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5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 2코린 4,7-15
복 음 : 마태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람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자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는 공동체 소풍으로 에버랜드에 다녀왔습니다.
역시 흥미로웠던 것은 놀이가 아니라 온갖 동물의 구경이었습니다.
지금은 멸종된 한국 호랑이도 사진 찍었고
사파리 월드에서는 버스를 타고 가며 여러 종류의 호랑이, 사자, 곰도 구경했고
마지막 선물센타에 들려서는 아기 곰 인형을 사들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이런 동물들을 보며 ‘사람은 무엇인가?’많은 생각을 했고, 또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의무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동물에까지 ‘반려’란 말을 붙여 ‘반려동물’, ‘반려견’이란 말도 씁니다만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반려자는 마땅히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영원한 반려자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반려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죽은 후 ‘연미사(?!)’가 가능한지 묻는 분을 보면,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생각하며 실소를 금치 못할 때도 있습니다.
역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시편8장이 답을 줍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 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만상을 그의 발아래 두시었으니
통틀어 양떼와 소들과 들짐승하며,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며
바다속 지름길을 두루 다니는 것들이오이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느님과 사람과 피조물인 동물과의 관계가 명확히 설정됩니다.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의 인간입니다.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한 답을 줍니다.
이런 하느님 창조 신앙이, 더 나아가 부활신앙이 있기에 불교의 윤회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 동물들과의 관계가 미묘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의 띠도 상상의 동물 ‘용’을 포함한 12개의 명칭도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재미있습니다.
저는 소띠인데 불교식으로 말해 전생에 소였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말은 몰라도 사람한테 ‘쥐같다’, ‘개같다’, ‘뱀같다’하면 몹시 기분 나빠 할 것입니다.
반면, ‘곰같다’, ‘소같다’, ‘양같다’, ‘돼지같다’하면 그래도 덜 기분나빠할 것입니다.
제가 아기 곰을 인형을 산 것도 귀여워 두고 보기 위함입니다.
누가 저보고 ‘곰같다’, ‘소같다’하면 기분 좋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하신 것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능적으로 사람을 동물과 연관시킨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을 보면 뱀같은, 늑대같은, 여우같은, 양같은,---참 다양한 동물들이 연상되며
불교식 사고의 전생에 대한 유혹도 받습니다.
사실 작금의 현실에서 언행 불일치의 사람들을 보면
겉모습만 사람이지 참 사람 발견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세상 공부와 학벌과는 별개로 짐승만도 못한 심지어 악마같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요.
흡사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듯 상식이나 양식이 실종된 막말을 쏟아대는
막가파 언행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지니는 느낌입니다. 영성은커녕 인성도 한참 미달입니다.
새삼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하느님 자녀로서의 부활신앙이 얼마나 고마운 복음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일반 동물들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 사람으로 사는 평생공부, 평생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편시절 김동길 박사가 소개한 ‘호랑이 속눈썹’이라는
평안도 맹산 산골에 전해 오던 이야기를 들려 줄 때 참 재미있어 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선명합니다.
일부 소개합니다.
부부생활에 크게 실망한 남자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힘으로 불행한 삶을 끝내려
깊은 산중에 들어갔다가 마침내 호랑이를 만납니다.
-사나이가 먼저 입을 엽니다.
“자, 어서 잡아 먹어라.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거야.”
호랑이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내가 사람을 잡아먹습니까. 짐승이나 잡아먹지요.”
그러면서 그 연로한 호랑이가 허연 속눈썹 하나를 뽑아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던 이 사나이에게 건네줍니다.
“이 속눈썹을 달고 한번 세상에 나가 둘러보세요. 아마 사람은 몇 없고, 대개는 짐승일 겁니다.
사람 가면을 쓰고 다니는 짐승이요. 짐승하고 살지 말고 사람을 찾아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호랑이의 권고입니다.
죽기로 결심했던 이 사나이는 늙은 호랑이의 속눈썹을 달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집에 가서 자기의 아내를 보니 암탉, 면장은 여우, 교장은 토끼, 파출소의 순경은 늑대,---
정말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자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헤매다가
정말 짐승 아닌 여인을 만나 부부가 되어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합니다.-
너무 재미있어 하던, 지금도 스승인 저를 찾고 있는
50대 초반의 초등학교 6학년 때 제자들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짐승에서 벗어나
참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는 복된 운명의 전환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앞에서 부단히 회개할 때 겸손과 지혜, 순수와 자비, 온유와 평화의 참 사람입니다.
세례 받음으로 참사람이 되는 평생공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수성獸性은 인성人性으로, 인성人性은 영성靈性에로의 변화가 가능 합니다.
하여 끊임없는 회개,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닮지 않고 참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하느님은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엄청난 힘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시니
예수님의 생명, 사랑의 성령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여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죽은 듯하지만 곧장 예수님의 생명으로 일어납니다.
어떤 상황이든 존엄한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를 견지합니다.
무지의 사람들이, 겉모습은 사람이나 속은 짐승 같은 통치자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립니다만
하느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의 형제들인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참 삶의 자세입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바로 제 사제서품 상본의 성구이기도 합니다.
참 사람의 하느님 자녀가 되는 평생공부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영성이 있다면 섬김과 종의 영성이,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된 권력은 섬김입니다. 교황은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미약하고 상처받은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보는 대로 됩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믿는 안 믿는 이든 ‘하느님의 자녀’로서 고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카톨릭 사제든 평신도등 다음 두봉 주교님 말씀이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본당 신부는 본당 교우들만이 아니라 그 지역 모든 사람들의 신부예요.
언제나 그 지역 전체를 걱정하고 그 지역에 가난한 이, 약자가 누구인지 찾고 생각해야 해요.”
이래야 비로소 열린 교회요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교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섬김의 사람,
하느님 자녀로서의 참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많은 분들이 이런 기도를 바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 그들을 변화시켜 주세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그들을 깨우쳐주세요.
제발 그들이 저에게 상처 주는 것을 멈추게 해주세요.”
남들의 변화를 통해서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사실 조금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이 담긴 기도는 하느님의 모상보다
자신들의 모상으로 상대방을 만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의도하신 뜻을 찾으려고 먼저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다고, 내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는 이유로 바뀌길 원한다면
결국 하느님 모상이 아니라 내 모상대로 상대방을 만들려는 것이기 아닐까요?
이처럼 내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뜻보다는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뜻을 좇는데 더 집중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주님, 그들을 변화시켜 주세요.”가 아니라 이렇게 바뀌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소원이 있다면서 들어달라고 말합니다.
그 소원은 주님의 나라가 설 때 아들 중 하나는 예수님 오른편에
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여깁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도 그 자리를 탐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켜서 선수 쳤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을 보면서 영원한 생명의 자리는
이 세상 죽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얻어야 할 것임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시려는 잔을 자신들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고,
다른 제자들도 자신들도 얻어야 할 자리를 뺏길 것 같다는 생각에 불쾌해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세상에서 보여주는 어떤 명예나 지위를 얻으려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경쟁과 질투와 다툼만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청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다른 이들의 변화를 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모두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있는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변화를 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을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섬기러 오신 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나 지금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 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10년을 못갑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지금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을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 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에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많은 믿는 이들이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섬기는 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도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모든 순간이
믿음의 신비 안에 있습니다.
믿음은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믿음의 관계가
모든 삶을
새롭게 합니다.
목숨을 바쳤던
야고보 성인의
삶 앞에서
믿음을 만납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신앙의 투신에서
목숨의 본질이
하느님이심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봉헌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향합시다.
끝내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내가 마실 잔”
전삼용 요셉 신부
하버드 대학에서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제목이 ‘러닝머신 실험’이었고 학생 130명이 이 실험에 참여하였습니다.
최고속도의 러닝머신에서 5분 정도 달리게 한 실험이었습니다.
실험은 빨리 끝났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진짜 실험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버드는 40년간 그들을 추적조사 했고 참가자들이 60세가 되었을 때
직업, 연봉, 삶의 만족도가 눈에 띄게 높은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재능 때문일 거야!”, “남들보다 IQ가 높겠지.”라는 추측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러닝머신 실험에서의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릿(GRIT)’ 점수가 높았다는 것입니다.
GRIT은 심리학에서 ‘한계에 다다랐을 때, 끝까지 참아내는 힘’을 말합니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끝까지 견디는 능력인 것입니다.
러닝머신 위에서 체력에 한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뛰려고 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성공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것으로 판명이 된 것입니다.
이는 육군사관학교 실험, 초임 교사 실험, 세일즈맨 실험에서도 똑같은 결과를 냈습니다.
‘그릿(GRIT)’의 저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아버지로부터
“니가 아무리 내 딸이긴 하지만, 머리가 나쁘니 성공하긴 어려울 거다.
재능이 없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기 힘들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 말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뭐랄까, 단순히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기보다는,
재능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성공에 관한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10년이 넘어가는 연구에 다들 시간낭비라고 했지만,
그녀가 43세 되던 해 전 세계 단 20명의 천재들만 받는다는 맥아더 상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사람에게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 ‘권력욕’이라고 합니다.
물론 권력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에 동료 사도들은 그들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꿈을 갖는 것은 잘못일까요?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의 쓴 잔을 마시면
높은 자리를 차지함을 아시고 계셨고 그 길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이것이 십자가이고 그리스도께서 마시려는 잔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과 같아지려하였습니다. 불순종을 통해 높아지려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은 타인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일 줄 아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윗사람들이 볼 때 더 많은 급여를 주고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싶은 사람은
옳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옳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상관이 하는 일을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이 됩니다.
상관은 그 말들이 비록 옳게 들린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상하기 때문에
말은 받아들여도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머리보다 마음이 앞섭니다.
기분이 상하면 아무리 옳은 말도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말이 자녀들에게 ‘잔소리’가 되는 것은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를 자주 하다보면
하느님께서도 ‘내가 틀리고, 네가 옳다는 말이냐?’라는 기분이 드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 잘 하시는 일이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겠다고
내 뜻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주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가장 어리석은 생각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이 진리이시고 옳으신 분입니다.
십자가와 가장 가까운 말이 심리학에서는 그릿(GRIT)일 것입니다.
그릿은 재능이나 아이큐처럼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연습으로 길러질 수 있습니다. 노력하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을 기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완료하는 습관”을 만들어보라고 말합니다.
먼저 아주 작은 계획들을 정해보는 것입니다.
거창할 필요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지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신에 정한 계획은 ‘무조건’ 끝까지 완료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완료하는 습관을 기르고 나면, 사람들은 힘든 순간, 포기하기보단 한 발 내딛는 길을 선택합니다.
끝까지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지금 드는 힘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난 여기까지야.’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합시다.
그러기 위해 오늘 작은 십자가를 찾고 그것을 꼭 완수하고 잠자리에 들 결심을 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을 들지 못하면 그 근육으로 더 큰 것은 절대 들 수 없습니다.
섬기는 권한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하늘나라는 여기 혹은 저기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마음 속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지도 않다.
그곳은 하느님이 다스리는 곳이다. 그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곳이다.
하느님은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전권을 예수님에게 넘겨주셨고, 예수님은 그것을 이 땅에 전해주셨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하늘에서처럼 이 땅위에서도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셨다.
그 권한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힘이 아니라 그 반대로 종처럼 그들을 섬기는 능력이다.
요즘 국민들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이들은 국민을 대표한다고 떵떵거리는 국회의원들인 것 같다.
나는 저러라고 그를 뽑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평신도가 아니라 사제들 안에 있는 것 같다.
한국교우들은 세계 최고다. 무엇이든지 따르고 언제든지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게다가 종들인 사제들도 끔찍하게 아끼고 잘 대해준다.
어리숙한 사제들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어 그런 대우를 받는 줄 아는 것 같다.
교우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을 사제들이 대신 받아 누리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교우들은 하느님을 얼마나 잘 섬기는 것인가.
그런 그들의 섬김이 그들에게 보답할 수 없는 가장 작은이들에게로 항하면 교우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사제들이 교우들을 그리로 인도하면 하느님은 얼마나 기쁘실까!
하늘나라는 섬기고 봉사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서로의 종이 되려고 앞 다투어 노력한다.
그런 공동체의 섬기는 능력은 공동체 밖으로 발산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안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보답을 받으니 보답을 해줄 수 없는 이들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그 잔이 무슨 잔인지도 모르면서 덜컥 마실 수 있다고 선언해버렸다(마태 20,22).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다(사도 12,1-2).
사도는 주님을 따라 목숨을 내놓았고 아무도 그의 목숨을 되돌려줄 수 없으니
당연히 주님이 갚아주셨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하늘나라에 살고 있음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나.
예수님, 저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저희에게는 봉사하고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더 넓은 마음과 더 깊은 마음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고 가장 작은 이웃들에게 봉사하게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혼인잔치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아채셨고
아드님의 십자가 수난을 지켜보셨던 그 눈으로
저를 지켜주시어 제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소서. 아멘.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미성숙한 제자들을 잘 교육하고 단련시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훌륭한 일꾼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지도력이랄까?
동반의 기술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야고보 사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 역시 영예로우면서도 황공스럽게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도 직분을 수여받았지만,
당시 그의 수준은 한없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그를 스승님께서는 끝도 없이 가르치고 격려했습니다.
때로 매몰차게 야단도 치고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스승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멋진 제자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 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 사도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대뜸 예수님 앞에 엎드린 그녀는 연신 절을 하면서 한 가지 청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 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오셨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 어머니의 낯 뜨겁고 노골적인 인사 청탁 광경을 목격한 다른 열 제자들은 기분이 많이 상했습니다.
동시에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었겠지요.
‘우리 어머니는 도무지 센스가 없으셔. 야고보 어머니처럼 동작이 빠르시면 좀 좋아?
빨리 움직이지 않으시고 대체 뭐하고 계시는가?’
야고보 사도 어머니가 보여준 행동!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드릴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스승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은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그릇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기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제일 물 좋은 자리, 영의정과 좌의정을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두 제자가 보여준 모습 중에 정말이지 치사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해,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매개로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물 좋은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결코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그가 평신도 혹은 성직자요 수도자라 할지라도,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스승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추구할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욕심이 있다면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신의 계획과 의지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끊고,
주님의 구원 계획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계획과 의지를 맞춰나가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