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습속
정리 김광한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시간의 습속』. ‘북스피어’와 ‘모비딕’ 두 출판사가 함께 선보이는 「세이초 월드」 시리즈의 하나로, 마쓰모토 세이초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그가 쓴 다양한 픽션과 논픽션을 함께 소개한다. 1961년 5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잡지 《여행》에 연재한 이 작품은 《점과 선》의 2탄으로 명콤비 도리카이와 미하라가 다시 만나 사건을 해결해간다.
가나가와 현에 있는 사가미 호수에서 근처 여관에 머무르던 남녀 여행객이 산책을 간다고 하고는 자취를 감춘다. 수색 결과 남자는 교살 사체로 발견되고 여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사건을 맡은 경시청의 미하라 경위는 관련 인물 중 가장 혐의가 없는 택시 회사의 전무 미네오카 슈이치를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그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러나 미하라에게는 이 알리바이가 뭔가 석연치 않은 가운데 후쿠오카의 미즈키에서 교살로 추정되는 젊은 남성의 사체가 발견되는데…….
마쓰모토 세이초 소설가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트릭이나 범죄 자체에 매달리기보다는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드러내서 인간성의 문제를 파고드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붐을 일으킨 마쓰모토 세이초는, 오늘날 일본 미스터리 소설 작가들의 문학적 뿌리이자 영원한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다. 41세 늦은 나이로 데뷔해서 숨을 거둔 82세까지 그는 “내용은 시대를 반영하고, 사상의 빛을 받아 변모해간다”는 신념을 지니고 전력투구의 필치로 천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909년 기타큐슈의 작은 도시 고쿠라에서 태어난 세이초는, 40세가 될 때까지 작가가 될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궁핍한 환경에서 열악한 세월을 보냈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역사는 1950년부터 마침내 극적으로 펼쳐졌다. 〈주간 아사히〉 공모전에 그의 데뷔작 『 사이고사쓰 』가 당선되었고, 이후 비록 재능은 있지만 고단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주인공을 그린『 어느 〈고쿠라 일기〉 전 』으로, 대중적 인기를 반영하는 나오키 상에 후보로 올랐다가 도리어 아쿠타가와 상에 당선되는 행운을 거머쥔다. 대중문학과 순문학의 경계가 무너지는 실로 파천황 같은 대반전이었다. 이후 전업작가로 나선 세이초는 창작력에 불이 붙으면서 “공부하면서 쓰고, 쓰면서 공부한다”는 각오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1955년에 발표한 『 잠복 』부터 장편소설 『 점과 선』 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연이어 제로의 초점 『 눈동자의 벽』 ,『 모래그릇』 등을 내면서 세이초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부동의 지위를 쌓는다. 그는 마치 중년에 데뷔한 한을 풀기 위해 일분일초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그의 모든 생애를 창작활동에 쏟아 부었다. 작가 생활 40년 동안에 쓴 장편이 약 100편이고, 중단편 등을 포함한 편수로는 거의 1,000편, 단행본으로는 700여 권에 이른다. 많이 썼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이다. 소설가로 자리를 잡자마자, 세이초가 다음으로 파고든 것은 논픽션이었다. 1961년 51세에 문제작 『 일본의 검은 안개 』를 발표해서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사회나 조직의 불투명한 비리를 표현할 때 ‘검은 안개’라는 말이 대유행처럼 쓰였다. 이어서 1964년부터 7년간에 걸쳐 집필한 『 쇼와사 발굴 』은 그의 작품 가운데 혼신의 대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공부와 불굴의 정신력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던 세이초였기 때문에 픽션, 논픽션, 평전, 고대사, 현대사 등으로 창작 세계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이초는 평생 온갖 규범을 넘어선 작가였고, 전쟁과 조직과 권력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문단과 학계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76년부터 실시한 전국 독서 여론조사(마이니치 신문 주최)에서 10년 동안 ‘좋아하는 작가’ 1위에 선정되면서 명실상부하게 국민작가의 지위를 얻었지만, 관에서 받은 훈장은 평생 동안 단 하나도 없었다.
출판사서평
『점과 선』 제 2탄. 그러나 후일담 아닌 새로운 시작 『시간의 습속』
시간의 상투성을 비웃는 범인의 알리바이, 재결합한 『점과 선』 명콤비의 분투기
4년 만에 재회한 도리카이 형사와 미하라 경위
『시간의 습속』은 1961년 5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잡지 『여행』에 연재되었다. 세이초가 이 잡지에 『점과 선』을 연재한 게 1957년이니 정확히 4년 만이었다. 실제 소설 속에서도 『점과 선』에서 발생한 사건으로부터 4년 뒤라는 설정이다. 새 연재에 앞서 마쓰모토 세이초는 『점과 선』 시절의 주인공 도리카이 주타로와 미하라 기이치를 재회시키기로 결정한다. 전 생애를 걸쳐 750편의 저서(이 가운데 장편소설은 100편)를 남긴 작가가, 동일 인물을 연이어 출연시킨 것은 『시간의 습속』이 처음이었다.
『시간의 습속』은 범인을 미리 상정하고 그 범인의 알리바이를 깨뜨려가는, 이른바 ‘알리바이 허물기’ 소설이다. 범인 미네오카 슈이치는 ‘축제’에서 찍었다는 사진의 ‘필름’을 강력한 알리바이로 삼고, 미하라 경위는 그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미네오카의 이동 경로를 추리를 통해 재구성한다. 또한 어긋난 출세욕에 저지른 업무상의 배임 행위를 살인의 동기로 제시해서 고도 성장기의 출세 지향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고, 범인의 조력자를 ‘게이’로 설정해서 변화한 사회의 성 풍속을 그리는 등, 사회파 작가다운 관점이 소설의 요소요소에 잘 투영되어 있다.
아저씨 형사들의 리얼 분투기
가급적 상상을 배제하고 작중 인물의 인간성을 중시한 세이초의 작품에 신처럼 전지전능한 명탐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는 사건의 진실을 추구하는 주인공이 있는 것으로 족하다. 따라서 당장 눈앞에 떨어진 불똥을 치우기에 급급한 회사원이건, 검사 같은 전문직이건, 또 본편에 등장하는 형사와 같은 직종이건, 그의 작품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시간의 습속』의 주인공인 미하라 경위와 도리카이 형사는 평범한 인물들이다. 이들에게는 셜록 홈즈처럼 단서 하나로 상대를 간파하거나, 안락의자에 앉아서 범인의 트릭을 깨부수는 능력 따위는 없다. 초반에 범인을 가려내는 안목의 날카로움이나 인간성에 대한 통찰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오랜 현장 경험에서 연마된 생활형 형사일 뿐이다.
가령, 미하라는 하루에 커피 세 잔은 꼭 챙겨 마시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단골 찻집에서 진하게 내린 커피를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다. 또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인의 머리를 탓하기도 한다. 한편 도리카이는 “방 두 칸짜리 집의 툇마루에서 화분 대여섯 개를 키우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사람으로, 쉰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력적으로 출장을 다니는 강철 체력의 소유자다. 생각해보면 왠지 우리 곁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인물들 아닌가. 바로 이런 점들은 독자들이 세이초의 작품에 친근함을 느끼는 요인이기도 하다.
트릭을 위...
트릭을 쓰되, 트릭을 풀기 위한 수사 과정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세이초의 기본 방침이었다. 이런 바탕을 깔고 있는 세이초의 소설들은 자연히 세태를 반영하게 되었고, 늘 ‘추리’보다는 ‘사회파’라는 타이틀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 그의 미스터리 소설들이 전후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다른 미스터리 작가들이 ‘완벽한 트릭’을 짜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당대의 현실을 그리는 일에 소홀했던 것에 비해, 마쓰모토 세이초는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형식 위에서 ‘지금 여기’를 묘사할 줄 알았다.
하지만 트릭을 구성하는 그의 능력이 출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점과 선』에서 도쿄 역 4분간 트릭을 선보여서 세상을 놀라게 했듯이, 그의 작품들 중에는 ‘본격 추리’라고 불릴 만한 트릭 중심의 작품군이 분명히 존재한다. 『점과 선』과 같은 시기에 저술된 『눈동자의 벽』, 전후 일본의 혼란상을 한 개인의 실종 사건으로 형상화한 『제로의 초점』, 한센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멸시를 미스터리로 승화시킨 『모래그릇』 등은 트릭의 빼어남으로 독자들을 흥분케 한 작품이다. 이번에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시간의 습속』도 이런 계열에서 시공간에 대한 상투적 관념을 깨부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와 시대상 묘사,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시간의 습속』에서는 트릭의 도구로 ‘필름’, ‘비행기’, ‘기차’라는 세 가지 장치의 조합을 선보인다. 『시간의 습속』이 쓰여진 1960년대는 일본이 한창 고도성장의 박차를 가하던 때로, 급격히 늘어난 경제적, 시간적 여유 덕에 여행붐이 일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대중들에게 폭넓게 보급되었고, 기차 여행이 일반화되었으며, 보통 사람들의 비행기 이용도 증가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해서 『시간의 습속』의 범인 미네오카 슈이치는 기차와 비행기를 자유자재로 갈아타면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공고히 한다. 또 살해당한 피해자 도이 다케오는 운수업계의 업계 신문 발행인, 미네오카는 택시 회사의 간부라는 사회적 위치로 설정되었다. 즉 이 소설은 현대화에 따라 기간 시설이 확고해져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관련 산업이 번창하던 시대를 그려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세이초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당시에는 생소했던) 비행기의 탑승법, 새롭게 개통한 특급열차의 운행 시간 등을 다룬다. 또 주인공 미하라의 관점을 빌려 텔레비전이라는 신문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장치들은 오늘날의 시점으로 볼 때 조금 예스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 누군가에게는 그 시절의 풍경을 회상케 하면서 독자를 아련한 감정으로 이끌기도 할 것이다.
『시간의 습속』의 줄거리
가나가와 현에 있는 사가미 호수에서 근처 여관에 머무르던 남녀 여행객이 산책을 간다고 하고는 자취를 감춘다. 수색 결과 남자는 교살 사체로 발견되고 여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피해자는 운수 업계 신문 발행인 도이 다케오였다. 사건을 맡은 경시청의 미하라 경위는 관련 인물 중 가장 혐의가 없는 택시 회사의 전무 미네오카 슈이치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미네오카에게는 사건 당일 규슈 동북단에 있는 메카리 신사에서 거행된 연례행사를 관람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러나 미하라에게는 이 알리바이가 뭔가 석연치 않다. 하지만 미네오카가 사가미 호수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데 미하라는 매번 어려움을 겪고, 조사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때 후쿠오카의 미즈키에서 교살로 추정되는 젊은 남성의 사체가 발견되고, 후쿠오카 서의 도리카이 주타로 형사는 미네오카가 타인의 명의로 정기권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고심에 고심을 더한 살인’인 만큼, 미네오카는 난공불락의 성에 숨어서 미하라를 비웃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증주의를 채택하는 형법의 원칙상, 어느 정도의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범인을 법정에 세울 수 없다. 미하라는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면서 집요하게 범인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마지막까지 그의 덜미를 잡는 것은 범인이 축제 현장에서 직접 찍었다는 사진의 필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