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과 전방삭 장군은 청년 시절 전남 보성군 보성읍에서 만나 무예를 연습하면서부터 절친한 지우 관계였고 임란과 정유재란 시 같이 싸우고 같이 죽기를 맹세한 동순절자로 많은 기록들이 있으나 어인 일인지 난중일기에 전방삭 장군 이름이 나오지 않아 (말미에서 밝히겠지만 필자의 조사로 이순신과 함께 싸웠고, 이순신 영혼을 위로코자 충민사 곁에 사당까지 지어 죽을 때까지 명복을 빌 것을 다짐 한 승려 옥형, 자운, 박대복의 이름도 난중일기에 나오지 않았다) 후세대들 중 이분들의 공적에 의심을 갖고 역사를 왜곡한 것처럼 생각 하고 있어 이를 해명하는 근거자료를 제시코자 한다.
■ 증거자료 1 (선무원종공신록권 )
1605년 선조 임금께서 임란과 정유재란에 공을 세운 공신을 선정 등급별로 명단을 기재하여 록권을 하사 했는데 전방삭 장군은 2등급에 기록되었다.
■ 증거 자료 2 (천안 전씨 대동보 기록)
역문
명종 을사년에 태어나니 자는 일진이요 호는 규암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벗에 대한 우애가 보통 보다 뛰어나게 다르고 무예가 절윤하여 선조 을해년에 등과하니 훈련원 정으로 제수되어 임진년에 이충무공 순신 막하에서 싸우는 업무를 도와 무수한 적을 베어 죽이고 또 정유란을 당하여 왜적이 침입함에 관군은 해체되어 가히 당적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공은 살신 순국의 뜻을 품고 창의하여 피를 뿌리어 의병을 창솔하여 보성 왜교 죽전에서 왜장 희입과 더불어 싸워 다수를 베니 기게 가 나는 것 같았다. 흥양 망주포 첨산으로 진을 옮겨 송공 대립과 최공 대성으로 군대를 모집하여 적의 머리를 베었으나 하늘이 돕지 않아 적탄이 가슴을 뚫어 죽을 지경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간담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일이 절의록에 실려있다. 선무원종공신으로 녹권이 있으니 상촌 신흠경이 전지를 받들었고 우산 안방준이 장문을 지으니 낙안 읍지 와 호남절의록에 실려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위 내용 중 " 공은 살신 순국의 뜻을 품고 창의하여 피를 뿌리어 의병을 창 솔하여..."라고 적혀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적은 유품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헌병에 의해 유품이 보관된 장자 후손 집을 불 지르고 유품을 빼앗아 갔기에 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한이 맺혀 있으나, 조상님들이 전하는 구전을 기록해둔 「어모장군전공창절록(禦侮將軍全公彰節錄)에 "공은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하면서 전주 지방을 순회 시 간청 하기를 '소신은 고향 땅에 잔류하여 의병을 모아 지리지형을 이용하여 전술을 연마하며 조직 전열을 가다듬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기 간청 하옵니다'라고 진언하자 왕세자 광해군이 기뻐하며 허락하셨다.
"이와 같은 사실이 고향 보성에 전해져 우국충정 열혈 청장년 300여명이 공을 찾아 모여들었고 불철주야 전술을 연마하고 조직 전열을 가다듬으셨다."라고 적혀있다
■ 증거자료 3 (호남 절의 록 )
역문
전방삭 자는 일진 본관은 천안, 판관 수완의 현손이고 진사 청의 손자이다. 효우가 두터웠고 무예가 있어 특별하게 천거되어 훈련원정에 제수 받았다. 임진란 때 이충무공을 따라 최대성, 송대립 등과 함께 군무를 도왔다. 왜교 첨산 등의 싸움에서 연승을 거두었으며 무수한 적을 참획했으나 탄환에 맞아 죽었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세주: 아들 판관 홍례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우산 안방준과 함께 입전되었다.】 【낙안】 ※보성 출신이나 아들 홍례가 부친 전방삭 장군의 의병 훈련지였던 당시 낙안군 연등으로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이거 한 후 작성된 문건으로 낙안(현 보성군 벌교읍 영등)으로 기재 되었음
■ 증거자료 4 (여수 충민사 진충 제공 추모비)
선조임진전라좌수영이충무공막하진충제공추모비(宣祖壬辰全羅左水營李忠武公幕下盡忠諸公追慕碑)
전방삭천안인자일진호규암무절공인량후이전공여훈련원정유사적비(全方朔天安人字日進號葵庵武節公仁亮后以戰功除訓鍊院正有事蹟碑)
■ 증거자료 5 (선무공신 추모록)
역문
전방삭 자는 일진이요 호는 규암이며 천안 전 씨이다. 백제 환성 군 전섭이 위 시조요 고려 천안 전씨 부원군 전락과 평장사 전 충우와 천성군 전세주와 국조 광주 목사 전구생과 상주 목사 전자명은 같은 조상이다. 판관 전수완과 선전 전대복과 진사 전 청과 장흥 부사 전 윤부는 고조 증조 조부 선고이다
명종 때 출생하여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하고 무예가 보통에 뛰어났으며 선조 을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별천으로 훈련원 부정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 막하에 가서 군사의 일을 도와 적군을 무수히 베어 죽였다.
정유년에 왜적이 또 쳐들어와 날뛰매 공이 혈서를 써서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기로 뜻을 궂히었는데 왜장 희입을 보성 죽전 들판에서 교봉하여 적을 무수히 죽이고 격퇴 시켰다. -후략 -
■ 증거자료 6 (두산백과 )
전방삭(全方朔)
조선 중기의 무관이자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전 부정(副正) 건공장군(建功將軍)으로 재직하다 임란 발생으로 왕실이 피신할 때 광해군 세자를 호종했으며, 나라를 지키고자 관직을 버리고 동갑내기인 이순신 장군 관하에서 군무를 돕고 수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의병을 모집 훈련하여 이순신 수군 재건에 일조를 하고 고향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 증거자료 7 (위키 백과 )
전방삭
전방삭(全方朔, 1545~1598)은 조선 중기 무장이며 의병장이다. 본관은 천안 (天安)이며 자(字)는 일진(日進)이고 호(號)는 규암(葵庵)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이순신과 함께 큰 공을 세우고 그 후 의병을 모집 훈련하여 고향의 연해안에 침입하는 왜적을 수 차에 걸쳐 막아내고 이어 이순신 수군 재건 활동에 많은 공을 세웠다
■ 증거자료 8 (전 방삭장군 비석 )
■ 증거자료 8(최대성 정충문 비석 ) - 동료 장수 기록에서 -
■ 증거자료 9 (최대성 충절 사지) - 동료 장수 기록에서 -
위의 책 내용에 최대성과 같이 싸운 전방삭 장군과 동료 장수들의 이름이 수차에 걸쳐 기록되어 있으나 한 가지 내용만 기록해 본다
· 국사 편찬 위원장 이성무(李成茂)
" 순천, 광양, 고흥, 보성 등지에서 송대립, 전방삭, 김덕방, 황원복 등과 함께 20여 차례에 걸쳐 왜군 100여 급을 베고 승전하였다.
" 전방 삭은 선무공신 2등에 등재되었다."
■증거자료 10 (문희순 상서문)
■ 증거자료 11 (송대립 장군 충효록) - 동료 장수 기록에서 -
내용 중 일부
'공은 최대성, 전방삭, 김덕방 등과 함께 예진에 침입한 적선 30여 척을 대파하였으니 그때 공이 사살한 적의 수가 백여 명이었다. 이어 다시 흥양의 망저포에 적선 수십 척이 침입하여 그 적을 소멸하고'라고 적혀있다.
■ 기타 참고 자료
● 순천대학교 조 원래 교수 발표 내용 중 전방삭 장군 전투 기록
1. 1597년 6월 10일 고흥 첨산 전투 (협동 장수 - 최대성, 송대립, 황원복, 김덕방) 2. 1597년 6월 16일 망저포전투(협동장수- 최대성, 송대립, 황원복, 김덕방)
3. 1598년 3월 일 보성 예진 전투 ( 협동 장수 - 최대성, 송대립)
4. 1598년 4월 8일 고흥(흥양) 첨산 전투( 협동 장수 - 최대성, 송대립, 김덕방 )
5. 1598년 6월 6일 흥양, 보성, 낙안 전투( 협동 장수 - 최대성, 황원복, 정회)
6. 1598년 6월 8일 보성 안치 전투( 협동 장수 - 최대성, 황원복, 정회)
※참고 자료가 더 있으나 지면 관계상 줄입니다.
■ 서두에서 말씀드린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싸우신 분 들 중 「난중일기」에 기록이 없는 몇 분을 찾았기에 여기에 소개하고, 필자는 앞으로 계속 추적 조사해 보기로 한다.
● 전방삭(全方朔)
위에서 증거를 제시했으므로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 이순신과 함께 싸운 사실이 분명하나 난중일기에는 기록이 없다. -
● 박대복 (朴大福)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을 사모하여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임전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사복시 부정(司僕侍副正)에 제수되었다. 1592년 한산대첩 때 순절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실은 「이충무공전서」와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어있다."라고 「 한국향토 문화 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호남 절의 록
필자는 상기 내용을 보고 호남 절의 록에서 찾아보았다.
" 임진란 때 이충무공을 따라 한산도 싸움에서 공과 대정 현감 차 천보(崔天寶)가 적선을 협격 하여 승세를 타고 전진하던 중 탄환에 맞아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위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과 함께 싸운 것이 분명하나 난중일기에 기록이 없다. -
● 자운 스님 - 승군 대장 -
필자는 포털 사이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았다.
"지금 우리 세대들은 승군 대장하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대강 기억하고 있으나 자운 스님과 옥형 스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신미대사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이순신이 거북선은 을 만들었다고 다들 알고 있다. 그런데 군사고문으로 자운 대사가 있었다 한다.
「여천 흥국사의 선당 상량 기록」을 보면
첫째 호남 해안의 지리에 밝은 자운스님이 이순신 장군의 군사 자문 역할을 했단 것이고
둘째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고해 바다의 중생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반야용선을 거북선으로 설계하여 받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북선은 나주 출신 군관 나대용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것도 공식 기록이 아니다. 거북선은 화엄경의 대가이며 해박한 지식을 갖춘 자운스님이 설계하고 나 대웅이 승군을 데리고 제작했을 것이다. " (네이버 블로그. 자운스님 옥형 스님 참고)를 읽고 호남 절의 록의 나대용을 찾아보았다. " 나대용은 거북선을 정비하고 발포(鉢浦)를 진수하다가 영남으로 옮겨갔다."라고 적혀 있다.
자운 스님의 임란 기록 진중일기가 있었는데 거기에 거북선의 설계도가 있었다 한다. 이 일기는 일본의 경찰서장이 탈취해 간 뒤 행방을 모르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 이런 사실로 보아 이순신의 군사 고문이었다면 난중일기에 한 번쯤은 나올 법 한데 한 번도 기록이 없다. -
● 옥형 스님 - 승군 대장 -
옥형 스님은 흥국사 승려로 있을 때 임란이 발발하자 자운 스님과 함께 승군 대장으로 활약하였고 이충무공이 전사할 때 같은 배에 타고 있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그는 이충무공의 장렬한 죽음을 목격했고 그의 충성심에 감복하였다. 그 뒤 여수에 충민사를 짓고 위패를 모시게 되자 평소에 장군을 위해 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충민사 옆에 초당을 짓고 제사를 올렸다. 이절이 지금의 석천사이다.
- 위의 내용으로 보아 이충무공과 무척 가까웠던 사이로 보이는데 난중일기에 기록이 없다 -
필자의 소견
난중일기를 분석해보면 일본이 1592년 양력 5월 23일(음 4월 13일 ) 침략하여 무려 6년 6개월 23일 동안 전쟁을 하였다. 이를 날짜로 계산하면 2,696일간이다.
난중일기는 1,593일간의 기록이 있고 1,103일의 기록은 없다. 그리고 일기에 등장한 장수나 군졸들은 대략 1,050여 명이다. 위에서 밝힌 분들로 보아 기록이 없는 분이 더 있으라 믿는다. 그러기에 능력이 허락하는 한 더 조사해 보고자 한다.
"이순신 장군은 나 홀로 영웅이 아니었다.
부하 장수들, 이름 없는 백성들, 노비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최선을 이끌어낸 훌륭한 리더이다.
국난이라는 절제절명의 위기에 그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구성원들을 단합 시킬 수 있었던 장군의 통합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김윤태씨의
엔터스코리아 칼럼의 글에 공감하면서 적어본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고 위의 분들과 사정이 같은 분이 계시는 것을 알게 되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같이 연구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