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당
대구 성모당은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고,
10월 13일 축성되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남방 지역을 관할할 대구대목구가
분리 · 설치되면서 부임한 초대 감목 안세화 드망즈
(安世華, Florian Demange) 주교의 허원이 계기가 됐다.
가진 것은 하나도 없이 오직 가난만을 나눠 갖고 온 안 주교는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주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다.
안 주교가 허원을 드린 지 2년 만인 1913년 12월 4일 대구본당(계산 주교좌본당)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등의 협력으로 주교관을 완공했고,
1914년 10월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다.
그러나 계산 주교좌성당 증축은 이루어지기 어려워
성모당 건립도 자연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Hyppolyte Joseph Sacet)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렀다.
안 주교는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보인 성모님께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에 성모당을 축성했다.
“회개하라”고 하신 루르드 성모님 모셔 1918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완성된
대구 성모당은 프랑스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 가브(Gave) 강가에 있는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크기는 물론 바위 모양까지 똑같다.
교구청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좋은 곳에,
앞으로 넓은 잔디마당을 두고 북향으로 배치됐다.
붉은 벽돌 건물인데, 외부는 벽돌로, 굴 내부는 시멘트이다.
기념틀의 모양은 교황 레오 13세께서 바티칸 정원에 만들어 놓은
루르드의 성모 기념동굴을 본떴다.
내부는 암굴처럼 꾸며졌고 성모당을 바라보며 오른쪽 상단에 마리아상을 모셨다.
돌로 된 성모상은 당시 대구교구 프랑스인 사제와 한국인 사제들의 헌금으로 마련됐다.
성모당은 루르드의 성모님이 15세 소녀 베르나데트(Mary-Bernadette Soubirous)에게
18번이나 발현했던 그 모습 그대로 머리에는 흰 수건을 썼고, 청색 띠를 띠었으며,
손은 합장하고 팔에는 은알(묵주)이 드리워졌고, 벗은 양발 위에 금해당화가 피어있다.
성모당은 가장 사랑받는 열린 성지 성모당은 신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거룩한 땅일 뿐 아니라 각종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적지로
외교인들도 큰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구의 명소이다.
역대 교황사절에 대한 환영식과 교구적인 경축행사의 식장은
의례 성모당이 되어 왔었다.
1984년 5월 5일 선교 200주년 대구 행사를 위하여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직접 이 ‘루르드의 성모동굴’에서 교구 내 성직자 · 수도자들과 함께
성모님께 기도를 바치고 대화를 나누었다.
1997년 2월 18일부터 4월 16일까지 보수공사를 하여 새로 단장하였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께서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이다.
대구 성모당(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 1990년 12월 15일 지정)은
전국적으로 확산된 성모신심의 중심이다.
1973년부터 5월 성모성월이면 대구 시내 각 본당별로 교구청 성모당에서 열고 있는
‘성모의 밤’행사는 전국적으로 성모신심 운동이라는 새로운 기도양식에 불을 붙였다.
프랑스 루르드의 영적(=기적) 샘물은 특히 치유의 기적을 많이 낳기로 유명한데,
대구 성모당 역시 간절히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알려져 있다.
식민지 시절, 학병으로 끌려간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도
대구 성모당에서 아들 김수환 신학생의 생환을 간절히 기도드렸고,
김 추기경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다시 루르드의 성모님 앞에서 대구 성모당은 대개 세 가지 이유로 참배한다.
하나는 그저 성모를 공경하고 감사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의 죄로 괴로웠던 사나이, 십자가에서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천주의 성모를 공경하기 위해서 순례를 하면, 저도 모르게 성모님을 닮게 된다.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둘째는 영혼이나 육신의 은혜를 얻기 위해
성모님의 특별한 효험을 믿으며 참배하는 것이고,
셋째는 허원에 의해 미리 영혼이나 육신의 은혜를 받고,
그 허원을 채우기 위하여 참배하는 경우이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도움을 구하든, 성모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다시 루르드의 성모님 앞에서 기도드린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모님, 어두운 세상 우리가 살아갈 길이 무엇인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 이 세상에 구원을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출처 : 관덕정 순교기념관 홈페이지]
성직자묘지
1915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이셨던 드망즈(안세화) 주교님이
교구 내 프랑스 선교사들을 위한 묘지로 쓰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1911년 이래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사목활동을 하다 선종한
성직자 100여 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성유스티노신학원
1914년 10월 3일 대구에서 개교한 신학교.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교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3월 19일에 폐교되었다.
드망즈 주교의 노력으로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 등 용산 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교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의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3·1 운동이 일어나자 성 유스티노 신학생들은
3월 7일 교내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으며,
3월 9일에는 김구정(金九鼎, 이냐시오)과 서정도가 주동이 되어
미국의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독립 선언문 복사 및 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사실이 교장 신부에게 알려짐으로써 시위 계획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고,
그 결과 방학이 5월 1일로 앞당겨 실시되었다.
3·1 운동의 여파가 가라앉으면서 그 해 6월 13일
신학교 확장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 드망즈 주교는,
1920년 1월 포교성성에서 2명의 신학생을 로마로 파견하라는 지시에 따라
송강정(宋康正, 안토니오)과 전 아우구스티노를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또한 1922년 9월에는 소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예비반’을 신설하였으며,
이듬해 10월에는 달성군 성당동에 신학교 별장인 ‘성 니콜라오 별장’을 개설하여
신부와 신학생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1930년대 들어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대·소신학교의 분리라는 학제상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소신학과의 분리는 신학생들에게 일반 교양 과목을 가르침으로써
신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1928년 말 서울 신학교에서 먼저 도입하였다.
그 결과 용산의 소신학생들은 1928년 9월부터 남대문상업학교
(동성상업학교의 전신) 을조(乙組)로 편입되었고,
대구의 소신학생들은 1930년 12월 16일 드망즈 주교가 뮈델 주교와
현합 소신학교 구성을 협의함에 따라 1931년부터
혜화동의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제 양성 교육 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서울·대구·덕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 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2년 2월 16일 폐교되었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폐교의 위협 속에 있다가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고 말았다.
그 후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신학과 학생 7명은 덕원 신학교로 전학하였고,
철학과 학생들은 1945년 2월 23일 ‘경성 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가
인가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공부하였으며,
부제품을 받은 4명은 대구교구 사제 휴양소에서 최민순(崔玟順, 요한) 신부의 지도로
수업을 받다가 1945년 12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부대에 징발되었다.
관덕정순교기념관
을해박해·정해박해로
관덕정·경상감영 옥터 등에서 복자 20위 순교
1814년 조선 전역에 큰 흉년이 들었다.
문전옥답이 즐비한 마을조차도 기아를 피해가지 못했다.
게다가 수해까지 겹쳐 굶어 죽는 이들이 넘쳐났다.
청송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새노래길)도
흉년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시 이 교우촌에 드나들며 고기를 팔거나 구걸을 하던 전지수는
흉년으로 신자들의 애긍이 줄어들자 구걸에 만족하지 못하고
교우촌을 약탈할 심보로 신자들을 밀고하려는 생각을 품기에 이른다.
일설에는 그가 배교자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그는 1815년 청송현 관장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노래산에 산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는 그해 예수 부활 대축일에
노래산 교우촌에 모여든 신자들을 한꺼번에 체포하라고 부추기고는
포졸들과 함께 들이닥쳐 신자들을 모조리 붙잡는다.
이것이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이 맨 먼저 체포됐고,
진보현 머루산(현 경북 봉화군 석보면 포산길),
영양 곧은정(현 경북 영양군 수비면 낙동정맥로와 봉화군 재산면 새골길 경계),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새골길) 교우촌 신자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갔다.
무려 71명으로, 이 중 33명이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이로써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충청도 내포에서 흘러든 신자들이 형성한
경북 동북부 산간지역 교우촌이 붕괴됐다.
이어 1827년 정해박해로
경북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문안길) 교우촌 등지에서
31명이 체포됐다. 이 중 25명이 석방됐고, 나머지 6명은 순교했다.
연이은 두 박해의 순교터가 바로 대구 경상감영 일대다.
이에 대구대교구에선 두 박해 순교자 20위(울산 장대 순교자 3위 포함)의
시복을 추진했고 전원이 시복됐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관덕정과 오류정에서 각각 순교한 2위는
마산교구에서 시복을 추진해 대구의 복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때는 ‘관덕당’이라고도 불린 관덕정 순교터는 대구읍성 남문 밖
아미산 자락 신천(新川) 지류 변에 있다.
평상시엔 군사들 훈련장이었고,
때론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던 곳이었다.
동시에 국사범의 처형장이었는데, 서학, 곧 천주교 신자들도
관덕정에서 순교의 화관을 썼다.
관덕정에서 피를 흘린 순교자는 17위다.
이 가운데 지난 8월 시복된 11위 중 김희성(프란치스코)과
구성열(바르바라) 등 7위는
을해박해로 체포돼 1816년 12월 19일에 순교했고,
이재행(안드레아)과 박사의(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등 3위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돼 12년 간이나 잡혀 있다가
기해박해 때인 1839년 5월 26일 순교했다.
또 마산교구에서 시복을 추진한 박대식(빅토리노)은
병인박해 때인 1868년 10월 12일에 피를 흘렸다.
당시 관덕정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
친일파였던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이
고종황제의 윤허 없이 대구읍성을 허물면서 관덕정도 사라졌다.
신천 지류 하천변도 복개돼 도로로 변했다.
지금은 관덕정 순교터로 고증된 곳에 지하 1층에 지상 3층의
한옥 누각 양식의 관덕정순교기념관(관장 최호철 신부)이 들어서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관덕정길 11이다.
이 기념관은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대구대교구 성지 개발 사업에 따라 건립됐다.
1986년에 착공해 1991년 5월에 축복식을 가졌다.
515㎡(155.78평) 부지에 건축 연면적 997㎡(301.59평) 규모다.
교구는 축복식에 앞서 그해 1월 이윤일(요한) 성인의 유해를 봉안했다.
지하 경당엔 유해실이 있고,
그 곁에 순교 전시실이 있어 순교 신심을 전한다.
124위 시복을 기념, 관덕정순교기념관은 지난 8∼9월 두 달간
‘순교자의 이끌림, 124위!’라는 주제로 다양한 시복 경축및
순교자 현양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 ‘천국으로의 행진’을 비롯해 음악 순례의 메아리,
성화로 만나는 20위 순교복자 전시회, ‘순교자, 영혼의 햇살’ 백일장 등을 가졌고,
대구 순교 복자 20위의 이름과 삶을 익히는 ‘순교자랑 나랑!’ 등
개인 프로그램도 함께 기획해 순교자 현양에 힘을 쏟고 있다.
관덕정을 돌아본 뒤 관덕정에서
1.36㎞밖에 떨어지지 않은 경상감영으로 향했다.
공원에 들어서니 잘 정돈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원으로 얼마나 잘 꾸며져 있는지, 관찰사가 집무하던 선화당 앞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감내하던 순교자들의 용덕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곁에 있는 관찰사 처소 징청각과 선정비를 모아놓은
비림 등을 돌아보고 옥터로 발길을 돌렸다.
동옥과 서옥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던 경상감영 밖 옥터
또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동옥은 대안성당, 현재의 대구시 중구 서성로16길 77 인근이다.
대구읍성 서아문 내에 있어 ‘옥골’ 혹은 ‘옥마당’으로 불리던 동옥은
현재의 대안성당과 천리교 대구교회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옥은 현재의 서문로교회, 지금의 대구시 중구 서성로16길 21에 있었다.
둘 다 아무 흔적도 없지만, 대안성당에 감영 옥터 표지판과 신자들을
고문할 때 사용했던 돌 형구가 놓여 있어 그날의 아픔을 전해준다.
이 옥터에서 7위가 옥사했는데, 이들 역시 모두 시복됐다.
유일하게 경상도 출신인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을 비롯해
김시우(알렉시오)와 최봉한(프란치스코), 서석봉(안드레아) 등 4위는
1815년 을해박해 때, 박경화(바오로)와 김세박(암브로시오),
안군심(리카르도) 등 3위는 1827년에서 1828년, 1835년에 각각 순교했다.
마산교구가 시복을 추진한 신석복(마르코)은
1866년 3월 31일 오류정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 오류정은 현재 남아 있지 않은데, 지금의 달성공원 정문 앞 200m 지점,
곧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99길 58(시장북로 1-10) 인근에 있었다.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당시 대구감영에 끌려와 순교하신 복자들이
바로 대구에 신앙의 씨를 뿌렸던 분들이며
대구교구에서는 그래서 순교 복자 20위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고 전했다.
첫댓글
세잎 클로버 님
주일 행복 하셔요
감사합니다.
대구의 성지로서 성모당이 최고지요.
대구를 찾는다면 추천 1순위입니다..
성모성월이면 밤마다 성모당에서 묵주기도하던...
참 아름답고...
자연과 더불어 힐링도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