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장례식에서의 관심사는 러일전쟁이 화제가 되었다.
누가 이기겠느냐 도 관심이 있었지만 이 전쟁이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꿀 거라는 것을 모르는 체 그 와중에 러시아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다.
1905년(광무 9년) 1월 금본위제를 채택한 ‘화폐조례’가 공포되었다.
이로써 근대 화폐제도로서의 금본위제가 실시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일본은 자국과 동일한 화폐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발권은행을 일본 제일은행으로 못 박았다.
그때 제일은행이 발행한 화폐는 반환·20전·10전 은화, 5전 백동화, 1전과 반전의 청동화, 20환·10환·5환 금화 등 모두 9종이었다.
그렇게 되니 그나마 명목을 유지하던 상업자본과 산업자본도 조선은행 한성은행 천일은행 등 국내 자본을 관리하던 은행과 함께 서서히 일제에 의하여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은 철두철미하게 경제를 속박하며 대한제국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부선 기차가 1월1일부터 시험운행 중 이었다.
그러나 영준에게는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쳤으니 아버지 장례를 치룬지 열흘 만에 아내 금선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준은 또 한 번이 초상을 치러야 했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2월22일에 슬그머니 독도를 병합하고 다케시마라고 명명 했지만, 누구하나 제대로 아는 이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4월25일에 용산에서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시험운행에 들어갔고, 한 달 뒤 5월28일에 경부선 개통식이 있었다.
5월27일 일본과 러시아는 대한해협에서 대규모 해전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말았다.
대마도해전 직후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의뢰했고, 국제정세도 전쟁을 끝낼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대항을 위해 러시아 군사력이 약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미국 역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강자로 전면에 나서는 것을 위험시하였다.
이에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열강은 제각기 종전 이전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해 두려고 하였는데, 뵈르케(Bjorke)밀약, 영일동맹 개정, 그리고 태프트·가쓰라(Taft·桂)밀약 등이 모두 그러한 연장선상에 나온 것들이었다.
러·일 양국은 6월 8일과 10일 각각 루스벨트의 평화제의를 수락했고, 미국은 12일자로 강화를 알선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회담장소 선정과 전권대표 선임에 양측 모두 곤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7월 7일 사할린상륙을 결행, 러시아를 강압하는 한편 7월29일에는 일본은 조선을 우리가 지배하겠으니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라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미국의 속셈은 러시아를 견제할 우군을 확보한 셈이었고. 덤으로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묵계가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일본은 영국과 8월12일 런던에서 영일 동맹 조약을 맺었는데 영국은 멀리 있는 인도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인정받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는 요식행위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본을 대표한 고무라·다카히라(高平)와 러시아를 대표한 위테·로젠 사이에 약 4주간(8.9.∼9.5.)에 걸쳐 진행된 강화교섭은 일본이 러시아에 제한 12개 강화안을 토대로 진행되었다.
양측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가장 우월한(paramount) 이익 보유, 요동반도 조차권, 장춘(長春)~여순(旅順) 간의 동청철도 및 그 지선의 양도 문제 등은 쉽게 합의하였다.
그러나 ① 사할린 문제, ② 전비배상 문제, ③ 중립국에 억류된 러시아 군함의 인도 문제, ④ 극동 해군의 제한 문제 등에서는 쉽게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였다.
일본은 특히 1·2항을 합쳐 50° 이북의 북부 사할린을 러시아에 돌려주는 대가로 12억 원을 일본에 지불하라는 새로운 요구안을 내놓았다.
회의가 결렬될 위기에 놓이자, 일본군은 군비지출 문제는 철회하고 사할린 남부를 요구하였다.
그렇게 4주 만에 일본과 러시아간의 회담이 9월5일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서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포츠머스 조약, 주요 내용은.
뤼순·다롄(大連)의 조차권 승인.
창춘(長春)이남의 철도부설권 할양.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북위 50˚ 이남의 남사할린 섬 할양.
동해, 오호츠크 해, 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등으로 이 조약으로 미국 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한국(대한제국)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한국은 일제 식민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포츠머스조약에서 일본국 전권위원은 ‘일본국이 장래 한국에 있어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동국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경우 한국 정부와 합의한 뒤 이를 집행할 것을 여기에 서명한다.’는 내용을 회의록에 넣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무력으로 일거에 한국을 침략하지 못하고, 국제법상 한국의 황제와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 한해 합법적 형식을 취하여 완전병탄을 집행할 준비와 절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남만주에서 일본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렇게 되자 머리가 좋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해 개혁을 해 근대화를 이루려는 꿈을 가진 황제폐하의 뜻을 저버리고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의 일신영달을 위해 일진회라는 단체를 만들더니 노골적으로 10월 15일 한일 보호 조약 촉구 성명까지 냈다.
그러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보다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서 있어야 했다.
드디어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1월 20일 장지연의 시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게재 되고, 신채호의 시일야우장성대곡이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11월30일 황제페하의 시종 무관장 민영환이 을사늑약을 개탄하며 자결을 했다.
그리고 의암은 `을사5조약' 소식을 듣고 전 국민이 항거하도록 촉구하는 글 `통고일국진신사림서' 발송 했다.
그리고 주한 영국공사관도 슬그머니 철수를 했다.
그렇게 한해가 저물어 갈 무렵 일본은 러시아로 부터 얻지 못한 것을 보상 받으려고 청과 베이징에서 마주 앉아서 고무라·우치다(內田康哉)와 경친왕(慶親王)·위안스카이(袁世凱) 사이에 12월 12일 체결된 만주에 관한 청일조약은 길림(吉林)~장춘(長春) 및 신민둔(新民屯)~봉천(奉天) 철도에 관한 비밀 합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1930년까지 비밀에 붙여졌으나, 일본은 그들이 주장해 온 문호개방, 기회균등 원칙을 스스로 파기함으로써 열강 모두를 적으로 돌렸다.
영·미가 일본을 지원한 이유가 동북아시아에서 러·일 양국의 상호견제를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일본으로 하여금 막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직후 일본이 선택한 배타적인 만주 진출은 즉각 영·미의 제재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으나 미국과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영린은 평산 감영을 더 이상 드나들 수 없어졌고, 을사년 저물어 가는 때에 단월에 와서 근호의 소상을 지냈다.
광국의 생활은 형편이 없었다.
큰어머니도 없는 큰집에 들락거리기도 힘들었다.
사촌형수 효진이 보살펴 준다고는 하나 완전히 떠돌이에 지나지 않았다.
영준의 생각은 녀석이 아비를 쫒아서 평산에 가서 의병을 합내 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늘 붙잡고 할아버지 대상이 내년이니 대상을 지내면 바로 식을 올려 줄 테니 그때 까지만 힘들어도 이 큰 애비 믿고 아무생각 말고 잘 지내라고 늘 충고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영준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소상을 지낼 만큼 많은 지출을 했는데, 비용은 모두 소 한 마리 값이 들었으니 살림에 많은 주름이 갔다.
러일 전쟁의 패전으로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저지된 러시아는 그 진출 방향을 중앙아시아와 발칸 지역으로 전환하였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1907년 영국과의 협상으로 타협을 보았으나, 열강의 이해가 쉽게 조정될 수 없었던 발칸반도로의 팽창은 분쟁의 소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은 결국 동아시아정세를 크게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세계대전으로 가는 세력구도의 형성을 촉진시킨 셈이었다.
해는 바뀌어 1906년 2월 1일 일제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을 했다.
그리고 일본인 토지소유의 합법화 문제와 관련하여 토지조사에 관한논의가 있었다.
원래 조선에서는 외국인의 토지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토지소유권 증명제도 역시 불완전했기 때문에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합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제도의 정비가 시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을 공포하였다.
8월7일 대한제국 만국적십자 조약에 가입.
8월18일 한말 의병장 최익현, 일본군에 잡혀 쓰시마 섬으로 유배.
8월27일 대한제국 보통학교령, 고등학교령 반포.
9월 5일 한성 보성중학교 개교.
10월 10일 삼육고등학교 삼육대학교 전신인 의명학교가 문을 열었다
10월 15일 대구 계성학교 문을 열다.
10월 - 만주 용정에서 서전서숙 문 열었다.
그리고 11월5일에 의병장 최익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얼마 후 영린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근호의 대상이 다가와 경의선 기차를 타고 경성을 들려서 단월에 도착하였다.
예전보다 하루나 시간 절약이 되었다.
이번에도 영준은 소한마리 값을 들여서 대상을 치르고 영준이 영린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보게 아우 이제 아버님 대상이 끝났으니 광국의 혼사를 서둘러야 할께 아닌가.”
“아무래도 올 봄에는 혼례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자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농사도 짓고 해서 정착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중입니다.”
“내 생각에는 마음을 접고 농사나 지으면서 아들 결혼을 시키고 정착을 하게나 의병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그른 것 같네.”
“저도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쉽지는 않네요. 일단은 평산으로 돌아가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향배를 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형님의 영준의 말을 거역 할 수가 없어서 대답은 했지만 북수사로 돌아온 영린은 많은 고민을 했다.
이룬 것도 없이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 봐야 아내도 없고 여기서 인맥을 넓혔다고 하지만 속세를 떠난 몸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에 믿고 함께하는 40여명 의병들을 어찌 두고 떠난단 말인가.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해가 바뀌고 말았는데 형 영준으로부터 광국의 결혼 날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고 단월에 와서 광국의 결혼식 보아야 했다.
아들 광국의 결혼식은 우여곡절 끝에 올리게 되었지만 결코 성대하게 할 형편도 아니어서 가까운 친지와 이웃을 불러서 단출하게 올릴 수밖에 없었다.
스물여덟의 노총각 광국은 간내월에서 초례를 치루고 사흘을 보내고, 스물네 살의 노처녀 남순은 가마를 타고 광국은 걸어서 하루를 꼬박 걸어서 단월에 도착하여 폐백을 올리고 살림을 시작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영린은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여기 머물러 지내라는 형 영준의 간곡한 설득이 있었지만 아내도 없고 며느리를 보았다고 하나 초가삼간에 살림을 시작해야 하는 아들의 형편도 형편이지만 무엇보다도 평산에 두고 온 의병들을 생각해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아들의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평산으로 떠났고, 광국과 남순은 둘만의 행복한 신혼생활이 시작 되었다.
광국은 어머니 연희에 대한 그리움이 남순의 사랑으로 변하여 행복한 나날이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해 일제는 조선에서 토지조사를 실시할 계획으로 토지조사를 위한 실무기술자를 양성했고, 1907년부터 일부 지역에서 시험적으로 측량을 실시하여 실무경험을 축적했다.
4월 한국의 구국 운동의 중심으로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 창립.
황제페하는 1907년 4월 자주권을 침해받는 대한제국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리고, 을사조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을 파기 하고자.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신임장과 친서를 주어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냈다.
그러는 사이 국내에서는 5월22일 이완용 내각이 이토 히로부미의 건의를 받아 성립되었다.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만나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데리고 네덜란드수도 헤이그에 도착했다.
또한 황제페하는 미국인 호머 헐버트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에 적극 지원하도록 밀사활동을 밀명을 통해 부탁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제국의 감시망을 피해서 헤이그 특사가 무사히 헤이그에 도착하도록 하였으며, 일본제국의 한국 대표의 만국 평화 회의 참석을 방해 할 것을 직감한 호머 헐버트는 스위스 프랑스를 경유하면서 한국 대표들이 회의 참석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서방 언론사들과 접촉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일본과 대영제국 등의 방해와 같은 제국들인 서구의 방관으로 대한제국 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묵인 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을 지지한 것이었고, 러시아는 러일 전쟁의 여파로 일본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특사 파견을 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 대표들은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이위종이 유창한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실력으로 대한제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는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조선을 위해 호소한다!”
라는 제목의 연설 내용은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대한제국의 처지를 불쌍히 여길 뿐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 밀서의 소식을 전해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7월3일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 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 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 협박했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
이 사건은 일본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으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인데, 황제의 퇴진이 왕실과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페하를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황제페하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은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내각 회의를 열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추궁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곧바로 입궁하여 어전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은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이제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었고 일본 정부나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격분하고 있으며 이대로 둔다면 어떠한 중대사가 일어날지 모르니 폐하께서 사직의 안위를 염려한다면 차제에 자결함으로써 사직의 위기를 구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고 황제를 협박했다.
황제께서 안색을 달리하며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 않자, 송병준이 다시
“폐하, 만일 자결하지 못한다면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 폐하에게 사죄하거나 그렇지 못한다면 일전하여 항복한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비는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는 송병준의 협박과 폭언으로 고종이 자리를 뜨자 그 후 내각은 일치하여 왕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 날 제3차 어전회의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은 황제페하께 황태자의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황제페하께서는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이병무가 칼로 위협하여, 황제께서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날 결심을 하게 되고 이를 수용했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으나,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20일 오전에 양위식이 거행되었는데, 양위식은 황제페하와 새 황제가 직접 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 하였다.
새 황제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20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조상들의 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양자를 잘못 들인 탓으로 우봉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을 당한 것이다.
이완용 자신이 후에
“조상 신주가 불타버린 것이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고 말할 정도로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집은 불타고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
는 군중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순종 즉위식이 끝난 뒤에도 덕수궁으로 몰려와
“이완용을 죽여라!”
라고 외치는 함성을 듣고 그는 당황했다.
기자들과 관료들이 전국 각지에, 그가 황제의 양위를 주관하고 새 황제의 즉위식을 주관했으며, 황제가 그의 음모에 의해 퇴위당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음을 알려왔다.
식이 끝나자 이토는 이완용을 재촉해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함께 통감 관저로 향했다.
통감 관저에는 이미 이완용의 가족들이 일본 순사들에 의해 구출되어 보호를 받고 있었다.
오갈 데가 없어진 이완용과 그의 가족들은 이토의 주선으로 이날부터 왜성구락부에 머물기 시작했다.
이완용이 순종 즉위식을 주관한 것이 알려지면서 반이완용 데모와 이완용 화형식은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완용의 부인 조 씨는 왜성구락부에서 거처하기 시작한 첫 1주일 동안은 생활비도 모두 이토가 대주었다고 회고했다.
이완용은 이곳에서 두 달 가량 머물다 9월에 식구들을 데리고 장교에 있는 그의 서형 이윤용의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
고종 양위에는 이토 히로부미, 송병준 등의 개입이 있었음에도 처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 논의와 고종 양위 주장을 처음 꺼낸 이완용에게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을사조약 전까지만 해도 민중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은 것은 주무 대신이었던 박제순이었다.
이완용은 박제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격과 비난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고종 양위를 계기로 이완용은 완전히 매국노의 대명사로서 민중들의 저주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첨부되고 있던 비밀각서에 의거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조선군 사령관은 조선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내용은 하게 한 다음, 7월 31일 밤 새 황제로 하여금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재 우리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는 부족하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제도를 쇄신할 생각아래 사관(士官)을 양성하는데 전력하고 뒷날 징병법(徵兵法)을 발포(發布)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 한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데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統監)에게 의뢰하라.”
하였다.
일본은 7월 31일 밤, 미리 군대해산의 칙서를 작성해 놓고는 이완용을 시켜 다음과 같은 '조회문'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보내도록 했다.
병제개혁을 위하여 선포할 조칙을 받들어 군대를 해산할 때에 인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아울러 왕명을 위반하고 폭동 하는 자가 있다면 진압할 것을 통감각하에게 의뢰하고자 하는 대한제국 황제폐하의 칙지를 삼가 받은바 있으므로 이와 같이 각하에게 조회하는 바이오니 받아들이시기를 바라나이다.
일본은 계획된 각본에 의해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이라 할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허수아비 내각 수반인 이완용의 '조회문'을 통해 추진하는 수법을 썼으며,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꾸며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후에 순종 황제의 조칙이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에 동대문 훈련원에서, 맨손 훈련을 한다고 병사와 장교를 소집해 놓고 군부협판 한진창이 새 황제의 군대해산 소칙을 낭독했다.
그 후 즉석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계급장을 떼었다.
주위는 이미 일본군 헌병이 중무장한 채 도열, 병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 해산은 8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자살하여 분노한 시위대 2개 대대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나(남대문 전투) 간단히 진압되었다.
일본은 군대를 해산하면서 이른바 황제의 하사금이라는 것도 나누어 주었는데, 하사에게는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원,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원씩이 지불되었다.
그런 와중에 8월2일 새 황제 즉위식이 있었고, 8월5일에는 원주 진위대 장병들이 군대 해산에 대한 무장 항쟁을 전개 했고, 이은찬(李殷瓚, 창의군 중군대장)· 이구재(李求采 혹은 李九載, 창의군 총독장)등이 원주에서 13도 창의군을 결성 조직하여 문경의 이인영을 수 일간 설득하여 창의군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각 도의 의병군을 모집하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토벌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자발적인 의병부대가 구성되었다.
8월11일 일본군이 강화도를 장악 하고, 그렇게 서울의 군대를 시작으로 하여, 9월 3일에 걸쳐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총 군 병력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궁성과 황성 시위 병력인 시위대만 1만6천 명(포병 2개 대대 포함)에 이르렀었다.
첫댓글 정말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