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처음 나온 말. '불안하다.' 는 그녀의 말에 륜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멍하니 서서 소파에 앉아 바닥만을 바라보는 그녀를
팔짱을 낀 채 보고 있다.
"불안하다구."
"… 왜요."
"…"
다시 말이 없어진 그녀의 곁에 우유를 들고 앉은 륜. 우유를 건네보지만 반응이 없긴 마찬가지이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거야."
"… 넌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적 없어? 내가 너와 같은 나이이거나 너보다 나이가 더 적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
아주 작게 내뱉은 그녀의 말에 륜은 우유를 탁자에 내려놓고 그녀의 몸을 돌린다.
"나 봐봐요."
"…"
그녀의 눈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내가 그렇게 못미더워요?"
"그런 게 아니…"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당신은 그냥 당신이라서 좋은 거니까. 당신 나이 때문에 힘들다고 느껴 본 적도 없어요."
"난… "
"쉬이…. 솔직히 불안한 걸로 따지자면 내가 더 불안해야 해. 알아요? 당신 주위에 얼마나 쟁쟁한 사람들이 많은데. 난 아직 학
생이고 경제적인 여건도 좋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자격지심 느껴질 때도 아주 조금씩은 있어. 그치만 어떡해요. 당신이 없으
면 내가 죽을 것만 같은데."
조용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말하는 륜.
"만약에 결혼하기 위해 선을 봐야한다면 어떡할 거냐고 했죠? 왜 선을 봐. 당신은 나랑 결혼할 건데."
"난…"
"만약에 다른 남자 만나기라도 했다 봐."
빠르게 말한 륜. 무언가 엄포를 놓으려 했던 륜의 입이 멈추자 이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고 륜은 그런 이원에게 키스를 해
버린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한 이원이지만 익숙한 그의 키스에 반응하는 자신을 느낀다. 이내 '촉' 하고 떨어진 그의 입술.
그는 이원의 양 어깨를 강하게 잡고 있다.
"그 남자 앞에서 이렇게 키스 한 뒤 동네 떠나가라 소리 지를 거야."
"뭐… 라고…?"
방금 전의 진한 키스로 인해 얼굴이 조금 달아 오른 이원.
"당신 유부녀라고."
"뭐어? 풉."
"어어? 웃어요?"
무언가 대단한 선전포고가 나올 줄 알았는데… 자신은 웃겨 죽겠는데 아직도 심통 난 표정으로 심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륜
때문에 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웃느라 맺힌 눈물을 쓰윽 닦고 륜을 바라보는 이원. 그는 아직도 심각한
표정이다.
"화… 났어?"
"당신만 원한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은 거 알아요?"
"응?"
웃음이 뚝 멈춘다.
"당신과 같은 침대에 누워 같은 꿈을 꾸고, 하루 종일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 매일 아침 모닝 키스로 당신을 깨워주고 싶고. 당
신과 날 닮은 아이를 보며 웃고 싶어. 이 집에서 다시 나갈 때면 얼마나 발이 안 떨어지는 줄 알아요? 당신 이렇게 옆에 있을 때
마다 나 얼마나 긴장 하는 줄 모르죠?"
"왜…?"
부드럽게 자신의 머리를 쓰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길에 자신을 맡긴 채로 있던 이원은 륜의 물음에 그를 바라본
다.
"나 정말 부처의 반열에 들게 생겼다니까."
"?"
"이 어리석은 여자야!"
느닷없이 '확' 하고 잡아당겨진 자신의 코. 이원은 코를 감싸고 륜을 밉지 않게 노려본다.
"나도 피 끓는 이십대라고요. 이렇게 예쁜 당신 두고 가만히 있는 게 쉬운 줄 알아요?"
확 달아오르는 얼굴. 이 여자는 늘 반응이 빠르다. 그래서 재미있다. 벌써 바짝 긴장해 버렸다.
"나도 이 참을성이 언제까지 갈 진 몰라요."
"!"
두 눈이 동그랗게 커 져 버린 그녀.
"지금까지는 잘 참았는데…"
장난에 발동이 걸려버렸다. 륜이 음흉하게 눈을 치켜뜨고 이원에게 들이밀자 이원은 슬금슬금 뒤로 가 보려 하지만 뒤의 소파
팔걸이에 막혀 버렸다.
"우리 이렇게 된 거 오늘 밤 한 번 뜨겁게 불 태워… 으악!"
순간 별이 보인다. 이원이 한쪽에 있던 쿠션을 집어 들어 냅다 그의 머리를 강타한 것인데, 결단코 이원은 그렇게 세게 때리려
는 의도는 없었다.
"괜찮아?"
소파에서 일어났던 이원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여버린 그를 보려하지만 그는 얼굴을 들어보이지 않는다.
"륜아…"
"하아, 정말 당신은… 장난과 진담도 구분 못해요? 무슨 여자가 그래?"
"그, 그건… 네가 너무 진지하게 나왔으니까 그렇지!"
그의 목이 벌겋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으면…. 하긴, 목이 반대편으로 확 꺾였으니까. 양 허리에 손을 대고 씩씩 대는 그녀. 륜
은 헛웃음이 나온다.
"내 참. 걱정마요. 당신 결혼 전까지는 죽어도 안 건드릴게. 어디 무서워서 건들겠어요? 진짜 목 꺾여 죽을거야."
"난 뭐…"
"됐어요. 말 하지 마. 나 갈래."
소파에서 일어나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맨 륜은 현관으로 나와 운동화를 신고 이원은 벌써 가는 륜이 아쉽기만 하다.
"벌써 가게?"
"네, 벌써 가려구요. 당신 무서워서 못 있겠어."
"그건 네가 너무 장난을… 치니까…"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두 사람. 당당하게 말 하려 했는데, 홱 하고 자신을 매섭게 보는 그의 눈빛에 압도당해 마지
막 말은 흐지부지 하게 되고 말았다.
"왜, 왜 그래, 또…."
"약속해요."
"응?"
"나도 당신 불안하지 않도록 노력할테니까, 당신도 불안해하지 마요. 그리고 하나 더."
'스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륜이 내려가는 버튼을 누른 채로 엘리베이터를 멈춰세운다.
"당신, 허니문 베이비는 나와 만드는 거야. 잘 자요."
'촉!'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륜의 입술. 륜은 엘리베이터에 탄 뒤 닫히는 문에서 손을 흔들고 있고 이원은 얼굴이 아
주아주 빠알갛게 달아올라있다. 정수리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다. 어쩜 저런 소릴 아무렇지 않게… 그렇지만 웃음이 가시지 않
는 건 왜 일까? 집으로 들어 온 이원은 침대위에 벌러덩 누워 그가 남기고 간 의미심장한(?) 말을 곱씹어보며 또 다시 삐죽삐죽
새어나오는 웃음과 뜨거워지는 얼굴을 식히느라 정신이 없다.
042
며칠이 지났다. 모처럼의 토요 휴무일. 오늘은 륜과 이원이 당일치기로 바다를 보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륜
의 연구실에 갑자기 일이 생겨 이원을 만났다가 연구실로 바로 온 륜이었다.
"하아… 이건 뭐."
"왜. 오늘 맘 먹고 데이트 하려 했는데, 도와주지 않지?"
"이원씨는 기차 표 환불하러 갔어요, 형."
륜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선배에게 말하자 선배는 입에 담배를 문 채 고대로 '아, 예예.' 할 뿐이다. 아침에 이원을 만났는데, 교수
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구보고서 제출 날짜를 잘못알고 있었다면서. 미안하다고. 아니, 그렇게 떵떵거리며 큰 소리를 치시더니 한
달 앞이란다. 급기야 아침부터 연구소에 나온 그들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연구소에서 나오지 못했다.
"후우… 나머지는 내일 교수님 아침에 올라오신다니까 교수님 나오시면 해야겠지."
"네. 그러니까요. 형, 수고하셨어요."
"그래. 난 뒷정리 하고 나갈테니까. 넌 어서 애인한테나 가 봐. 애인 무지 삐졌겠다."
"그러니까요. 얼른 가야죠."
륜은 벗어두었던 외투를 집어 들고 핸드폰을 열어 이원의 단축번호를 누르며 밖으로 나왔다.
[응. 륜아.]
"나 이제 끝났어요."
[피곤하겠다.]
"어디에요? 집? 내가 갈까?"
[아니. 나 밖에 나와있는데… 내가 너네 학교로 갈까?]
"어딘데?"
[나 지하철 역. 금방 갈텐데. 한 삼십분 쯤이면.]
륜은 핸드폰 바깥화면에 있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그렇게 하자고 한다. 그러고보면, 그녀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 학교까지
오는 것도 처음이긴 하다. 온 김에 연구실도 보여주고 선배도 만나고 가라고 해야겠다. 륜이 전화를 끊고 어디론가로 전화를 건다.
그의 선배다.
"아! 형!"
수신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저기 저쪽에서 나타나는 선배.
"뭐야. 애인 만나러 안 가?"
"아… 이쪽으로 온대요. 형 이원씨 보고 갈래요?"
"내가? 에이, 됐다. 담에. 나 지금 몰골이 이런데 뭘 보고 가라냐?"
하긴, 완벽한 추리닝 차림. 오늘 선배는 머리도 감지 못하고 아침에 전화를 받고 바로 튀어나왔다고 했다.
"옛다. 열쇠. 내일 늦지 말고 와."
"옛설!"
선배는 륜에게 열쇠를 건네고 길을 건너 가 버렸다. 한적한 토요일 저녁. 역시 캠퍼스엔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이원을 기다리는 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이다. 어떻게든 풀어줘야 할텐데… 어쩐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륜은 또 다
시 핸드폰을 들곤 어디론가로 통화하기 시작한다. 온갖 아양을 다 피워가면서.
"오케이! 그럼 일곱시 반까지 들어갈게요. 실력발휘 부탁해요!"
그리고 기분좋게 전화를 끊는데…
"륜 오빠."
"?! 아! 주연아."
"누구 기다리나봐요? 저 좀 앉아도 돼죠?"
주연이다. 주연은 륜의 옆에 앉았다.
"잘 지내셨어요? 요즘은 담배 안 피우나 봐요?"
"어. 끊었어."
"아아… 하긴. 몸에도 별로 안 좋으니까요."
"그렇지."
말이 없어진 두 사람. 안 그래도 주연을 한 번 만나긴 해야겠다 싶었는데…
"잘, 지냈니?"
"네. 그냥 그렇죠 뭐. 오빠는요?"
"나도 그럭저럭."
"오빠 여자 생겼단 소문 돌던데. 예쁘다던데."
"아. 그래?"
"네. 소문 파다해요."
다시 대화가 끊겼다.
"난 안되고 그 여자는 되나 봐요? 그 여자 누군지 참 궁금하다. 어떤 여자인지."
"주연아…."
"오빠 참 나쁜 거 알아요?"
"그 여자, 내가 말했… "
저 쪽에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이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주연도 륜의 눈을 따라가 이원을 봤다.
"저 여자예요?"
타이밍. 주연의 질문과 동시에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 이원이 잠깐 멈칫하다가 일어선 륜을 보고선 시선을 피하고 신호등을 건넌
다. 륜은 그런 이원을 바라보다가 옆의 주연을 봤다. 끝까지 이원을 쳐다보는 주연.
"그래. 저 여자야. 내가 기다린다는 여자."
"!"
"다시 만났어. 우리."
"오… 오빠."
이원은 이쪽으로 오지 않고 그들의 눈에 닿지 않는 곳에 섰다.
"너한텐 미안하단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근데, 나한텐 운명이야 저 여자. 간다."
륜은 벤치에 그대로 주연을 두고 나왔다. 이원을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리는 륜. 그런 륜을 그 바로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이원이
작게 웃음을 터쳤다.
"오늘 참 너, 나 서운하게 많이 한다."
"!"
륜이 돌아 본 그 곳에는 정사각형으로 깎아 만든, 벤치 대신 놓아 둔 돌에 앉은 이원이 웃고 있다.
"일어나요. 차가워."
륜이 손을 내밀어 보지만
"너 미워."
'탁' 하고 이원이 그 손을 쳐 버렸다.
"미안해요."
"정말 밉다."
"… 화… 났어요?"
"진짜진짜 미워 죽겠다 정말."
하곤 일어나더니 그대로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의 횡단보도를 건너버린 이원. 그리고 그런 이원의 손을 잡아 챈 륜이다.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화 풀어요. 응?"
'응?' 하며 예쁘게 얼굴을 내미는 그인데,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을까. 곱게 휘어지는 눈매하며.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다. 어린
꼬맹이한테 질투심 느끼는 내가 죄인이지. 이원은 자신의 한심함에 다시 웃어버렸다.
"어? 어? 웃었다! 웃었다! 화 풀린거죠? 그쵸?" "내가 언제 웃었어?"
"방금! 방금 웃었잖아."
"내가? 나 안 웃었는데?"
시침을 뚝 떼보는 이원. 그러나…
"이래도? 이래도?"
"악! 간지러워! 그만 해! 그만. 알았어, 알았어. 항복! 항복! 항복할게!"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찔러대는 륜의 간지럼 통에 결국 항복을 외쳐버린 이원이다. 그리고 뒤에서 그런 륜과 이원의 예쁜 모습을
바라보며 힘아리 없이 고개를 돌려버린 주연이었다.
"너 정말 나빴어."
"큭큭. 화 내지 마요. 나 그럴 때마다 정말 덜컥덜컥 하는 거 알아요?"
"그래서 잘했다 이거야?"
"그건 또 아니지만요. 어쨌든 아까 그 여자앤 그냥 학과 후배에요."
지하철에 탄 이원과 륜. 역시 이 시간의 이호선이란… 사람들에 밀리지만 이원과 륜은 그들 덕택(?)에 찰싹 붙어있다.
"많이 피곤해 보여. 까칠까칠 해."
이원이 손을 뻗어 륜의 거뭇거뭇한 턱수염을 쓸어본다. 낮게 '쿡쿡' 하고 웃는 륜. 이원은 그 손을 그대로 륜의 머리로 가져가 본
다. 남자의 머릿결인데도 참 부드럽다.
"머리도 많이 길었어."
"음. 안그래도 자르려구요. 언제 같이 미용실 가서 앉아있을까?"
"그럴까? 나 안그래도 머리 자르려고…"
"왜 또 잘라?"
자른다는 말에 미간을 확 좁히는 륜. 자신은 지금 머리 긴 모습이 너무너무 맘에 드니 그냥 가만히 두란다. 웨이브를 하라나 뭐라
나?
"근데 우리 지금 어디가는 거야?"
이원이 화제를 바꿨다. 머리를 꼭 잘라야지.
"음. 글세요. 어디를 가고있을까요?"
"어디 가는 건데?"
"앗. 내려요. 여기서 내려야 해."
얼떨결에 같이 내려버린 이원. 사람들에 휩쓸리다시피해서 내려버렸다.
"우리 어디가는건데?"
"우리집."
"응?"
분명히 뭐라 들은 것 같은데. '얘가 지금 뭐라는거야?' 이원이 다시 한번 반문을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다.
"우리집. 우리집이요."
"너네집?"
"응. 우리집."
이원은 순간 휘청 함을 느껴야만 했다.
043
그의 뒤에 서서 들어간 그의 집. 이원은 륜의 부모님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동네 슈퍼마켓에서 산 음료수를 드렸다. 지하철에
서 내려 여기까지 오는 데는 도보로 10분정보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임에도 륜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삼십분에 걸려서 왔다. 도망갈
기회만 엿 봤던 이원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질질 끌고 집에 대동 해 온 륜이었다.
"어떻게 입에 맞는 지 모르겠네. 맛 괜찮아요?"
"네. 정말 맛있어요."
"맛있다니 다행이네!"
언젠가, 륜으로부터 그의 아버지가 호텔 주방장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이원은 이 집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차려진 식탁을 보고서
는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옛날 임금님 수랏상에나 올라올 만한 한식 요리들이, 그녀가 보도 듣도 못한 그러한 맛깔나는
음식들이 잔뜩,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져있던 것이었다.
"륜이 어찌나 어찌나 예쁘다고 하던지. 우리가 너무 보고 싶더라니까요? 우린 아직도 얼굴 기억하고 있어요. 언제적이야 벌써? 십
년도 더 된 이야기지? 그 때 은파피아노 연주회 때 말이에요."
"아아… "
"저기 저 쪽 방이 륜이 방인데, 가장 크게 걸려진 사진이 바로 둘이 같이 피아노 치고 있는 사진이라구요."
륜의 어머니는 참 아름다우셨다. 그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의 위로는 결혼한 형이 있다고 하는데, 그의
형이 그의 아버지와 닮았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배불리 밥을 먹고 륜의 손에 이끌려 들어 간 륜의 방에는 커다랗게 그와 자신
의, 십년도 더 된, 꼬마적의 사진이 떡 하니 걸려있다.
"지금 보려니까 되게 쑥스럽죠? 같이 보려니까 더 그러네. 참, 나 저 때 기억나요?"
"아니. 기억 안 나."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사진 속의 륜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원이었다. 아쉽게도 피아노 치고 있는 뒷모습만 찍혀 그 때의 자신과
륜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 전혀 알아 볼 수가 없다.
"짠, 이거 우리 가족 말곤 아무한테도 보여 준 적 없는 건데."
"뭔데?"
"나 어릴 적 사진."
륜의 방에 그와 마주하고 이원은 앉았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것들. 륜의 아기적 사진부터 일곱 살, 여덟살. 어렸을 때의 모습. 지
금과 똑같은 모습에 이원은 웃기도 하고 감탄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넘기다가…
"어?"
"같이 찍은 거예요. 학원에서. 이 것도 기억 안나요?"
"글세… "
이원과 륜이 '은파피아노' 라는 명패가 걸린 학원 입구 앞에서 찍은 사진. 이원은 헛 곳을 바라보고 있고 륜은 이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보다 키가 큰 이원을 바라보는 사진이다.
"실망인데요? 이것도 기억 안나면?"
"정말 기억 안 나. 이런 사진이 있었어?"
"네. 있었어요. 원장선생님이 친히 찍어준 것이라구요. 진짜 나빴다. 난 우리 옛날 일도 다 기억하고있는데, 당신은 다 까먹고."
륜의 퉁퉁거리는 말에 이원은 미안하다는 듯 웃어보이며 그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일텐데… 륜은 계속해서 그 사진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원의 볼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이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나 근데 정말 기억 안나."
"괜찮아요. 지금부터 기억하면 돼지. 이제부턴 하나도 까먹지 말고."
륜은 예쁘게 웃곤 이원의 콧등에 다시 입술을 살짝 대었다 뗀 뒤, 이원을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주방에서는 륜의 어머니께선 과일
을 깎고 있기에 이원이 바로 그 쪽으로 가서 과도를 집어 자신도 깎고, 륜의 어머니는 그런 이원을 말리지 않았다.
"그 때 모습 그대로 인 거 알아요?"
"네? 아… 전 사실 기억이 잘 안나서…"
"초등학교 3학년 때면 기억이 안 날 만도 하지. 우리 륜이가 얼굴은 나 닮았어두 성격이 남편 닮아서 별의 별 걸 다 기억해요."
그의 어머니가 이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곤 장기를 두고 있는 부자의 앞으로 과일이 대동되었다. 도덕책에 나올 법 한,
전형적인, 따뜻한 가정. 륜이 얼마나 가정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알 법 하다.
"그나저나 우리 륜이는 대학교 졸업하고 바로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던데, 이원이 생각은 어때?"
"네?!"
이원은 뜬금없는 륜의 아버지 말에 놀란 눈으로 륜을 바라보지만, 륜은 빙글 웃을 뿐이다.
"륜이 대학교 졸업이면 내 후년인데. 우리 생각엔 이원이가 같은 생각이라면, 두 사람 혼인신고부터 먼저 했으면 하는데."
"에에? 혼인 신고요?"
"아직 륜이와는 얘기가 안됐나 봐?"
"아, 그게… "
당췌 이게 모두 무슨 소리인지. 이원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자 륜이 오물거리던
사과를 목으로 넘기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원씨도 저와 같은 생각이에요. 아버지."
그러나 되려 일을 크게 벌였다. 여기에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이원은 가시방석 같은 곳에서 앉아있다가 겨우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거 가져가서 먹어요. 륜이가 그러는데, 혼자 산다며. 혼자 살 수록 잘 챙겨먹어야죠."
"아. 네, 어머님. 감사합니다."
"그래요, 잘 가요. 그리고 또 놀러와요."
이원은 륜의 어머님이 싸 주신 반찬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륜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원은 나오자 마자 대뜸 륜에게 인상을 썼다.
"화 났어요?"
"이런 건 나와 상의 한 번은 해 봤어야지. 이렇게 네 멋대로… 아아, 모르겠다."
화를 내려던 이원은 륜이 자신의 오른손을 깍지 낀 바람에 화가 가라앉았다. 그들은 동네 놀이터의 그네를 하나씩 맡아 앉았다. 이
원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모래바닥에 발을 붙인 채, 그저 가만히 있다.
"내가 못미더워요?"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그럼 왜요?"
"왜 라니? 너 지금 그 질문이 나와? 결혼은 너 혼자 할거니? 왜 그렇게 네 멋대로 정해버렸는데?"
륜은 약간 올라간 이원의 목소리에도 따스하게 이원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없다. 이원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사실 화가 나는 건 자신이었다. 아직까지 이원은 륜의 존재에 대해 그녀의 가족에게 말 한 적이 없었다.
"그럼 지금 결정해요, 우리."
"뭐?"
"언제 결혼할까요? 난 내일 당장이라도 가서 할 수 있는데. 아, 물론 식은 못 올리겠지만."
"하 륜!"
륜은 벌떡 일어나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하던 말이 쏙 들어가버렸다. 당황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륜의 얼굴을 보고서야
이원이 눈을 감으며 제 마음을 정돈시킨다.
"하아… 소리질러서 미안. 근데 오늘은 얘기가 안 될 것 같아. 갈게."
그러나 이내 붙잡히는 손목. 륜은 그 어느 때보다 낮은 목소리로 이원을 붙잡았다.
"도망가지 마요."
"난… "
"도망가지 말라구요. 나 그리고 그렇게 생각없는 놈 아니예요. 몰라요? 알잖아요. 나 누구보다도 당신 생각하는 마음 크다는 거."
이원은 그의 낮고도 빠른 말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당신 내가 이러지 않음 언제까지나 도망갈 거잖아. 안 그래요?"
이원은 바보처럼 그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안 그런다고 말 하고 싶은데, 륜의 말이 틀린 것이 없어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
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 불안 하니? 내가 못 미더워? 그렇게라도 안 하면 내가 도망이라도 칠 것 같아? 천천히 해도…"
"불안해하는 것도, 용기가 없는 것도 당신이잖아. 당신은 천천히가 아니라 못하고 있는 거잖아."
이원은 륜의 말에, 륜의 강경한 눈빛에 잡혔던 손목을 뿌리치고 돌아서 무조건 뛰었다. 자신의 용기없음을 알아버린 그를 마주 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이내 골목길에서 다시 손목이 잡혀버렸다.
"잠깐만! 잠깐만 그대로 있어줘."
륜은 떨리는 이원의 목소리에 이원의 손목을 잡은 채, 이원의 등을 보고 섰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흔들리고 있다. 륜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이원을 감싸려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로 인해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어."
"…"
"네 말이 전부 다 맞아서. 널 어떻게 봐야 할 지 모르겠어."
"…"
"우리… 이제 그만하자."
044
륜은 잡고 있던 이원의 손목을 스르르 풀었다. 아니, 그녀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시, 한 번 말 해봐요."
"…"
이원은 자신 앞에 선 그를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눈물을 바닥에 흘렸다. 도망치는 것이다. 죽어도 인정하고 싶
지 않지만, 그래. 도망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 해 보라구! 나 못 들었으니까."
륜은 이원의 어깨를 양 손으로 붙들고 소리쳤다. 이원의 어깨를 꽉 진 륜의 두 손이 하얗게 질려 떨린다.
"… 나 힘들어. 그러니까… "
"그러니까 뭐요."
"… 우리 그만… "
"… 젠장."
이원의 말에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낸 륜. 낮게 욕을 읊조렸다. 뭔가가 상당히 어긋나 버렸다. 둘 사이에는 정적만 흐른다. 이
젠 이원의 눈에서도 눈물이 마른 모양인지,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륜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있는 이원을 가만히 보
았다. 대체 왜…. 바보같은 여자. 아직도 이 여자는 여린 아이와 같다. 계속해서 신뢰를 보여주어야 하는.
"… 후회 안 할 자신있어요?"
"…"
"대답 해요.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구."
"…"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이원을 보며 륜은 이원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 한 손으로 이원의 턱을 잡아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엉
망인 얼굴. 륜은 엄지로 그녀의 눈물 자욱을 지워준다.
"휴우… 사랑 할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그만 둘 용기도 없고. 이렇게 겁쟁이인 당신이 난 뭐가 좋다고 매달려 있는 건지."
이원은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와 자신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그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사랑해요. 사랑해."
륜은 이원을 꽉 껴 안았다.
"미칠만큼 사랑해. 나 당신 없음 죽어. 나 당신과 죽어도 못 헤어져. 말이 되는 소릴 해. 머리 나빠서 또 까먹었지? 당신 이젠 절대
안 놔 준다고 했잖아요."
마치, 자장가처럼 들리는 낮으면서도 깊은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이원은 그의 품 안에서 그쳤던 눈물을 또 흘리고야 만다.
"또 운다. 거봐, 당신도 나 사랑하면서. 왜 그런 말을 해요?"
"… 숨 막혀."
"가만히 있어요. 얼굴 아주 괴물이라 못 봐주겠어. 조금만 이러고 있어요. 당신 눈물 다 그칠 때까지. 울려서 미안해. 당신 맘 아프
게 해서 미안해요.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따뜻함. 그리고 평온함. 이원은 륜이 자신을 안고 한걸음 한걸음 걸으며 그들을 비취는 가로등의 동그란 원 안에서의 움직임이 너
무도 잔잔해서 아무 말 없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오롯이 가슴에 새기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륜이 품 안에서 그녀를 풀어주었다.
"당신 졸립지. 집에 가요. 데려다 줄게."
이원의 눈은 정말이지 잠이 가득하다. 륜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어보지만 이원은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가만히 있다.
"집에 안 갈 거예요? 여기 계속 이러고 있을거야?"
"… 사랑해."
"!"
"사랑해. 사랑해, 륜아. 사랑해. 사랑…"
처음으로 들려주는 그녀의 사랑고백. 륜은 이원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어버렸다. 이원 역시 그의 키스를 달게 받았다. 달콤한
사랑고백. 뜨거운 용기. 단단한 믿음. 새초롬한 하얀 손톱달이 걸린 차가운 밤의 뜨거운 키스.
045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주로 청바지에 셔츠를 즐겨 입고 다니는 륜이지만, 오늘만큼은 정장을 멋들어지게 빼 입었다. 옷
걸이가 워낙 좋은 륜이라, 흰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멋진 그가 정장을 입었으니… 길을 가는 내내, 뭇 여성들의 시선이 한번씩 륜을
거치곤 한다. 륜은 익숙하게 팔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오!! 브라보!!! 우리 륜, 금희환향 하는데! 수고했어!"
"수고했다, 임마!"
"수고했어요 선배!"
정장을 쫘악 빼 입은 그가 연구실로 들어가자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들어왔던 여 선배도 륜의
어깨를 툭툭쳤다. 방금 전, 그와 함께 그들의 연구 실적 중간 발표회에 갔다오는 길이었다.
"아니 그렇게 떨린다고 하더니, 실수 하나 없이 그렇게 잘 하는 거 있죠? 앞으로 우리 프로포즈, 발표, 싹 다 하연구원 시켜야겠어!"
"아, 선배! 너무 그러지 마요!"
여선배의 말에 륜이 멎적은 듯 웃자 여선배는 겸손하기도 겸손하다면서 놀려댔고 륜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웃었다.
"하 연구원 오늘 한 건했는데! 좋아, 오늘은 내가 쏜다!"
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인 김부장의 경쾌한 말. 모두들 박수치고 난리가 나야하는데, 연구소의 분위기는 싸- 해졌다.
"아니, 이거 반응이 왜 이래? 내가 쏜다니까?! 내가 쏜대도 그래?"
"아, 진짜. 부장님 산통 깨는 데는 뭐 있으시다니까. 오늘 륜선배님, 그 날이잖아요!"
"그날?! 아아, 맞다! 그날이었지?! 내가 깜박했네."
"하여튼 부장님 나이 드신 거 너무 티 내는 거 아니에요? 어제 분명히 륜 선배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륜선배님이 다음에 쏘신
다고 하셨잖아요."
연구실의 막내의 말에 부장은 '하하하- 그랬지?' 라며 웃어버렸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아니야, 죄송하긴.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
"신경써 주셔서 감사해요."
륜은 연구실 식구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빠르게 나왔다. 그녀와의 약속시간이 가까워져 온다. 륜은 바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
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한 호텔의 프랑스 레스토랑. 륜은 미리 예약해 둔 예약석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
가 걸쳐져 있다. 테이블 위에는 그가 미리 준비한 조그마한 선물이 들어있는 종이가방을 올려두고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일
찍 왔군. 그는 테이블을 길다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간다.
"저기…"
"네?"
얼마쯤 흘렀을까. 륜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옆을 바라보면 한 여성이 싱긋 웃고 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그러고 여자는 륜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륜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아하게 틀어올린 머리와, 여름밤에 잘 어울리는 원피스는
그녀의 외모를 돋보이게 한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륜은 그녀가 건네는 인사에 그도 인사로 답했다. 그러나 그는 왜 그녀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지 모르겠다. 어서 일어나 주기만을
바랄 뿐.
"혼자 오셨나봐요."
"네? 아, 오는 사람 있습니다."
그녀는 이 곳에 들어왔다가 홀로 앉아있는 륜이 너무도 멋있어 보여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멀리서 봤을 때도 멋있는 그가 이렇게
가까이 보니 참 멋있다. 얼추 스물일곱쯤 되어 보이는데… 정장을 입고 있다. 내면에서부터 흐르는 귀티. 자신의 직감이 맞다면,
눈 앞의 멋들어진 그는 어느 재벌집 3세쯤 될 것이다.
"이 근처 회사 다니시나봐요."
"아니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요."
여자는 생긋하고 웃었다.
"이민희예요."
그리고 여자는 손을 내밀었다. 륜이 그 손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까닥 해 보이면서 왜 안잡느냐는 제스춰를
보낸다.
"아, 죄송한데, 이를 어쩌죠. 유부남이라서."
"네에?!"
여자는 륜이 왼쪽 손등을 들어보이며 반짝이는 반지를 보여주자 거의 기겁을 한다. 하지만 이내 다시 우아한 모습을 되찾았다.
"어머, 장난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예요? 그냥 일반 커플링 같이 보이는데…."
"아이도 있는데요?"
"네에?! 장난이 심하시네요. 신사는 그런 장난 하는 게 아닌데."
여자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또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륜은 이 앞에 있는 여자가 어서 빨리 일어나기만을 바랄 뿐이
다. 이러다가 그의 아내가 보기라도 한다면…
"누구야? 자기 아는 사람이야?"
그러나, 타이밍도 참 좋지. 륜의 그녀가 나타났다. 우아한 여자는 임신한, 륜 옆의 그 여자를 보며 뜨악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정말, 정말 유부남이야?
"제 아내에요. 오늘이 두번째 맞는 결혼기념일이구요."
"어머, 아아… 축하드려요. 그럼 즐거운 시간…"
그리고 여자는 황급히 사라졌다.
"똑바로 말해. 누구였어? 아까 그 여자?"
"아니, 그게…"
"자기 정말 그럴래? 아우 진짜 우리 결혼반지 다이아로 당장 바꿔야겠어. 우리 지금 결혼한 지 2년 째인데…"
아니, 이게 왠 말이람? 이원은 결혼 2년차임에도 이렇게 뭇 여성들의 활활 타오르는 애정을 받는 그 때문에 늘 골머리를 썩히곤 했
다. 어떤 날에는 자신의 회사 앞까지 찾아와 정말 그가 남편이 맞느냐며, 남동생이거나 아니면 그냥 만나는 애인이 아니느냐 묻기
도 했을 정도이니….
"그래서 우리 반지 말이야."
륜은 심통이 가득난 이원의 앞에 준비했던 반지를 꺼내 보였다.
"당신 맘에 들진 모르겠는데, 맘에 들어요?"
륜은 반지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보여주곤, 이원의 왼쪽 약지에 끼워진 그들의 무난한 결혼 반지를 빼 낸 뒤, 제 왼쪽 약지에 끼워
져있는 것과 같은 반지를 이원의 손에 끼워주었다. 륜이 이원에게 반지를 다 끼워주고 고개를 들어 본 이원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
렁그렁 맺혀있다.
"정말이지. 결혼도 제 멋대로, 반지도 제 멋대로."
이원은 웃으며 륜에게 입을 맞췄다. 그들의 두 번째 결혼기념일.
The Story
END.
written by Jeongjuel
Copyrightⓒ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