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진읍 검세리에 있는 작원관에 대해서는 여러 용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이래로 검세리에 關이 설치된 적은 없다.
영조대에 필사본으로 편찬된 밀주읍지, 정조대, 1832년, 1871년의 각 경상도읍지에서는
모두 관방이 없다(關防無)라고 되어 있다(다만 1832년읍지에서는 관방을 관애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1899년의 밀양부읍지에는 관방조에서 다음과 같이 한남관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한남관은 밀양군의 남쪽 50리 작원리에 있는데 남쪽의 요로와 통하고
관위에는 석벽, 관아래에는 강이 있으며 길은 아주 좁게 나 있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그때까지 없던 관이 특별한 사유도 없이 갑자기 설치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것은 한남문을 한남관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 아닌가한다.
따라서 검세리에 關이 설치된 것인양 關자를 붙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다만 1966년 예총 밀양군지회에서 발간한 밀양문화제 10주년 기념책자에는 鵲關이라는
현판사진이 실려 있다.
이 사진은 1936년에 홍수로 떠내려 가기 전의 옛 작원에 붙어 있던 현판사진이다.
역시 이 현판만으로 관이 설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일부 책(밀양지)에서는 그 현판이 삼랑진 읍사무소에 보관되고 있다고 하나 현재 알 수 없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검세리에는 관이 설치된 적이 없기 때문에 관자가 쓰여 질 수는 없으므로
이것은 관의 설치여부와 무관하게 쓰여진 것으로 본다.
아마도 경부선 철로 부설당시 작원을 옮길 때 쓰여져 게판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익전의 밀양지에서부터 최근의 향토지까지 모든 기록에는 밀양 검세리에 鵲院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검세리에 설치된 것은 작원일 뿐이다.
다만 작원은 험한 요지에 설치되었으므로 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또한 작원은 건너편 김해 都要渚로 가는 나루터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나루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결국 작원은 원, 관, 나루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정확하게 작원으로 부르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본다.
다만 1939년에 세웠던 鵲院關院門基址碑는 다소 복잡하게 적혀 있으나 마지막에 쓰여진 원을
기준으로 보면 결국 원이 맞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020A3F506A3B5910)
밀양문화제에 실린 작관이라는 현판
![](https://t1.daumcdn.net/cfile/cafe/19756B49506C11872F)
"작원관원문기지" 라고 복잡하게 쓰여져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716749506C118A30)
작원관이라고 쓰고 있다.
이 곳이 원, 관, 진의 역할을 했다고 적고 있다.
1936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