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목장
남효선
말래서 왔다는 순례할미 펼쳐놓은
도토리묵, 나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순례할미 쪼그리고 앉은 치마폭 가지런히 펼쳐진
나이롱 보푸재 겨울 해가 그림자를 깔아 놓는다
계란 노른자만치로 노오랗다
도토리묵 한 양푼이, 잘 말린 시래기 세 묶음, 차좁쌀 세 되
마구 팔아 남은 돈 이만 원
이천 원짜리 국시 한 그릇 점심으로 말고
손주 놈 골덴바지 칠천 원 주고 애지중지
나이롱 보푸재에 말아 쥐었다.
설이 낼모렌데, 이태 전 집 나간 며눌아는 영 소식이 없다
걸어서 세 시간 걸리는 울진읍장 드나든 지
올해로 예순 해, 시집와서 이태째 되던 해에
시어머니 뒤 세우고 드나들던 울진읍 장터
나락 거둬 설 대목 읍장 날이면 시어미 몰래
하얀 입쌀 두 됫박 팔아
맏아들 하얀 운동화도 신기고 지아비
봉초꾸러미도 챙겼다
살아갈수록 좋은 날은 안 생기고
닷새 장마다 낯익힌 어물전 끝냄이 할미
팔다 남은 물가자미 세 마리 건넨다
순례할미, 말없이 물가자미 받아들고
나생이 한 단 들이민다
나이롱 보푸재에 계란만큼 남아 있던 겨울 해는
저만치 삿갓봉 목재를 기웃거린다
손주 놈 골덴바지 말아 쥔
나이롱 보푸재, 순례할미 손등 검버섯 새로
한 줄 희멀건 힘줄, 숨 가쁘다
22번 중매인
칼바람 부는 포구, 새벽과 함께 서 온 지 서른 해째다
자식들 공부는 많이 못시켰지만 삼남매 나이 채워 혼사도 치렀다
남 서럽지 말라고 아파트 한 칸씩도 장만해주었다
악착같이 돈도 벌었다
뱃일 나간 지아비 바다에 묻은 지 서른 해, 몸빼바람으로
사내들 틈에 끼여 악바리 별명도 싫지 않았다
죽변 바다처럼 펄떡거리는 물 좋은 생선만 오르면
남보다 두 배나 높게 입찰했다
물건이 실하니 대처 고기장사들 사이 인기가 좋았다
지난해는 막내 딸년이 몸도 풀어 외손주도 생겼다
지 아부지 제삿날 자식놈들 빙 둘러앉아 음복 잔 나누더니
뜬금없이 환갑잔치 지내야겠단다
쉰소리 하지 말라며 사래질 쳐도 자식놈들
기어코 지 어미 환갑잔치 지내야겠단다
지 애비 먼저 보내놓고 무슨 환갑잔치냐고 고개를 저어도
한사코 지내야겠단다
갓 돌 지난 외손주 껴안고 막내딸년 눈 가득 눈물 흘리며
아부지 없으면 어무이는 그 흔한 환갑도 못 지내냐고
기어코 눈물 그렁그렁 쏟는다
서른 해 가슴 닫고 산 세월, 울컥
파도가 뭍으로 오른다
서설(瑞雪)
경칩에 눈이 내렸다. 예고도 없이 내린, 보기 드문 함박눈이다. 밀려오는 봄기운을 버팅기듯 온 산천을 눈꽃으로 매달았다. 한풀한풀 벗어 던지며 마침내 은박지처럼 눈부신 속치마로 겨울을 덮고 봄을 받는다.
하얗게 달아오른 산천이 속살을 열고 생명수를 잦아 올리자, 개울이 풀리고 금세 개불알꽃, 노루귀, 변산바람꽃이 솜털을 나풀거리며 꽃을 피운다.
뭍과 함께 바다도 열렸다. 서설(瑞雪)이 억센 바다의 등짝을 두들기자, 몸을 뒤채이며 바다는 한꺼번에 생명을 토해낸다.
진저리니, 토박이니, 말치니, 미역이니, 송곳나물이니, 국수말 따위의 바다나물이, 바다 밑바닥 혹은 갯바위에 단단히 뿌리박고 길게 목을 뽑아 올려 바다를 헤집는다.
음력 이월 초하루, 갯가 아낙들은 바람과 종자 신 영등할망이를 부르며 소지를 올렸다. 한 보름 내내 바다를 달구었다. 바다는 비릿한 봄내음 풀풀 날리는 여자들 판이다.
자하(紫霞) 동천(洞天)을 찾다
구불구불 부처 곁으로 오르는 길
노을이 걸렸다
천축산을 에돌아 이무기의 길을 흐르는
빛내(光川) 속살이 붉다
안일왕산에서 샘을 만들어
불영의 속살로 들어와
연꽃 한 무리 피웠다
내가 좇은 길, 네가 따른 길
빛내가 이룬 용소에서
소용돌이로 우주를 이뤘구나
물안개 옷깃 털며
외길 뒷걸음치면
붉은 노을 한 다발 꽃잎처럼
물 위로 연꽃 위로
붉은 물안개 피워 올리며
장삼자락 너머
동천은
마침내 마을로 닿는구나
찬(讚) 몽유도원도
안평의 흰 도포자락이 바람에 날린다
팽년이 바투 어깨를 나란히 걷는다
절벽으로 이어지는 걸음이 가볍다
솔향이 바람을 흐트린다
가슴속이 솔내음으로 가득찬다
안평이 휘청, 몸이 기운다
팽년이 얼른 손을 뻗친다
두어마장 쯤 뒤로 숙주와 최항이
너풀너풀 안평을 따른다
수백 구비 조도잔(鳥道殘)을 돌아
외줄기 샘을 만난다
엎디어 단숨에 물을 마신다
흐트러진 상투 끝이 물빛에 어른거린다
복사꽃 몇 잎 물길을 흐른다
문득 고개를 드니 복사꽃비가 하늘을 수놓는다
자하(紫霞), 복사꽃잎이 붉은 안개를 피워 올린다
아이들 복사꽃비를 쫓는다
아비들 잠뱅이 걷고 밭을 간다
어미들이 뜯는 나물 내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마득하다
뒤돌아보니 울울첩첩
조정은 아마득하다
숙주와 최항이 손을 휘저으며
헐떡헐떡 쫓아오다가
안개 너머로 되돌아선다
훅, 바람결에 비린내 그득하다
되돌아 나오는 길, 새발자국 좇아
천길 낭떠러지로 고꾸라진다
몽상이다 줄줄 식은땀이 흐르는
적삼 깃에
복사꽃이파리 한 점
핏빛이다
남효선
경북 울진 출생. 198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둘게삼』 등.
―『시에』2011년 봄호
첫댓글 서설을 읽다보니 춘설이 보고 싶어지네요. 지난 겨울 그렇게 춥고 눈도 많이 내렸는데도 말입니다.
시로 생명을 얻는 삶의 발소리, 울진 아름답습니다.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