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일 몇달을 준비했던 추자도 여행
15년만에 10월에 찾아온 태풍 23호 피토의 영향으로 여객선이
결항되어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었던 섬 완도 소안도로 발길을 돌렸다.
섬여행의 어려움은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여행이다.
그래도 남도에는 가보고 싶은 섬들이 너무나 많아 계획이 잡히면 무조건 떠나고 본다.
목포에서 소안도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완도 화흥포항에 도착했다.
완도 화흥포항은 청해포구해신촬영장과 구계등 사이에 있는 항이다.
면단위 소재의 규모가 있는 큰 섬이라 그런지 매시간마다 여객선이 있다.
화흥포항을 떠난 여객선은 소안도를 향해 힘차게 물살을 가른다.
'편안히 삶을 기댈 만한 섬'이란 뜻의 소안도는 조선시대 강진 탐진포나 해남 관두포에서
제주를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 가는 육지와 제주를 잇는 중요한 항구(소안도 월항리)였다.
제주와 소안도 사이는 한없이 큰 바다로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접하는 선원들은
공포에 시달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이 섬에 상륙하면 안심하게 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치게 된 곳이 이곳 소안도의 유래가 된 것이다.
화흥포항을 떠난 여객선은 노화도 동천항에 잠시 들린다.
노화도, 보길도 주민들은 해남을 오고 갈때는 노화도 산양항을
완도읍내를 오고 갈때는 이곳 노화도 동천항을 이용하게 된다.
동천항 옆으로 보이는 구도
'구도(鳩島)'라는 지명은 섬의 모양이 비둘기를 닮았다고 해서 구도라고
하였다는 설과 섬에 비둘기가 많이 서식한다고 하여 구도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행정구역상 소안면에 속한 둥글고 앙증맞게 생긴 섬에는 집집마다 태극기가 꼿혀 있다.
전복 양식으로 귀농 인구가 많아지면서 섬에 아이들이 늘어나고 섬에 활기가 넘친다고 한다.
여객선은 화흥포항을 떠난지 1시간이 안되어 소안도항에 도착했다.
미라리해수욕장 인근에 숙소를 정하고 가학산 등반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가학산을 오르면서 상록수림 터널을 지나고...
억새밭도 만나게 된다.
가학산이 최근들어 산악인들에게 주목 받는 이유가 있었다.
산을 중간쯤 오르자 바다가 눈앞으로 펼쳐진다.
앞쪽으로 소모도, 대모도(영화 '남쪽으로 튀어' 촬영지)
무인도 불근도가 보이고 그 뒷편으로 청산도가 보인다.
불청객의 방문이 불편했는지 매는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미라리해수욕장 뒷편으로 한국의 이스터섬으로 불리는
돌담이 너무나 아름다운 섬, 영화 '남쪽으로 튀어' 촬영지 여서도가 보인다.
가학산 정상에서 바라 본 소안도, 섬의 모양이 통영 비진도와 흡사하게 생겼다.
소안도의 옛이름은 '달목도(達木島)'인데 멀리서 보면 초승달을 보는 것처럼
허리가 잘록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한다. 섬과 섬이 목으로 이어진 섬이라는 뜻이다.
해발 359m 가학산 정상
가학산은 산세가 학을 닮아 가학이라 불렸으며,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온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 가학마을이다.
월항리에서 바라본 소안도의 노을
오묘한 풍경을 자아내는 맹선리 해변
마을주민들에게 주문해 놓았던 전복과 삼치회로 풍성한 저녁식사를 한다.
10월 4일 둘째날 아침
숙소인근의 미라리해수욕장으로 향한다.
해수욕장 주변으로는 천연기념물 제339호 상록수림이 어우러져 있다.
미라리(美羅里)는 아름다운 경치가 곳곳에 널려 있다고 하여 명명된 지명이다.
미라리해수욕장
미라리 해안에서 바라본 빼어난 자연경관을 예찬하여 '미라 팔경'이라 부른다.
학산귀운 : 가학산에 머무는 구름
대동장천 : 마을 뒷산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
미포귀법 : 미라포구로 들어오는 범선의 장관
부아강월 : 마을 앞 부아산에 떠오르는 밝은 달
전방가림 : 미라리 상록수림의 아름다움
용담쾌혈 : 강빈(마을 앞 지명)에 뜬 태공들의 정담
오산낙조 : 오산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
아침식사를 마치고 진산리 '물치기미 전망대'에 들려본다.
제주도, 당사도, 추자도, 보길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추자도를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한 경치를 자아낸다.
맞은편 보길도 예송리가 보이고
보길도 앞쪽으로 '자지도 왜인등대 습격사건'으로 유명한 당사도가 보인다.
당사도는 임철우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년)가 촬영되었던 곳이다.
일제가 소안도 맹선리에 소규모 군항을 구축하고 '항구의 문'이라 하여 '항문도(港門島)'라
했다가 해방이 되고 '자지도'란 이름을 되찾았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1980년대 들어와
당사도(唐寺島)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등대와 재미난 지명을 간직한 섬이다.
당사도 남쪽으로 희미하게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
항일의 섬으로 불리는 소안도
소안도 섬중앙에 위치한 항일운동 공원을 돌아보았다.
공원 안에는 항일운동 기념탑, 항일운동 기념관, 소안학교 교사를 복원해 놓았다.
항일운동 기념탑 옆으로 복원된 소안학교 교사
소안도가 강고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화학원(소안학교 전신)이 있었다.
1913년 송내호, 김경천 등에 의해 설립된 사립 중화학원은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에서 승소
후에 소안면민들의 성금을 기반으로 사립 소안학교로 발전하여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길러냈다.
일제 당시 소안도에는 일본인이 세운 공립학교가 따로 있었는데 이 학교에는 일본 군무원
자녀 등 30여 명 정도밖에 다니지 않았고 나머지 150명은 사립학교인 소안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소안학교가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를 양성하는 곳으로 일본 국경일에
일장기도 달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소안학교를 폐쇄시켜버렸다고 한다.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
기념관은 소안도의 항일운동사를 보여주는 시청각실과 전시실로 꾸며졌다.
1920년대 6,000여 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혔던 해방의 섬, 소안도 항일운동의 뿌리는 갑오년 동학혁명까지 올라간다.
갑오년 동학접주 나성대와 혁명군들이 소안도로 들어와 군사훈련을 받을 때 소안도 주민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고, 혁명의 실패 후 주적인 몇몇 주민들은 관군에게 주살되었다.
이후 독립 투쟁의 근거지가 된 것은 1905년 동학군에 동조한 이준하 열사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에 잠입하여 일본인 4명을 살해한 것이 시초다.
전시실 안에는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 88명의 사진과 공적사항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19명의 얼굴이 동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해방 후에도 소안도는 편안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에 가입되 있던
항일운동 관련자 상당수가 피해을 입었다. 가장 피해가 컷던 마을이 월항리인데 줄줄이 묶여
배에 실려간 사람들은 이후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주로 희생을 당했다.
소안학교가 폐쇄된 후 소안도 사람들은 공립학교를 보내는 대신에 야학이나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일찍 개화되고 김양식의 발달로 비교적 살림형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항일운동가는 한국전쟁이후 빨갱이가 되어 있었다. '항일의 섬'은 '빨갱이 섬'이 되어 있었다.
섬문화답사기 저자 김준 박사가 처음 섬과 인연을 맺은 곳이 소안도이다.
남도 바다 한가운데서 들은 항일운동 이야기, 빨갱이 이야기는 너무나 큰 충격이였다고 한다.
우리의 왜곡된 슬픈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남도의 작은섬, 소안도
내년 삼일절에는 이곳에서 딸아이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싶다.
소안도, 그 섬에 가면
이병화
고깃배가 여명의 옷을 갈아 입는
소안도 미라리 해변
고문 당하는 피의자 마냥
팽나무와 노송 사이로
바닷 바람이 뒤틀리고 있다
채 마르지 않은 억새는 만세 부르고
모래톱을 뒹구는 소라 껍데기 속엔
조상들의 함성이 담겨있다
투옥된 항일 운동가를 생각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이불 덮지 않았다던 충혼의백忠魂義魄의 땅
소안도, 그 섬에 가면
조상들의 항일정신을 기리며
무궁화 동산을 일구는 후손들이 있다
삼백 예순 닷 날
코끼리 귀처럼 태극기가 펄럭이는
소안도, 그 섬에 가면
뭍으로 나간 자식 맞이하듯
낯선 이들을 반기는 어머니들로
허기진 여정은 훈훈하다
파도의 달겨듦에 제 몸 뒤집으며
울다가 웃는
웃다가 우는 몽돌들
어제의 역사가 오늘의 현실이 되고
오늘의 현실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소안도, 그 섬에 가면
우리는 애국자가 되기로 한다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북암리 마을과
월항리 마을을 잠시 들려보고
항일의 섬, 소안도를 떠난다.
앙증맞은 섬, 구도
노화도 동천항을 지나
화흥포항으로 회귀한다.
화흥포항 인근의 구계등을 찾는다.
구계등은 파랑과 조석·조류의 영향으로 자갈이 해안선을 따라 밀려 올라가 형성된 곳으로
해저로부터 9개의 계단(범)상의 지형을 이뤘다는 데서 구계등이라 불리는 곳이다.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아름다운 곳인데... 태풍의 피해로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주도가 보이는 완도항에 도착
작년 청산도, 여서도 여행(http://cafe.daum.net/lshisland/jIud/47)때 들렸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당진에서 완도로 시집온 주인 아주머니의 음식솜씨는 여전하다.
완도에서 신지도로 넘어와 나룻배를 타고 고금도로 향한다.
신지도 송곡항과 고금도 상정항을 운항하는 이 나룻배는
한참 공사중인 연도교 건설로 다음 여행에는 보지 못할 듯 하다.
이충무공의 사당 충무사가 있는 고금면 묘당도 이충무공유적지를 찾는다.
1597년 7월 22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패전보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어전회의를 열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한다.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회령포(현 장흥 회진)에
도착하여 10여척 전선으로 해남 이진을 거쳐 9월 16일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고,
9월 17일 부터 10월 2일까지 신안 지도, 영광 칠산도와 법성포를 거쳐 홍농으로
다시 부안 위도를 거쳐 군산 선유도에서 12일간 머무르면서 명량해전 결과를
보고하고 휴식을 갖은 후 해남 우수영에 도착한 조선수군은 인근 지역이 황폐화된
사실을 확인하고는 10월 11일 안좌도에 도착하여 18일간 머물면서 향후 대책을
강구하다가 10월 29일 목포 앞바다 고하도로 진을 옮기게 된다.
한양과 영남으로 연결되는 바닷길의 길목에 위치한 고하도에서 조선수군은
1597년 10월 29일부터 1598년 2월 16일까지 군량문제 해결과 전선 건조 등
수군력 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고하도에서 전력 증강으로 자신감을 찾은 조선수군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호남 좌우도를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이자 경작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군량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 고금도로 1598년 2월 17일 진을 옮기게 된다.
충무사 입구의 하마비
정유재란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년) 2월 17일 이순신이 수군 8,000여명을 거느리고
고하도로부터 이곳 묘당도에 진을 쳤고, 그해 7월에는 명나라의 원병으로 진린 장군이
5,000여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여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침략을 막아 낸다.
이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그는 다시 시신이 되어
고금도로 돌아온다. 83일이나 이곳 묘당도에 모셔져 있다가 장지인 충남 아산으로 모셔 장례를 했다.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사당 '충무사'
400여년의 시간을 초월하여 그와 잠시 만남을 갖는다.
명나라 장수 진린이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기록된 관왕묘비
충무공 유적지 이곳 저곳을 돌아본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고 충남 아산으로
모시기 전까지 83일 안장되었다는 자리
고금도에서 잠시 충무공의 유적을 돌아보고 약산도 당목항에서 금일도행 여객선에 오른다.
금일도의 원래 이름은 개도 이래 외침을 받지 않아 '평화로운 섬'이란 뜻의 평일도 였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일면과 금당면을 합해 금일면으로 통합 개칭되었다가 1980년 읍으로
승격하여 현재는 평일도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금일도'라는 이름으로 행세를 하고 있다.
약산도 당목항에서 30여분 만에 금일(평일)도에 도착하여
월송리 해송림에 숙소를 정하고 금일도해당화해수욕장을 찾는다.
전국에서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다음으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 앞으로 우도가 보인다. 전국적으로 우도라는 섬은 정말 많은 것 같다.
강화도 NLL에 위치한 우도, 통영 우도, 고흥 우도, 제주 우도, 이 곳 완도 우도
우도와 비슷한 신안 우이도, 강진 가우도 아직 알지못하는 우도까지 정말 많다.
해당화해변에서 바라본 소랑도
소랑도는 섬 앞바다의 물결이 항상 잔잔하다고 하여 '소랑'이라고 부렸다는 설과
섬의 모양이 소라와 같이 생겨서 '소랑(소라의 방언)'이라 불러오고 있다는 섬이다.
바람의 신비로움을 잠시 관찰했다.
금일도 동백리에서 바라본 생일도 투명산
우연의 일치인지 섬의 능선과 능선의 일치로 인하여
섬의 뒷부분이 투영되는 것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금일도에서 소랑대교(2006년 12월 완공)를 넘어 소랑도로 왔다.
층층이 들어선 집들은 조그만 섬답게 마을은 경사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본다.
금일도와 소랑도는 전국 다시마 생산량의 70~80%을 생산하는 곳이다.
금일도와 마찬가지로 밭이란 밭은 모두 다시마 건조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소랑도 마을 뒷산에서 해넘이를 보게 된다.
소랑도 여행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월송리 해변으로 돌아왔다.
펜션 주인장이 금일도 앞바다에서
낚시로 잡아온 횟거리로 저녁식사를 한다.
10월 5일 여행 셋째날 아침 숙소 앞 풍경
일출을 보겠다고 새벽일찍 해당화해변으로 나간 일행을 찾아 길을 나섰다.
이 소라는 해수욕장 앞 소랑도에서 살던 소라일까?
해수욕장에 우리의 흔적을 남겨본다.
바람이 불면 우리의 흔적은 간데 없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의 흔적으로 남겠지...
숙소로 돌아오는 길
햇살에 비친 월송리 해송림 숲길이 몽환적이다.
우리가 하룻밤을 보냈던 숙소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금일도의 자랑 용황리 갯돌해변과 거북섬을 보게 된다.
용황리 갯돌해변에서 바라 본 여수 앞바다 섬들...
정말 거북이처럼 생겼다.
금일도 망산 입구 당숲을 구경한다.
이 보다 못한 곳들도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었는데....
왜? 아직 이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든다.
당숲 앞 당집
당숲에서 평일정사로 오르는 길에 바라본 금일도 풍경
금일도에 유일한(?) 사찰
평일정사 http://cafe.daum.net/bub-in 를 방문한다.
섬에 교회는 많아도 사찰을 보기란 쉽지 않다.
평일정사 주지 법인스님께서 연꽃잎차를 내어 주신다.
연꽃향이 그윽하다.
섬에 있는 사찰에서 연꽃잎차를 마셔본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였다.
아쉬운 금일도 여행을 마치고 상경하기 위해 선착장으로 나선다.
금일도의 관문 일정항
3년전 딸아이와 남도 1,400km 여행때 들려 인연이 되었던 섬 금일도
나의 일행도 금일도를 가슴에 품고...
금일도를 다시 찾을 것이다.
금일도를 나와 약산도에서 고금도 다시 마량을 거쳐
강진읍내로 올라가는 길에 강진청자박물관에 잠시 들려본다.
섬을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지나칠 수 없었던 강진만의 유일한 유인도 가우도를 돌아본다.
가우도는 소 멍에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강진만의 상류인 강진읍 보은산이 소라고 한다.
가우도는 섬 양쪽(대구면, 도암면)으로
출렁다리가 놓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대구면쪽에서 출렁다리를 넘어 가우도에 입도한다.
가우도 섬둘레길을 따라 가다보면...
강진만의 상류인 강진읍내와 보은산이 보인다.
둘레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니
가우도 한옥펜션 http://www.gaudo.co.kr/ 이 나온다.
도암면쪽에서 연결된 출렁다리가 보인다.
가우도 펜션에서 바라 본 풍경
가우도는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곳이였다.
짧은 여정으로 인하여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길을 되돌아 강진읍내로 향한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가고 싶었던
영랑생가를 돌아보지 못하고 어느 한정식 집에서
남도의 진미를 맛보게 된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남도밥상을 제대로 만난 것 같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서해대교의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2박 3일 남도의 숨겨진 보석 소안도, 고금도, 금일도, 가우도 여행을 마쳤다.
첫댓글 섬여행 참고자료로서
기회가주어지면 가보고싶은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