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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광산김씨 안동 예안파 종택(오천 유적지)
이장희 추천 0 조회 151 14.04.01 18: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산김씨 안동 예안파 종택(오천 유적지)

 

아가신 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 때 부터 집안에 관한 말씀을 자주 하셨다.

가문의 내력과 여러가지 상황적 비유를 곁들인 우월성이나 第一의 三韓甲族이라는 긍지심 고취등...

그 말씀은 내가 자라서 한 가족을 일구고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 오십을 몇 년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얼마 전 까지 계속 되었다.

래서인지 어릴 적에는 친구들과 班家의 우열을 두고 가끔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아버지 말씀이 머리에 요지부동 자리하고 있어

다툼이 있을 경우 거의 내 뜻으로 결론이 났었다.(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무엇을 알았을까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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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金 예안파 종택 전경

 

동시내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도산서원의 표지판을 찾으면서 약 20km정도 가다보면

눈 앞 멀리서 홀연히 나타나는 기왓집의 一群이 있다. 이 길이 初行인 사람은 저 곳이 도산서원인 줄

착각하기에 알맞다. 도로 우측에 "烏川 유적지"라는 안내 표지판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君子里"란 표지석이 조그맣게 보인다. 표지석에서 우회전 하여 진입하면

여기가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이 있는 "오천 유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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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초입의 入口

 

경유방 유장백세(善慶遺坊 流長百世)라는 행서체의 글귀가 이 집안의 내력과 家風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여 준다. "선을 행하고 쌓음으로서  집안 경사가 있고,그 가풍이 영원히 이어간다."이다.

말이 곧 이 집안의 내력과 전통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스치 듯 지나가면 껍데기만 구경하는

무의미한 나들이가 될 것이다.속 깊은 이야기를 모른 채 겉만 훑다보면 정작 보고 느껴야 할 알맹이는

 놓치게 마련이다. 수백년 풍상이 켜켜히 쌓인 옛 집 어느 한 구석인들 사연을 품지 않은 곳이 있을까?

모르고 지나치면 그저 나무 기둥과 기와 지붕에 불과하지만 주춧돌 하나, 방 한 칸에

고스란히 담긴 옛 사연을 알고 나면 그 공간은 새삼스레 정겨움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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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를 지나면 바로 우측 편으로 보이는 호수. 안동댐 유역면적의 끝자락이다.

 

곳 "君子里"는 본래 조선조 초기 부터 20여대 600여년간 세거해온 "외내"의 光金 예안파

건물들이 안동댐의 조성으로 수몰의 지경에 다다르자 국가지정 문화재를 우선으로 기타 부속 건물들을

1974년 이곳으로 이전해 오면서 생긴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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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를 숙지하고 천천히 돌아 보려는데 초겨울의 해는 벌써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山金氏는 5개의 大派가 있다.문정공파,문숙공파,양간공파,낭장공파,사온직장공파가 그것이다.

나는 이중 文正公派에서 분파된 文簡公派에 속하며 始祖로 부터 37世이다.

곳 "예안파"는 "양간공파"의 中派인 "밀직부사공파"에서 분파된 "전직공파"의 후손들이다.

21世 孝盧를 入鄕始祖로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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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를 보고 탐방을 시작 하려는데 눈길을 끄는 나무가 있어 가까이 가보았다.

보호수로  지정된 우람한 나무들을 보아온 터라, 저 정도의 크기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에 불과한데

나무 밑 둥치 부근에 설치된 동판의 내용이 이채롭다. 문중의 어느 분이 쓰신 내용이다.

 

해와달,별자리를 겨냥하자

 

-군자리 상징수 느티나무에 부쳐-

 

자리에 선 사람들아 고개를 들자,그리고 바라보라.이 나무는 나무이면서 역사이고 정신이다.

그 아기 무렵에 이 나무는 光金 반천년 世居의 땅인 외내에서 태어나 우리고장에 滄柔의 變이 있자

장황한 이삿짐 갈피에 담겨 여기에 식수 되었다.본래 이 나무의 족속인 느티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敬天崇祖의 상징으로 삼아 오신 것. 오랜 세월 우리 할아버님과 할머님들은 이 나무와 더불어 조상을

받들고 아들 딸 기르며 山川草木,天地萬物을 가꾸고 섬기는 나날을 살아 오셨다.

 

리는 그런 옛 분들의 핏줄이며 줄기요 가지며 잎새일 따름이다.오늘을 사는 우리는 새삼 이 나무

앞에서 옛 일을 되 새기며 새날을 여는 뜻을 세워야한다.여기 선 이 느티나무 처럼 튼튼하게 뿌리를

大地에 뻗고 끊임없이 하늘을 우러러 해와달, 별자리를 겨냥하는 기상과 슬기를 익히고 다져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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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의 돌계단.

조당은 조선 선조때에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처음 건립하였다고 하며,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로 옮겼다.현판은 그의 스승인 퇴계 이황(李滉)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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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

 

성원 청량산 문화연구회 회장께서 2007년 [청량]지 3호에 기고한 글을 인용하면,

가가 지정한 문화재이지만 안동에서 한옥고건축은 그렇게 관심을 끌지 못한다. 聖人하고 사는 여자가 악처가 되듯이 경주 사는 사람이 초등학교 소풍 이후 한 번도 석굴암을 못가 보았다고 하듯이 안동사람들에게 한옥은 거의 무심한 존재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사는곳이 한옥이고 가는 곳이 모두 한옥이니 놀라운 일도 못된다. '병산서원'에 대한 온갖 미적 수사의 글도 안동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러니 그런 모양이구나' 정도이다. 그런데 좀 더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안동의 건축을 보면 안동이 왜 '건축의 보고' 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조당(後彫堂)'은 그런 안동 한옥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내부를 보면 '그저 그런 집이려니' 하는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다. 마루문을 사방으로 들어 올리는 구조의 '후조당'은 안동의 고건축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매우 화려한 집이다. 화려함은 당시에도 화제가 되어 1567년 낙성식에 초대받은 퇴계가 '끝내 마루에 오르지 않고 현판만 써 놓고 가버렸다.'는 전설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 퇴계는 후조당의 신축을 축하하면서 "들으니 집을 너무 화려하게 지어 매화 운격에는 맞지 않아 언우(彦遇김부필의 자)가 병이 날 지경이라 하여 이를 위로 한다."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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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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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 종택

“同姓마을 구심점인 宗家”


가는 철저하게 조상숭배 관념에 기초한 건축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손을 길러내는 터전이다. 同姓마을의 정신적 지주이고, 조상의 위패가 모셔져 삶과 죽음의 공간이 이어진 곳이다. 상류주택의 요소를 갖추고 있어 제사 공간인 사당으로부터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후조당 사랑채), 여성의 공간인 안채(후조당 안채)가 중심이 된다. 이밖에 행랑채, 곳간채, 대문채 등 부속 공간들이 겹집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사당과 안채는 폐쇄적으로 보호되는 口자형(탁청정 종택)이 주종을 이루고, 사랑채와 행랑채 등은 외부로 열려 있는 형태를 취한다. 다시 각 공간은 사랑마당, 안마당, 사당공간이 정방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참고:군자마을 홈페이지)http://local.daum.net/localn/srch2.htmlrd=http://www.gunja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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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각(藏板閣)과 숭원각(崇遠閣)

판각은 선조들 문집, 판각들을 수장한 건물이고

숭원각은 유물 전시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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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월당(雪月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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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바라 본 "탁청정".그 뒤로 보이는 집이 탁청정의 종택이다.

 

탁청정(濯淸亭) 김수(金綬)공의 종택에 딸린 정자로서 그가 중종 36년(1541)에 건립했다. 

영남지방에서 개인 정각(亭閣)으로는 그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탁청정'이라는 현판은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필적이며 마루에는 농암(聾巖)·퇴계(退溪)·금계(錦溪)·

청풍자(淸風子) 선생 등 당대 명현(名賢)들의 시판(時版)이 걸려 있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烏川里:외내)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4년 현 위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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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본 탁청정

 

성원 청량산 문화연구회 회장의 말씀을 인용해 본다.

1544년에 지어진 '탁청정(濯淸停)'은 더욱 화려하다. 그래서 탁청정은 당시부터 '화려한 집'이란 뜻의 화루(華樓)로 표현되기까지 했다. 김시찬이 쓴 중수기에 "선례가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고 했고, "단청까지 있었다."고 했다. 아마 정자의 현판을 단 건물로는 전국에 앞서는 건물이 없을것 같다. 퇴계가 "탁청정의 부엌에는 진미가 가득하고 독에는 술이 항상 가득하다."고 한바 있는데 그런 부유가 이런 건물을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관심이 있는자, 전문가에게 이들 건물이 갖는 예술적 가치를 들어 보기 바란다.

 

람들은 말하리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선비들이 어떻게 이런 화려한 집을 지을수 있는냐고! 그렇게 볼수 있다. 사실 벼슬을 추구한 벌열집안에서 이런 집을 지었다고 하면 지탄받을 수도 있다. "벼슬을 부 축적의 수단으로 삼았지 않느냐고" 그렇지만 벼슬에 초연한 재야의 가문은 경우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가문이야말로 집은 제대로 지어야 한다. 단정하고 멋진 집은 가문의 상징이다. 오천광산김씨의 이런 집들은 이 가문이 할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명예이며 규범이다. 그것은 결코 사치일 수가 없다.

 

자리의 건축은 이후 김부인이 '산남정'을 짓고, 김부의가 '읍청정'을 짓고, 김부신이 '양정당'을 짓고, 김부륜이 '설월당'을 짓고, 다음 세대의 김해가 '근지재'를 짓고, 그 다음세대의 김광계가 '침락정'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김령의 후손들이 '계암정'을 지었다. 그런 집들이 지금 군자리의 언덕에 저마다 자리하고 있다. 마치 지난날 '오천7군자'가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경의 자세를 하고 있는 모습"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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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애정(芝厓亭)의 대문인 일비문(一卑門)

문의 이름을 "자신을 낮추는 문"이라 自意的으로 해석하고 바라보니 정감이 더욱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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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애정(芝崖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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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당(養正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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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정(溪巖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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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정의 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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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락정(沈洛停:좌)과 계암정(우)

침락정은 영남 의병대장(義兵大將)을 지냈던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 선생의 윤자(胤子)인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공이 현종(顯宗) 13년(1672)에 세운 것이다. 정면4칸, 측면2칸의 

납도리집으로, 가운데 4칸은마루로 되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당호(堂號)는 정(亭)으로 되어 있으나

일종의 강당(講堂)건물로, 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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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원 제2 전시관

 

숭원각은 유물 전시관 이다. 이집 유물들은 어마어마하다.

어마어마한 것들이 아이러니하게 안동댐으로 말미암아 빛을 보게 되었다. 안동댐이 아니었으면 상당기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 경위를 <오천군자리>에 실린 글 그대로 옮겨보면

 

러나 (안동댐은) 결과적으로 예안파 광산김씨로는 그 유적의 이전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종가를 해체하다가 대청 대들보와 지붕 사이의 감추어진 공간에서 수 백점의 귀하디귀한 보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더욱 입이 딱 벌어지도록 놀랐던 것은 광산 김씨 예안파 개기조(開基祖)인 농수 김효로의 증조부, 다시 말해서 한성에서 안동지방으로 맨 처음 이주해온 조선왕조 초에 산 김무에서 현대의 그의 21대 후손에 이르기까지 600여년에 걸친 각종 고문서 예컨대 교서, 교지, 호구단자, 토지문권, 분재기, 노비문기, 시권, 혼서 등이 한 대의 누락도 없이 가지런히 발견된 사실이다.』

 

물들은 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겨져서 <광산김씨오천고문서>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고, 그 가운데 고문서 429점은 보물 1018호로, 전적 61점은 보물 1019호로 지정되었다. 연구에 의하면 김연(1215~1292)과 손자 김진(1292~?)의 준호구 및 호구단자는 고려시대의 문서양식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김무가 1429년 노비225명을 아들, 사위, 친손, 외손자들에게 나누어 준 '분재기(金務許與文記)'는 려말선초의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볼만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 유물들은 이집의 보물이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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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개방하여 전통문화및 가옥에 대한 체험을 실시하고 있다.

 

천광산김씨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한다.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며 시비를 분명히 하여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며 성품이 엄정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모두 글을 잘 지으니 참으로 군자답다. 집집마다 사마(司馬)요 집집마다 시주(詩酒)가 있어 손님이 오면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도하고 우애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군자가 되는 마을' 그리고 '손님이 오면 온갖 정성을 다하는 집' 이 '오천군자리'이다. 이런 전통을 가진 가문이 전국 어디에 또 있겠는가. 우리 인간의 삶에서 더 이상 추구할 덕목이 어디에 있는가! 물론 <신성지>의 기록은 오천광산김씨의 과거에 대한 평가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집의 현재이며 미래일 수도 있다. 이런 명예로운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이 집 후손들의 몫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리'는 바야흐로 옛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계암정'이 단아하게 지어졌으며 '군자마을-역사마을 만들기'의 다양한 행사는 전통안동의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이런 행사들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닫혀있던 집들도 활짝 개방되었다. 지난해부터는 누구든지 신청하면 고가에서 하룻밤 잘수 있다. 안동고가의 숙박은 그 자체가 교육이고 체험이다. 그런 체험에서 이집의 오랜 역사향기를 맛볼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군자마을의 이런 변화는 현 안동문화원원장이신 김준식 종손의 결단이 작용하고 있다.

 

근 이집에는 문의 명가답게 볼만한 책 4권이 나왔다. <국역 오천세고>와 <단산유고>와 <국역 설월당집>과 <김남수자료집>이다.

이들 책들은 어제의 오천광산김씨 가문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다. 이미 소개한 <오천군자리> <군자리-그 문화사적 성격> 등의 책들도 있다. 그 가운데 <오천군자리>의 서문에는 온갖 고난을 감당하고 오늘의 군자마을을 조성한 종손의 부친인 김택진 어른의 글이 있는데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바로 이 집의 정신이고 좌표이다. 그 글 일부를 옮겨 적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 고향 새 터전을 이룩함은 교육의 도장으로 승화시켜야하지 그저 조상을 자랑하고 어떤 전시효과를 일 삼는 과장된 관광지가 아닌 조상의 얼을 계승 보존 하는데 그 의의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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