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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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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유 게시판 스크랩 파평윤씨 가계도
용연봉강재사랑 추천 0 조회 433 17.01.05 02: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계도: -()-()-종덕(種德)-맹진(孟畛)-연기(衍基)-(?)-윤번(允蕃)-]

 

휘 서 (?) 사직공 (司直公) 의 맏며느리가 되시며 휘 윤번 (允蕃; 1460~1539) 가선대부 사간원대사간 (嘉善大夫 司諫院 大司諫) 의 배위가 되시는 숙부인 (淑夫人) 파평윤씨 (坡平尹氏, 1458~1524) 는 사직 (司直; 5) 윤사연 (尹師淵)  22녀중녀요, 광주목사 (光州牧使; 3)  윤은 (尹垠)   손녀요,  호조판서 (戶曹判書; 2) 윤희제 (尹希齊) 의 증손녀요,  파평군 (坡平君) 우참찬 (右參贊; 정2품)  윤곤 (尹坤) 의 현손녀요, 기계인 (杞溪) 직강 (直講; 5) 유목로 (?牧老) 의 외손녀이셨다.

 

숙부인 윤씨 역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여느 한산이문의 며느리처럼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며 사대부 (士大夫) 의 신분을 유지한 명가의 따님으로 태어나 곱게 성장하시다가 나중 한산이문에 시집을 오신 것이다.

 

숙부인 윤씨의 고조부가 되는 파평군 (坡平君)  소정공 (昭靖公)  윤곤 (尹坤, ?~1422) 은 개성부사 (開城府事) 윤승순 (承順) 의 아드님으로 () 국재 (菊齋) 혹은 국음 (菊陰) 이다.  시호는 소정 (昭靖) 이다. 그래서 소정공 윤곤으로 불린다. 파평윤씨 소정공파 (昭靖公派) 의 파조가 되는 분이다. 소정공파는 파평윤씨를 크게 나누는 16개 계파중 한 지파로, 판도공파 (版圖公派) 와 함께 파평윤문에서도 큰 세력을 이?던 지파라 하는데,  대한민국 파평윤씨의 80%가 소정공파와 판도공파의 후손이라 한다.

소정공은 고려 젊어서 문과 급제하여 문학 (文學) 등을 역임하였고, 아우 윤향 () 과 함께 일찌기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1392 이성계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완산부윤 (完山府尹) 지내고, 1398 대장군 (大將軍) 되었다.

 

 

소정공은 1400(정종 2) 에 이방원 (芳遠 : 뒤의 태종) 편에 서서 이방원이 그의 동복형인 이방간 (芳幹) 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였는데,이듬해 그때의 공으로 1401(태종 1) 익대좌명공신 (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군동지총제 (右軍同知摠制) 로 파평군(坡平君) 에 봉작되었다.

그해 명나라 태종 즉위를 알리는 사은사가 파견될 소정공은 사은부사 (謝恩副使) 명나라 연경에 파견되어 태종 왕위를 물려받았음을 () 하는 뜻을 전달하고 돌아왔으나,  무역마값을 잘못 정한 죄로, 파평에 안치되었다.

1406 (태종 6) 좌군도총제 (左軍都摠制) 임명되었으나,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어 파평현에 유배되었다가 나중 풀려났다. 이후 1408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은 태종 각별한 신뢰를 얻었는데, 공의 동생 윤목 (尹穆) 민무구 (閔無咎) 옥사에 연루 (1409) 되어 처형당하였지만,  공은 처벌받지 않았고, 대간의 탄핵이 계속되었으나 태종 공을 특별히 배려하였다.

1413 경주 안동도 병마도절제사 (慶州安東都兵馬都節制使) 지냈다.

1417 의정부 참찬 (議政府參贊) 지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평안도관찰사 (平安道觀察使) 로 기용되었다. 공이 학덕이 높은 것을 알고 있는 세종은 침전에서 환송연을 베풀어주는 등 크게 총애하였다 한다. 이듬해 9월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공의 파격적인 출세는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기악 (妓樂) 을 폐지하여 풍속을 바로잡으며 기생들의 풍기 문란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또한 학문을 장려하여 문풍을 확산시키기도  하는등 많은 치적을 쌓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 뒤 우참찬까지 지냈다. 공은 성질이 관후 (寬厚) 하고 풍채가 매우 좋아 복옹 (福翁) 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실록에 실린 공의 졸기를 보면 공이 별세하였을때, 조정에선 3일동안 조회를 폐하였다고 한다. 두 임금이 (=태종과 세종) 행재소 (行在所) 에 있다가 부음 (訃音) 을 듣고 육선 (肉膳) 을 먹지 않았으며, 태상왕 (=태종) 은 그를 부원군 (府院君) 에 임명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였다 한다.  병조와 승정원에서 계하기를,

“기년상 (期年喪) , 대부 (大夫) 는 강등 (降等) 을 하고, 제후 (諸侯) 는 없애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이 제도를 행한 지가 오랜데, 외간 (外間) 에는 이를 알지 못할 뿐이다. 임금이 대신이 졸하였다는 말을 듣고 감선 (減膳) 하는 것은 비록 옛날의 제도에는 없지마는,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삼년상 (三年喪) 을 입으니, 임금이 신하를 위하여 3일 동안 육선 (肉膳) 을 먹지 않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적고 있다. 산람 (山嵐) 의 장기 (?氣) 가 두려우므로, 굳이 〈육선(肉膳)을 들기를〉 청하니, 그제야 마지못하여 따랐다 한다. 인하여 3일 동안 감선하는 법을 만들게 하였다. 실록은 공을 평하기를, “공신 (功臣) 으로서 부귀 (富貴) 를 보전하였으니, 세상에서 복노인이라고 일컬었다. 소정 (昭靖) 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용의 (容儀) 가 아름다운 것을 소 () 라 하고, 마음이 너그러워 고종명 (考終命) 한 것을 정 () 이라 하였다.” 공은 평소에 풍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 한다.

 

 

소정공은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 안장되었는데,  1422 묘표를 세웠으나 후일 1929 18대손 진사 윤사규 다시 비석을 세웠다 한다. 공의 묘비와 신도비 특징은 명나라 숭정 연호나 영력 연호를 쓰지 않고 공이 죽은 해를 기점으로 해서 '공이 몰한 번째 돌아오는 '이라고 것이 특징이다고 한다.


 




(소정공 윤곤 선생묘. 경기도기념물 10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용지안길 103-2이다.)

 

 

소정공 가계는 (조선) 왕실과 밀접한 인척-외척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소정공 자신은 세조 국구 (國舊) 정정공 (貞靖公)  윤번 (?) 사촌 형이었다. 공의 손자 윤호 (尹壕) 는 나중 성종의 국구가 되며, 세종의 부마가 된 윤사로 (尹師路. 세종과 상침송씨 (尙寢 )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녀 정현옹주 (貞顯翁主) 와 혼인) 는 공의 증손자였다. 한편 고려 충혜왕비 희비윤씨 (禧妃 尹氏) 의 친정아버지 윤계종 (尹繼) 은 소정공의 증조부 윤안숙 (尹安淑) 의 친형이었다. 따라서 희비윤씨는 소정공의 재종대고모가 되었다.

 

소정공은 두 번 장가를 드셨는데, 부인은 첨의정승 (僉議政丞)  류탁 (柳濯) 따님 고흥류씨 (高興 柳氏) 였으며,  뒤에 청주한씨 예문관대학사 (藝文館大學士) 문열공 (文烈公) 한상질 (韓尙質) 딸과 재혼하였다. 한상질의 아들 한기 () 한명회 (韓明澮) 아버지로 소정공은 한명회 고모부가 되었던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나중 공의 증손자인 윤사로의 장남이 다시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恭惠王后) 언니와 결혼하여 이중인척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소정공에겐 아드님이 셋이 있었는데, 첫째가 윤희이 (尹希夷), 둘째가 윤희제 (尹希齊), 셋째가 윤삼산 (尹三山)이었다. 소정공은  조선 건국 후에도 고관을 역임하였지만 고려 그리워했다 한다. 그래서 첫 두 아들의 이름을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진 백이 (伯夷) 숙제 (叔齊) 에서 이름을 따서 희이 (希夷), 희제 (希齊) 라고 지은것이라 한다.

세 아드님중  둘째되는 윤희제가 숙부인 윤씨의 증조부가 되신 분이다.

 

숙부인 윤씨의 증조부가 되는 한성공 (漢城公)  윤희제는 홍무13(서기 1380) 에 태어 나셨으며, 88세가 되는 1467년에 별세하셨다.  벼슬은 나중에 정헌대부 (正憲大夫) 호조판서까지 이르렀다. 파평윤씨 한성공파 (漢城公派) 의 파조가 되는 분으로 사후에 나중에 크게 현달한 후손들 덕분에 보국숭록대부 (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議政府左讚成) 판한성부사 (判漢城府使) 에 증직이 되었다.

 

한성공의 전배위는 연안차씨인데 문절공 (文節公) 운암 (雲岩) 차원부 (車原?) 의 따님이셨고, 후배위는 남양홍씨 (南陽 洪氏) 로 통정대부 검참찬 (通政大檢參贊) 홍잠 (洪潛) 의 따님이셨다. 공은 총 53녀의 자녀를 두셨는데, 다섯 아드님들 윤경 (尹坰), 윤은  (尹垠), 윤증 (尹增), 윤배 (尹培), 윤훈(尹壎중에 2남이 되시는 윤은이 숙부인 윤씨의 조부가  되신다.  공의 셋 사위중에는  군수 (郡守) 를 지낸 광주인 (光州) 정종우 (鄭宗禹)가 있다.


한성공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 입암산 (= 적성 입암산 축원 유, 積城笠岩山丑原 乳穴) 에 위치해 있는데,  부친되시는 소정공 사패지지 (賜牌之地= 공으로 나라에서 내려준 땅) 로서 옛날부터 실전 되었다가 숙종 (肅宗) 37(1711) 겨울에 연천 (漣川) 사는 후손 윤원교 (尹元敎) 가 산소 자리를 구하려고 산 밑에 이르러 단표 (短表) 하나를 얻어 본즉 세 조각으로 분질러져 넘어져 있었다. 이를 모아 본즉 공의 휘와 벼슬하신 것과 부인 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모든 후손들에게 통고하여 후손들이 영역 (瑩域) 을 개수 (改修) 하고 제전을 마련하였으니 이는 곧 예전 은사 (恩賜) 하신 구토를 환퇴한 것이다. 매년 10월 초길일에 제사하는데 임진년 8월에 새로 묘표를 세웠다. 공의 묘표는 공의 10세손인 판서공 윤지인 (尹趾仁)이 지었다.

공의 후손들이 나중 크게 현달하였으니, 윤필상 (尹弼商) 은 공의 손자이고, 조선중엽에 소론의 재상이 되었던 윤황 (尹煌), 윤선거 (尹宣), 윤증 () 일가와 노론 학자인 윤봉구 (尹鳳九) 등등 또한 모두 공의 (직계) 후손들이다.  나중 일부 후손들이 충청남도에 낙향하고 공의 5대손 윤창세 (尹昌世) 가 충남 노성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노성윤씨 (魯城尹氏) 라는 문중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윤창세의 손자되는 석호 (石湖)  윤문거 (尹文) 는 우암 (尤庵) 송시열 (宋時) 의 따님을 며느리로 맏아들여 우암 선생관 사돈이 되었다.

 

숙부인 윤씨의 조부가 되는 윤은 (尹垠) 은 벼슬이 광주목사 (光州牧使)  에 이르렀는데, 1458년에 이질 (痢疾) 로 임지인 광주에서 별세하였다. 나중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우의정 (右議政) 영천부원군 (鈴川府院君) 에 증직되었다.  

 

공이 일찌기 합천 () 에서 수령이 되었을때 루 () 의 이름을 하상국 (河相國 = 정승)의 호를 따서 징심 (澄心) 이리고 하였다 한다. 이는 하정승의 청백한 절조를 ?받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정승은 일찌기 공의 형제의 행장과 우의를 아름답게 여겨 시 한절을 보내었다고 한다.

 

공의 배위는 용인이씨 (龍仁李氏) 로 나중 안성군부인 (安城郡夫人) 에 증직되었는데 봉훈랑 예빈판관 (奉訓郞 禮賓判官) 이수상 (守常) 의 따님이셨다. 사이에 92녀를 두셨으니, 아드님들이  윤사로 (尹師路), 윤사석 (尹師晳), 윤사유 (尹師有), 윤사화 (尹師華), 윤사공 (尹師貢), 윤사하 (尹師夏), 윤사건 (尹師騫), 윤사연 (尹師淵), 윤사맹 (尹師孟)이다.  파평윤문에서 이들 아홉아드님의 후손들을 일컬어 구방파 (九房派)” 라 부른다고 한다. 이중 여덟째되는 윤사연이 숙부인 윤씨의 친정아버지가 되시는 분인 것이다.

공의 묘소는 충청보 신창현 남도고산 동문내리 (현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에 장례를 모셨다.

 

숙부인 윤씨의 친정아버지되는 윤사연은 벼슬이 사직에 이르렀으며 슬하에 2남2녀를 두셨는데, 숙부인 윤씨가 이중 장녀가 되신 것이다.


숙부인 윤씨의 백부가 되는 윤사로(尹師路, 1423~1463) 는 소정공파 구방파 9형제중에서 가장 현달한 인물이며 세간에 잘 알려졌다.  

윤사로의 호는 과옹 (
果翁) 혹은 주옹 (周翁) 이었으며,  시호는  충경 (忠景) 이다. 그의 재종조부였던 윤번 (?) 딸이 (나중 정희왕후, 貞熹王后)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 (首陽大君. 나중 세조) 이유 (?) 혼인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 윤번 윤사로의 할아버지인 소정공 윤곤 사촌 동생이다.

[참고: 정희왕후는 여장부 기질을 가진 여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가 되었고,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레 병으로 승하하자 당일 바로 한명회와 결탁하여 둘째 손자 자을산군 (者乙山君) 을 왕위에 올린 뒤 자신은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조선 최초의 수렴첨정을 하였다.]

 

윤사로는 1436(세종 18) 세종의 서장녀 정현옹주 (貞顯翁主) 와 결혼, 영천군 (鈴川君) 에 봉해졌다. 세조에게는 이복 매부가 되는데, 그의 사후 5 당숙인 윤호 (尹壕) 딸이 다시 성종 정현왕후 (貞顯王后) 책봉되면서 왕실과는 이중 인척이 된다. 한명회와도 사돈간으로 그의 아들 윤반  (尹磻) 한명회 명과 결혼하였다.


윤사로는 1452(문종 2)  영천위 (鈴川尉) 로 다시 봉해지고, 세종릉의수릉관 (守陵官) 을 지냈다. 문종이 죽자 다시 문종릉의 수릉관에 임명되고 숭덕대부 (崇德大夫) 에 가자 (加資) 되었다. 그 뒤 수양대군의 세력에 가담, 안평대군 (安平大君) 등을 추방하였다. 1455년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 (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 좌찬성 (左贊成)에 발탁, 이어 중추원영사가 되고, 1458(세조 4)  영천부원군 (鈴川府院君) 에 진봉되었다. 1461년 간경도감도제조 (刊經都監都提調), 1462년에는 충훈부당상 (忠勳府堂上) 을 지냈는데 임직중 병으로 별세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0세였다.


1463 윤사로가 죽자 세조는 조회와 저자를 이틀간 중지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윤사로를 평가하기를, “윤사로가 정현옹주에게 장가들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성질이 요마 (??) 하면서도 자못 경오 (警悟) 하였으며, 식리 (殖利) 능하여, 외방의 농장 (農莊) 있는 곳에 여러 만석 (萬石) 쌓아 놓고, 서울 제택 (第宅) 창고도 굉장하여, 밖에서도 바라볼 있었는데, 무릇 주구 (誅求)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성질이 영오 (穎悟) 하여 남의 뜻을 해석하였으나 재리 (財利) 논의할 때에는 조그마한 이익도 남기지 않았다. 매양 나아가서 임금을 뵈올 적마다 낡은 모자에 때묻은 옷을 입으니, 임금이 항상 말하기를, “ 사람이 탐욕(貪欲)하고 인색하여 갑자기 부자집이 되었으니, 거만 (鋸萬) 돈을 쌓았을 것이다.” 하였으나, 선비에게 굽신거리고 교만 (驕慢) 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자못 많이 그를 따랐다. 시호를 충경 (忠景)이라 하였으니, 청렴 방직하고 공정한 것을 ()이라하고, () 따라서 남을 구제하는 것을 ()이라고 한다.” 기록하였다.


비슷한 연배였던 그의 5 당숙 윤호 (尹壕) 훗날 성종 장인이 된다.

윤필상 윤사로의 사촌 동생이고 윤은로 (尹殷老) , 윤탕로 (尹湯老) 등은 그의 6 동생이다.



숙부인 윤씨의 외조부 유목로는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의학자 (醫學者) 유효통 (兪孝) 의 큰 아드님이셨는데, 숙부인 윤씨의 외증조부되는 유효통은 기계유씨 후손들중에서는 조선 초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유효통은 정인지 (鄭麟趾) 와 같이 중과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세종시대 집현전의 직제학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의학에 정통하였다.  1431년 전의감정 (典醫監正) 노중례 (盧重禮) 등과 같이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이중 향약채취월령은 우리나라 약용식물을 맨 처음 정리한 의서로 유명하다.


숙부인 윤씨의 외조부 유목로 (兪牧老) 는 문과를 거쳐 벼슬이 직강 (直講) 에 이르렀는데, 부인되시는 분, 즉 숙부인 윤씨의 외조모되시는 분이 영의정 황보인 (皇甫仁) 의 딸이다. 황보인이 수양대군에 의해 참변을 당한 뒤 숙부인 윤씨의 외가도 박해를 받았었다.


유목로의 동생, 즉 숙부인 윤씨의 외종조부 유신로 (兪臣老) 는 문과를 거쳐 벼슬이 전적 (典籍) 에 이르렀다.


유목로의 아드님, 즉 숙부인 윤씨의 외삼촌 되는 유혼 (兪渾) 은 생원 (生員) 이었다.


이렇듯 숙부인 윤씨의 친정, 곧 휘 윤번 대사간의 처가집은 정희왕후, 정현왕후 (貞顯王后) , 장경왕후 (章敬王后) , 문정왕후 (文定王后) , 숙빈윤씨 (貞熹王后) 등등을 통해 조선왕실과 밀접한 인척/외척 관계에 놓여져 있었던 당대의 권세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례 권력과 결탁하면 그렇듯이 나중 각종 사화에 연루되어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는 인물들도 종종 역사속에 생겨났었다.

 

숙부인은 남편 대사간 휘 윤번과의 사이에 11녀를 두셨으니, 아드님은 휘 귀지 (貴枝) 중훈대부 풍저창 직장 (中訓大夫 豊儲倉 直長)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贈 通政大夫 丞政院 左承旨) , 따님은 청풍인 (淸風) 김준성(金遵性) 에게 출가하였다. 휘 귀지 직장공의 후손들중 일부가 나중 현달하여 경북안동의 수은공파 (睡隱公派=소호문중) 와 경기도 장단지역의 창곡공파 (蒼谷公派) 를 이루며 가문을 빛낸 훌륭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하였다.

 

이상 내 멋데로 풀어본 우리 할머님네 이야기였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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