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리
道林里는 청계면소재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뒤에는 무안의 주산인 승달산이 있고 里의 중앙으로 광주 - 목포 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道林’이란 지명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길 가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도림리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원래 도림리는 무안군 일서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청림리 양지촌 삼덕리 대흥리 대암동 격양동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선돌 연곡 2개의 마을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되고 2011년에는 2리를 2리와 7리로 분구했다.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현재의 도림리로 추정되는 마을을 보면 일서면 垈巖리 碧流亭 靑林里 陽之村 白雲亭 伏龍村 道林洞 天峙洞 龍興洞 擊壤洞 蓮洞으로 표기되었다. 1912년의 자료에는 靑林里와 道林洞 良芝洞 格良洞으로 1917년의 자료에는 청계면 도림동 靑林里와 良芝村 삼덕리 대흥리 대암동 격양동 등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청계면 도림리 입석 연곡 백련동으로 정리된다.
청림에 무안박씨 제각인 경모재와 영대암이 있으며 양촌에 나주임씨 제각인 화산재가 있다. 또한 목포대학교 경내에 무안박씨 제각인 삼천재와 박순효자각이 있다. 백련동에는 1개의 교회와 하나의 사찰이 들어서 있다. 입석마을엔 1개의 제각과 1기의 선돌 그리고 5기의 고인돌이 있다.
볕[陽]과 숲[林]이 어우러진 선비골의 마을 -도림1리 청림
오래 전부터 ‘道林’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풍수에 능한 사람이 이 마을에서 승달산을 바라보고 노스님 셋이 경을 읽고 있는 노승예불형의 吉地를 보았다. 둘러보니 인근의 남성리 소살봉은 보살산이고 예전 목대 앞에 있었던 석산(딴산)은 칠성산의 형국이었다. 해서 보살 할멈이 격양동에서 밥을 지어 칠성산에다 바쳐 놓으면 승달산의 스님이 공양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 것이다. 또한 승달산의 12봉우리가 12제자가 되어 스님에게 인사를 하는 형국이어서 때가 되면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도림이라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1981년 목포에 있었던 목포대학교가 이 마을로 이전한 것을 보면 선인들의 예견지명의 지혜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당시 목포대 유치를 주도했던 사람은 남성리의 배석오 선생과 이 마을 삼천재의 후손인 박희양씨였다. 대학을 유치하면서 많은 잡음도 있었고 난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청계면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만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청림은 양촌과 함께 도림1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청림은 숲이 무성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양촌은 따뜻한 마을이라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원래 도림1리에는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백운정과 도림동 대흥동 그리고 양촌과 청림 등 다섯 마을이 있었으나 개울 건너 백운정과 도림동 그리고 대흥동 일부는 목포대학교 부지로 들어가고 지금은 陽村(陽之村) 과 靑林으로 이루어졌다. 白雲亭과 청림은 무안박씨들이 주로 살았고 양촌과 대흥동은 청주한씨들 그리고 도림촌은 전주이씨들이 주로 살았다. 또한 이 마을은 상대미 천치골 사장골 사직골 등 네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양촌 마을의 입향조는 500여년 전에 터를 잡은 청주 한씨 韓番仁(자-기옥, 호-遯菴)이다. 그는 장흥군 장도면 북교리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이곳 도림리 鍮店洞에 터를 잡았으며 명예와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보냈다. 원래는 이 마을이 국씨들의 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국씨는 한 가구도 없고 마을 주변에 묘만 남아있다.
청림 마을은 임란 이후 들어온 무안 박씨가 입향조다. 태봉 마을 앞 작천에서 분가한 박 제 장군의 후손들이다. 박 제는 임란 때 장수로 보평산 전투와 그 부인인 여산 송씨의 열녀행으로 널리 알려진 장군이다. 여산 송씨가 순절한 이후 두 번째 부인으로 평강 채씨를 맞았는데 그 분의 후손이 청림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이 마을은 승달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물이 흔했다. 목포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청림마을 뒤에 있는 물맞이고랑은 많은 사람이 신경통과 관절염 치료를 위해 줄을 설 정도로 수량도 풍부하고 효험도 있었다. 지금도 주민들은 ‘앉은뱅이도 이 고랑에서 물을 맞으면 벌떡 일어설 정도로 효험이 있는 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목포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지하수 개발 등이 이루어져 현재는 마을 주민들이 쓰는 식수마저 고갈된 상태다.
도림동의 전주이씨 입향조는 완풍대군 7대손 이근용((1590-1633)이다. 공은 담양 월산면 홍농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 입촌 이유는 뚜렷하지가 않다. 우와리(목포대에서 청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우산재라는 전주이씨 제각이 있다.
승달산에는 골짜기 골짜기마다 암자들이 있었다. 전하는 말로는 승달산 자락에 4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많은 수도승들이 암자에서 공부를 했으며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사월초파일이 되면 마을 앞은 그야말로 사람바다였다. 목포 해남 등지에서 법천사를 가려는 사람들로 하루 종일 마을 앞이 붐볐다고 한다. 그때는 마을에 두 개의 주막밖에 없어 드물게도 주막 앞에서 줄을 서는 진기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고인돌이 많았다. 은진팬 평버들이라 하는 곳에는 고인돌로 이루어진 산이 있을 정도였다. 그중 상당부분이 공사장에서 사라지고 몇 기만 현재 전시용으로 남아있다. 또한 목포대 옆 대암동에도 고인돌이 많이 있다.
서남부 지역 남로당의 근거지였다
청림 마을엔 무안 박씨 재실(평강 채씨 재실이라고도 함)인 경모재가 있고 양촌 마을엔 나주 임씨의 제각인 화산재가 있다. 경모재는 원래 뒷고랑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4칸 팔작지붕에 삼문이 있으며 재각 안에는 5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2005년에 중건했다. 화산재 또한 4칸 팔작지붕이며 삼문이 있다. 목포대 옆 대암동이라 부르는 곳에 무안박씨 제각인 영대암이 있다. 전체가 시멘트 구조물로 이루어진 제실은 5개의 현판과 11개의 주련이 달려있다.
목포대학교 경내엔 삼천재라는 서당 겸 재실이 있으며 박순 효자각도 있다. 효자각은 두 개의 효행비가 앞에 있으며 1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朴 洵(1681-1765. 자-윤보. 호-竹圃)은 지극한 효자였다. 병석에 있는 모친에겐 꿩고기를, 부친에겐 죽순과 잉어를 하늘의 도움으로 마련해 부모를 봉양한 효자였다. 박 순은 삼천재의 주인공인 박성지의 6대조이다. 또한 효자각에서 조금 떨어져 아래에 있는 三遷齋는 三休亭이라고도 하는데 1942년 박성지가 엄친 박기윤의 생전의 행적을 기리고 후세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지은 것이다.
삼천재는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 지붕의 전형적인 정제 건물로써 기둥 하부를 석재로 하였어도 육중하면서 단아한 고풍을 견지하고 있다. 정면 3칸의 솟을 대문 역시 석재 위에 지어, 본채와 잘 어울리고 있다. 경내 좌우에 은행나무와 줄 가시나무가 있으며, 경내 우측에는 무안 박공 사적비가 있다. 현재 역사문화학부 전통문화 교육장으로서 한문학 및 한국 전통문화에 관련된 교과목을 강의하고 토론하는 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천재는 목포대학교 소유지만 효자각은 무안 박씨 가문의 소유다.
목포대학교를 중심으로 냉골 솔동재 범바우 평버들 천치골 따박골 사장골 사자바위 이패빠골 수리바위 큰골 작은큰골 갱기재 뒷고랑 매봉 양촌재 안산재 빈대절터 숯골 토골 사직골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다. 이중에서 천치골은 목포대학 뒤에서 법천사로 오르는 길로 예전에는 천치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빈대절터는 사장골에 있으며 지금도 돌을 들치면 빈대가 나온다고 한다.
청림 마을은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서남부 지역 남로당의 근거지였다. 이 마을 출신 박병관과 박공하의 영향을 받아서 청계면의 인재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사람들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것이다. 실지로 이 마을 주민 21명을 비롯해서 구로리 관동 마을의 20여명, 서호리 기동 마을의 13명, 복길 마을의 주민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것은 이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좌익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사상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졌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마을 뒤 천치골에서는 이 마을 주민들이 죽창의 피해를 많이 입기도 하였다.
당시 중심 인물이었던 박병관은 광복 이후 서울시 남로당 위원장을 역임하고 월북해서 주요국 북한 대사로 나가기도 했던 인물이며 박공하는 일제 강점기 때 청계 면장을 지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명당의 전설을 안고 있는 청계면의 중심 마을 - 도림2리 연곡
연곡은 도림2리에 속한 마을로 칠성동 장터 연곡으로 이루어졌으며 목포대 앞의 광-목 간 도로에서 아래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로는 승달산에서 발원한 연곡천이 흐르고 아래로는 청수리 잔등에서 발원한 용개천이 흐르고 있다. 두 개의 천(川)이 만나 연동개를 이루며 복길 간척지를 적시고 있다. 원래 연곡천은 S자 형으로 흘렀으나 현재는 목포대에서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
마을은 승달산을 주산으로 하고 보살봉을 마주하고 있다. 칠성동은 현재 청호주유소 주변을 말하는데 예전에 7개의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인데 이곳을 개발하면서 목포대서 연구용으로 가져가거나 주변의 사방공사에 쓰여져 지금은 하나도 없다. 또한 이곳에는 물이 잘 나는 샘이 있었다.
장터는 연동개 주변의 연곡 마을 아래에 있는 지역이다. 60여 년 전부터 場이 섰던 곳이어서 붙여진 지명인데 상마리 평림 마을 앞에 있었던 장송장이 이곳으로 옮겨진 듯하다. 3일과 8일에 장이 섰는데 복길리와 구로리에서 잡히는 많은 해산물들이 이곳에서 거래되었다. 한때는 우시장 개설을 검토할 정도로 장터가 커가는 규모였으나 80년대에 복길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간척지로 장터를 옮기자 활성화 되지 못하고 없어져 버렸다.
이 장터가 지리적으로 아래쪽에 있어 비가 많이 올 때는 연곡천과 용개천의 두 개천에서 내려오는 물을 감당하지 못한다. 지난번의 장마에도 갑자기 불어나는 물에 이곳에 살고 있는 4가구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연곡은 연이 심어져 있는 골짜기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풍수적으로 연잎의 형상이어서 연동이라 했으나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연잎의 줄기와 꽃이 만나는 지점이 현재 영화밥상의 자리이다. 풍수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자리인 것이다. 이처럼 자세히 보면 연곡을 포함한 도림리 전체가 불교와 관련이 깊다. 실지로 도림리 이전의 지명은 절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寺祭리(師弟동 또는 士才동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이다. 마을유래지에도 ‘蓮谷은 입석 마을 아래에 있는 마을로 조그만 연못에 연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불교와 관련된 어떠한 것도 없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이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청계면의 중심 마을
연곡은 명당과도 관련이 있는 전설이 있다. 승달산에서 수행하던 노스님이 예불하면서 염주를 떨어뜨렸는데 떨어진 곳이 연곡이었다 한다. 염주가 떨어진 곳은 천하의 명당으로 3정승 6판서가 代를 이어 나올 수 있다는 곳이다. 하지만 염주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아직까지 혈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
문헌으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일서면 蓮洞이 나온다. 하지만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연동이나 연곡의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이후 1987년에 가서야 청계면 도림리 연곡으로 나오며 점차 인구가 많아지자 현재는 도림7리까지 分里되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가 않다. 마을유래지에는 무안박씨가 먼저 들어오고 이후 전주이씨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도림1리의 입향조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예전에 이 마을은 현재 청계면 노인회 분회가 있는 곳에서 몇 가구만 살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논과 밭이었으며 주변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마을의 형성도 장터가 들어오고 면사무소가 개설되면서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뚜렷한 입향조가 없다. 굳이 말한다면 원주민이 없이 다양한 성씨가 모여 이룩한 복합성씨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면사무소와 보건소 복지회관 그리고 농협이 들어서 있어 문화와 교육과 교통 복지 그리고 경제의 요충지가 되는 청계면의 중심마을이다. 하천과 시내가 복개를 하여 마을이 이루어져 복개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이 마을은 조리형으로 만호 터라고 알려져 있다. 해서 원주민보다 외지인이 쉽게 정착하고 성공도 빨리 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 수 있는 곳이다. 지역적으로 바닷바람이 세어 3월에도 눈이 잘 녹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마을에 천석군의 터가 두 군데 있다고 한다. 하나는 현재 한일빌라가 들어 선 곳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밥상 아래 밭이다. 한일빌라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청계면의 천석군 한양조씨 조자현이 살았던 터이지만 영화밥상 아래는 아직 주인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목포대학이 들어오면서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주민들 대부분이 상업을 통해서 소득을 얻고 있으며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별로 없다. 한국전쟁 때 많은 주민들의 사상자를 냈던 청림 마을과 인접하고 있어 이 마을도 많은 피해가 있었지 않을까 여겼으나 의외로 주민들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복합성씨의 마을이지만 서로 협조하고 양보하여 화목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연동개에 대한 주민들의 노래 두 곡을 채록했다.
산이좋아 연동개냐
물이좋아 연동개냐
산도물도 좋다마는
다리좋아 내가사네
산이좋아 청계더냐
물이좋아 청계더냐
산도물도 좋다마는
연동다리 못믿어서 못가겠네
참고로 풍수지리로 널리 알려진 옥룡자 유산록의 승달산 관련 일부를 싣는다.
백천(百川)이 회조(回朝)하고 만산(萬山)이 폭주(輻輳)하니
갑산정기(甲山精氣) 모은 곳에 설법가사(說法袈娑) 벌였으니
아름다운 저 형상(形象)이 십이상좌(十二上佐) 분명하다
발우(鉢盂)는 동쪽에 있고 운암(雲岩)은 남쪽에 있도다
저 노승(老僧)의 거동 보소 백팔염주(百八念珠) 손에 쥐고
팔폭장삼(八幅長衫) 떨쳐입고 모든 제자 강(講) 받을제
그 중의 늙은 중이 스승께 문안(問安)할 제
염주(念珠) 하나 떨어져서 수구원봉(水口圓峰) 되었고
간태금성(艮兌金星)이 충천(沖天)하니 혈재방원개정처(穴在方圓蓋粘處)라
사륜석(四輪石)은 뒤에 있고 금어옥대(金魚玉帶)는 아래에 있고
팔백연화(八百煙花) 놓여있고 삼천분대(三千粉袋) 모였도다
지역교육과 발전을 위해 터를 양보한 마을 - 도림3리 백련동
현재 목포대학교가 들어선 자리에는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백운정과 도림동 대흥동 그리고 양지촌과 청림 등 다섯 마을이 있었다. 1979년 목포대학교 건설이 시작되면서 백운정과 도림동은 목포대학교 부지로 모두 들어가고 陽村(陽之村) 과 靑林은 일부만 들어갔다. 또한 승달산 자락의 상대미 천치골 사장골 사직골 등 네 개의 골짜기도 함께 목포대학교 부지로 들어갔다. 후에 목포대가 확장되면서 평버들과 대흥리가 새로 편입되었다.
백련동은 도림3리에 속한 마을로 목포대학교 건설로 이주하게 된 백운정과 도림동 마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마을이다. 후에 청림과 양지촌 일부의 주민과 평버들 대흥리 주민들도 함께 와 살게 되었다. 이때 처음 터를 잡은이가 현재 마을 노인회장을 하고 있는 신현중 공이다. 이어 들어온 성씨들이 전주이씨 김해김씨 무안박씨 평산신씨 등으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원래 이 마을은 바다였으나 1970년대 청계면 복길리와 삼향면 왕산리 사이에 복길방조제가 들어서면서 간척지가 되었다. 이후 농경지가 조성되어 농사를 짓다가 1979년부터 매립을 시작하여 부지를 만들었고 1981년에 처음 주택이 들어서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백련동(白蓮洞)이란 지명의 유래는 마을 주변의 지형이 연(蓮)의 모양이고 마을 옆으로 흐르고 있는 개천의 지명이 연동개라고 부른데서 비롯된다. 처음 이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 이름을 정할 때 여러 의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원래 있었던 지명을 참고로 해서 지명을 붙이자는 데 모두 동의해 백련동이라 한 것이다.
보살봉과 서당뫼 아래로 흐르고 있는 하천을 연동개라 하는데 지금은 농개천이라 부르는 큰 개웅이다. 또한 마을 오른쪽에 있는 산을 서당뫼라 하는데 지형이 연잎[蓮葉]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이 산에는 무덤에 석물을 하지 못한다. 연잎의 지형이어서 석물을 하면 연잎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서당뫼 주변에는 연골, 연동, 연동개, 연곡 등 연(蓮)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예전부터 도림리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이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원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의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우리 지역에서 도시 계획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마을
마을은 보살봉(소살봉이라고도 함)을 주산으로 하고 좌측으로는 놋종골 집각골 가시동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서당뫼 또는 안산이라 부르는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복길방조제로 형성된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청주한씨의 문중산인 놋종골은 산 정상에 놋종이 묻혀 있다고 전해져 오나 아직 확인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鍮店洞이라 불렀다.
이 마을은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도시계획이 이루어져 형성된 마을이다. 도로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이 계획적으로 조성되어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마을회관은 위치가 좋고 넓어 청계면에서 행사를 할 때면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서 준비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교육을 할 때도 회관을 사용해 마을에서 유상으로 임대해 주기도 한다. 주민들은 부지런하고 근면할 뿐 아니라 성실함으로 부를 이룩한 마을로서 자립심이 강한 마을이다.
한때는 고향에서 쫒겨 나왔다는 의미로 ‘쪽개촌’의 ‘쪽개민’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런 이름으로 비아냥거릴 때마다 주민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백련동 주민들의 양보로 우리 지역에 대학이 들어서게 되고 지역이 발전하게 된 것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현재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연동개는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이 개웅에는 수많은 좌익인사들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웃 마을인 청림 마을은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서남부 지역 남로당의 근거지였다. 이 마을 출신 좌익인사의 영향을 받아서 청계면의 인재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사람들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것이다.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사상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몸이 오싹해진다고 한다.
이 마을을 포함하여 주변에 두 개의 교회와 천주교 성당이 있다. 각각 교파를 달리하는 청계중앙교회와 도림교회가 그것이다. 중앙교회는 제일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이고 도림교회는 목포에서 건너온 교회다. 국립대학이 있다 보니 미래신자를 확보하기 위한 교회간 경쟁이 치열했다. 실질적으로 도림리에 5개의 교회가 있다. 2001년에 지어진 천주교 성당은 두 개의 공소를 안고 있다.
이러다보니 주민들 대부분이 신자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많아 일요일이면 집에 남아있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한 주민은 내가 교회에 나가는 이유가 천당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요일에 혼자 남아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면서 신앙보다는 체면 때문에 나간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주택을 짓다보니 건축자재가 모자라고 경험이 부족해 대부분이 부실주택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복길간척지의 수문 고장으로 주민들이 염해 피해를 입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개웅 옆의 연동은 일제강점기 때 골재채취장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골재는 망운비행장 터 닦이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골재의 운반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이기도 하였다. 즉 여러 대의 멍텅구리 배에 골재를 싣고 한 척의 기선이 끌고 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이 골재는 서해안 물길을 따라 망운의 비행장 공사장까지 운반 되었다.
여산송씨의 사패지 - 도림4리 월암 마을
道林里는 청계면소재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뒤에는 무안의 주산인 승달산이 있고 里의 중앙으로 광주 - 목포 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道林’이란 지명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길 가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도림리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원래 도림리는 무안군 일서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청림리 양지촌 삼덕리 대흥리 대암동 격양동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선돌 연곡 2개의 마을뿐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나누고 이어 도림3리를 3. 5리로 분리 했다. 2000년에는 다시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해서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해서 월암이란 지명은 1993년에 처음 나온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이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도림4리의 구역을 보면 청계 제일교회에서부터 상마정 삼거리까지 해당되는 부분으로 광-목간 도로의 오른쪽 지역이다. 매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보살봉이 자리하고 있다. 신촌 태양열 안산 월암 등 4개 마을을 포함한 상당히 넓은 지역이다. 신촌은 새로 마을이 이뤄진 지역으로 1980년대 중반에 형성되었다. 도림4리에서 제일 위쪽에 위치한다. 태양열 마을은 1983년경에 형성되었는데 당시 태양열은 친환경 주택단지로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을 때 정부 지원을 받아 형성된 마을이다.
안산은 매봉의 줄기로 마을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제일교회 뒤에 있는 산이다. 안산은 대체적으로 마을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특이하게도 이 산은 마을 뒤에 있으면서 마을이름이 되고 있다. 안산은 도림4리의 중심마을이며 안산 기슭에는 현재 새로운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월암은 도림6리에도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행정구역의 구분이 조금 애매하다. 특히 ‘월암’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바위나 고인돌이 있어야 될 텐데 주민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알 수가 없다. 칠성동의 고인돌을 보고 마을 이름을 지었는지 아니면 입석마을의 선돌을 보도 지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같은 이름의 해제면 유월리 월암이나 일로읍 월암리 월암 마을의 경우에는 마을에 커다란 고인돌이 있다.
도림1리의 일부를 포함한 도림4리와 도림7리는 대부분 여산송씨의 터였다. 매봉과 안산 그리고 보살봉의 상당부분도 송씨들 소유의 땅이었다. 이렇게 송씨 소유의 땅이 많은 것은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 송 박(호-愛松) 송 욱(호-愛筠) 등 두 형제에게 나라에서 내린 사패지였기 때문이다. 매봉 기슭에 송씨들의 재실 겸 납골당이 자리하고 있다.
세장비 뒤에 문중 소유의 땅을 표시했다
조선시대 무안의 여산송씨 문중은 호국정신 뿐 아니라 열부행의 표상이었다. 적과 항쟁하다 죽음은 忠이며 적에게 잡힌 치욕을 씻을 길 없어 유방을 베고 순절한 죽음은 烈이며 적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꾸짖다가 분사한 죽음은 節이며 의려를 모아 세가 궁함에 의롭게 죽은 것은 義이다. 이처럼 一門의 안에서 忠 節 義 烈이 나옴은 드물다 할 것이다.
마을에 한때는 똥산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동산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예전에 한양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며 무덤도 한 기가 있어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되었으나 현재는 소나무 두 그루만 서 있다.
동산에서 조금 내려오면 1922년 임술년에 세워진 여산송씨세장비가 있다. 지금은 주택 속에 있지만 예전에는 한양 가는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길이다. 세장비 뒷면에 조금 특이한 문구가 있다. 소산에 20정4반, 응봉에 22정 3반, 상대암에 21정 2반 등의 송씨 문중 소유의 토지 면적이 적혀 있다. 이처럼 세장비에 문중 소유의 토지를 명시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문중의 위상을 과시하는 면도 있으나 토지 분쟁을 없애기 위한 면도 있다.
청계중학교 후정에 한 쌍의 석인이 있다. 송감사의 묘에 있었던 석인이다. 송감사는 여산송씨 족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나, 상마리 사람들의 의식에 뚜렷이 남아있다. 송감사가 살았다는 죽림지역에는 지금도 밭을 갈 때 쟁기 날을 버릴 정도로 많은 기왓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송감사가 이곳에 살았다는 자료나 기록은 없다. 하지만 불당골로 불리는 곳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송감사의 묘라는 큰 봉분이 있었는데 그 묘 앞에 서 있었던 석인 두 기가 예비군 훈련 때 예비군들에 의해서 현재 청계 중학교에 옮겨진 것이다.
공공기관으로는 1952년에 세워진 청계제일교회가 있고 1971년에 세워진 청계중학교가 있다.
문화를 가꾸는 마을 - 도림5리 문화촌
문화촌 마을은 목포대학교가 도림리에 들어오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백련동 마을에서 분가했다. 해당 지역은 목포대학교 사거리에서 복길 쪽으로 연곡천을 기준으로 右로는 연곡마을이 左로는 백련동과 문화촌으로 나누어진다. 이어 백련동과 문화촌은 푸른솔 유치원 앞 다리에서 다시 나누어진다. 백련동은 복길간척으로 형성된 간척지이지만 문화촌은 밭으로 활용했던 농지였다. 복길간척지는 삼향면 왕산리 금동 마을과 청계면 복길리 복길 마을을 잇는 제방으로 1986년에 완공되었다.
문화촌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백련동에서 분리되면서 주민들이 모인 총회에서 나온 이름이다. 마을에 학문기관이 들어왔으니 그에 걸맞는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민들의 바람이 문화촌이란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도림리의 분구를 살펴보면 1986년에는 선돌과 연곡 2개의 마을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다시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하고 2011년에는 2리를 2, 7리로 분리했다.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으로 알려졌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7개의 고인돌을 갖고 있는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백련동과 문화촌으로 분리되면서 당시 문화촌 터에는 12가구의 취락개선 주택건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어 아파트가 들어서고 청계제일교회에서 분가한 중앙교회와 원불교가 들어섰다. 또한 4차선의 도로가 개설되고 식당가가 형성되면서 나름대로의 활력을 찾고 있다.
원래 이 마을에는 딴산이라 부르는 석산이 있었다. 목포대 정문 앞 사거리에 있는 산으로 대부분이 돌로 이루어진 산으로 승달산과 떨어져 있다 해서 딴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당국에서는 도림리의 이주민을 수용할 토지를 만들면서 이 산의 돌을 활용한 것이다. 지금은 우람했던 석산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평이한 평지로 변해있다.
이 석산과 관련하여 오래 전부터 ‘道林’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풍수에 능한 사람이 이 마을에서 승달산을 바라보고 노스님 셋이 경을 읽고 있는 노승예불형의 吉地를 보았다. 둘러보니 인근의 남성리 소살봉은 보살산이고 예전 목대 앞에 있었던 석산은 칠성산의 형국이었다. 해서 보살 할멈이 격앙동에서 밥을 지어 칠성산에다 바쳐 놓으면 승달산의 스님이 공양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 것이다. 또한 승달산의 12봉우리가 12제자가 되어 스님에게 인사를 하는 형국이어서 때가 되면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도림이라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1981년 목포에 있었던 목포대학교가 이 마을로 이전한 것을 보면 선인들의 예견지명의 지혜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현감의 선정비가 선돌처럼 세워진 마을 - 도림6리 입석
입석은 도림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선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입석이란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일제강점기인 소화 3년(1928년)부터이다. 현재 목포대학교 정문 옆에는 승달산 자락의 안골과 물맞이고랑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그곳으로 국도 1호선이 지나면서 다리를 놓게 되었다. 그때 붙여진 이름이 입석교이다. 그 이후 입석교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때부터 입석마을 또는 선돌 마을로 불려진다.
도림리의 분구를 살펴보면 1986년에는 선돌과 연곡 2개의 마을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다시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하고 2011년에는 2리를 2, 7리로 분리했다.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마을에 선돌이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선돌에 관련된 유래는 네 가지 설이 전해져 온다. 하나는 한양에서 8개의 바위가 남으로 내려오다 칠성동에서 7개가 멈추고 나머지 하나가 현재의 자리에 멈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을이 음기가 강해 비보를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웠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어떤 장사가 성을 쌓으러 가다가 다 쌓았다는 말을 듣고는 가져가던 돌을 버렸다는 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기를 못 낳는 여자가 점을 치러 와서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묻자 점쟁이는 오늘 정성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키면 원하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했는데 여자는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면서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겨 바위로 변했다는 설이다.
원래 도림1리에는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백운정과 도림동 대흥동 그리고 양촌과 청림 등 다섯 마을이 있었으나 개울 건너 백운정과 도림동 그리고 대흥동 일부는 목포대학교 부지로 들어가고 지금은 陽村(陽之村) 과 靑林(淸林)으로 이루어졌다. 白雲亭과 청림은 무안박씨들이 주로 살았고 양촌과 대흥동은 청주한씨들 그리고 도림촌은 전주이씨들이 주로 살았다. 또한 이 마을은 상대미 천치골 사장골 사직골 등 네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처음 들어온 성씨는 국씨들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한 가구도 없고 냉골이라 부르는 곳에 국씨들 묘만 남아있다. 이곳에 살았던 국씨들의 후손은 현재 망운면 장재동에 살고 있다. 후에 청주한씨 韓番仁(자-기옥, 호-둔암)이 들어와 입향조가 되었다. 공은 장흥군 장도면 북교리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에 피난을 와 이곳 도림리 유점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는 영달을 꿈꾸지 않았으며 후손들의 교육에 힘쓰며 자연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이후 들어온 성씨가 전주이씨와 무안박씨다. 현재는 외부인이 더 많은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주민들은 원주민을 중심으로 부녀회를 조직하여 상부상조하고 근면한 생활을 하며 화목한 마을 생활을 하고 있다.
입석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사자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국도1호선이 지나고 있다. 청계면의 중심 마을로 월암 마을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우체국 파출소 등과 버스 정류장 그리고 두 개의 교회를 포함하고 있다. 한때 물이 좋아 이 지역 막걸리의 대명사가 되었던 청계막걸리의 주조장도 이 마을에 있었다. 초기에 막걸리 양조를 시작했던 사람은 돈과 명성을 모두 얻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시도했던 사람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잃었다. 현재 마을에서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은 원래 청계면 노인정이었다.
선돌은 선정비였다
입석은 칠성바우 미륵바우라고도 불려지는데 다세대 주택 옆에 붙어 있다. 예전에는 주택가 길 옆에 있었는데 주변이 정리되면서 그 자리에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땅을 돋아 다세대 주택을 지은 관계로 선돌이 깊숙이 묻혀 있지만 위에는 스텐레스로 보호막까지 쳤다. 선돌의 길이는 3미터 50센티미터 폭은 1미터 60센티미터로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선돌 앞에 상석이 있었고 주변에는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었다 하나 현재 상석은 없고 어린 동백나무만 자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제사도 지내지 않고 있다.
들어가서 살펴보니 앞면에 희미하게 글자가 조각되어 있다. ‘縣監金侯( )省 恤民善政碑 ( )丑 六月’라 쓰였다. 자료를 찾아 확인해보니 1684년 7월 무안현에 부임해 1688년 2월까지 4년 동안 근무했던 김일성 현감의 선정비였다. 이 입석은 고인돌이나 거석숭배사상에서 나온 돌이 아니라 원래 선정비였던 것이다.
도림리 일대는 모래 자갈 밭이어서 농사 짓기가 매우 어려웠다. 해서 예전에는 어렵게 살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국도1호선이 지나가고 1981년 목포대학교가 들어오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목포대학교 학군단 옆 대암동이라 부르는 곳엔 고인돌이 많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이 마을이 좌우의 대립으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여야 했다. 이웃 마을에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이 있어서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사상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졌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쟁의 중심지에 있던 청계파출소는 당시에 대나무로 감싸듯이 보호해야 했다.
파출소 앞에 3기의 묘를 안고 있는 묘역이 있다. 주민들이 부르기를 압해도 김씨 땅이라 일컬어지는 이 묘역은 5기의 고인돌이 놓여 있다. 예전에는 10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5기만 확인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2기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데 3기는 고인돌의 일부가 땅에 묻혀있다. 그중 가장 큰 고인돌의 크기는 길이가 3미터 80 폭이 2미터 90으로 대형이다. 얼마 전까지 묘역 앞에는 수백 년이 됐음직한 소나무가 있어 역사와 연륜을 자랑하였으나 현재는 없다.
목포대 정문에서 선돌로 오는 소로 옆에 1991년에 세운 효자무안박공봉규기행비와 효부달성배씨행적비 등 두 기의 비가 서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마을 중앙에 무안박씨 제각인 매월당이 있다. 이 제각은 애한정 박익경의 증손인 매월당 박문용을 모신 제각으로 정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1993년에 중수하였다. 재각의 문이 잠겨 있어 재각 안의 상황은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거지 - 도림 7리 격양동
격양동은 보살산(주민들은 소살봉 소설봉이라고도 한다) 기슭에 있다. 마을 앞으로는 용개천이 흐르고 있으며 맞은편에 매봉과 안산이 자리하고 있다. 격양동은 전체가 여산송씨 문중산이었다. 처음엔 5-6가구 송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으나 주변 마을에서 한두 사람이 건너오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이 마을이 행정적으로 독립한 것은 2011년이었다.
도림리의 분구를 살펴보면 1986년에는 선돌과 연곡 2개의 마을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다시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하고 2011년에는 2리를 2, 7리로 분리했다.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으로 알려졌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7개의 고인돌을 갖고 있는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도림1리의 일부를 포함한 도림4리와 도림7리는 대부분 여산송씨의 터였다. 매봉과 안산 그리고 보살봉의 상당부분도 송씨들 소유의 땅이었다. 이렇게 송씨 소유의 땅이 많은 것은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 송 박(호-愛松) 송 욱(호-愛筠) 등 두 형제에게 나라에서 내린 사패지였기 때문이다. 매봉 기슭에 송씨들의 제실 겸 납골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삼거리와 격양동으로 이루어졌다. 삼거리는 상마삼거리를 말하며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이 마을 입향조는 여산송씨 송태섭이다. 약 100여년 전부터 송씨들이 5-6가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목포대학이 들어오고 여러 계층의 사람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이어 코아빌라를 선두로 백두그린빌 그리고 별장아트가 들어오고 운전학원이 문을 열면서 유동인구를 포함한 많은 세대가 들어섰다.
이 마을의 이름은 격양동이다. 조선시대 표기는 擊壤洞으로 했다가 일제강점기부터는 格良洞으로 표기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아는 사람이 없어 정리하기 어렵다. 한때 이 마을은 재앙동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이 없고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실지로 초기에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만 살았다. 이 마을에 살면서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홀로 되기도 일찍 죽기도 하였다. 또한 아파트를 지었지만 1년 넘게 분양이 되지도 않아 굉장히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해서 주민들이 격양동을 부르면서 대양동이라 하다가 재앙동으로까지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교통이 좋고 공기가 좋을 뿐 아니라 편의시설을 가까이 하고 있어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거지가 되었다. 여기에 살고 있는 많은 주민들이 목포나 무안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때 보살봉과 매봉 그리고 승달산에서 봉화가 올랐다. 좌익 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연락을 취하는 수단이었지만 도림리는 다른 지역보다 좌익활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좌익활동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사람도 많았다. 이 마을에서도 운전학원 골짜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