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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가와 4 - 야나가와 운하에서 일본 최고의 무장 다치바나씨를 회상하다!
11월 11일 JR 과 사철 니시테츠( 西鉄天神大牟田線) 로 찾아간 야나가와시 柳川市(유천시)
는 후쿠오카현의 남부 아리아케해에 있는 “물가의 마을” 로.... 사공이 돈코부네
라고 부르는 배에 손님을 태우고는 삿대로 젓는 "뱃놀이 야나가와 구다리" 가
유명한데, 후쿠오카시의 덴진 에서는 사철 니시테츠 텐진오무타선 으로 45분이 걸립니다.
1467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승계 전쟁인 응인의난 후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에 지금의
후쿠오카 는 당시 지쿠고 (筑後 축후) 라고 불리웠는데... 지쿠고의 최대 영주는
후쿠오카현 최남단인 여기 야나가와성 (柳川城 유천성)의 성주 가마치 (蒲池) 씨 입니다.
“미즈마군지(三瀦郡誌)” 에 의하면.... 가마치 히사노리 는 성곽을 확장하고 가시마 묘진에게
제례를 올리며 야나가와 柳川 조카마치(城下町 성아래 마을) 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분고(오이타)의 영주 오토모 씨가 후쿠오카로 진출하니 가마치씨는 오토모에게 귀부 합니다.
이후 사쓰마의 시마즈 씨가 북상하자 오토모씨를 배반하고 히젠(사가)의 류조지 씨에 붙은
가마치 시게나미 는 1579년 헤바루 공격에 참가하는등 류조지씨에게 충성 했으나.....
때때로 전장을 이탈해서 가문의 거성인 야나가와 에 돌아갔기 때문에 점차 신뢰를 잃습니다.
가마치씨 는 사가의 류조지 다카노부 에게서 벗어나 "자립" 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자
류조지씨는 1580년 1만3천으로 야나가와성 을 공격하는데, 사전에 예상하고 물가에
말뚝을 박고 가시나무로 울타리 를 만드는 등 야나가와성 방어 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여기 야나가와 에서 벌어진 류조지군과 가마치군의 공방전은 1백여일간 계속되었고
서로 지치자 외삼촌 다지리 아키다네의 중재로 가마치 시게나미 와 류조지 다카노부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으니..... 류조지 가문 다마쯔루히메를 아내로 맞이하고 귀부 합니다.
그러나 다음해 가마치 시게나미 는 몰래 사쓰마(가고시마)의 시마즈씨에게 내통 을
시도했고 규슈 통일을 위해 북상 중이던 시마즈씨 도 이것을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외삼촌 다지리가 편지를 증거로 밀고 했다지만 진상을 알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을 안 류조지 다카노부 는 격노했지만 야나가와성 을 공격하면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고 생각하여 시게나미를 스고성으로 초청해 계략 으로 죽이려 하니
류조지 가문으로서 가마치와 정략 결혼한 아내는 친정의 계략 을 눈치채고 말립니다.
다카노부는 화의가 성립된후 화의의 예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사가로 시게나미를
소환 하니 거절하려고 했으나..... 어머니와 백부에게 설득되어 결국 사가 로
가게되는데 사가성에서 가마치 시게나미는 류조지 다카노부의 장남 마사이에 를 만납니다.
화의의 예를 올리고 류조지 가문과 서로 정중한 인사를 주고 받으며 후한 대접을 받고는
이틀후 류조지 다카노부의 거성 스코를 목표로 한 가마치 일행이 시요카의 바바 에서
류조지군이 사전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하니 가마치 시게나미는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류조지씨 는 다카오 성주 다지리 아키타네 에게 야나가와의 가마치 잔당을 토벌 하라는
명을 내리니 아키타네가 누님(시게모리 어머니) 이 거처하는 야나가와성 을 공격하자
시게나미의 동생 가마치 무네하루 는 성을 넘기고 도망갔기 때문에 토벌은 중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마치 무네야스 등이 시오즈카성 에서 농성하자 다지리는 3천명의 병사로 토벌에
나서니, 사가에서 류조지씨의 중신으로 훗날 임진왜란에 참전해 도공을 잡아와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해 일본의 명성을 유럽에 떨치는 나베시마 나오시게 도 원군으로 출진합니다.
전 성주 시게모리의 외삼촌 다지리와 가마치의 병사들 중에는 야나가와군과 서로 형제나
인연이 있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동족상잔의 혈전 끝에 시오즈카성은 낙성 되는데
이어 류조지 다카노부는 다지리에게 사루카키촌의 가마치 무네하루 도 제거하라 명합니다.
가마치 무네하루가 전사하니 지쿠고 최대 세력을 자랑하던 가마치씨 종가는 멸망 합니다.
에전에 시게나미의 아버지인 가마치 아키모리 는 류조지 다카노부 가 궁지에
몰렸을 때 물심 양면으로 그들 류조지씨를 도와 멸망을 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류조지 다카노부 가 "은혜를 입은 가마치씨를 멸망" 시키자 부하인 아리마씨 는
두려움에 시마즈씨와 연락을 취해 북상한 사쓰마군에게 류조지 다카노부가 죽으니
“자비는 사람을 위한것이 아니다” 라... "자비를 원수로 갚은 벌" 을 받은게 아닐까요?
이후 히젠(사가) 류조지씨 중신 나베시마 나오시게 는 수성을 통해 시마즈군의 공격을
방어 하고는..... 때마침 규슈로 진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군 에 합세해서는
시마즈씨 사쓰마군을 격파하고 후일 "임진왜란에 가토기요마사 제2군" 으로 참전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인 1600년에 일본의 새 주인 자리를 놓고 어린 아들을 지지
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8만명 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10만명 이
일본의 운명을 가르는 전쟁인.... 교토 동쪽 세키가하라 에서 전투에 돌입하게 됩니다
여기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에도(도쿄) 에 막부를 여는데 미카와의 10만석
영주 다나카 요시마사 는 동군에 참전했으니.... 전후에 여기 야나가와 33만석
번주 로 전봉되지만 다나카씨의 야나가와 柳川 지배 는 불과 20년에 그치고 맙니다.
야나가와 번주 자리는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宗茂(입화종무) 에게로 돌아가게 되는데...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1567년 붕고(오이타) 오토모 가문 의 중신인 다카하시 쇼운 의
아들로 태어나 동료 가신인 다치바나 도세쓰 의 사위가 되어 다치바나 가문 을 계승합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1584년 다치바나야마성 을 맡아 아키쓰키 다네자네가 지휘하는 8천을
물리쳤고 2년후 사쓰마군이이 지쿠젠노쿠니 로 침공해 오자 부친인 다카하시 쇼운은
전사했으나...... 그는 거짓 항복 등의 계략으로 시마즈씨의 본진을 기습 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시마즈군을 추격하여 다카토리이 성을 공략하니 마침 규슈로 진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인정을 받아 1587년 야나가와 13만석 영지 를 받았는데.....
히고(구마모토) 고쿠진 잇키 가 일어나자 하루에 13번을 싸우고 7개 성을 함락 시켰다나요?
임진왜란시 부산진, 동래, 상주를 거쳐 탄금대전투에 승리하고 평양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 와 함경도에서 조선 왕자를 잡고 정유재란시 울산성을 사수한 가토 기요마사,
8천으로 4만의 명나라와 조선군을 사천신성에서 대파한 시마즈 요시히로 도 유명하지만....
소규모 병사로 대승 한 왜장이 둘 있으니 하나는 수군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로 70척 판옥선
가진 부산 경상좌수영 박홍 이 겁에질려 단 한척의 배도 출진시키지 않고 배를 불사르고
도망쳤으며 경상우수영 원균도 후퇴하자 할일이 없게된 왜 수군은 상륙해 서울로 진격합니다.
선조가 도망치고 서울이 함락되자 전라감사 이광의 2만, 전라방어사 곽영이 2만, 충천감사
윤선각 1만 4천에 경삼감사 김수등 조선 근왕군 6만여명 은 서울을 수복하고자 용인에
이르니 와키자카 야스하루 는 1천 6백 왜군 으로 40 배에 달하는 조선군 을 몰살 시킵니다.
6월 3일 조선군 선봉 백광언이 2천으로 문소산을 공격했으나 패한후 6월 6일 왜군 1천 6백은
기마 5기를 앞세워 조선군을 습격하니 충청병사 신익이 무느지자 조선군은 혼비백산해
밟고 밟히며 수백리를 달아나 고향까지 도망치니 광주유수 권율이 1천을 수습 했을 뿐입니다.
노략질하던 왜군 배들이 조선 수군의 공격 을 받자 서울로 올라간 수군 와키자카 는 웅천으로 내려오는데...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 등 수군 장수들과 연합하라는 지시를 전공을 탐해 무시
하고는, 자기 부하 1,500명으로는 25척 동원도 어려우니 우키다 히데이에의 병사 및 세토내해 해적들과
노군으로 조선인 포로들에, 작은 배라 전투하기도 힘든 고바야부네 13척까지 끌어모아 73척의 함대 로
견내량에서 이순신 24, 이억기 25, 원균 7등 56척 + 거북선 2척 조선수군과 한산도 해전 을 벌여 참패합니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든 튼튼한 배로 크고 높으며 120명이 탑승하는 전함 인데 비해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 는 삼나무로 만들어 약하며 작고 낮아 75명 이 승선하는 수송선 이니
조선 배에 다가가 올라타서 육박전을 벌여야 하지만.... 낮은 배에서 높은 배에 오르지 못하고
그전에 조선 수군은 조총 사거리 밖 멀리서 대포로 공격하니 접근 조차 못해보고 부숴 집니다!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109척 부술 때 아군 전사자는 11명 이며
한산도 해전 에서 왜선 59척을 부술때 전사자는 3명 이고 영화 명량 에서는 이순신 장군
배에 왜군이 올라타 치열하게 싸워 서로 무수히 죽는걸로 나오지만, 실제 아군 전사자는
2명 이라? KBS 임진왜란 등 육박전은 모두 거짓 이니 와키자카는 조선 대포 에 당한 것이지요!
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 한산도 해전에서 참패한건 계속되는 승리로 교만 해졌기 때문이라!
40척 판옥선 가진 조선 일선의 수군인 부산 경상좌수영 박홍 이 두려움에 질려 도주하니...
부산에 공짜로 상륙 해서 서울을 무혈점령하고, 원균은 부임 3개월에 준비가 없어 후퇴하니
수군 주제에 용인에서 왜군 1천6백으로 6만여명 조선군을 몰살 시킨 것이 화를 키웠나 봅니다!
몇년후 정유재란에서 와키자카는 한산도 해전 패배를 교훈 삼아 조선수군을 부산에 끌어들여
지치게한 후 후퇴하는 조선군을 추격해 급습하니 후방에 있다가 도주한 배설의 12척 외에
148척을 칠천량 에서 격침하니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저 도망병 12척 으로 133척을
맞아 1597년 9월 16일 명량에서 적선 31척을 부수는 대승리 를 거두었으나 바로 후퇴합니다.
명량해전에서 대승했으나 포탄과 화약이 소진된 조선 수군 처지에.... 왜군은 후방에 배가 300척
가까이 있으니 일부가 진도 바깥 바다 로 돌아와 포위되면 전멸 이라 생각하고는 승리한 날
저녁에 우수영에 들러 쉬지도 못하고 노를 저어 신안군 당사도로 물러나 배에서 밤을 새우고는
군산 선유도 까지 후퇴하시니... 왜군은 다음날 다시 쳐들어와 우수영을 점령하고 목포 를 거쳐
영광 까지 전라도 바다를 점령하고 조선인을 약탈, 강간, 살륙하며 불지르고 잡아서 끌고갑니다.
정유재란때 왜군 병사는 조선인의 코와 귀 한되씩을 베어 바치라는할당을 받은지라 이순신 장군이 후퇴한
전라도 해안은 아수라 지옥 이라!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주자학(성리학) 을 전해준 전 형조좌랑이자
의병장으로 간양록을 쓰게되는 강항 은 명량해전 대승 7일 후인 9월 23일 영광 앞바다에서 나포되어
수천명 조선인들과 함께 일본에 끌려가는데.... 겨울이 되어 왜군이 물러가니 장군은 우수영 으로
돌아 오시지만 성 안팎에 그 많던 백성들이 단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으니 모두 죽거나 끌려간 것입니다?
와키자카에 이어 두번째 맹장은 여기 야나가와 번주 다치바나 무네시게 이니.... 명나라 이여송 은 4만
3천에 조선군 1만, 합계 5만 3천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1만이 지키던 평양성을 공격해서 함락
하고는 이여송이 급히 추격 하는지라 서울의 왜군은 위기를 맞이하는데.... 벽제관 전투 에서 저지합니다.
평양전투 승리에 도취된 이여송은 서울을 빨리 되찾겠다는 마음에 기마병만 이끌고 추격하니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3천 병력 으로 고바야카와 1만과 벽제관에 진을 친후 철포 속사와
기습을 활용해 명군을 격파 하니....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이여송은 전투 의욕마저 상실 합니다!
또 제2차 진주성 전투 에서 명의 장수 유정 이 임호에게 4만명 을 주어 진주성을 도우려고
하자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불과 4천의 병력으로 4만의 명군을 격퇴 하였으며
정유재란 때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 함께 수군을 이끌고...
거제도에서 원균의 조선함대 160척중 도망친 배설의 12척 을 제외한 전부를 격침시켰으며
제1차 울산성 전투 에서는 명의 장수 고책이 이끄는 2만 병사가 일본군 본진인
부산을 급습해 오자.... 겨우 2천명의 군사만으로 야습과 화공 을 사용해 명군을 물리칩니다.
1598년 제2차 울산 도산성 전투 때는 포위되어 궁지에 몰린 가토 기요마사 를 구원
하기 위해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직속부대 1천명 만 이끌고 진격하여.....
야습, 거짓 정보 흘리기, 적군 유인 등의 계략으로 포위를 깨고 가토를 구출해 냅니다.
히데요시 사후 일본군에 퇴각명령이 내려졌을 때, 28개 남해안 왜성 중에 27곳은 막아서는 조선군
이나 명군이 없었으니 전리품을 싣고 편안하게 돌아갈수 있었으나.... 오직 순천 왜성에 고니시
유키나가 는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 봉쇄 를 당하여 퇴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는....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다카하시 무네마스, 시마즈 요시히로, 소 요시토시 등과 함께 수군 을 편성해 구원합니다.
조선군은 모두 왕의 군대이니 지휘관이 죽으면 병사들은 새 지휘관을 맞이하면 되지만 일본은 영주 개인
의 군대 라! 히데요시가 죽었으니 일본에서 내란 이 일어날테니 자기 병력을 보존 해야 함에도....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진린과 이순신의 수군과 노량해전 을 벌였으며 일본 함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다치바나 는 고니시 구출에 성공하게 되지만.... 자신의 병력 대부분을 잃는 아픔 을 감수했지요?
일본의 새 주인(왕) 자리를 놓고 벌어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막대한 은상을 약속 하며 맹장 다치바나 무네시게 를 동군에 가담하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회유 하였으나 그는 히데요시에 대한 은의 를 지킨다며 거절하는데 중신들이 서군은
가망없으니 동군을 편들것을 진언했으나 승패는 따지지 않는다 며 미쓰나리 서군에 참전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 오하쓰의 남편 인 오쓰성 성주 교고쿠 다카쓰구 는 명문으로 서군에
참전했으나 미쓰나리가 동군과 싸울 주요 길목인 오쓰성을 양도해 달라고 하자 격분해서
동군으로 말을 갈아타니 9월 8일 모리 모토야스가 1만 으로 공격하나 방비가 엄하자 12일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 여러 장수가 5천 원군으로 공격해 9월 15일에야 가까스로 함락 합니다.
“하야고메” 방식의 3배속으로 철포(조총) 사격 을 하여 큰 공적을 올렸지만 9월 15일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에 2만 병력이 참가하지 못했으니??? 본 전투에서 서군이 궤멸하자
오사카성으로 후퇴 하였는데..... 서군의 주장인 야마구치의 영주 모리 데루모토 에게
오사카성에서 농성 할 것을 주장했으나 데루모토는 성문을 열어 이에야스에 투항 하였지요?
때문에 무네시게 는 자신의 영지인 규슈 야나가와 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아버지의 원수로
사쓰마 번주 인 시마즈 요시히로 를 만났으니 원수를 갚으라는 가신들의 권유에 대해
패장을 치는 것은 무가의 명예 가 아니라며 물리치고 오히려 요시히로와 친분 을 맺습니다.
이 도시 야나가와 柳川(유천) 에 돌아온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구로다 요시타카군 에게 공격을 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순종함을 보이기 위해 자신은 직접 출병 하지는 않습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오노 시게유키 를 총대장으로 하여 1천3백명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 의
군대에 승리 를 거두기도 했으나 여기 야나가와성 에서 농성하게 되었고, 가토 기요마사의
설득으로 항복하는데 시마즈 요시히로 가 원군을 보내왔으나 이미 투항한지 사흘뒤 였습니다.
영지를 몰수당한 무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가토 기요마사나 마에다 도시나가로 부터 가신이
될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니 가토 기요마사 는 자신의 "식객" 으로 대우하였는데
이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열심히 영입을 추진하는 데에는 차마 거절하지는 못합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 는 게이초 8년 에도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친위대장 으로 기용됩니다.
이후 다나구라 번 1만석 을 부여받아 다이묘로 복귀 하게 되는데 영지는 점차 늘어나
3만 5천석 에 달했고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휘하에서 그 경비를 담당합니다.
1620년에 이르러 다치바나는 예전 영지인 야나가와 11만석 의 땅을 받으면서 다이묘 로서
완전히 복귀하니 명실공히 "일본 최고의 지략가 무장" 에 대한 상응한 대우 라...
도쿠가와에 항거한 서군 장수는 몰살 되었는데 일본최고 무장이라 대접 이 달랐던 것이지요?
1637년에 발생한 천주교도들의 반란 인 나가사키 "시마바라의 난" 에 참전하여 예의 전략
과 전투 실력 을 다시 보여 주었으며.... 이듬해 양자 다다시게에게 가문을 계승케 하고
사직한후 다음해에 죽으니 아들은 여기 야나가와 에 "다치바나 정원" 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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