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다 같이 두 눈동자가 있어서
모든 것을 보고, 붉은 것은 보고 ‘붉다’고 그러고,
노란 것은 보고 ‘노랗다’고 그러고, 까만 것은 보고 다
‘까맣다’고 그러지만,
그 사람의 경계에 따라서,
능력에 따라서 견처가 다 다르기 마련이여.
범부중생은
모든 것을 봐.
세간에 모든 것을 보되 전부가 무상한 것인데 그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착각을 하고 산다
그 말이여.
명예도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권리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재산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모든 사랑하는 사람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자기의 몸띵이도 영원성이 없는 것인데,
그것이 영원성이 있는 것처럼, 상주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을 하고
그놈을 붙잡고 늘어지고 그놈을 안 놓칠라고 애를 써.
그놈에 종이 되고
그놈에 관리인이 되아가지고
그놈 관리허느라고 바뻐서, 행여나 그놈 놓칠까봐서
도 닦을 생각을 안 내.
도 닦을 생, 생각을 내지를 못혀.
그러니 범부중생이 가지고 있는 눈은
사람에 눈이 아니라 소나 염생이의 눈과 조끔도
다를 것이 없어.
소나 염생이나 돼지나 개는 먹을 것 밲에는 안보이거든.
‘개 눈에는 똥 밲에는 안 보인다’고 그런 속담도 있지만, 짐승은 밤낮 두리번거리고 돌아댕인 것이 ‘
행여나 뭐 먹을 것 있는가’
그것만 찾고 댕기고, 명태대고리라도 하나 앵겼다 하며는 만 가지를 다 불구허고 그 놈 먹으러 쫓아가.
우리 범부의 눈은
짐승의 눈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성문은
성문은 ‘일체가 다 무상한 것’으로만 보거든.
다 하나도 영원성이 없는 무상한 것으로 보고, 그래서 ‘
일체가 다 공(空)이다’ 이렇게 보거든.
철저하게 공으로 봐.
그래서 공에 치우치는 그런 벽안
치우칠 벽(僻)자, 치우친 눈을 가지고 있어.
무상한 속에 영원한 것이 있건마는,
영원한 것으로는 보지를 못하고 정말 무상하고 또
철저하게 모든 것이 공한 것으로만 딱 치우치게 보기
때문에 그것은 ‘벽안’이다 그말이거든.
보살은, 대승보살은
무상 속에 영원한 상주를, 상주에 진리를 보고,
일체가 영원하되 영원한 속에 또 무상하게,
무상함을 또 봐.
그래서
무상하게 보되 무상에 빠지지 않고
영원한 도리를 보고,
영원한 도리를 보았으되 영원한 가운데에 또
무상한 것이 또 본다’ 그 말이여
그래서 무상에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상주(常住)에도 떨어지지 아니해
그래서 보살의 눈은
실다운 상이다. ‘실상의 눈’이다.
그러니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본 바가 그렇게도 차이가 있다 그 말이여.
우리는 분명 확철대오를 못했으니
범부, 범부일시 분명하지만,
이러헌 법문을 통해서
확실히 무상한 줄도 알아야 하고,
무상한 속에도 영원성이 있다고 허는,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고,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집착허지 말 것이며,
무상한 속에도 영원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충실하면서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이 뭣고?’ ‘이 뭣고?’를 해서
번뇌망상심 일어나는 그놈을 가지고
그놈을, 그놈 일어나는 뿌리를 돌이켜 찾음으로 해서
실상눈을 뜨는 것이 우리 정법학자에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