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KBS 퇴직사원들이 보는 사우회보 11월호에 실린 글로 우리 동기들이 봐도 무난하다 싶어 소개합니다.
□ <三山居士의 세상사는 이야기>
- 장 동 범 회우
KBS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한 사람은 재수 좋은 사람이다. 아니, 복 받은 사람이다. 나도 그렇다! 3년 여 전 퇴직을 앞두고 받은 ‘그린 연수’에서 강사로 나온 어느 퇴직 선배는 좋은 직장 조건으로 첫째, 정년 보장되고 둘째, 월급 제때 꼬박꼬박 나오고 셋째, 어느 회사 다녔다 라면 사람들이 금방 아는 곳으로 꼽았다. 이 조건에 KBS 만큼 들어맞는 직장이 대한민국에 또 어디 있을까? 임금피크 때는 연봉이 10의 8승을 넘었으니 세금을 아무리 많이 뗀다고 볼 멘 소리 했어도 ‘신이 내린 직장’으로 다들 부러워 한 것을, 다달이 받는 국민연금이 노후 복지에 얼마나 요긴한 돈인 줄 알면서부터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지금이다.
그러나 재테크 제대로 못한 것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일까? 시간은 보들레르 시처럼 “지금! 하는 순간 이미 과거인 것을”. 그래서 뭐니 머니해도 현금이 좋지만 ‘지금’이 제일 소중한 것임을 술자리 건배사로 대신하는 것이다. 또 있다. 유토피아, 한자로 이상향(理想鄕)은 영어로 nowhere란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뜻. 그래서 우리가 진정 누릴 수 있는 이상향은 지금! 여기!(now+here)인 것이다. 건배사 치곤 너무 현학적인가?
1970년대 대학 다닌 사람치고 제대로 마음잡고 공부한 사람 별로 없을 게다. ‘유신방학’이다 뭐다 해서 교정에 나라 지켜야 할 탱크들이 들어와 있는데 강의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 그래서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다 운 좋게 신문사 기자로 들어간 게 KBS로 까지 인연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늦깎이로 대학원 한 두 곳 다닌 게 계기가 돼 5년 여 대학 강단에서 소일하고 있다. 수업시간 학생들에게 여담으로 실컷 놀다 지겨우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마음껏 공부하라! 그리고 너희 부모 세대는 대단한 분들이시다! 세상에 반세기만에 농업국이면서도 배곯고 원조 받는 나라에서 산업화, 민주화 끝에, IT강국으로, 또 원조를 주는 나라로 환골탈태한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어디 있으면 나와 봐 라고 해!
뉴미디어, 손 안의 스마트한 세상임에도 얼굴 마주보는 인간적인 의사소통의 부재, 세대 간 단절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 요즘 젊은 학생들에게 부모 세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어찌 보면 측은한 생각도 든다. 끝없는 경쟁에 내몰리면서 불투명한 미래, 늙은이를 먹여 살려야 할 부담만 가중되는데 천정부지로 치솟는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밤잠을 못자고 알바를 하는 학생들이 강의시간에 졸거나 자는 것을 모른 채 해야 한다. 이들에게 기성세대는 변화와 혁신, 경쟁만 강조했지 사람답게 사는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삶인지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못했다.
나는 요즘 아침 바닷가를 산책하는 여유를 즐긴다. 회사 다닐 때 부산, 창원(마산), 울산 등 주로 뫼 산(山)자 붙은 곳에서 근무해 친구 사이에 ‘삼산거사’로도 통한다. 또 토, 일요일 아침이면 남천동 바닷가에 ‘천 원짜리 밥차’가 오는데 시래기된장국은 가격에 비해 여간 속이 편하지 않다. 노인부터 노점상, 술꾼, 산책객들 틈에 끼어 한 끼 때우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는 기분을 나날이 절감한다.
사실 그동안 너무 누리고 살아왔다. 알아주는 직장에서 남의 잘못 탓하는 일에 익숙하다 보니 자연 세상사는 이치에 있는 그대로 보는 ‘긍정의 힘’을 알기 어려웠다. 가끔은 자신을 낮추고 “누릴 수 있되 절제하는” 자세를 되새기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한 클래식 음악동호인은 바쁜 출근길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좌석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내버스 기사를 ‘인생 상수(上手)’로 표현했다. 그렇다! 사람 사는 곳에 청산(靑山) 있고, 사람 사는 곳곳에 달인(達人)이나 상수들이 즐비하다. 단지 눈에 잘 안 띌 뿐.
최근 베이비부머 세대의 퇴직이 시작되면서 ‘늙음을 경계하는 글’(戒老錄)이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은퇴 세대가 뒷방 늙은이로 기다리는 세대가 아닌, 교육받고 사회 경험 풍부하며 어느 정도 경제력도 있는 실버세대로, 사회 구성원의 한 주체로 보다 적극적인 제 2의 삶을 향유하는 때가 된 것이다. 그러한 삶의 적극성은 누가 주는 것 보다 각자의 생활 태도에 달려있기도 하다.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늙고 병들어 죽는 것 또한 순리다. 하긴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젊은 왕자 싯달타도 고민하고 방황하다 깨달음에 이른 것이 불교의 핵심 메시지 아닌가? 태어나면 늙어 죽되 어떻게 잘 살고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저 대지가 몸을 주어 나를 싣게 하고, 삶을 주어 나를 수고하도록 하고, 늙음을 주어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긍정해야 자신의 죽음을 긍정할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좋아하는 계로록 중 하나인 『장자』(莊子)의 ‘대종사’(大宗師) 편의 글이다. 노자의 ‘무위의 쓰임’(無爲之用)에서 더 나아가 활달하고 거침없는 대붕(大鵬)의 자유를 노래하는 장자도 바로 “자신의 삶을 긍정해야 자신의 죽음을 긍정할 수 있”다고 했다. 요즘말로 웰빙(well-being)이 웰다잉(well-dieing)이다. 어차피 죽음은 삶의 저 편에 있는 것. 오로지 우리가 찌지고 볶으며 살고 있는 지금! 여기! 에서 잘 사는 길 만이 잘 죽는 길임을 기억하자.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다 간 사람이 800억 정도 된다고 한다. 800억이라는 많은 사람이 살고 갔다니! 저승이 있다 해도 끔찍하고, 없다 하면 삶이 너무 허무하다. 나는 최근 이렇게 살다간 이들의 명복을 비는 시를 쓴 적이 있다.(블로그: suchon.egloos.com/ 참조) 누가 보든 말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괘념치 않고 앞으로도 “세상 사람과 더불어 시나 지으면서 살 거다”(與天下人作詩-수안 스님)
편집자 주 : 필자는 창원총국과 대구총국 보도국장, 울산방송국장을 지냈다. 2010년 정년퇴직해 부산외대, 경성대 등에서 미디어의 이해와 매스컴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1999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해『바람소리 혹은 낚詩』등 시집 6권을 냈으며, 현재 KBS 부산총국 시청자위원으로 있으면서 KBS 1라디오 ‘동남권 100년 포럼 KBS 열린 토론’(매주 금요일 오후 6시 10분~7시) 진행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