우수잡지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댓글을 올려놓았더군. 그렇게 그렇게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네. 나는 그렇게 믿네. 관심과 배려가 사랑이라고, 그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님의 건투와 건필, 건강을 기원하며 줄이네. 도둑처럼 다녀가는 한양길, 얼굴 보기도 쉽지 않지만, 아무 때고 반갑게 만나 막걸리 한 잔 원없이 기울였으면 좋으련만. 참, 오는 토요일 장성의 방외지사 청담 변동해선생이 귀틀집 6채 ‘집들이’ 초청장을 보냈던데, 거기에서 만날 수 있을랑가. 만나먼 조컷는디.
11월 5일
서울 오목교에서 우천 최영록 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