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진 물
김민술
참! 세상을 어설프게 살았다. 다 늙어 내일 모래면 가는데, 우리들에겐 콩깍지 사랑도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아 고독하게 산다.
잘 될 나무는 떡잎 때부터 안다고, 내 인생 운명을 세분해서 오늘까지 살아온 과정을 더듬어 보면 무던히도 초년고생을 하고 그렇다고 중장년, 말년도 근심 없이 살았는가? 늙은 괴로움도 과거를 좋아하는데 오고 상처 괴로움도 건강을 좋아하는데 오니 죽음 또한 삶을 좋아함에 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오니 말이다.
인간 귀소본능 人間 歸巢本能이라, 원초적 평등 온갖 경쟁과 차별, 억압과 착취로 땅에서 땅으로 돌아가는 숙명적인데 어제보다 더 성숙한 내일의 관계를 점쳐보지만 아무도 모른다. 내 인생도 일제 강점기 작은 도시 읍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유치원 다녔다. 아버지께서 자전거 뒤에 태워 유치원 보내 주셨다. 코딱지 손수건 고이 접어 앞가슴에 핀으로 꼽고 뚱보 여선생님 풍금 소리 맞춰 친구들 손잡고 둥글게 돌았다. 그때 기억은 재미있는가! 같은데 그렇지만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선생이 일본 사람이라 그랬는지는 모른다.
지금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했다. 들어갈 때 시험을 치렀다. 우리말 한다고 후다 (딱지)한 장씩 빼앗고 다 떨어지면 복도에 무릎 끌려 손들고 벌을 받았다. 벌 받을 사람은 나 아니고 선생인데 거꾸로 살았다. 시대적 운명을, 2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어린가슴이 터질 것 같아 대한민국 만세 부르며 풍선처럼 공중에서 터질 것 같았다. 왜놈 순사가 그렇게 미웠다. 큰 칼 차고 운동장을 날마다 돈다.
희사요, 참회 喜事慙悔라 태어남은 기쁜 일이요, 사는 동안 오늘까지 잘못이 커 후회하며 휘 황 노을도 기대할 수 없다. 해후하는 이별인가? 떨어졌다가 잠시 만나고 저세상 가는가, 그래도 내 마음에는 하늘 밑 보금자리 천애 동산이 포근히 기다린다. 4학년 2학기 때 전주중앙초등학교 전학해 왔다. 졸업하던 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고향으로 피난 간다. 유년은 그런대로 유복했다.
피난생활 2년 풀뿌리 캐고 나무하고 멀건 죽을 쑤어 맷방석에 앉아 먹으면 둥근달이 멀건 죽사발에 걸치고 빈 그릇되면 살아진다. 이렇게 지내다 서울행 열차를 타기로 운명을 바꾼다. 아버지께서 처음 만류하시다 종이돈을 몇 장 주신다. 안주머니 깊숙이 꼬챙이로 집어넣고 용산인가에 내린다. 서울은 살벌했다. 시골에서 나무할 때가 더 생각나고 코 베어 먹는 세상이라고 들었던 말이 항상 뇌리에 스치고 다리 밑에서 자다가 전차 지나는 소리 곤한 잠을 깨고 슬픔과 외로움을 배웠다.
미제 껌 만년필 가방에 담아 수없는 다방을 눈치 없이 돌았다. 스님한테도 참빗을 팔아내는 지혜가 필요했다. 죽으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천재일우라 하던가? 다방에서 점잖으신 분에게 만년필 내놓고 사 주시길 바란데 만년필 상관없고 네 고향이 어대냐, 물으신다. 솔직하게 그대로 전주입니다. 그래, 고향 사람이네, 나 군산이다. 토목회사 하고 있는데 우리 회사에서 심부름 할래, 하신다. 태양이 다방 천장을 뚫고 나에게 내려 꼽는 날이었다. 그때 그 한마디는 지구상에서 나를 위해 창조된 지혜로운 말이었다.
ㄷㅎ 건설회사 취체 역 전무님이시고 회장님은 참의원이셨다. 사무실 바닥을 쓸고 책상을 닦고 근데 콧노래가 자꾸 나와 입을 깨물었다. 회사는 서소문동에 있고 전무님은 갈월동에 2층 집이었다. 전무님 차로 퇴근하면 사모님이 목욕탕 다녀오라고 돈을 주신다. 밥은 공기 밥인데 어찌 작은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불안했다. 한 달이나 지났을까, 강원도 명주군 묵호항 방파제 공사를 입찰했다고 내려가시면서 너도 같이 가자하신다. 언젠가부터 바늘과 실이 됐다.
현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얼마나 큰지 석산에서 콤프레샤로 돌을 캐고 가시로차로 운반하고 방파제에 투하하면 잠수부가 고르고 캐숀 콘크리를 타설해서 보강하는 작업이었다. 나 어려도 자재 창고를 거쳐 정식 직원으로 노무계 보직을 받았다. 묵호 읍에서 선망의 직장인이었다. 세월은 나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4.19와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고향에서 군 소집 영장이 나와 군에 입소하고 전역하며 전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하고는 광주병무청 복무할 때 만나 결혼하고 제약회사 전주 총판 일 년 하고 택시회사가 처음 도입 전주에서 제일 큰 택시회사에 입사한다. 운전기사가 모자라 면허증만 있어도 취직하고 도로는 비포장 운전미숙으로 사고 연발이었다. 지금처럼 종합보험이 아니고 책임보험으로 상해 정도도 모자라 병원에서 기피하니 사장들이 당좌어음을 발행해 처리하니 회사도 어렵고 직원들도 수난이었다. 성격상 내가 감당하기도 그렇고 10년하고 다시 도입되는 특수냉동차회사를 내 아는 사람이 신청하고 도와 달라고 해서 면허내고 전무로 일하게 된다. 냉동차는 위생적이고 빙과류 과자를 냉동 운반할 수 있어 강원도 문막 삼양사, 경남 양산 롯데와 물류 계약하여 초장기 순조롭게 운행했는데 우의 죽순처럼 냉동회사가 난립하여 어려움이 컸다.
애들도 대학 들어가고 재단에서 운영하는 공원묘원을 만들자고 제휴가 들어와 말년에 안성맞춤 같아서 전무로 일하다 퇴직하고 손자들 돌봄 막내손자가 중학교 들어가며 일선에서 손을 놓는다. 엎어진 물은 고이든 실수든 주어 담을 수 없다. 나는 1950년 초등학교 졸업하며 한국전쟁으로 엎어진 물이 되었다. 책가방을 잃어버렸으니 내 인생 일대 위기 아닌가? 사회 일상은 아직 이른 나인데 파도가 휘청 일대 하필 물이 엎어졌을까? 생각할 여지도 없어 막연하게 서울로! 좌절하지 않고 더 끈질긴 인내로 상황을 내 앞으로 슬기롭게 혜쳐나갔다.
함지박에 물이 조금씩 고일 때는 아내는 봄이었다. 둘이 앉아 차오르는 물 을보고 속닥거리던 56년 전 추억이 다시 올까.? 추운 겨울을 반드시 이기고 찾아오는 봄, 봄비가 내리고 날이 흐려도 그 속에는 빛이 있기에 따뜻했다. 지나온 생을 더듬어 보면 어지간히 사람이 날 좋아하는 덕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회적 필수 요원 그릇은 작아도 꼭 앉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 적재적소 그게 행운이다.
살아가는데 많이 힘들면 세상에 홀로 던져진 것처럼 외롭고 함지박물이 한 종그래기 차면 얼른 한 바가지 퍼내고 짐은 가벼울수록 좋으니 함지박물도 엎으러 다 쏟아내면 충격은 클지 몰라도 산전수전 지난한 고통이라면 얼마나 시원하고 가벼울까? 하나 사고 둘 버리는 것은 만고진리다. 삶의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서 구정물을 꾸준히 버리는 것이 좋다. 단언컨대 엎어진 물이 마중 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20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