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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tyne Price
출생일 | 1927년 0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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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미국 |
대표작 | 베르디 《레퀴엠》, 《에센셜 레온타인 프라이스》,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베르디 《아이다》 |
성부 | 소프라노 |
요약 흑인으로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주역을 노래한 최초의 소프라노. 특히 베르디의 묵직한 오페라에서는 마리아 칼라스 못지않은 깊이와 박력을 들려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에 있어 흑인에게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힌 존재로 콘트랄토 마리안 앤더슨을 생각할 것이다. 명분상 맞는 말이다. 1955년 앤더슨은 흑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섰다. 하지만 그녀는 진정한 의미에서 오페라계의 스타는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흑인영가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였다. 메트의 지배인이었던 루돌프 빙이 앤더슨을 초빙한 것도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웠다. 《가면무도회》의 점쟁이 울리카 역으로 출연했는데, 단 8회 공연이었고 그 이후로는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콘트랄토였으므로 배역이 한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흑인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가 컸을 뿐 과연 메트와 루돌프 빙의 흔쾌한 선택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은 교과서적인 뜻에서 위대한 것이지만, 정말 인류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그의 발견이 결실을 맺어 신대륙에 서구인이 정착하고 지금의 미국으로 성장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악계에서 마리안 앤더슨이 콜럼버스적 역할을 해냈다면 진정으로 흑인 가수에 대한 편견을 깬 존재는 레온타인 프라이스였다.
한 가지 쑥스러운 고백을 하겠다. 나 역시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아서 한때 클래식 음악계에 흑인이 발붙이기 힘들다는 사실에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클래식이라는 고상한 장르에 대중음악과 재즈나 익숙한 부류들이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하는 식의 기막힌 오만함으로 말이다. LP 시절에는 주로 데카의 오페라 음반들을 사모았고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얼굴이 재킷에 새겨진 RCA 음반은 '미국 것이라 저 흑인 가수가 나오는 거겠지.'라고 치부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오페라를 듣기 시작한 첫 10년 동안 프라이스의 음반은 한 장도 갖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라디오에서 프라이스의 음성이 들려올 때도 두터운 질감이 인상적이었을 뿐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계기로 이런 편견이 무너져버릴 줄이야.
나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야말로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전통이 극한까지 구현된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극으로서의 약점은 종종 지적되는 바와 같지만 인간 목소리의 무한한 위력을 신뢰하여 박진감 넘치는 선율과 리듬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맹렬히 돌진하는 오페라인 것이다. 아무튼 이 오페라를 너무 좋아한 까닭에 명반으로 손꼽히는 주빈 메타(Zubin Mehta, 1936∼) 지휘, 레온타인 프라이스, 플라시도 도밍고, 셔릴 밀른스(Sherrill Milnes 1935∼), 피오렌차 코소토의 RCA 음반(1969년 녹음)을 끝내 피해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역시 박력 있는 오페라야. 그런데 프라이스도 장난 아니군.' 정도로 시작했다. 그런데 점점 프라이스에게 감탄하게 되더니 4막 루나 백작과의 이중창 장면에선 드디어 이 흑인 디바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정말 기적 같은 노래였다. 연인 만리코가 루나 백작에게 잡히자 그를 살려주기만 한다면 자신을 루나 백작에게 바치겠다고 애원하는, 그러나 서글픈 탄원이 아니라 마치 두 사람의 기싸움을 보는 듯 치열하게 펼쳐지는 이중창인데 이 장면을 프라이스와 밀른스는 그야말로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의 향연으로 무한하게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프라이스의 진가를 깨닫게 되자 그녀의 음반이라면 무조건 사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프라이스야말로 칼라스에 견줄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고 한층 더 숭배하게 된 계기는 카라얀이 지휘한 베르디의 《레퀴엠》 영상물(DG)을 통해서였다. 1960년대 중반에 촬영되어 젊은 날의 파바로티를 볼 수 있는 자료로도 유명한 이 영상물에서 프라이스는 타고난 목소리의 자질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나 예술적 측면으로도 그 누구보다 뛰어난 가수임을 입증하고 있다. 피오렌차 코소토, 루치아노 파바로티, 니콜라이 갸우로프(Nicolai Ghiaurov, 1929∼2004) 등 결코 한자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세기의 명가수 중 유일하게 검은 피부인 프라이스가 유독 찬란한 광채에 휩싸이는 듯 보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영적 자세, 완벽한 암보로 그 어려운 소프라노 파트를 소화해내는 솜씨에는 완벽주의자 카라얀조차도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프라이스에 대한 경외감을 베르디와 연결하여 얘기했는데, 일반적인 평가도 이와 비슷하다. 오페라에서 프라이스의 주특기는 베르디와 푸치니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일 트로바토레》, 《아이다》, 《토스카》, 《나비부인》에서는 칼라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명연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밖에 가곡 분야에서 슈트라우스와 볼프의 독일 리트,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 포레(Gabriel Faure, 1845∼1924), 풀랑크(Francis Poulenc, 1899∼1963)의 프랑스 멜로디에 강점이 있으며, 미시시피의 전형적인 흑인 집안 출신이자 독실한 감리교 신자답게 당연히 영가에도 능하다.
레온타인 프라이스는 1927년 미국 미시시피 주의 로렐(Laurel)에서 출생했다. 미시시피 주는 소위 코튼 벨트(Cotton belt)라고 불리는 목화 지대의 중심에 위치해 미국에서 흑인 인구 비율이 가장 높고, 그래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노래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그 지방의 명물로 통했던 프라이스는 흑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전문 음악가로 성장한다는 꿈을 접고 음악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그녀를 후원한 치숄름(Alexander Chisholm)이라는 고향 유지와 성악선생의 격려에 힘입어 교육 대학을 마친 22세의 늦은 나이로 줄리어드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줄리어드에서도 스타로 떠오른 프라이스는 이곳 학생 오페라를 관람한 미국의 대작곡가 버질 톰슨(Virgil Thompson, 1896∼1989)의 눈에 띄어 1952년 그의 오페라 《3막의 네 성자(Four Saints in Three Acts)》를 통해 직업 성악가로 데뷔했다. 이 오페라는 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올려진 것이었다고 하니 가벼운 작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포기와 베스》에 출연하면서 미국 전역은 물론 유럽, 심지어 옛 소련을 포함하는 순회 공연에 나서게 되었다. 거쉰의 이 작품은 비록 백인이 작곡했지만 흑인의 정서와 그 음악적 이디엄으로 채워졌고 보수적 시각에서는 오페라라고 불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1935년 초연될 때에도 성악가가 아니라 가벼운 음악을 다루던 흑인 가수들이 출연했다. 그러나 프라이스가 베스 역을 부름으로써 그녀의 성가가 크게 상승한 것은 물론 작품의 가치까지 정당하게 평가받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프라이스가 이 오페라에 나오는 〈서머타임〉을 잘 부르는 가수로 손꼽히지만 실제 오페라에서 이 노래는 클라라라는 조역의 몫이며 베스의 노래는 아니라는 점이다.
2년간 미국과 세계를 누비면서 계속된 《포기와 베스》는 프라이스에게 배우자까지 마련해주었다. 포기 역의 바리톤 윌리엄 워필드(William Warfield, 1920∼2002)가 그 주인공. 워필드는 흑인으론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남성 성악가로 꼽히는데 그 배경에 든든한 아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커플은 결혼 22년 만인 1974년에 헤어졌다.
1955년 프라이스가 TV 오페라 방송용의 《토스카》에 출연한 것은 마리안 앤더슨이 그해 메트의 무대에 선 것만큼이나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흑인 프리마돈나에 대한 많은 반대가 있었고 일부 지역 방송으로부터 방송을 취소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프라이스의 토스카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얻어냈다. 정통 오페라에 자신을 얻은 프라이스는 1957년에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오페라 극장 데뷔 무대를 갖는다. 출연 작품은 풀랑크의 《카르멜파 수녀들의 대화》. 지금은 20세기 프랑스 오페라의 고전으로 꼽히는 명작이지만 그때로서는 갓 초연된 최신작이었다. 이 덕분에 프라이스는 미국보다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먼저 러브콜을 받게 되었다. 1958년 빈 국립 가극장의 《아이다》를 시작으로 영국의 코벤트 가든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960년에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역사상 최초의 흑인 주역으로 역시 《아이다》를 불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프라이스를 처음 초청한 것은 그 이듬해였으니, 마리안 앤더슨이 깨뜨린 아성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메트가 유럽의 극장보다도 흑인에게 더 폐쇄적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터였다. 첫 공연작이 바로 《일 트로바토레》였는데 이 공연에서 프라이스는 메트 역사에 빛나는 무려 42분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뉴욕의 독설적 비평가로 유명한 헤럴드 숀버그(Harold Schonberg, 1915∼2003)도 "그녀의 소리는 낮은 톤에서 어둡고 풍요로웠으며 레지스터를 이동할 때 완벽하게 안정적이었다. 고음에서도 흠잡을 곳 없이 맑고 벨벳같이 부드러웠다."며 이례적인 격찬을 퍼부었다.
레온타인 프라이스를 소개한 글들을 보면 대개 그 성질을 리리코 스핀토로 표시하고 있다. 정말 뜻밖이다. 분명 프라이스의 음성은 두툼하고 묵직하여 드라마티코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날의 프라이스는 실제로 리리코 스핀토에 가까웠던 것 같다. 1950년대에 녹음한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 1910∼1981)의 〈녹스빌, 1915년 여름(Knoxville, Summer of 1915)〉이라는 가곡을 들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프라이스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프라이스는 흑인 특유의 드라마틱한 음성을 타고났지만 교육 과정에서 일반적인 리릭 소프라노로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 노래에는 리리코 스타일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자신의 피부색에 어울리는 《아이다》를 통해 진정한 베르디 소프라노로 거듭나게 되자 목소리의 특징도 배역에 맞게 원래의 무거운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을 것이다. 동시에 리리코의 훈련도 잘되어 있었기에 모차르트를 부를 수 있었고 베르디나 푸치니에서도 전체적으로 드라마틱한 가운데 필요할 때는 정교한 테크닉과 청아한 소리까지 들려줄 수 있었으리라.
1960년대에 프라이스는 메트의 명실상부한 최고 스타가 되었다. 그래미상(Grammy Award)만 15차례 이상 수상했다고 하니 미국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특히 사무엘 바버는 1966∼1967 시즌 메트 개막 작품으로 위촉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프라이스를 위해 작곡했다.
1970년을 전후해 프라이스의 오페라 레코딩은 여전했지만 오페라 무대의 출연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신 리사이틀을 늘리면서 흑인 영가나 애국심을 부추기는 노래들을 많이 부르게 되었다. 자신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으므로 오페라를 부르는 것이 이전만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 촬영된 베르디의 《운명의 힘》 영상물을 보면 프라이스는 이제 더 이상 젊은 여인을 노래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거운 소리가 되어버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기를 생각하면 더 버틸 수도 있었겠지만 프라이스는 환갑 전인 1985년,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던 《아이다》를 끝으로 오페라 무대를 떠났다. 하지만 국민가수로서의 위상은 사그라지지 않아 그 이후에도 대통령 취임식, 교황청 공연, 카네기 홀 100주년 기념 공연 등에는 빠지지 않고 초청되었다.
이제 거의 팔순에 달한 프라이스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흑인이 많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노래도 불러주고 자신이 성장한 얘기를 들려주면서 흑인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다. 1997년 어린이용으로 《아이다》를 손수 집필한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는데, 이것이 팀 라이스(Tim Rice, 1944∼)와 엘튼 존(Elton John, 1947∼)의 뮤지컬 《아이다》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한다.
프라이스의 영상 자료는 적지 않지만 오페라 전곡으로는 황혼기에 녹화된 《운명의 힘》이 유일하다. 그러나 오페라보다 이 베르디 《레퀴엠》으로 프라이스의 마력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날의 피오렌차 코소토, 루치아노 파바로티, 니콜라이 갸우로프는 모두 최고의 가수들이면서도 진혼곡으로는 다소 말랑말랑하게 노래한다. 오로지 프라이스만이 모든 면에서 영적(靈的)으로 충만한 노래와 자태를 발휘하면서 전체적인 공연의 질을 높였다.
무려 11장으로 구성된 프라이스 레코딩의 집대성이다. 오페라 전곡 녹음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이 시리즈 하나로 프라이스의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페라뿐 아니라 가곡, 흑인 영가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전 생애에 걸친 중요 녹음을 거의 다 커버한다. 풍부한 사진 자료도 매력적이다. 너무 방대하다면 '궁극의 컬렉션(Ultimate Collection)'이라는 《2 for 1》 음반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베르디, 푸치니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모차르트, 바버 등 오페라에 관한 한 프라이스의 정수를 거의 섭렵할 수 있다.
본문 중 언급한 음반이며 이 오페라의 극적 박력을 유감없이 살려낸 회심의 명반이다. 주역 가수는 물론 지휘자까지 젊은 시절의 혈기가 넘치던 1969년의 녹음이다. 비극적인 음영이 드리워진 프라이스는 물론이고 도밍고의 감성적인 열창, 밀른스의 드라마틱한 압박, 주빈 메타의 거칠 것 없는 지휘에 이르기까지 벨칸토 오페라의 전통에서 기대할 수 있는 미덕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일반적으로 프라이스 최고의 오페라로 꼽히는 것은 《아이다》다. 아프리카의 공주가 주인공이니 흑인 디바에게 적격이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그런 점을 배제하더라도 베르디가 아이다에게 요구한 음악적 캐릭터는 프라이스의 개성과 잘 어울린다. 에리히 라인스도르프(Erich Leinsdorf, 1912∼1993)가 지휘하고 도밍고와 공연한 BMG 음반이 우선이지만, 솔티가 지휘하고 존 비커스가 라다메스로 나선 데카 음반도 그에 못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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