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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구라' ① 백기완 ② 방동규 ③ 황석영
'3대 교육방송'은 이어령·김용옥·유홍준
백기완
"내 이빨 중에서 14대가 가짜예요. 그동안 3~4년에 걸쳐서 임플란트로 해 박은 겁니다. '이빨 깐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젠 내 이빨이 아니라 그런지 '구라'도 옛날 같지 않아요. 자꾸 버벅거리고… 유창하게 나오질 않아." 요즘처럼 날렵하고 빠른 디지털 시대에는 자기 같은 '아날로그'는 더 이상 '이야기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도 '구라'다.
방동규
조선엔 3대 '구라'가 있다. 백구라, 방구라, 황구라. 백기완이 물었다. "자네 주먹 좀 쓴다는데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나?" "뭐, 그저 한 삼십명 정도…" "사내로 태어났으면 삼천 명이나 삼만 명은 상대해야지 겨우 삼십 명이야. 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꺼져." 문단의 알아주는'구라' 황석영과 재야의 걸쭉한 '구라'방동규가 한번 붙어야 한다고 김정남(김영삼 정부 청와대 교문수석) 등이 부추겼다. 문인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을 하던 또래들이 30~40명 모였다. '구라 대결'은 다수결의 판정에 의해 황석영이 졌다. 평론가 염무웅이 함께 자리한 '방배추'를 자극하려고 "이제 구라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백구라'는 민중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뒤 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 더 이상 구라를 풀 수 없고, '황구라'는 교도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구라'를 풀고 싶어도 풀 수 없게 됐으니 '구라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앞장 선 놈이 누구냐?" "저기 와 있네." "쟤가 무슨 라지오냐. 인생이 없으니까… 쟤는 '교육방송'이야."
1대 이어령, 2대 김용옥, 3대 유홍준.
"한국일보 연재 '장길산'이 나를 키웠다"창간47주년 인터뷰
시대의 입담꾼 황석영
미리 받은 집 반채값 고료 일주일간 술 마시고 탕진 장기영 사주 아니었으면 소설 햇빛 못봤을것 1989년 북한 방문은 작가로서 할일 했을뿐 우리사회 이념대립 극단적 중도가 인정받는 세상 돼야
"친정이죠. 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에요."
1974년 7월11일 한국일보에 연재된 '장길산' 첫 회. 김기창 화백이 삽화를 그렸다.
'황석영이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졌고,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서울 한복판 청진동으로 몰려 들었다. 술자리가 시작됐다. 그리곤 당신의 명함에다 술집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주며 '친구들과 술 마실 일이 있으면 그 곳에 가서 내 앞으로 달아놓고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나 너무 미안해서 그 술집은 한번도 가지 않았어요. 놀랄 일이 또 있었어요. 바둑 대국장으로도 유명한 인사동의 운당여관 특실을 잡아주곤 글 쓰는 일에 매달려 보라고 했어요. 대단한 분이었어요. 그런 배려가 없었으면 '장길산'은 출발도 못했을 겁니다." 황석영은 그 해 11월15일 청진동 귀향 다방에 모인 문인들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자는 데 뜻을 같이 한 뒤 18일 고은(대표 간사), 신경림, 염무웅, 박태순, 조해일, 황석영이 6인 간사를 맡아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반유신 독재 투쟁에 앞장 섰다. 시인 김지하 등 긴급조치로 구속된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고, 언론·출판·집회·신앙·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에겐 이들은 '눈엣가시'였다. 감시가 심해졌고, 활동에 제약이 많아졌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당국의 감시를 받던' 소설가의 원고를 챙겨야 했던 기자들이 오죽했으면 '황석영의 구라는 언제 끝나는 것이냐'고 했을까.
1984년 7월5일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의 연재를 끝낸 뒤 황석영이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완간 기념회에서 무당 춤을 추고 있다.
'세 가지 꿈'은 죽는 날까지 잊히지 않을 상처이자 강박 관념인 것이다. 아직도 나를 '종북좌파 빨갱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조직적이지도 못하고, 이념적으로 투철하지 않아요. 자유주의자일 뿐입니다. 방북은 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한 사회의 터부나 억압받는 것을 무너뜨려 상식화시키고, 대중화시켜야 합니다. 금기시하는 것이 억압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작가입니다. 작가는 민족의 주술사 같은 거예요." 결과적으론 기회주의적 희망으로 그쳤고, 유라시아에 동행한 이후 좌우 양쪽 어떻게 두들겨 맞았는지 양 볼이 다 방방해졌어요." 지금은 집권 세력이 급격하게 우향우를 하니까 저는 좌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상식이 설 자리가 없어요. 선(善)한 상식이 서있는 사회가 '열린 사회'입니다. 상식이 바로 서야 진보와 보수가 양립할 수 있고 대화를 통해 발전적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 주간한국 2011.10.
‘배추’ 방동규 “요즘세상 의리가 없어 서운해”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꼭 엉뚱하기는/ 천장에 매달린/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입심좋아/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와/ 와 웃음터진다.”
10여년 전에 발표된 연작시 만인보에서 고은 시인은 방동규씨(73)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땅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천장을 받치고 서 있어야 할 대들보가 천장에 매달린 형국이라니 방씨의 인생이 그만큼 기묘했다는 얘기일 거다. 게다가 힘깨나 쓴다고 하고 거기에 입심도 좋다고 하니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도 1973년 강원도에서 노느메기밭을 일구며 공동체생활을 꿈꾸다 재야인사들을 접촉한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로 복역하고, 86년에는 또다시 ‘말’지 사건에 휘말린 김태홍 전 의원을 숨겨줘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헬스클럽 강사로 활동했고 일흔에는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일했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장배 보디빌딩 대회에 최고령자로 참석해서 입상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전국대회 출전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칠순 노인이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지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의리나 사람이 근본이 되어야지 세상이 좋은 건데 요새는 자본이 근본이고 재산이 근본이 아닙니까. ‘자본’이 어떻게 ‘주의(主義)’가 되지요? 의리고 뭐고 없고 이기는 놈이 장땡이고 이기려다보니 모략하고 배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결과 잘된 놈은 잘된 놈들끼리만 모이고 안된 놈은 사그라지는 것 아닙니까.”
세속의 틀과 이기심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배추의 파란만장 일대기가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다른 아이들은 여학생과 한방에서 같이 공부하니까 모양도 내고 면도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뭐 집이 가난해지면서 교복도 못 사입고 베잠방이 한복 반바지에 조끼 같은 민소매 옷 하나 걸치고 다녔죠. 운동은 그때부터 좋아해서 민소매 입어야 몸이 나타나니까. 신발도 그때는 게다짝이라고 했는데 나무판에 못 쓰게 된 타이어 같은 것 못 박아서 찍찍 끌고 다니고, 밀짚모자까지 썼어요. 그러니 배추장수 같다고 여학생들이 붙여준 거예요. 게다가 어렸을 때였지만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한마디로 불량학생이죠.” 영화에서는 이기던데 난 졌지. 아 도대체 17명을 어떻게 이기느냐고. 저쪽도 날고 기는 놈들인데. 그래서 병원에 한 두어 달 입원했었죠. 요새는 괜히는 안 싸우잖아요. 이해관계가 있다든지 시비가 있다든지 해야 싸우는데 예전에는 그런 것 없이 괜히 싸웠어요. 그때는 전화도 없으니까 상대편에서 쪽지를 들고 나와요. ‘나 영등포 아무개인데, 너 요즘 좀 잘나가더라? 한 수 겨뤄보자’라는 식이죠. 그럼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붙는 거예요. 보통 장소는 지금의 창경궁이었는데 전쟁 때 창경원에 넣어뒀던 동물들이 없어져서 아주 휑했지요. ‘코끼리 앞에서 보자’ 하면 널찍한 코끼리 우리 앞에서 붙는 거죠. 방법은 천하 없어도 1 대 1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힘은 세지만 싸움을 특별히 잘한다고 볼 수 없거든요. 계속 약한 상대들만 걸린 거예요. 그러다보니 내가 이미 센 놈이 되어 있더라고요. 삼국지에서도 보면 자기 나라에서 얌전히 왕 노릇하면 되는데 꼭 옆 나라를 치고 망신당하잖아요? 동네에서 골목대장 하면 유명해질 텐데 제가 유명하다고 하니까 도전했다가 번번이 깨지더라고요. 저는 그러니까 도전자를 계속 받아주면서 센 사람이 되어버린 거죠. 커닝해서 한 번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꾸준히 밤새워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격이지.” 할아버지가 아버지인 증조부에 이를 갈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신 것이죠. 할아버지께서 어느날 ‘돈 벌어 오마’라는 말만 남기고 황해도 신천의 운수회사인 부잣집으로 종살이를 하러 갔죠. 개성에는 특별한 관습이 있는데 객지에 나가면 10년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죠. 10년이 넘어 돌아오면 개성 시내의 가장 큰 다리인 야다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했어요. 지방색이 강한 것이죠. 할아버지는 9년 만에 돌아왔어요. 5층 건물을 지을 만큼 큰돈을 들고 오셨죠. 그리고 그 건물에 편리화라고 지금으로 치면 구두 공장을 만드셨고 밀짚모자 공장도 했어요. 또 정미소도 했고요. 그렇게 악착같이 모으신 거지요. 저는 그래서 어렸을 적에 항상 구두만 신고 다니고 잡곡밥을 먹은 적이 없어요.” 그 아이들이 당시 이승만 자유당 때 부패하고 엉망진창이니까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산에 나무 심는 운동도 하고 그랬어요. 겨울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운동을 하고요. 그때 백기완을 처음 만났죠. 참, 내가 보기에는 사람 같지도 않더이다. 바싹 마른 것이. 내가 그때는 힘을 엉뚱한 데 쏟으면서 유명해질 때라 백기완이도 나를 알더라고요.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앉은 채로 올려다보며 ‘네가 배추냐?’ 하더니 ‘너 주먹 한 번에 몇 명이나 쓰러뜨릴 수 있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한 10명이야 자신 있지’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아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귓방망이’를 때린단 말이야. ‘남자가 주먹을 들면 3000만이 울고 웃고 해야지 넌 10명이 뭐냐. 조자룡보다 못하잖아. 조자룡은 10만 대군을 물리쳤는데’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참 가소롭고 북어대가리 같은 게 내 따귀를 때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그런데 그렇게 맞고 한 일주일을 잠을 못 자겠는 겁니다. 그 말이 자꾸 머리를 맴돌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백기완 똘마니가 됐지. 에이, 그때 그냥 백기완이 몇 대 때리고 나왔어야 내가 지금 조폭 두목이라도 하고 빌딩이라도 갖고 있을 텐데 하하.”
방동규씨는 “재야운동 하는 사람들 안만났으면 지금쯤 조폭 두목이라도 하면서 빌딩 한 채라도 가지고 있었을 텐테”라고 농담을 하며 허허 웃었다. 하지만 그는 “후회는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앞에 다가온 도전은 보디빌딩 전국대회다. | 김세구 선임기자
-‘백기완’이라는 친구를 만나서 인생이 많이 달라졌나 봅니다. 사회 현실에 눈뜨고 싸움 잘 안 하고 책도 보고 꼴값을 하는 거야 이게. 주먹 계통에서는 ‘배추가 돌았다’는 말도 나왔대요.” 그런데 무슨 주의라고 하는 게 ‘자본’이 ‘주의(主義)’가 된다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는 거지. 그렇게 되면 의리도 없고 경쟁에서 이기는 놈이 장땡이고 이기려니 모략하고 배신하고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럼 잘된 놈은 잘된 놈끼리 모이고 안된 놈은 사그라지는 것 아닙니까. 지금 정치판에서 날뛰는 사람들 중에도 한동안 감옥에 같이 있었던 애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서 그쪽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요.” 두목이라는 것은 안아줘야 하는 것인데 조금만 잘못해도 소리소리 지르고 호되게 하니까 머리 큰 사람들이 그걸 견뎌내겠어요? 그래도 요즘 씁쓸한 건 노나라 때(노무현 정권 당시) 만세 부르던 아이들이 민주투사라고 날뛰었잖아요. 그 아이들이 백기완 사무실을 거쳐간 아이들이거든요. 거의 대부분이 그래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반독재 운동을 한 사람들을 민주 인사로 안다고. 물론 반독재도 좋아요. 그렇지만 ‘민(民)’이 ‘주(主)’가 되는 운동을 한 게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보니까 민주가 진짜 뭔지 모르죠. 민주를 안 하잖아. 못 했잖아. 하고 싶어도 민주가 뭔지 모르니까요.” 백기완이 사직공원에서 대통령 민중 후보 수락 연설을 할 때였는데 저는 반대했어요. ‘네가 할 때가 아니다. 도저히 터지지 않으면 안 될 때 나가자. 학생들 몇몇 만세 부른다고 너 찍는 거 아니다’라고. 그런데 그때 나가더라고요. 그 이후로 나는 접근조차 어려워지고요. 학생들, 시민사회 단체 사람들이 되기도 전부터 모여들었죠. 그런데 몇 표 못 받고 망조가 드니까 내가 다시 사무실 드나들게 되고 결국 뒤처리를 했지요. 다 백기완을 떠났죠. 도리어 주먹 쓰고 싸우던 불량자 의리보다 (그들의 의리가) 더 엉성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죠. 의리나 우정을 얘기하면 지능이 낮은 것으로 치죠. 근데 그건 백기완이뿐 아니라 누구나 그렇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을 거예요.” 황석영이나 백기완이나 다른 국회의원들도 자기가 없는 것을 가진 나를 과대포장해서 만들어 놓고 나를 잘 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말을 잘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 바람에 내가 유명해진 것 같아. 황석영과 백기완과 나를 3대 구라라고 하는데 스타일이나 이야기 내용부터가 다르지요. 황석영이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인생파 구라니까요.”
계속 한국에서의 일들이 떠오르고 오버랩되고 했지만 열심히 일했어요. 술도 끊었죠. 주말에 일을 하면 휴일수당까지 주기 때문에 자청했고, 또 야간에 일하면 야간수당도 붙어서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벌었어요. 한 달에 400달러 벌었는데 그때 보통 다른 사람들은 120달러를 벌었죠. 집에 돈을 악착같이 부쳤는데 그 돈으로 도곡동에 국민주택인가 13평짜리 아파트를 샀어요. 어머니도 다행히 기적처럼 깨어나셔서 안정이 되어갔죠.” 독일에서는 탄광 천장을 받치는 쇠기둥이 있는데 나올 때 광부가 그걸 가지고 나오면 개당 10달러씩 쳐줘요. 왜냐면 그 받침대가 100달러 정도로 비쌌는데 광부가 그것을 가지고 나오다가 갱이 무너져서 다치거나 죽을 수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목숨 걸고 비싼 걸 건져오면 수당을 준 것이죠. 그날도 그걸 메고 나오려는데 천장이 내려앉은 거예요.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나면 산 거고 안 깨어나면 죽은 거였는데 눈이 떠지더라고. 그런데 기억이 없는 거예요. 어머니 이름, 내 이름, 여기가 어디인지 등 다 알고는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는 거야. 나와 무관한 것 같고 괴롭고 그랬어요. 하루 종일 창밖만 보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던 네덜란드인 동료가 기억이 돌아오도록 이것저것 얘기도 해주고 그랬나봐요. 보름 만에 돌아왔어요.” 하루에 삽 7개까지 부러뜨려 가면서 직접 개간했어요. 몸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땅이 쓸모 있게 변해가고 그 자체로서 가장 기쁜 나날들이었어요. 제가 철원에 100만평을 얻어서 있던 곳이 580고지인데 산이 평평했어요. 발밑으로 봉우리가 있고 거기에 구름이 쫙 끼곤 했는데 살짝 물러나고 나면 그 위로 해가 비추는 것이 보입니다. 구름이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면서 오색찬란하게 변하는 풍경이 보여요. 그런데 서 있으면 좋지요. 그것도 4년 정도 했나. 빨갱이라고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잡혀가게 됐어요. 재야인사라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하니까.” 이후 86년에는 당시 민주화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었던 김태홍이 ‘말’지의 보도지침을 공개해서 수배됐는데 광주까지 보디가드를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건으로 결국 고문기술자 이근안까지 만났죠.” 85년에는 선우휘 형이 술병을 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어요. ‘네가 동지들 위해서 총대 한 번 메라’라면서 저를 설득했지요. 정권 쪽에 발 하나 들여놓아야 운동하던 친구들 뒤를 봐주고 쌀이라도 사줄 수 있지 않으냐는 거였죠. 다름이 아니라 대통령의 비선에서 일하라는 거였어요. 펄쩍 뛰었더니 ‘내가 얼마나 어렵게 말을 꺼내고 있는 줄 아느냐’며 설득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참 그게 안 됩디다. 내가 소인배니까 배신자, 나쁜 놈 소리 듣기 싫었던 거죠. 선우 형은 ‘아주 큰 그릇은 못 되겠구먼’이라고 하더니 앞으로 그런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그래도 그건 못 하겠습디다.” 하면 된다는 것을 늙은이가 보여주고 싶어요. 노인들에 대한 정책이 일단 잘 안 되어 있고, 정책이 되어 있다고 해도 노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안 돼 있다고 생각해요. 마냥 지원금만 바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내 생각에는 노인들도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사실은 보디빌딩 대회에도 나가는 것이고요. 서울시 대회에 지난번에 나갔었고 이제 전국대회에 나갈 자격도 얻었습니다. 내년에 도전할 테니 꼭 지켜봐 줘요.”
방동규 씨(76)는 지난해 75세의 나이로 미스터코리아대회에서 당당히 입상했다. "내 몸의 전성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그는 주민등록 상의 나이와 몸의 나이는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방 씨는 1974년, 시대의 희생자로서 남들은 한 번도 견디기 힘들다는 고문을 2번이나 참아냈다. 그는 그 후로 이유 없이 일 년에 두어 번씩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껴왔다고 호소했다.역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그의 몸. 그에게서 몸의 또다른 의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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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