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메 2 - 구사노 마을에서 구사노 노부타네, 곧 사야가 김충선(?)을 회상하다!
11월 11일 후쿠오카현 남부에 자리한 물의 도시 야나가와 柳川(유천) 의 운하
에서 뱃놀이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는 야나가와역에서 후쿠오카행
사철인 니시테츠 기차 를 타고는 구루메 久留米 (구류미) 역에서 내립니다.
구루메역 인포메이션 에서 교통편 을 알아 보고는 우에하라행 25번 버스
를 타고 구사노 草野の(초야) 에 도착하여 기차역으로 찾아가
시간표를 확인한 다음에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신사와 절 을 구경합니다.
여기 구루메 교외에 구사노의 거리 草野のまち並み 는 중세 호족인 구사노씨
草野氏(초야씨) 의 성읍 도시 로 번창했던..... 매우 오래된 거리로
신사와 절 을 거쳐서 야마베노미치 문화관 (山辺道文化館) 에 도착 합니다.
16세기 센고쿠(戰國) 시대에 히젠국(사가현) 마쓰우라의 하라다 다카타네의 아들인
시게나가 는 여기 구사노씨 가문에 양자 로 들어와 구사노 시게나가 가 되어
이 고을 구사노 草野の 의 지배자 가 되었는데 1560년에 고로 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히젠(사가현) 의 류조지씨 가 압박해 오자... 아들 고로를 인질 로 보내는데
이후 하라다 본가의 상속자 치카타네가 오토모씨에게 패해 할복하자
손이 끊기니 고로는 본가로 복귀 해서는 "하라다 노부타네" 原田 信種 라 불립니다.
1578년 북규슈의 패자 부젠(오이타)의 오토모씨 가 사쓰마(가고시마)의 시마즈씨 에게
미미가와 전투에서 참패를 하니.... 하라다 노부타네 는 류조지씨 휘하로 들어 갑니다.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씨가 시마즈에게 대패해 시마즈씨가 규슈를 제패하자
노부타네는 시마즈씨에 종속 하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군 이 규슈로 진군해 옵니다.
이에 시마즈씨에게 속했던 하라다 노부타네 는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게 항복
하는데, 영지 규모를 속인게 발각되어 여기 구사노 草野の 영지를 몰수 당하고
삿사 나리마사 휘하를 거쳐 가토 기요마사 가 번주인 히고(구마모토) 로 전봉됩니다.
다카스야마 성의 성주 로 있던 하라다 노부타네 는 1592년에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제 2군인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좌선봉으로 출병해 전사 하는데.....
임진왜란때 유학의 나라 조선을 흠모해 귀순한 사야가 김충선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토군 좌선봉 이란건 조선측 기록이고 일본에는 저런 기록은 없으며
조선측에서는 전쟁 초기인 1592년에 귀순한 것으로 나오나......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인 1597년말 울산 도산성 전투에서 죽은 걸로 추측 합니다.
하지만 하라다 노부타네 는 일본측 기록 처럼 1597년 말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1592년 조선에 상륙하자 마자 항복 해 조선을 위해
싸운 사야가 沙也可 김씨 (김해 김씨), 훗날의 "김충선"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반대한 장수 로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 하여 동래성 전투후 바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 에게 "귀순" 하고는 왜적에 대항해 큰 공을 세우는데.....
몇년전 KBS 극에서는 사야가가 3천명 병사 를 데리고 투항했다는데 숫자 는 믿기 어렵네요?
임진왜란 제2군 은 가토군 1만, 히젠의 나베시마 나오시게 1만, 하타 미카와수 2천
사가라 요리후사 800등 22,800명이고, 가토 기요마사 직할 1만은 부장급 무사 150
말탄 하급무사 580, 조총부대 1,820, 궁병 250, 닌자 10명에 일반 병사 7,200명 입니다.
150명 부장 중에 하나인 그가 1만 가토군 중에서 3천이라는 대군 을 거느릴수도 없고 또 전쟁
초기라 제2군은 전투도 없이 그냥 행군중 인데, 3천 대군이 기요마사의 눈을 피해 독자행동
하기도 불가능하며 3천명이 처자와 지위 를 버리고 모두 한날한시에 행동을 같이 할수는 없지요?
1592년 고니시 1군 은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15일 동래성을 점령한후 28일 탄금대
전투를 치를때, 4월 17일 부산에 상륙한 가토군은 불과 11일만에 충주 까지 따라왔는데
부산서 장정이 걸어와도 보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왔으니 전투는 거의 치르지 않았지요?
전장에서 대규모 병력이 적에게 투항 하는 것은 아군이 전투에서 대패해 풍비박산 이 날 때 인데....
가토군의 1차 전투는 5월 17일 임진강 전투이니 그전엔 전투없이 행군만 했을뿐 이라
1만 중에 3천명 이라는 대규모 병력이 이탈했다면 가토군이 그냥 빠르게 진군하는건 불가능 합니다?
이런 엉터리 터무니없는 사실 을 사야가 김씨 문중에 내려오는 사적인 기록 하나를 근거로
한국 역사학계에서 언급하고 또 KBS 극에서 태연히 말해진다는게 참으로 한심한
일인데.... 임진왜란 전사에서 볼때 "3천명이 아니라 서너명이 투항"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본 에서는 사야가 김충선이 조선군에 조총술을 전수 했다는 점에서 와카야마현의 사이카
(雑賀) 라고 불린 철포부대 의 스즈키 마고이치 (鈴木孫一) 가 그라고도 하는데....
그러니까 조선인에게 사이카(雑賀) 라고 말한게 사야가 沙也可 라고 바뀌었다는 뜻인가요?
또는 사이카슈 에 소속 된 스즈키 요시유키 (鈴木善之) 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요시유키의
이름이 김충선의 자인 선지(善之) 와 같다는 점에서 그라고도 본다는데.... 또는
사이난가쿠인대학 마루야마 교수는 사야가 가 하라다 노부타네 (原田信種) 라 주장합니다!
사이카 부대 의 스즈키 마고이치는 반 히데요시 세력 으로 가토의 선봉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인데.... 가토 가 출병 전에 작성한 예하 부대 장수 명단 에
사야카 란 이름은 없지만 철포대 를 보유하고 있던 하라다 노부타네 가 있다고 합니다.
사이난가쿠인 대학의 마루야마 교수는 하라다 노부타네 가 조선 출병후 바로 기록 에서 사라
졌으니.... 전사했는데 확인 이 안되었거나 또는 투항 했거나 둘 중 하나 라는 의미 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에 기록된 사야가 (沙也可) 는 일본에서는 성 보다는 이름 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에는 사야 라는 지명 도 여럿 있고
우리나라 기록은 일본 장수들의 이름을 틀리게 기록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사야가는 조국 일본 에서 보자면..... 매국노요 배신자이자 역적 입니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자 말자 투항해 조선군 으로 조국 일본과 싸웠으니 조국에
살고 있는 "부모와 처자식의 안전" 때문에라도 본명 을 사용할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야가 그는 조선군에 조총 사격술 을 전수하고 전공도 높으니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으로 김해 김씨 성 과 충선이라는 이름 을 하사 받고 자헌대부 에 올랐으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 해서 사성 김해 김씨 라고 부르는데 정유재란 때도 전공을 세웁니다.
그후 오랑캐의 침입 으로 변경이 소란하자 10년간 국경방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정헌대부가 되었으며 1624년 이괄의 난 때는 부장 서아지를 잡아 죽인
공으로 조정에서 사패지를 하사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 으로 삼게 합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광주(廣州) 쌍령 싸움에 출전해 오랑캐 500여명을 베었으나(?)....
임금이 항복하자 통곡하며 대구로 돌아갔는데 이후에 가선대부 를 제수 받습니다.
청군 5백명을 혼자서 베었다니? 임진왜란때 3천명 일본군 부하들을 거느리고 조선군
에 투항했다는 것 만큼 터무니 없으니 게다가 "쌍령전투는 조선군이 전멸한 전투" 입니다?
1636년 12월에 청태종이 12만을 이끌고 침공하자 도원수 김자점 은 황주 토산에서 패한후 경기도
양평에 패잔병등 1만 7천이 모였지만 겁을 먹은지라 인조가 항복할때 까지 움직이지 못합니다?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남진하지 못하고 웅크린 가운데 강원도 금화로 온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
3천은 한 싸움에 괴멸당하고 산 위에 병사 유림의 2천은 적을 물리쳤으나 병사가 적어 후퇴 합니다.
충청관찰사 정세규가 험천에서 패한 후에 전라병사 김준룡의 2천은 용인 광교산에서 승전 하나
탄약과 식량부족으로 수원으로 후퇴 하니 전라감사 이시방은 6천 을 가지고도 겁에 질려
후퇴해 소멸되고... 강원도 관찰사 조정호와 함경도 민영휘도 패하는데, 경상도 감사 심연은
3만 속오군 을 소집해 북상하며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의 8천은 광주 쌍령 에 진을 칩니다.
청군은 3천으로 선봉 33기가 4천 허완의 진영 으로 쇄도하자 겁에 질린 조선군은 함부로 총을
난사하다가 탄약이 떨어진 것을 안 청군이 돌격하자 도주하는데.... 허완은 말에서 떨어져
도망치는 아군에 밟혀죽었고... 청군 3백이 4천 민영 진으로 돌진하자 총을 난사하다 화약을
분배하는 중에 폭발사고로 전멸 당했는데, 김충선이 무슨 수로 혼자 5백기를 베었다 는 것인지?
1월 28 쌍령전투 에서 지휘관 8명 중에 장수 2명과 부장 5명등 7명이 전사 하고 김충선 혼자
살아 패잔병과 함께 후퇴하니 여주에 있던 경상감사 신원등 2만 조선군 은 공포에 질려
멀리 조령을 넘어 경상도로 후퇴해 버리고, 양평의 1만 7천 도원수 는 움직이지 않으며
전라도 병사들도 전투없이 달아나자 고립무원이 된 인조는 1월 31일 삼전도에서 항복 합니다.
1차 전투에서 승전 한 평안 병사 유림과 전라 병사 김준룡이 후퇴한 이유는 당시 조선군은
조총병인데 단 하루 전투로 총탄과 화약이 소진 된데다 식량이 떨어졌으나 보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도원수 김자점의 1만 7천 이 남한산성의 임금을 구원하지 못한 것은
야전에 대한 두려움 인데 경상감사와 전라감사 병력이 전투없이 도주한 것도 공포심 이라!
사야가 김충선 은 공자와 맹자에 정호와 주자 로 이어지는 주자학 을 숭상한 사람으로
명분을 좇아 조선에 귀부 했으나.....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향수 는 어쩔수
없었으니 김충선이 남긴 시문에는 고국 일본 에 대한 애절한 향수 가 곳곳에 보입니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
친척과 이별하며 형제와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
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 ( 술회가·述懷歌 )”
“남풍이 건듯 불어/ 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
홀연히 바람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허탈히 탄식하고 앉았으니/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至親) 소식 알 길이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 남풍유감·南風有感 )”
사야가 김충선의 장남인 경원(敬元) 은 아버지 행장 에서 “매양 선대의
제삿날 을 당하면 종일 눈물을 흘리시고 남풍이 불면 의대를 풀고
남(南)을 향해 길게 한숨지어 탄식하고 때로 눈물 지으셨다” 고 적었습니다.
여기 구사노 草野の(초야) 마을을 다스렸던 "하라다 노부타네" 原田 信種 가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 귀부한 "사야가 김충선" 이라는 사이난가쿠인 대학 마루야마 교수의
말에 믿음이 가는지라, 그가 임진왜란에 이어 이괄의난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까지
공훈을 세워 사성 김해김씨 가 되었지만 고향을 애타게 생각했던 일 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일본에 주자학 을 전하는 조선 선비 강항 은 배를 타고 피난했다가 명량해전 승전 7일후 1597년 9월
23일 영광 앞 바다에서 명량해전 승전 당일 바로 후퇴해 군산 선유도로 피한 이순신을 추격해
온 왜군 배에 나포 되어 일본에 끌려가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주자의 주석에 훈점한
사서오경 왜훈을 출판하니 비용을 댄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 는 통행증 까지 얻어
주고 귀국 비용까지 부담해서 1600년 4월 2일 강항 일행 38명을 배에태워 부산 으로 보내줍니다.
사야가 김충선과 아카마쓰 히로미치는 유학의 나라 조선을 흠모 했으니 강항은 간양록에
" 아카마쓰는 일본의 무장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마음' 을 지녔으며 공자묘를
세우고 3년상 을 치르며 중국의 제도와 조선의 예법 을 착실히 따랐으며.... 조선
선비들에게 유교 경전의 필사를 요청하고 옷과 음식마저도 조선을 본뜨려고 했으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말 위에서 까지 책 을 놓는 일이 없었다" 고 간양록에 적었습니다.
한가지, 각 집안에 내려오는 사적인 문서 들은 조상의 공훈 을 높이기 위해 과장된게
많은데도 우리 역사학계와 KBS 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염려하면서, 회상
에서 깨어나 야마베노미치 문화관 을 뒤로 하고 마을을 한바퀴 돌며 구경하고는...
구루메 로 가기위해 걸어서 JR 지쿠고구사노 築後草野(축후초야) 역으로 찾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