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에 읽어보는 고려사
고려사 - 71.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8
한때 유학자들로 부터 미움을 사 떠돌이를 전전하던 신돈이 다시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온 것이 1364년의 일로 이때부터 신돈은 본격적으로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하고 주도하는 역할을 자행하게 됩니다.
신돈은 공민왕의 국정 자문역을 담당하면서 이인복, 최영, 이구수 등을 밀어내고 136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정계에 들어섬으로서 그 핵심세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공민왕은 그가 다른 신하들과 달리 파당에 속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사리사욕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전면에 내세우고 다시 한번 개혁 정치를 도모하게 됩니다.
공민왕의 강한 신임과 의욕은 1365년 7월에 신돈에게 진평후의 봉작을 내리고 영도첨의사사사 겸 판중방감찰사사 및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 라는 복합적이면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관직으로의 임명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신돈은 인사권을 비롯한 내외의 모든 권력을 한꺼번에 자신을 중심으로 집중시키도록 하고 승복을 벗고 '돈' 이라는 속명을 사용하게 됩니다. '신돈' 이라는 이름이 불리게 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개혁 작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신돈이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개혁정책으로는 노비와 토지제의 개혁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권문세족들의 경제적인 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자 침체 국면에 있던 민간 경제를 보다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결과적으로 권문세족의 힘을 약화 시키고 더 나아가 공민왕의 왕권을 더더욱 강화시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돈의 개혁정책은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로 보다 구체화 되었습니다. 1366년 5월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강제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은 양민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것은 광종대의 노비안검법 실시에 버금갈 정도로 급진적인 정책 가운데 으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신돈의 정책에 의해 노비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성인이 나타났다'
고 찬양한 반면, 노비와 토지를 잃은 일부 지배층들은
'한 중이 나라에 평지풍파를 일으켜 망치려 하고 있다'
면서 그의 정책을 비난하는 등 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1367년에는 숭문관 옛터에 성균관을 고쳐 짓고
'공자는 천하만세의 스승이다'
라고 하면서 유학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는 '도선비기'를 근거로 수도를 옮길 것을 공민왕에게 건의하고 평양의 지세를 살펴보기도 했으니 이 일은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돈의 개혁정책도 차츰 반발로 인해 주춤거리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신돈 역시 집권 기간 내내 공민왕과 마찰을 빚고 또 여러 면에서 물의를 빚는 일까지 생기는 바람에 결국 6년 만에 몰락하게 됩니다.
고려사 - 72.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9
신돈의 개혁정치가 한창 진행중일 때 그에 대한 반발에 따른 제거 음모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1367년 10월에 오인택과 경천흥, 그리고 신돈을 공민왕에 소개해 준 김원명 등이 신돈을 제거하고자 모의하다 발각되어 유배된 사건이 벌어졌고, 그 이듬해인 1368년 10월에는 김정, 김흥조, 김제안 등이 역시 신돈을 제거하려다 계획이 발각되어 유배를 가던 도중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발은 단지 그가 추진하는 개혁정치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신돈의 타락된 모습과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공민왕과의 갈등과 불화도 그에 대한 반발과 몰락을 가속화 시켰던 한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신돈은 개혁을 위해 속세로 나온 뒤 한동안 기현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1367년에 자신의 집을 얻어 독립하면서부터 점점 타락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많은 첩을 거느리면서 아이를 얻는가 하면, 주색에 빠져 있는 일도 점점 많아져서 이에 따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정치를 하는 과정에 있어 빚어진 공민왕과의 극심한 갈등과 불화도 그를 점점 궁지로 몰고 가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즉, 1369년에 스스로 5도의 사심관이 되기 위해 사심관 제도를 부활시키려다 공민왕의 강한 반발로 좌절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공민왕과의 사이가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1370년 10월에 공민왕은 자신이 직접 정치에 관여하겠다는 뜻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이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지만, 신돈의 세력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뒤였습니다. 친정에 앞서 커져버린 이들 세력이 공민왕에 있어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1371년, 마침내 공민왕은 신돈에게 역모죄를 적용하여 수원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습니다. 이때 신돈과 함께 개혁을 도모하던 기현, 이춘부, 이운목 등도 그 도당이라 하여 함께 제거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신돈은 집권 6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과정에서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많은 양민들이 노비에서 환원되었고, 권세가들에 의해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의 상당 부분이 원주인들에게 되돌려지거나 혹은 국가에 환속됨으로서 고려는 경제적인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으나 신돈의 실각 이후 다시 여러 가지로 문제가 야기되는 바람에 한때 신돈에 의해 마련된 경제적 안정 기반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성균관을 확대 개편하는 과정에서 유학자들이 대거 배출됨으로써 조선왕조 개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사대부 세력의 성장을 촉진하게 하였던 점에서 신돈의 개혁이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돈의 개혁 이후 공민왕은 예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결국 비참하게 최후를 맞습니다.
고려사 - 73.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10
신돈의 위세가 나날이 커짐에 부담을 느낀 공민왕은 신돈을 실각시켜 숙청한 다음 다시 직접 정치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돈이 제거된 이후 공민왕의 모습이나 행동은 예전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즉위 초기부터 가지고 있었던 개혁 의지는 온데 간데 없고 오직 주색과 여색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고려를 개혁하고자 앞장 선 공민왕이 왜 이런 모습으로 변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원나라 공주 출신으로 공민왕을 묵묵히 내조해 주던 사랑했던 왕비 노국공주(고려 시호 : 인덕왕후) 가 난산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 충격에 공민왕이 스스로의 의욕과 의지를 모두 잃었기 때문입니다.
노국공주 인덕왕후는 원나라 황실의 친척인 위안이라는 사람의 딸이며, 본명은 보탑실리로서 공민왕이 왕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입조해 있을 당시이던 1351년에 결혼하였으며, 그 해 10월 공민왕이 즉위하게 되자 12월에 왕과 함께 입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노국공주가 원나라 공주 출신이긴 하나,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해 주었고 또한 공민왕에게 여러가지로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변란의 위기에서 지혜로서 공민왕을 구해 준 훌륭한 여인이었기에 공민왕의 슬픔은 더했습니다.
노국공주, 즉 인덕왕후가 세상을 뜬 것은 1365년 2월의 일이었는데, 그때까지 공민왕은 왕비 노국공주 사이에 자녀를 얻지 못한 채 후사 문제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어렵사리 임신을 하여 공민왕은 후사가 생길 것이라 무척 기대하면서 죄수들을 풀어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그 와중에서 노국공주가 산고를 치룬 끝에 아이도 낳아 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국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으로 하여금 엄청난 괴로움에 쌓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왕은 왕비의 죽음으로 인해 거의 정사를 뒷전으로 미룰 만큼 슬픔 속에 빠져 지냈고, 이러다 보니 정치에 대한 의욕이나 의지는 거의 실종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슬픔 속에 대신들은 1365년 4월 죽은 왕비에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라는 시호를 올렸으며, 원나라에서는 그 이듬해 1366년 노국휘익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내리게 되지만 공민왕에 의해 노국휘의대장공주로 고쳐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노국공주의 호칭도 시호의 일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공민왕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의욕과 의지를 잃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그는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에 못 이겨 주색에 빠지거나 미행 나가는 일로 일관하였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국공주의 죽음이라는 충격으로 공민왕은 정신적으로도 이상이 생기게 됩니다. 본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던 그가 노국공주에 대한 집착에 못 이겨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공민왕의 변태적인 행동도 바로 이러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어난 것으로 젊고 예쁜 시녀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귀족들의 아들로 구성된 이른바 자제위 소속의 김흥경, 홍륜 등과 난삽한 성행위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문틈으로 그것을 엿보곤 했다는 것입니다.
공민왕의 행적을 기술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이때 거의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이런 문한한 성행위 관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마음이 움직이면 홍륜 등을 자신의 침전으로 불러들여 동성애까지 즐기기도 했으며, 후계자가 없음을 걱정한 나머지 홍륜과 한안 등을 시켜 후비를 강간하도록 하고 그들 사이에 아이(아들)가 생기면 자기의 자식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마침내 1374년 9월, 그는 내시 최만생으로부터 익비 (공민왕의 후궁) 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보고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익비의 몸속에 있는 아이를 완전히 자기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최만생에게 왕비와 같이 잔 홍륜과 그 무리들을 한꺼번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만생은 홍륜 등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고 오히려 한안, 권진 등과 더불어 이들과 함께 왕을 죽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날 밤 그들은 침전에 침입하여 만취상태로 잠들어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공민왕은 최만생 등의 어이없는 흉계에 의해 재위 23년 만인 1374년, 4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이로서 공민왕이 추진하던 개혁들은 모두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공민왕을 죽인 최만생과 홍륜 등은 내시 이강달과 경복흥, 이인임 등에 의해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참살되었습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공민왕 생전에 반야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 우가 뒤를 잇게 되는데, 이가 32대 우왕이었습니다.
고려사 - 74. 고려 왕조의 종말 1
의욕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고려의 중흥을 꾀하던 공민왕이 사랑하던 왕비 노국공주(인덕왕후)의 난산에 의한 죽음으로 인해 절망과 상실감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과 여색, 그리고 동성애를 즐기는 변태적 행위를 일삼다가 재위 23년 만에 최만생 등에 의해 피살되면서 (1374년) 이후 고려왕조의 정정은 불안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사람은 공민왕과 그 시비 반야라는 인물 사이에서 태어난 우(禑)이며, 그는 공민왕을 시해한 최만생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던 이인임 일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1365년에 태어난 그의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 이며, 그는 어린 시절을 당시 집권자이던 신돈의 집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본래 공민왕은 노국공주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해오던 중 노국공주가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끝내 난산으로 숨을 거두게 되면서 공민왕의 후사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만 갔습니다.
이럴 즈음, 신돈은 자신의 종으로 있던 반야라는 여인을 공민왕에게 바치게 되었으며 신돈이 바친 그 반야와 공민왕은 동침하게 되고 얼마 뒤에 그녀는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반야가 만삭이 되어 출산이 가깝게 되자 신돈은 다시 자신의 친구인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맡기게 됩니다. 결국 반야는 이 능우의 어머니 집에서 아기를 낳게 되는데, 이가 바로 우 (모니노) 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를 순산한 반야는 1년 후인 1366년에 신돈의 집으로 가서 기거하게 됩니다. 이때 신돈은 반야가 낳은 아이를 동지밀직 김횡이라는 사람이 보낸 여종 김장을 유모로 삼게 하여 아이를 돌보도록 했는데, 1371년 신돈이 실각당하고 다시 역모죄로 몰려 수원으로 쫓겨나게 되자 공민왕은 자신에게 아들이 있음을 모든 백관들에게 밝히게 되고 이에 반야의 아들 모니노를 궁궐로 데려오도록 명하게 되었습니다.
모니노를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면서 공민왕은 당시 수시중(오늘날의 부총리)으로 있던 이인임에게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기에 가까이 하였더니 아들을 얻었다'
면서 자신의 아들 모니노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게 됩니다.
공민왕의 명으로 궁궐로 들어오게 된 모니노는 명덕태후 홍씨에게 맡겨집니다. 이때 공민왕은 문신들을 모아 모니노의 이름을 고칠 것을 명하여 '우(禑)'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중으로 있던 경복흥과 밀직제학 염흥방, 정당문학 백운보 등을 불러 의논한 후 왕우에게 강녕부원대군이라는 봉작을 내리고 백문보, 전녹생 등으로 하여금 그의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게다가 공민왕은 자신의 후계로 삼을 왕우의 친모가 천출(노비 출신)의 소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것을 꺼린 나머지 자신이 죽임을 당하던 달인 1374년 9월에 이미 사망하고 없던 궁인 한씨를 왕우의 생모로 입적시키는 한편 한씨의 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후계자가 천출임을 철저히 가리려 했던 것이죠. (이후 한씨는 우왕 즉위 후에 순정왕후라는 시호가 내려짐)
하지만 우왕을 낳은 생모인 반야는 비참하게 최후를 마칩니다. 즉, 우왕 2년이던 1375년 자신이 왕의 친모라고 주장했다가 이인임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마저 임진강 강물에 수장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앞서 말씀 드렸지만 공민왕은 우왕의 친모를 궁인 한씨로 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왕우의 친모 반야가 천출로서 신돈의 여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반야가 신돈의 여종이었음을 당시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기에 만일 반야가 자신을 우왕의 친모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 믿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민왕은 자신이 죽기 전에 (갑작스런 죽음이었긴 하지만) 서둘러 왕우의 모계를 궁인 한씨로 바꾸어 버렸으며,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우왕은 공민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당부받은 이인임 등의 도움에 힘입어 어렵사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을 두고, 훗날의 일이지만 조선 개창의 핵심세력인 사대부 세력들은 신돈과 몸종 반야 사이에서 태어난 천출이자,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직후 그를 폐위하고 대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세웠다가 다시 신종의 후손인 정창군 요를 34대 공양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이 개창되면서 우왕은 자신의 아들 창왕과 함께 철저하게 반역자로 매도되었습니다. 즉, 신돈의 아들 (우)과 손자 (창)이 나라를 도적질했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신돈과 함께 그들 부자는 반역으로 몰리게 되었고, 고려사 기록은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왕우를 신우(辛禑)라 하고, 그 아들 왕창(王昌) 또한 신창(辛昌) 이라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역자로 내몰린 까닭에 그는 왕으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폐위 직후 살해되었어도 이렇다 할 능(陵) 조차 마련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시호조차 받지 못한 채 앞서 말씀 드린 신우라는 이름만 남아 고려사 역대 제왕의 사적인 세가(世家)가 아닌 열전 반역자 편에 그 행적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왕조를 개창하고자 했던 사대부 세력의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폄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새 왕조 조선의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태조 이성계는 공민왕의 뒤를 계승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의 종묘내에 공민왕 신당을 세운 사실은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함) 우왕이나 그 뒤를 계승한 창왕, 심지어 왕씨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공양왕마저 죄인으로 몰아내고 이성계를 공민왕의 뒤를 계승한 떳떳한 임금으로 내세우며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합리화 하고자 했던 그들의 정치적 목적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신우 나 신창이 아니라 우왕, 창왕이라 해야 옳으며,신우나 신창이라는 표현은 객관성이 떨어지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의도에서 왜곡된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어머니가 천출이었다 해도 그 어머니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바로 공민왕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그 공민왕의 핏줄을 계승한 우왕의 아들이 바로 창왕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왕위를 계승한 정통성은 바로 이들 우왕과 창왕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사 - 75. 고려 왕조의 종말 2
우왕이 이인임 등의 도움을 받아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우왕이 왕위에 올랐다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왕우를 새 왕으로 추대할 즈음 당시 생존해 있던 공민왕의 모후이던 명덕태후 홍씨가 이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명덕태후는 공민왕이 피살된 그 다음날 경복흥과 함께 종친들 가운데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여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하고 또 그렇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인임은 우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종친을 옹립하려는 태후 측의 입장과 우를 왕으로 세우려는 이인임 측의 의견이 엇갈려 한동안 논쟁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사이, 판삼사사로 있던 이수산이 나서서 종실에 맡기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만, 영녕군 왕유와 밀직 왕안덕이 공민왕의 유지를 적극 이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여 결국 우가 32대 왕으로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가 왕위에 오르자 그를 왕위에 앉히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인임은 이로 인해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실력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우리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가훈으로 널리 알려진 최영도 이 무렵 이인임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핵심인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국내에서 어렵사리 왕위 계승 절차가 정리되고 있을 즈음 새로 들어선 명에 의해 북방으로 쫓겨난 원(이하 북원 이라 칭함)에서는 공민왕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하고 심양왕 왕고의 손자인 탈탈불화로서 새 고려국왕으로 삼게 됩니다.
이로 인해 원나라 장수였다가 명나라에 투항한 나하추는 공민왕이 자식이 없었는데 누가 왕위를 이었느냐며 고려 조정에 힐난하게 되고, 결국 1375년 8월 탈탈불화는 즉위식을 갖기 위해 고려로 오게 되었습니다.
탈탈불화가 고려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고려 조정은 안팎으로 불안에 휩싸이게 되지만 이인임이 탈탈불화 일행을 저지함으로서 이 문제는 더 이상 크게 번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377년, 마침내 북원에서 우왕을 정식으로 고려의 국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사실상 왕위 계승으로 인한 잡음은 소멸되었습니다.
헌데, 문제는 이 당시 고려의 이중적인 대외 관계였습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몰아내고 친정하면서 새로 들어선 명나라와 국교를 맺고 상대적으로 북원과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여전히 관계가 지속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북원에서 우왕을 고려 국왕으로 정식 인정하게 되자 (1377년), 이번에는 다시 명나라에서 우왕을 정식으로 고려 국왕으로 정식 인정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378년) 이러한 이중적 문제가 계속되자 실권자 이인임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한동안 북원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실권자 이인임 등이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해 제거되면서 고려는 다시 친명 정책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철령위 이북의 영토 문제를 놓고 다시 대립, 급기야 실권자 최영은 요동정벌을 물색하게 됩니다만 어디까지나 우왕 말년의 일이므로 이 문제는 다음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왕이 즉위할 무렵부터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시끄러워졌던 고려는 설상가상으로 왜구의 노략질까지 빈번하게 일어나 골치를 앓게 됩니다.
이러한 왜구에 대해 고려는 군대를 총 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1376년, 최영이 홍산(지금의 충남 논산)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필두로 (홍산대첩), 1380년에는 나세, 최무선 등이 화약과 화포를 개발하여 적선 5백여 척을 붙사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 해에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황산대첩), 다시 1383년에는 정지가 서남해에서 수백의 왜구 선박들을 궤멸 시켰습니다.
이외에도 외교 교섭을 통해 왜구의 침입을 저지하는 작업을 병행하였습니다.
1375년에 나홍유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 조정에 왜구 토벌을 협조할 것을 요청하는 뜻을 전달했으며, 2년 후인 1377년에는 정몽주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큐슈 지방과 이마카와에 붙잡혀 있던 고려인 수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한편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왜인 만호부를 두고 이처럼 강경과 회유를 적절히 구사하며 왜구의 침입을 억제하고자 노력했음에도 왜구의 노략질은 끊이지 않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려의 이중적 외교 관계 (북원 및 명나라와의 관계)도 점점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즉, 북원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 채 오히려 신흥 강국인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가운데 북방의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고려사 - 76. 고려 왕조의 종말 3
우왕이 즉위하고 공민왕의 부탁을 받은 이인임이 사실상 우왕의 후견인으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외교 노선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 과정에 있어 많은 혼란을 초래하여 나라 안팎으로 많은 불안감이 감도는 가운데, 고려의 이중적인 외교 태도와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의 정정이 더더욱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함은 이미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습니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불구하고 고려는 북원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였고, 명나라와의 관계마저 함께 갖게 되면서 외교관계는 북원과는 적극적으로, 명과는 소극적인 이른바 이중적인 형태의 모습을 드러내 보입니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들과의 관계만을 요구해 왔음에도 고려는 계속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 두 나라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북원이냐 명나라냐를 놓고 내부의 외교 노선은 또 한번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럴 즈음 당대의 실권자인 이인임과 염흥방, 임견미 등의 전횡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영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그들을 제거한 다음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인임의 신임을 얻으며 그의 휘하에 있던 최영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대외관계도 자연 북원 중심으로의 외교 노선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래 이인임파에 있던 최영이기에 외교노선도 북원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사대부 세력들은 한동안 정계 밖으로 축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려 내부의 외교 노선을 둘러싼 혼선과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서기 1388년인 우왕 14년 명나라에서는 고려가 점령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옛 땅이 원나라의 뒤를 계승한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해 오며 철령 이북의 영토를 자신들의 요동부에 귀속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오면서 실권자 최영은 명나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명나라의 영토, 즉 요동의 정벌을 추진하게 됩니다.
최영의 제창에 따라 추진된 요동정벌을 둘러싸고 고려 조정에서는 논란이 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란 끝에 마침내 우왕은 최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최영의 건의에 따라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우왕은 전국 5도의 각 성에 성을 수축할 것을 명하고, 군사를 요동이 있는 서북방면에 집중 배치하여 명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개경의 방리군을 동원하여 한양의 중흥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는 유사시 왕족들을 중흥성으로 피신시키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이러한 전쟁 준비를 통해 요동 정벌의 의지를 굳힌 우왕은 최영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더욱 굳히기 위해 최측근으로 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최영의 딸을 맞아들여 영비로 삼았는데, 이때 그는,
'나의 아버지가 밤에 잠을 자다가 해를 당하였는데, 나 또한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여 최영에 대한 두터운 의지를 과시하게 됩니다만, 아마도 이는 한치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최영으로부터 보장 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우왕으로부터 요동정벌의 총책을 부여 받은 실권자 최영은 자신의 전쟁 의지를 더더욱 강하게 굳히고자 반대파중의 한사람이던 공산부원군 이자송을 처단하였습니다. 이자송은 처형당하였으나, 훗날 실권을 장악한 급진파 사대부 세력에 의해 복권되는데, 위화도 회군의 정당성 및 자신들의 집권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그들만의 철저한 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그 무렵 서북면 도안무사로 있던 최원지로부터 명나라의 요동도사가 보낸 지휘관 2명이 1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철령위를 접수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개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명나라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이라는 사람을 사절로 보내 철령위의 설치를 정식 통보하게 됩니다.
이에 우왕과 최영은 문하찬성사로 있던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도록 하고 5부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군대를 조직한 후에 우왕 자신과 최영은 서해도로 이동하여 요동 공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 때 세자 창과 정비 및 근비, 그 외의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여러 사람들은 급히 한양산성으로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개경을 떠난 우왕은 봉주라는 곳에 이르러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아 요동 정벌의 총 책임자로 삼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 도통사로 삼아 요동 공략을 명하게 됩니다만, 이때 우군 도통사로 임명된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하며 이른바 '사 불가론'을 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