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의 38선 진격작전(킬러작전, 리퍼작전)
1. 중동부 전선의 킬러작전
가. 개요
1951. 1. 25일 재반격작전으로 전환한 국군 거 유엔군은 단계적인 공격작전 중 중공군의 제4차 공세(2월 공세)을 맞아 대돌파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2월 18일 유엔군이 지평리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공군의 제4차 공세는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은 적에게 재편성의 기회를 주지않기 위해 제천-영월 지역에 들어온 공산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즉각적인 반격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은 적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데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격멸작전(킬러 작전)"이라 명명했다.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 방향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제천 -평창 방향으로 각각 공격하기로 했다.
대관령 횡계리
차항리
[제천지역 돌파구]
홍천 유천리
하진리 용평리조트
중42군 국9사
창봉리 창동리(봉평) 속사리
국7사 발왕산
양평 지평리 중39군, 중40군 횡성 용평
미23연 장평리
곡수 주암 북5군단 북2군단
미1기병 영27여 국6사 판대리
후포 원주 국3-18연 평창
미187연 국9사
여주 도돈 국7사
국3사
주천
미7-31연
제천 미7-32연 영월
장호원 목계 주포 국8사(-)
나. 부대 배치
1) 국군과 유엔군의 부대 배치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이 김포반도와 영등포 일대, 미 제3사단이 한강선을 따라 경안리 일대, 미 제25사단이 광지원리 남서쪽의 무갑산 일대를 각각 방어 중이었다.
중서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은 미 제24사단이 중공군의 한강교두보 남쪽과 남동쪽을 방어하고, 미 제1기병사단이 남한강 동쪽의 하진 일대, 영 제27여단이 주암리, 국군 제6사단이 판대리 부근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이 원주 서쪽 섬강, 제187공정연대전투단(국군 제3사단 제18연대 배속)이 원주, 국국 제3사단(18연대 결)이 성남리, 국군 제5사단이 입석리 일대에서 차단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이 마차리, 제9사단이 정선, 수도사단이 삽당령에서 강릉에 이르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히고 있었다.(국군 제1군단은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있다 복귀중)
2) 중공군 및 북한군 부대 배치
이 무렵 북한군과 중공군은 8개 군단을 한강 하구로부터 양평, 중원산, 횡성, 봉화산, 주봉, 방림리를 거쳐 하진부리에 이르는 제1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군단이 한강 입구에서 뚝섬, 중공군 제50군이 뚝섬에서 상팔당, 중공군 제38군이 상팔당에서 조좌리, 중공군 제42군이 조좌리에서 매봉, 중공군 제66군이 매봉에서 정금산, 북한군 제5군단이 정금산에서 하대곡, 제3군단이 하대곡에서 아지동, 제2군단이 아지동에서 동해안까지를 담당하였다.
다. 작전 경과
1) 중서부 전선의 킬러 작전(미 제1해병사단의 횡성점령)
1951. 2. 21일 10시에 미 제9군단은 횡성을 점령하기 위해 4개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군단의 주공인 미 제1해병사단이 중앙에서 횡성을 향해 공격하고, 나머지 3개 사단(미 제24사, 미 제1기병사,국군 제6사)이 해병사단의 좌우측에서 각각 공격을 개시 하였다.
그러나 이상 고온현상과 비로 인해 노면이 악화되고 하천이 범람하여 교량이 파괴되는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군단의 좌전방인 미 제1기병사단은 하상에 설치한 지휘소와 보급소가 하천이 범람하여 유선망 두절과 보급품이 유실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사단은 24일 양평-홍천 도로 북족의 469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군단의 주공으로 횡성을 공격중인 미 제1해병사단은 눈과 비로 어려움이 많았으나 25일 횡성 점령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2월 24일 뜻하지 않은 헬기 추락사고로 남한강 상에서 제9군단장 무어 장군이 전사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에 미 제1해병사단장이 군단장 임무를 대리하게 된다. 미 제8군사령관은해병의 횡성 점령을 돕기 위해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미 제1해병사단의 우측 제5해병연대 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하고, 좌인접 국군 제6사단지역을 미 제7해병연대가 인수, 좌전방으로 투입되었다. 결국 3월 4일 횡성을 점령했다.
2) 중동부 전선의 킬러 작전(국군 제3사단의 강림-안홍-봉화산지역 진출)
홍천 유동리 장평
미1해병 ‡ 국3사
계천 마옥 포동리
201m 둔방내리
횡성 두곡리
국3사 / 미2사
479m 봉화산
정암리 덕고산702m
음달말 풍취산697m
영랑리 조항리 방림리
1085m
미1해병 / 국3사 매화산 안흥리
국3-18연 국3-23연(차후 원주로)
치악산 강림
원주 국3-18연
국3-23연
미 제10군단도 2월 21일 10시를 기해 미 제7사단을 주공으로하여 영월-평창간 도로를 따라 작전을 개시했다. 이때 군단의 조공인 국군 제3사단이 미 제9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을 엄호 하며 강림-안흥-봉화산을 목표로 공격하였다.
국군 제3사단의 공격목표인 강림-안흥-봉화산은 서쪽으로 치악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고 동쪽으로는 주천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적설이 1m에 이르고 있고 적 유격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사단은 재편성간 2,000명의 신병을 보충받아 전투력은 약화되어 있었다.
사단은 미 제1해병사단의 우측방인 좌전방에 제18연대, 우전방에 제23연대로 2개 연대 병진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8연대가 치악산 북방 매화산을 점령하고 우측의 제23연대가 안흥리를 감제할 수 있는 고지군으로 진출하였다.
2월 26일, 제18연대가 횡성-안흥-평창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 음달말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연결하고, 우전방 제23대는 안흥지구를 점령하여 군단의 주공인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중앙으로 투입된 미 제2사단과 연결하였다.
2월 28일,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9군단의 우전방인 미 제1해병사단의 제5해병연대의 작전지역을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원주로 이동하여 정암리부근에서 인수하였다.
이때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6, 12사단의 5,000명이 안흥리 북쪽의 봉화산과 덕어산 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3월 1일~4일 어간에 국군 제3사단은 봉화산 좌측 479고지와 봉화산, 그리고 덕어산 일대의 적과 공방전을 계속하는가운데 사단 우측의 미 제2사단은 원주-방림리 전방의 고지를 점령하다가 공격이 돈좌 되기도 했다. 그러나 3월 5일에 갑작스레 적이 철수하면서 공격을 재개하여 7일 원주-방림리 도로 북족의 감제고지를 점령, 목표선인 아리조나선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제3사단은 국군 제3군단으로 복귀하게 되며 ,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마차리-정선일대로 철수하였다.
3) 속사리 설한지 전투
두일리
차항리 횡계리
유천리 투구봉 칼산
도사리 발왕동 월정거리 969m 942m
진부리
태기산1259m 창동리(봉평) 속사리
평촌리 용평 이목정리
장평리 백적산1142m
잠두산1244m
대화
국군 제3군단은 태백산맥 서쪽의 산악지대를 공격하게 되는데 오대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수도사단이, 서쪽은 제7사단이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9사단은 예비로 송계리에 집결되어 있었다.
군단은 수도사단의 제26연대를 횡계리에, 제1연대를 강릉에 배치하고 좌인접 미 제10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 위하여 2월 25일 좌전방 제7사단이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 하였다.
군단장은 적의 저항이 경미하여 진출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5일간이나 계속된 폭설로 대관령-횡계리-구산리간 도로가 차단되므로서 공격이 지연되어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 국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1개 대대씩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무렵 적은 영월부근에서 철수한 북한군이 발왕산, 속사리, 월정사 부근에서 종심진지를 편성하여 군단의 진출을 저지하였고 , 유엔군의 함포사격에 계방산-오대산-황병산을 연하는 산악지대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기도하였다.
같은 시각에 제1기갑연대가 속사리로 향하고 있을 무렵, 군단장은 거문리 일대에서 격전중인 국군 제7사단 제5연대와 격전중인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3월 1일 , 당일내에 속사리로 진출하도록 제1기갑연대를 독촉하였다.
그러나 적설로 진출이 지연되어 2일에 하진부리와 속사리 중간의 발왕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22:00시경 제1기갑연대의 후방을 엄호하는 제26연대 제3대대와 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적이 3일 04:00까지 유천리일대에서 밤새 격돌하였다. 그러나 숫적 열세로 08:00시경 차항리로 철수하면서 제1기갑연대의 퇴로는 차단되었다.
결국 군단은 제1기갑연대는 철수를 제26연대는 유천리로 재진격하도록 하였으며 제1기갑연대는 4일 자정경 대관령 서쪽 가사두에 집결하였다.
연대는 철수간 300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나 전사 59명, 부상 119명, 실종 802명이 발생, 다음날 실종자는 대부분 복귀하였다.
따라서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으로 14일간 추격전을 벌인 제9, 10군단은 횡성-평창선까지 도달하였고 적을, 당시 제9군단 지역에서만 사살 7,918명, 부상 1,469명, 포로 208명을 획득하였다. 따라서 목표선인 아리조나선 이남의 모든 적을 섬멸한다는 목표를 완전하게 달성하지는 못했다.
4. 유배발굴 관련 탐사 및 탐문 결과
유해발굴 결과부터 지역별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강림-안흥지역은, 강림에서는 없다. 안흥 서쪽 풍취산 북쪽일대에서 10여구, 영랑리 6구, 둔방내리 9구, 봉화산 0구, 덕고산 북족 5구, 479고지 일대 5구 발굴 되었다.
속사리지역은, 태기산 동쪽 무이리의 안흥동, 보광 휘닉스 파크 6번 도로상에 주변에서 5구, 휘닉스 C . C 동쪽 907고지 일대에서 10구, 창동 685고지 29구, 용평 백옥포리 일대 7구, 도사리 일대 9구, 백적산 34구(모릿재 일병 권오대), 잠두산 일대 10구, 거문리 10구, 이목정리 6번도로 변 고지군에서 20구, 속사리 주변 고지군에서6구, 진부리 일대에서 21구, 두일리 고지 3구, 유천리 일대 3구, 투구봉/칼산에서 13구, 차항리 3구(감자밭 전체가 무덤), 강릉 옥계면 산계리 일대 고지군 15구(이등중사 김선만)이 발굴 되었다.
물론 위 지역은 중공군 4월 공세와 5월 공세에서도 중첩되는 지역이 있다. 보편적으로 전사에 나와 있는 주요 격전지와 발굴지역이 일치한다.
특이한 것은 강림에서 제3-18연대 참전용사님이 직접 본인이 전투에 참가하여 소대병력이 전사했다며 꿈에도 지금 나타난다고 찾아서 발굴해 달라 하셨다.
강림~신림지역은 서쪽은 남북으로 치악산이 달리고 있다. 강림 남쪽은 배향산(808m)을 중심으로 동서로 능선이 발달한다. 다시 그 남쪽이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 지역으로 또 남쪽이 1000~800고지군으로 동서로 능선이 발달했다. 다시 그 남쪽이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송계리로 그 남쪽이 감악산 900~800고지군이 동서로 발달하여 특이한 지형이다.
그러니 당연히 전투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마을마다 넘쳐난다. 이곳 강림과 안흥일대는 중공군과 전투가 아닌 북한군과 국군 제3사단 및 미 제2사단이 전투를 하게 된다. 속사리 지역은 중공군 5월 공세시 중공군이 이곳까지 일부가 들어오지만 주 전투는 북한군과 국군 제7사단 및 제9사단, 수도사단, 해병연대가 전투를 하게된다.
가. 속사리-하진부리-횡계리(차항리)-강릉지역 고지군에는 개인호가 널려 있다.
사실 이지역은 국군 과 북한군이 맞붙어 처음부터 긑까지 전투한 곳이다(한순간, 중공군 5월공세시 중공구니 잠깐 들렸다 미군의 운두령 포위작전에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 따라서 지역주민들의 답변도 여러각도에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군 제2전선 유격대들이 아군의 북진 작전시에도 산악지역에 남아 지역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생하다 1.4 후퇴시 다시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국군을 몰아세우고 제천-영월가지 내려갔다. 그 일부는 안동을 거쳐 대구북방까지도 산악능선을 이용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니 사람이 사는 계곡의 능선에는 어디든지 개인호가 있다. 물론 그것이 북한군이 굴토한 것인지 아군이 굴토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 호의 굴토방향을 보면 피아를 구분할 수 있는데 이렇게 산악지역은 사면 방어형, 아니면 매복진지형태로 구축하기 때문이다.
가-1 : 칼산(942m)과 투구봉(969m)의 비밀(지역주민 함영대(55세), 지옥선(71세)씨의 제보 '06)
2006년도 6월이다. 대관령 목장에서 북쪽으로 노인봉, 남쪽으로고루포기산(1238m)에 이르는 구간을 탐사하고 구 대관령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동해바당가 바라보이는 전망이 정말 환상적이다.
이런 곳이 전쟁터로 그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휴식간에 한 농부께서 우리를 보고 나가오셨다.
"뭐하시는 분들인데 땀을 뻘뻘 흘리고 계셔요?"
"6.25전쟁 때에 전사한 군인의 유해를 찾습니다"
"아니 지금도 알 수있나요, 누가 누군지?"
"DNA감식으로 밝혀야 하는데 뼈가 있어야 살아계신 유족과 비교를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 뼈를 찾는겁니다"
"뼈가 있고 독사들이 많았어요"
"세월이 60년인데 뭐가 있겠어요. 내가 한 8살에 저기 칼산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허옇게 뼈가 있고 독사들이 우굴거렸는데... ."
"그렇습니까, 그 이후로는 안가보셨나요?"
"그때야 배고프니까 탄피나 신주같은 것을 주어다 돈바꿔서 과자 사먹는 재미로 갔지 지금은 안들어간지 40년은 되지요"
"혹시 여건이 되시면 너희를 그곳에 안내해 주실 수 있습니까. 소정의 수고비는 드리겠습니다"
"아니 무슨 수고비. 거기에 우리 밭이 있어요. 함께가요. 지금이 좋아요"
"또 다른 곳은 모르시나요. 인접이 다 산인데 이곳저곳 다 올라가셨을 것 같은데요"
"그야 이 일대 저기 오대산, 설악산도 다 갔어요. 칼산 바러 옆에 투구봉이라고 있는데 그곳에는 호가 많아요."
"우리가 지금 대관령 목장 위로 올라가 노인봉에 갔다가 다시 내려와 고루포기 산까지 갔다 왔어요. 그런데 호가 수천개는 있는데 탐지기를 이용해 보니 소리나는 곳이 별로 없어요. 소리가 나면 유해가 있을 확률이 높거든요"
"아이고 선생님, 전쟁 나고 얼마 있다 이 일대는 모두 피난민들이 꽊차서 화전했어요. 죄다 파서 아무것도 없어요"
"아니 피난민이 이 일대에 그렇게 많이 들어와 살았습니까?"
"그럼요, 저기 이목정리에 가면 백적산이라고 있는데 그런 산도 다 피난민이 올라가 화전을 일구고 살았어요"
"그곳도 남쪽 잠두산일대까지 모두 전쟁터인데 전쟁터에 피난민이 살았습니다?"
"포탄을 쏘아대서 평평하잖아요. 나무도 다 타버려서 움집짓고 살기에 좋았다고 봐야지요. 여기 칼산도 동해안에서 큰 배들이 들어와 얼마나 포탄을 쏘았는지 바위가 다 깨져서 조각조각 다 났어요. 올라 가지도 힘들어요. 군화는?"
"그렇습니까. 등산화로 바꿔신고 올라가야겠네요. 아저씨는요?"
"우린 장화가 최고입니다. 독사도 못물고 미끌지지않아요"
이렇게 해서 올라가는 산은 정말 바위조각이었다. 6월이지만 이곳은 아직 태백산맥 서쪽이라 해동이 안된 곳도 있어서 풀도 별로 없다. 산이 온통 바위인데 파편이 발견되었지만 탄피는 없다. 누군가가 아주 깨긋하게 잘도 찾아간 모양이다.
우린 칼산과 투구봉일대에서 1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특히 칼산의 유해는 모두 조각유해였다. 그러니 제보들이 말하기를 당시 동네 어른 들이 흉한 곳이라 올라가지 말라했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었다.
가-2 : 차항리의 감자밭 그리고 최원규 할아버지(86. '05), 박재동(66. '06)의 제보
차항리 일대는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속사리진출간 퇴로가 차단되어 제26연대가 증원하러와서 북한군과 전투를 한 곳이고 그 이후에도 해병1연대와 제9사단이 진출간에 전투가 있던 것이다.
우리가 '05년도에 유해발굴 지도제작을 위해 최초로 T/F를 구성하여 내가 정덕이와 준화를 데리고 전국을 꼬박 1년 동안 오직 탐사와 탐문만을 하던 시절에 차항리 입구에서 최원규(당시 88세)를 만나 점심을 같이 하고 함께 탐사를 했다. 말에의하면 북한군이 머물고 갔는데 온통 산에 시체가 가득해서 동네사람들이 가서 괭이로 긁어서 묻었다는 것이다.
차할아버지와 야산에 갔다 내려오는데 박재동 어르신을 만났다.
"어디갔다 오시는가요?"
"군인들 죽어서 묻혔다는 곳을 알려주고 오는 길일세"
"저희는 국방부 유해발굴조사팀입니다"
"아니 우리집이 전쟁 때에 불타버렸는데 그곳에 가니 죽은 군인이 있어 아버지와 함께 묻어주었는데 거기도 있을까 모르겠네"
"그러세요, 한번 저희들이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차할아버지를 차로 모셔다 드리고 현장에 갔다. 가는 도중에 감자밭에 섰다. 본인의 감자밭이었는데 지금은 남이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엄청난 유해가 있던 장소란다.
"내가 12살인가 전쟁인데 이곳에 엄청 많은 무덤이 있었어요. 국군인지 북한군인지는 모르지만 올망졸망하게 우리밭에 가매장터가 수없이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럼 그게 언제까지 그랬는지 모르세요?"
"내가 군대갔다 오니 주변이 다 변했어. 사방공사인지 뭐 개간을 해서 주변이 다 변했어요. 여기도 야산도 있고 했는데 번듯하게 밭이 되었고 아무것도 없었어"
"그럼 유해를 발굴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거나 아니면 그냥 이곳에 흙을 복토하였거나 할텐데 누가 모를까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감자밭은 발굴해보거나 시굴도 안해봤다. 이유는 북한군 유해라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지역주민 최원규(88세, '07)
횡계리지역 발굴작전이 있어 현장에 가보았다. 그래서 한번 차항리에 들어갔더니 2년전, '05년도에 한번 만났던 제보자 분을 만났다. 그때 말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고 한다. 본인 밭 위로 야산이 있는데 국군이 죽어있어 3구를 묻었다는것이다. 철규팀장을 데리고 바로 현장에 가서 확인후에 발굴병을 투입하였다.
"인식표에 새겨진 이름 정영석(제9사단 추정), 하지만 유족감식에 맞는 분이 없다"
"혹시 당시에 발굴하러 오지는 않했나요?"
"나는 그 후에 군에 갔다와서 잘 몰랐는데 우리 밭 뒤라서 가보니 그대로야. 그런데 누가 관심을 가졌나.그때만 해도 여긴 북한군이 통제하고 있었지요. 국군이 완전하게 들어온 것은 5월이 넘어서야"
"하기야 그당시에는 함부로 누굴 묻었다고 말도 못하는 시절이겠네요"
"전쟁때는 누가 누구를 믿어? 정말 무서운 세상이었어요."
발굴이 계속되는 가운데 반합이 나오더니 박클도 나오고 드디어 인식표가 나왔다. K1135374라 선명하다. 이름은 정영석으로 제9사단 소속이다. 그런데 유족을 찾지 못했다. 동명이인은 다 찾아다녀 유족의 DNA샘플을 채취하여 감식을 하였으나 맞지않았다.
이렇게 되면 무명용사다. 그래서 유족분들의 감식이 중요하다. 아니 이름이 없는 군인이 있겠는가?
"드디어 찾아낸 수도사단 기갑연대 전사자"
지역주민 제보자 이창희(69세. '07) : 내가 12살인데 전쟁이 났어요. 여기가 산골이라 누가 오지도 않아. 그러니 전쟁인지도 우리 동네는 몰랐어. 그런데 동란이 나고 얼마 안되었는데 국군이 왔어요. 내가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수도사단 기갑연대야. 그런데 북한군에 포위가 되어 엄청 죽었는데 겨울이라 눈속에 있으면 보이지도 안해요.
"눈속에서 겨울을 난 용사님"
겨울이 갔는데 아직도 밤이면 북한군이 내려와서 마을에 머물고 새벽에 산으로 올라가면 바로 뒤이어서 국군이 마을에 들어와요. 한참을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면 빨갱이 세상이었지. 동네에 사람이 그때는 별로 없어. 그나마 피난들 떠나고 몇가구 없는데 눈이 녹으니 여기저기에 죽은 군인의 시체들이 보이는 거야. 괜히 소문내고 묻었다간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쉬쉬한다고.
그런데 너무 보기 민망하니까 동네사람들이 나서서 세군데에 묻어버렸어요. 5구는 넘을겁니다.
우린 그 제보자님이 가리키는 곳 일대 세군데를 발굴하여 정말 유해 3구, 약병, 모시나칸트 탄피, 전투화 밑창, 철제 수푼 등을 발굴하였다.
가-3 : "삼척 옥계면 산계리에 일어선 이등중사 김선만"(전기엽 76세, '10)
나는 제9사단과 수도사단의 행적을 찾아서 삼척에서 강릉에 이르는 구간을 골짜기마다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제3사단을 보았다는 지역 주민도 많아서 그 당시에 이 3개 사단이 명확한 전투지영선 없이 후방지역 작전에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산계리에서 올라서면 생계령에 이르게 되는 아주 최단거리 접근로이며 실제 전쟁 당시에 이곳 주민들 이야기는 아침에 왔던 군인들이 그 다음날 새벽에 다시 온다는 것이다. 그 말은 밤새 뱅뱅 돌다 원위치한 것이다. 그만큼 이 지역은 산악지역이고 우리 헨드폰이나 나침판도 제대로 작동이 안된다.
생계령(632m)에 올라서면 주변이 개인호가 500여 개가 있다. 우리가 굴토한 것이지, 북한군 유격대가 굴토한 것인지는 구분하기 힘들다. 매복형 진지이며 산이 회도리치며 빙빙 도는 형국이라 누구든 이곳에 올라서면 그렇게 밖에는 호를 구축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생계령에서 북으로 능선을 타면 석병선-삽당령이 나오고 남으로 타면 자병산과 백봉령에 이르게 되는 산악의 요충지다. 그러니 이곳에서 피아간에 먼저 점령하면 산악 능선 이동을 차단하는 잇점이 있으니 서로 먼저 점령하려 했다고 본다.
생계령 바로 서측은 정선 임계리다. '00년도에 석병산에 집단 가매장지가 있다는 제9사단 참전용사의 증언에 기초하여 안내자도 없이 산을 올랐던 곳이다. 그러나 집단 매장지는 흔적을 볼 수 없었고 개인호는 능선을 따라 수없이 있다. 그때는 생계령까지 안오고(삽당령에서 시작했음)금방동으로 내려서 차량으로 백봉령을 갔었다.
"지역주민 전기엽 어르신의 제보"
산계2리 마을회관이 있다. 6.25전쟁 당시에 이곳에 살았던 분이 계셨다.
"어르신께서는 그 당시에 나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11살이지. 그때는 여기는 전쟁이 났는지 뭔지도 모르고 지나갔어요. 동란때 처음으로 인민군을 보았는데 그 당시는 그저 동네에서 같이 살았어요. 김일성 장군가도 배우고 해방전사라고 하던가 하여튼 여기는 경찰도 군인도 한번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군인 매장하는 것은 보셨습니까?"
"설날도 지나고 조금 되었는데 인민군이 전부 사라졌어요. 갑작스레 어디로 가버렸는데 동네에서 몇은 따라서 갔어요. 그래도 며칠 있으면 돌아올거니 했는데 안 오고 국군이 왔어요. 그때는 솔직히 국군이 좀 못된 짓 많이 했어요."
"알겠습니다. 못된 짓은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목격하게 된 것인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어. 참 그런데"
"괜찮아요. 적군이라도 발굴해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처리하는 것이 요즘 세상이고 연좌제법도 없어졌고, 지금 뭘 벌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말씀하셔도 됩니다."
"동네에 아군초소가 있고 언덕에는 북한군이 있었다."
"그때는 누구 좋은지 몰랐어요. 동네에는 9사단 초소가 있는데 해가 지면 통상 가버려. 어쩌다 안가는 경우가 있긴한데 밤에는 산에서 유격군이 내려와 동네에 있었지"
"언덕이라는 것이 지금 생계령에 오르기전 바로 앞에 큰바위가 있는 평범한 곳 말하는거잖아요?"
"맞아요, 지금 군인들이 뭘 파고 있던데 뭐하는 것요?"
"유해발굴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호가 있어서 파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싸웠던 용사님이 연로하셔서 오진 못했는데 그 생계령 부근 어딘가에 집단 가매장지가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솔직히 북한군은 아군이 뭐하는지 다 내려다보며 움직이니 북한군을 잡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이 초소에서 기습받아 몇이 죽었어요"
"군인에게서 장구류 떼어내고 머리카락을 자르더니 초소 옆으로 옮겼다"
"그걸 다 지켜보았습니까?"
"다 옆에서 보았어요"
"화장을 했습니까, 아니면 그냥 묻었습니까?"
"옮기는 것까지 보았고 그 다음은 몰라요. 왜냐하면 군대가 모려와서 동네 사람들 모두 차에다 실어서 시내로 데려갔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들어와서 그 일대는 가보니 없던 봉분같은 것이 생겼어요. 그런데 한며이 아니고 3~4명이 함께 죽었는데 작은 봉분같은 것이 생겨서 여기에 묻었다고 생각했지요."
"경상도분들이 와서 몇구는 발굴해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유가족이라는 분들이 와서 발굴을 해 가기도 했는데 현재 장소는 그대로 있어요"
"거제시 둔덕면 시목리 선산에 마련된 고, 김선만 상사의 엉터리 묘"
"고향 우리는 발굴을 시작했고 인식표를 찾았다. 김선만이라는 이름이고 전사망 카드에 거제도가 집이고 자가봉송 유해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정덕이와 함께 시목리로 향했다. 동네 마을회관에 들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 여동생이 살아있고 친조카들도 있었다.
"무슨 소리요, 우리 오빠 지금 선산에 부모님 옆에 모셔져 있는데?" 여동생분의 격찬 말투다
참전용사님은 큰아들인데 부모님들께서 눈물로 기다리는데 어느날인가 군인들이 유해를 목함에 넣어서 들고 왔다고 한다. 그때도 처음에는 동네에서 받지않았다.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있어서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가짜로 재만 가지고 온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안받는다고 했는데 집안어른분들이 받아라 해서 선산에 묘를 썼고 아버지 어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선만이 밑에 우리를 묻어라, 군대보낸 우리가 죄인다!"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지역예비군 중대장의 협조를 구해 상근ㅇ역 3명을 데리고 묘소로 갔다. 간단한 약식제례를 올리고 파묘를 했다. 유가족들이 지켜보며 한숨을 지으신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뼈가 없는 "까만 재만 만들어 보낸 것이다" 재는 물이 먹으면 없어진다 만약 화장된 재라면 뼈가루가 햇빛에 말리면 하얗게 나타난다.(김해공원묘지에서 60여구의 화장유해 발굴 경험)
동네분들이 모여들고, 기가 차다는 목소리가 하늘을 애타게 했다. 그 이후에 우리는 여동생과의 유전자 검사에서 완벽한 형제지간임을 밝혀내며 정식으로 유해를 운구하여 고향땅에 들러 약식제례를 다시 올리고 유가족 참여하에 화장을 하여 현추원에 안장했다. 우리는 이 일대에서 15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용사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때는 그렇게 밖에 하지못한 잘못을 용서하시고 이제라도 하늘나라에서 혜량하소서!"
가-4 : 지역주민 이영휘(80세, '10), 김성례(74세, '10)의 제보
"동네 멍석으로 말아 화장되는 국군"
이영휘 : 나는 강릉 성산면 보광리에 계속하여 살았다. '51년도 봄인데 우리집은 피난도 못갔다. 그런데 하루는 군인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멍석을 다 거둬가더라. 그래서 뭐하느가 봤더니 죽은 군인을 돌돌 말더니 거기에 불을 붙여 태우더라. 겁나서 얼른 집에 들어와 있다 그 다음에 군인들이 떠나간 뒤에 가보니 파묻고 갔더라.
하지만 우리는 그 제보지역 일대를 열심히 발굴했지만 유해의 잔해를 찾지못했다.
"경찰이 마을 사람을 불러내 시신을 여러 곳에 묻었다"
김성례 : 나는 강릉시 상시동 2리에 살았다. 전쟁이 나서 우리는 부산에 피난가서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들어왔다. 왔더니 동네 곳곳에 시체가 다 썩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어 흉칙했다. 하도 많이 있다보니 경찰이 동네사람들을 모아서 여러 곳에 매장했다. 지금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상시동리는 바로 군선강(초기 전투시 제8사단이 북한군 특전대가 배로 사전 침투하여 북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거꾸로 북에서 남을 보고 방어한 곳이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수도사 최병창(추정, 도장이 출토. 결혼반지. 지역주민 최돈채(75세, '07)이 제보)님이 발굴된 운산리도 그 일대다. 하지만 화장되어 묻혀진 유해는 찾기가 쉽지가 않다. 화장하지 않했다하더라도 토질에 따라 불과 몇년만에 전부 녹아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5 : 도사리 지역주민 이종남(76세, '10)의 제보
"저기 땅벌이 사는 곳에 군인 10여 명이 묻혀있다"
우리는 대대로 용평 도사리에 살았다. 피난도 못가고 살다가 동란때(1.4후퇴)는 할아버지 할머니만 남고 풍기로 피난갔다 가을에 왔다. 할아버지께서 지금 소 기르고 있는 축사 맞은 편 낮은 언덕에 군이니 죽어서 있다고 했다.
"매년 술따르고 간단한 고사지냈다. 그런데 지금 한 10년전부터 땅벌이 살고 있다" 적군이지 중공군이지 아군이지도 모른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군인들이 묻었다는 것이다. 발굴하면 알 수 있는지?"
"발굴해서 뼈를 보고 알기는 쉽지않습니다. 주로 유럽인종은 뼈 크기로 대략 알지만 동양인은 인종자체가 대부분 같기에 구별이 힘들고 발굴된 유품을 보고, 지역 주민의 제보내용 등을 분석하여 판단하게 됩니다."
"그당시는 여기가 집이 아니고 언덕쪽인데 지금은 축사가 들어서며 집주변이 되었어요. 저 땅벌 조심하세요"
"땅벌이 우리 용사님과 함께 살고 있다"
엄청난 땡벌이 들락달락한다. 아마도 시신이 묻히아보니 부패하면서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에 벌이 쉽게 집을 짓고 사는 모양이다. 우리는 난처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벌을 제거해야 했다. 결국 토치램프를 이용하여 벌을 제거하는 작업을 1시간 이상하고 나서 판쵸우의와 방독면을 착용하여 땅을 파기 시작했다.
"유해 7구가 엉켜있고 그곳에 7층으로 벌집이 있다"
삽으로 한삽을 파내니 벌들이 난리였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 제압하여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흙이 단단하지 않아서 흙을 들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벌집이 보이는데 7층으로 지었다. 애벌레가 엄청 붙어있다. 그리고 유해가 보인다. 만년필도 나오고, 스패너, 철재망치, 수통 등이 나왔다. 운전병이 전사한 모양이다. 한 지역에 무려 7구의 유해가 엉켜있다.
나. 횡성 우항리와 하궁리 , 안흥면 송한리-소사리 지역(6번도로/13번도로. 19번도로. 42번도로 안)은 저지대(?)로 사연이 많다
나-1 : 아들 낳겠다고 군인 머리를 발굴하여 고아먹고 횡사한 신배골
탐문이나 탐사를 하다보면 별별 사연들이 많다. 이곳 풍취산(687m) 밑 동네에도 괴상한 제보를 받았다. 국군 제3사단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몇군데 묻혀있었는데 전쟁 끝나고 언젠가 서울 사람이 사람뼈를 사러왔다고 한다. 그것도 머리부분이다. 돈을 후하게 준다고 하여 동네 누군가 군인이 묻혀 있는 곳을 알려주고 돈을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 위해 정말 그 사람들이 발굴(도굴)해 갔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은 그것이 아니였다. 사람 머리를 끓여서 먹은 해당 집안의 며느리가 급살병에 걸려 갑짜기 죽어버렸다고 한다.
나-2 : 주요 격전지라는 봉화산(668m)에는 유해 없다.
킬러작전간 국군 제3사단이 마지막으로 진출한 선이 479-봉화산선이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다고 하여 우리는 선행탐사릃 해본 결과 개인호 150여 개를 식별하였다. 도한 479고지 일대는 개인호가 500여 개가 넘게 식별되었다.
하지만 막상 발굴작전을 개시한 결과 하궁리 봉화산에는 유해를 발굴하지 못햇다. 유품도 M1안탄 등 3점을 바굴하는데 그쳤다. 반면 상대리 479고지에서는 5구의 유해와 미군 별무늬단추, 칼빈탄, M1탄 등 100여 점의 유품이 발굴되어 실제 전투는 479고지 위주로 벌어졌다고 봐야한다.
나-3 : 하궁리의 봄바람?(북한군과 3개월 생활)
6번도로와 13번 도로사이에 있는 하궁리는 밖에서 보이질 않는다 정금리 사거리에서 하궁리로 들어가면 나가는 길은 없다. 다시 돌아나와야 한다. 동네가 500m고지군으로 완전히 둘려쌓여 있다. 그러니 전쟁이 났는데 전쟁이 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지세가 사람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 갑짜기 1.4 후퇴 이후에 군인들이 들어왔는데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르고 시키는대로 하는데 사람도 별로 없으니 뭘 크게 요구하지도 않아서 형제처럼 지냈다 한다. 거의 3개월을 같이 살았다.
낮에는 찾아온 군인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밤에는 내려왔다. 그런가 하면 한 집에는 여자가 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국군 첩보원이었다고한다. 함께 있던 군인은 북한군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동네 한 분을 만나 직접 안내를 받으며 산을 올랐다. 큰터에서 500고지군을 한번 도는데 꼬박 하루가 걸려 탐사를 마치니 무려 1,000개의 개인호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올라서면 정금리-포동리-유동리로 1.4후퇴 이후에 재반격작전간 국군 제5사단이 진격해 올라갔던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3구의 유해와 칼빈탄, 별문양미군단추 등 유품 50여점을 발굴했다.
나-4 : 풍취산-연봉사-544-메나골로 이어지는 종심상에서 주로 유해발굴
"여명의 눈동자"란 드라마가 있었다. 6.25전쟁을 소재로 주로 치악산에 얽힌 비하인드스토리를 엮어서 극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남쪽으로부터 남대봉-향로봉-비로봉-매화산-풍취산으로 이어지는 종심상 능선을 끼고 서족은 원주로 주로 미군의 기동로가 되다보니 동쪽에 능선을 이용하여 북한군이 이동했다고 본다.
따라서 풍취산-연봉사-544-메나골로 이어지는 종심상에서 주로 유해발굴이 이루어지고, 우측 안흥 송한리-논골-민족사관고교 능선에는 개인호같은 흔적이 적다.
다이어먼드 형태의 하궁리와 상대리, 안흥 송한리, 소사리 일대의 발굴된 유해 50여구중 10여 구만 동측에서 발굴 되엇고 그것도 대부분 낮은 곳에서 가매장된, 제보지역 위주로 발굴 되었고 40여구는 서측에서 주로 산악지역에서 개인호를 굴토하여 발굴 하였다
나-5 : 덕고산(?)에 올랐다 죽다말고 살아왔다
나는 '03년도 이른 봄 주말에 김밥 도시락을 휴대하고 가족과 함께 덕고산에 올랐다. 웬지 차가 알아서 오르는 기분이었다. 4월인데 산판길이 있어 눈이 없는 것을 고려하여 괜찮다 싶어 올랐다.
그래서 8부능선으로 올라가 평평한 길이기에 잠깐 머물러 개인호 실태를 확인했다. 전사에 나와 있는 내용을 확인하러 올라간 것이다. 봉화산은 이미 '96년도인가 호국훈련간에 제2군단 제332관측대대장으로 출동하여 일대 산을 다 올라가 보았다. 대항군의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수색정찰 임무를 했기에 개인호가 많이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눈이 녹고, 땅이 얼었던 곳이 녹은 구렁에 승용차가 빠지다"
고지일대를 탐사하고 내려와 하산하는 길에 그만 차가 구렁에 빠졌다. 알고 보니 산판길을 내면서 생긴 곳으로 차가 바닥이 닿아서 붕터있는 상태가 되어 움직이지 못한다. 700m나 되는 산인데 전화도 안된다. 가족도 차에서 내려 발만 동동 구르지 우린 무슨 대책이 더오르질 않았다. 방법은 뛰어 내려가 구난차를 불러야 되는데 구난차도 이 산판길에 온다고 하지않을 것이다.
갑작스레 생각이 났다. 차 드렁크에 약초캐는 괭이가 있다는 것이. 나는 그걸 들고 땅바닥에 엎드려 바퀴 자리를 파기 시작했다. 땅이 겉만 녹았지 속은 녹지않아서 무척이나 힘들지만 파야했다. 이대로 차를 놓고 하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를 파고나서 가족을 멀리 떨어지게한 다음, 1단에다 기어를 놓고 악세레다를 힘차게 밟았다. 차가 붕뜨며 덜커덩하고 위로 오르는데 바로 앞이 산비탈이다.
"용사님 우리를 보호하소서!"
나는 외쳤다. "용사님 살려주세요"
그리고 운전대를 잡고 오른쪽으로 꺽는 순간 차는 온전히 산판길에 올라서고 살았다. 기적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흙으로 범벅이된 차를 끌고 하산하여 어느 개인집에서 몸을 씻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주인이 하는 말이 대단하다.
"아니 승용차로 그곳을 왜 올라가요. 죽지않고 살아온게 천운이네요'
"들어가는 입구가 좋아서 괜찮겠지 생각했지요"
"그나저나 어젯밤 좋은 꿈 꾸셨나봐요, 아니 좋은 일 많이 하시니 정말 호국용사님이 도우셨구만"
우리는 집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원주방향으로 조금 달리다 민족사관학교가 보이는 장소에 차를 세우고 김밥으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이때 시간이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지금도 가족과 가끔 그당시를 이야기하며 무식한게 용감하다는 말을 주고 받으며 웃곤한다.
2. 중부 전선의 절단 작전(리퍼작전)
가. 개 요
국군과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으로 전황하여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분쇄하고 킬러작전을 벌려 1951년 3월 초에는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선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된 방어선을 확보하였다.
이때 서울을 재수복하기 위해 미 제8군사령부는 현 전선의 중앙지역에 대 돌파구를 형성, 적의 전선을 양단하여 서부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으로 분리시킨 다음,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서울을 양익포위한다는 작전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고 이번 작전을 전선 절단과 분리라는 작전 목적을 고려 "전선 절단작전"이라 명명하였다.
나. 부대 배치
1) 국군과 유엔군의 부대 배치 및 작전기도
가) 부대 배치
아군은 격멸작전(킬러작전)으로 양평-횡성-강릉 선으로 진출하여 다시 2월 공세 이전의 전선을 회복하였다.
서부전선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25사단(배속:터키여단)이 한강을 따라 강 남쪽의 김포반도-노량진-잠실-수청리를 점령하였다.
중부전선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 미 제24사단, 제1기병사단(배속:영29여단), 제1해병사단이 양평-용두리-풍수원-횡성 선을 점령하였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5사단, 미 제2사단, 미 제7사단으로 추동리-안흥리-하송빈을 점령하였다.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배속:해병1연대)이 형제봉-박지산-용산리를 점령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제9사단, 수도사단으로 간평리-차항리-강릉 선을 점령하였다.
나) 작전 기도
미 제8군은 중부의 미 제9군단이 주축을 이루어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 북방-한계를 연하는 목표선(아이다호선)까지 진출하여 적을 양단하고 적의 병력과 보급물자의 비축 장소로 판단되는 홍천과 춘천을 점령하도록 하고, 3개의 통제선(알바니선, 버팔로선, 카이로선)을 두었다.
첫번째 통제선은 미 제1, 9, 10군단 전방의 8~20km 북쪽의 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태기산-속사리를 연하는 "알바니선'으로, 이 선을 점령하면 미 제9군단이 전술적 요충지인 홍천을 통제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두번째 통제선은 미금리-진벌리-홍천 북쪽-한계리를 연하는 "버팔로 선'으로 이는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 지역에만 설정하였다. 이때 미 제25사단은 버팔로선까지 진격하여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적에 대한 포위망을 학대하는 임무를 , 미 제9군단의 주 목표는 홍천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통제선은 "카이로 선"으로 미 제9군단 지역에 국한하여 설정하였다. 가평-춘천 남쪽-한계 북쪽을 연하는 이 선을 점령하면 제9군단은 춘천을 목표로 계속 공격할 계획이었다. 춘천은 차후 공격목표인 "아이다호선"의 최종 목표지점이기도 했다.
제8군사령관은 춘천과 홍천을 점령하여 적의 전선을 차단하고 서울을 양ㅇㄱ포위허기 위하여 주고인 제9군단이 29번 도로를 다라 3단계 작전으로 홍천-춘천을 공격하고, 조공인 제10군단이 2단계작전으로 풍암리-태기산-운두령을 공격하여 주공의 우측방을 엄호하였다.
그리고 미 제1군단의 주력은 한강선에서 적을 고착견제하고 일부는 2단계작전으로 예봉산-천마산을 공격하여 주공의 좌측방을 엄호하여 서울 포위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우익인 국군 제3군단은 산악지형인 운두령-황병산을 공격하고, 이미 주문진에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은 점령중인 방어진지를 강화 하도록 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2월 중순부터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사단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미 제10군단의 작전통제를 받아왔던 국군 제1군단사령부와 제3사단을 육본 직할로 복귀시켰다.
이에 육본도 국군 제3군단의 우전방 제9사단을 국군 제1군단으로, 국군 제3사단을 제3군단으로, 그리고 홍천 공격 실패후 재편성을 완료한 국군 제5사단을 미 제10군단으로 배속을 전환시켰다.
2) 중공군 및 북한군 부대 배치
이런 상황에서 적은 서부지역에서는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50군이, 중앙에는 중공군 제38, 42, 66군이, 동부지역에는 북한군 제2, 5군단과 제69여단을 배치하였다.
다. 작전 경과(미 제9군단의 진격(홍천-춘천 진격전)
리퍼작전의 목표는 미 제9군단이 아이다호선(목동리-춘천북쪽-내평리-한계)으로 진격하여 홍천과 춘천을 탈환하는 것이였다.
이를 위해 미 제9군단은 4개 사단 병진으로 좌전방 미 제24사단(배속: 국군 제6-19연대)이 용문산으로,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배속:영27역)과 국군 제6사단(제19연대 결)은 29번도로 서쪽의 홍천강 남쪽의 산악지대로,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은 홍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있는 제187공수연대가 의명 군단을 지원할 게획이었다.
1951. 3. 7일, 군단의 주공인 미 제1해병사단이 2개연대 병진으로 오음산 북쪽의 알바니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3월 8일 알바니선을 점령했으나, 우익 미 제10군단의 미 제2사단이, 좌익의 미 제1기병사단이 진출이 지연되어, 13일 두 사단이 알바니선을 점령하여 제1단계 작전이 종료되었다. 다만 아직 국군 제6사단이 산악지형으로 지연되었다.
국군 제6사단은 제2, 7연대로 풍수원 남쪽 도로에서 3월 7일, 병진 공격을 개시하여, 제2연대 수색대가 초원리에서 국군 제8사단이 중공군 2월 공세시 유기한 대전차 7문과 105밀리 곡사포 5문을 회수하였다. 사단은 3월 11일, 풍수원 북쪽 갈기산-성지봉으로 진출 중, 군단의 부대 배치 조정에 따라 12일 작전지역을 좌인접 영 제27여단과 우인접 미 해병 제7연대에 인게하고 지1기병사단의 좌전방인 제8기병연대의 장락산-용수리 지역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13일에는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었던 제19연대가 복귀하였다. 이에 따라 사단은 14일부터 좌로부터 제19연대, 제7연대, 제2연대로 3개 연대 병진 공격을 재개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리퍼작전의 제1통제선인 알바니선이 점령되자, 3월 13일 제2 통제선인 버팔로선으로 진출을 명하고, 이에 제9군단은 제1기병사단과 제1해병사단으로 홍천을 양익포위하고, 미 제24사단과 국군 제6사단으로 북한강 계곡의 청평호와 홍천강 남쪽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3월 15일, 미 제24사단이 청평호를, 국군 제6사단이 홍천강 남쪽의 고지군을, 그리고 홍천을 좌측에서 공격중인 미 제1기병사단이 홍천강변에 진지를 구축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우측의 미 제1해병사단은 진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에 제9군단장은 1일, 홍천 일대에 중점적으로 배치된 적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홍천강을 연하여 중간 통제선인 "버스터선"을 설정하고 홍천 북방의 버팔로선과 연결하였다. 그리고 미 제24사단과 국군 제6사단이 이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 제7해병연대의 정찰대가 강력한 적의 저항을 돌파, 홍천시내로 진입하자 적의 저항은 약해졌고 이어 도착한 주력이 홍천 동북쪽의 주요 고지군을 점령하였다.
'51. 3. 17일, 군단의 4개 사단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버스터-버팔로선까지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 국군 제6사단이 홍천강 북쪽 구은동 부근 계곡에서 집결중인 중공군 1개 대대를 포위공격하여 231명을 사살하고, 75밀리 야포 7문, 60밀리 박격포 6문 등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3월 19일, 마지막 통제선인 카이로선으로진출을 명한 미 제8군사령관은 21일, 미 제1기병사단이 카이로선을 확보하고, 13시 30분 특수임무 부대가 춘천을 탈환했다. 이어서 제7기병연대가 22일 춘천시내로 진입함으로서 미 제1기병사단의 리퍼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한편 군단의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은 18일, 동부전선 여량리에서 사단으로 배속이 전환된 국군 제1해병연대가 도착하자 사단의 중앙연대로 투입하였다. 국군 제1해병연대는 가장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24일 적의 방어거점인 가리산을 학보하였다. 이를 계기로 25일 미 제1해병사단은 공격목표인 카이로선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4. 참전용사 증언, 유해발굴 위한 탐문 및 탐사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