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를 만난 건 2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나는 여의도에 살고, 토요일 아침의 여의도를 좋아한다. 직장인들의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아직 관광객의 밀물이 들이치기 직전, 토요일 아침이면 여의도엔 영화 <나는 전설이다>나 시리즈 <라스트 오브 어스>의 한 장면처럼 쓸쓸한 디스토피아적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그 적막함과 아이러니를 즐기기 시작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가 침묵을 감상하던 어느 토요일, 건너 IFC 빌딩에서 조조영화를 보고, 지하보도를 건너 힙스터 젊은이들이 줄을 서고 있는 더현대서울을 구경하러 갔다가 문득 이세계와 조우하고 말았다.
지하 1층 팝업 공간부터 건물 곳곳에 아바타와 캐릭터 액세서리를 단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호기심에 위층까지 올라가봤다. 공중 정원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에 그 캐릭터들이 열심히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따라가 보니 팝업으로만 연간 1000억원을 벌어들이는 더현대서울이 야심 차게 새로 마련한 660m²(220평)짜리 팝업 전용 공간이 펼쳐졌다. 사전 예약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행사의 주인공은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검색해봤더니 한 달 동안 버추얼 아이돌 콘서트를 개최한다고 했다. 이세계아이돌, 스텔라이브, 플레이브가 주인공이었다. 이세계아이돌에는 꽤 관심이 있었다. 플레이브도 최근 많이 들리는 이름이었다. 스텔라이브는 솔직히 잘 몰랐다. 그런데 이 세 팀이 콘서트와 더불어 팝업 스토어를 연다니. 뉴진스, 제로베이스원 등 내로라하는 케이팝 그룹에만 허락된 더현대서울 행사장 아니었던가.
곧장 집에 돌아와 고정 연재하고 있는 언론사 칼럼에 버추얼 아이돌 원고를 작성해 넘겼다. 원고를 쓰며 좀 파헤치다 보니, 버추얼 아이돌의 인기는 더현대서울의 현장에서 목격한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알고 보니 팝업 스토어 입장 예약은 일찌감치 마감됐다. 진작에 동나 리셀 가격이 붙은 채로 중고 거래되고 있던 머천다이즈의 만듦새도 상당했다. 플레이브의 두 번째 미니 앨범 <아스테룸(ASTERUM)>이 발매 첫날 20만 장이나 팔려 나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칼럼이 나가는 날 플레이브는 버추얼 아이돌 최초로 타이틀곡 ‘웨이 포 러브(Way 4 Love)’를 통해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과 빌보드 HOT 100 차트에 손쉽게 진입한 르세라핌의 ‘이지(Easy)’를 가볍게 따돌렸다.
칼럼이 나간 이후로 나는 내내 버추얼 아이돌에 대해 설명하며 다녔다. 플레이브의 성공 비결과 버추얼 아이돌의 인기, 전망을 묻는 전화와 인터뷰 요청이 이어졌다. 취재 내용과 콘텐츠를 바탕으로 버추얼 아이돌의 인기 현황과 가능성에 대해 성실히 답을 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이세계아이돌 멤버들의 개인 방송국과 유튜브 채널 클립, 플레이브의 생방송 예고, 스텔라이브의 방송 클립과 기타 버추얼 아이돌 영상에 잠식됐다. 순식간에 매진된 플레이브 첫 팬 콘서트 예매도 시도했다. 차츰 나의 공부는 목적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버추얼 아이돌들이 궁금했고, 재밌었고, 그들의 음악이 좋았다. 점차 자주 돌려 보는 콘텐츠가 생겼고, 좋아하는 멤버도 생겼다. 누구냐고? 비밀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버추얼 아이돌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은 매우 낮다. “그거 뭐 홀로그램 같은 걸로 무대에서 노래하는 만화 아이돌 아닌가요?”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적어도 현재 인기 있는 이세계아이돌, 플레이브 등 버추얼 아이돌은 가상의 아바타를 사용하지만, 결국 그 요체는 ‘사람’이다. 세기말 인기를 끌었던 사이버 가수 아담의 뒤에 솔로 가수 제로(박성철)가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 그 정체를 노출하는 건 물론이고 팬의 입장에서 신상을 궁금해하는 일마저 금기다. 플레이브의 하민, 노아, 예준, 밤비, 은호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고, 멤버들 스스로가 활동명을 철저히 지킨다. 익명성과 철저한 캐릭터화는 버추얼 아이돌 ‘덕질’의 필수 요소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개념은 버추얼 유튜버다. 나잠수의 노래 가사처럼 ‘어쩌다 떠밀려 첨단에 서 있는 경이로운 사이버 가수 아담’과 달리, 버추얼 아이돌은 가수이기 전에 유튜버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이세계아이돌의 각 멤버는 베테랑 인터넷 방송인 우왁굳이 ‘버추얼 유튜버 선발’을 목적으로 뽑은 방송인들이다. 이들은 우왁굳의 채널을 통해 1년 동안 철저한 익명성 계약 아래 활동 중이다. 이는 2016년께에 일본에서 태동한 ‘버추얼 유튜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모션 캡처와 아바타 디자인 과정을 거쳐 가상의 자아를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해서 이미 수많은 버추얼 유튜버가 활동 중이다.
자, 이제 왜 버추얼 아이돌이 인기 있는지를 이야기할 시간이다. 이 지점부터 아주 답답하다. 플레이브가 더현대서울의 팝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지금도, 많은 이들이 버추얼 아이돌들의 인기가 진짜냐고 묻는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열리는 송도달빛공원에서 이세계아이돌이 페스티벌을 개최했다고 이야기해도 미심쩍은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지금 이 원고를 실어줄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마저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단어를 듣고는 영 시큰둥하게 “그 인기가 과연 실체가 있을까요”라며 내 속을 갑갑하게 했을 정도다. “열애설과 같은 불확실성과 실패의 확률이 적다”거나 “실제 아이돌들처럼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자유로운 산업이라 인기”라거나 하는 분석은 버추얼 아이돌이 갖는 진정한 의미에 다다르지 못한다. 기술과 산업의 관점, 투자 대상으로만 콘텐츠를 보다 보니 발생하는 오역이다. 버추얼 아이돌 팬덤이 가장 싫어하고, 동의하지 않는 해석이 버추얼 아이돌을 대표하고 있다.
우리는 또 다른 이 버추얼 아이돌의 세계가 현실의 공백이 만들어낸 평행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버추얼 유튜버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그대로 가진 상태로 그룹으로 묶이고 조직화하며 이 세계의 아이돌 문화를 만들어냈다. 작금의 버추얼 아이돌 유행은 일본의 버추얼 유튜버들이 던진 아이디어에 한국의 케이팝 산업이 가진 세계관과 가치관이 이식된 형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돌 멤버를 본명 대신 활동명으로 지칭하고, 기획사가 세심하게 제작한 이미지와 인격을 소비한다. 버추얼 아이돌도 마찬가지 아닌가? 케이팝 아이돌을 받아들이고 소비하면서 버추얼 아이돌은 허상이라고 말하는 건 틀린 얘기인 셈이다. 내 생각엔 오히려 마음대로 연애도 못 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상황에서 신상을 감추며 활동해야 하는 현실 아이돌보다, 버추얼 아이돌의 가면과 절대적 익명성을 대가로 오히려 일상의 자유를 누리는 버추얼 아이돌이 더 현실적이다.
데뷔가 무산되거나 공식 자필 사과문을 업로드하는 현실 아이돌처럼 버추얼 아이돌도 과거 논란과 신상 공개의 위협을 안고 산다. 경쟁은 더 치열하다. 대규모 자본 지원으로 만들어진 완제품으로 출발해 완벽을 펼치는 케이팝 그룹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들은 성공을 확신하며 무대에 오른다. 반면 버추얼 아이돌은 제로의 디지털 세계로부터 현실과 맞닿고자 안간힘을 쓴다. 플레이브는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좋은 곡과 안무를 받지 못하자 스스로 작사, 작곡 및 프로듀싱과 안무 창작을 배워 멋진 곡을 만들었다. 한국 유튜브 뮤직 인기곡 3위까지 오른 이세계아이돌의 ‘키딩’ 작곡가들의 리액션 비디오, 거듭 안무와 노래를 연습하는 그룹 멤버들의 콘텐츠는 분명한 진심이다. 가상의 내가 유명해진다 한들 현실에서 누구도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가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에 이끌린 이들의 수가 늘어난다. 데뷔 전부터 오직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는 오늘날 케이팝 산업이 잊어버린 가치, 진정성이다.
버추얼 아이돌을 바라보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더현대서울을 거닐던 나의 주말이 겹쳐 보인다.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모두가 유행을 따라 하고 주류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오타쿠라 조롱하는 이 사회에서 얼굴과 이름을 가린 가상의 존재가 더 솔직하게 다가오는 현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세계는 이세계를 원한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물론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다.
김도헌은 음악 웹진 ‘IZM’의 에디터부터 편집장까지 맡았던 대중음악평론가로, 음악 웹진 ‘제너레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대중음악상(KMA) 선정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