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루 동지여러분 꼭 읽어보시고 6월 30일에 뵙죠!
Clean-up ansan서!!!
1. 안산이 도대체 어디인가?
88올림픽이 열리던 날, 나는 당시에 다니던 부천시 내동의 금구류를 만드는 전기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지금은 양귀자님의소설 원미동사람들로 유명해진 유명해진 부천복사골에서 나는 아들을 낳고 소명여고앞에서 살고 있었다. 회사의분위기가 딱딱하고 그때 안산시의 반월공단으로 많이 이사를 간 도당동 원미동 춘의동 오정동의 회사직원들은 부천역광장에 7시쯤에 도착하는 반월공단행 회사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있었다. 그때만해도 반월공단은 털털거리는 신작로를 따라 1시간 30분을 타고가는 안산시는 말 그대로 시골길의 황량한 벌판일뿐이었다. 부천의 유명한 여우고개는 내가 다닌던 회사버스가 날마다 다니던 타향으로나가는 관문이었다. 여우고개를 넘어 예비군훈련장을 지나 신천리를 접어들던 안산행 경원여객 완행버스는 차장아가씨가 버스의옆구리를 타당거리며 "오라이!" "스톱"을 외치던 전형적인 시골버스 모습 그대로였다. 터덜거리는 시골길에서의 버스는 어느여름날 장마로 질퍽거리는 길바닥에 멈춰서서 야간근무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귀가하던 승객들을 내리게 하여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게 했던 그런 추억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날의 경험을 함께 겪은 사람들은 버스에서 만나면 서로반갑다고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야리 은행리 연성리 군자리를 거치노라면 어느새 털털거리는 출근버스가 갑자기 조용해지는 안산시의 경계마루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쯤이면 잠에 취해있던 사람들은 반월공단이 가까원워 온줄알고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2. 반월공단의 하루
박정희대통령이 안산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내려 현지지도를 펴놓고, 공단건설을 지시했다는 절설이 전해져오는 안산은 박정희대통령의 애국심만큼이나 절도있고, 잘 계획된 도시의 이미지는 호주 멜버른시의 도시계획을 따라 만들었다는 소문처럼, 바둑판같은 공단과 도심을 가로지르는 전철이 특이했다. 안산을 처음오는 사람들이라면 왜 하필 도시의 중심지를 전철이 자르듯이 지나가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할수도 있지만, 20년당시 안산시 초기건설 당시는 초지동 사동지역은 거의 개발이 되지않은 바닷가마을 그대로였다. 그래서 도시계획은 중앙동이라고 부르는 시청앞지역을 중심으로, 현재 한국최대의 연립주택단지로 알려진 라성호텔아래 초지동일대가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이다. 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중한곳인 원곡동 언덕위의 주공아파트 1단지는 이제 개발이 되어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반월공단 건설당시의 안산시는 라성호텔뒤의 중국집이 유일한 자장면집이었다. 당시 안산을 찾은 외지의 방문자나 납품처 사람들은 점심을 먹을곳이 없어, 여기저기 찾아다닐정도로 음식점이 드물었었다. 지금 6500여업소가 안산시음식어조합에 가입된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새지감이있다.
3. 17블럭, 그 긴 인연의 시작
반월공단 입구, 한국에서 유명한 제빵업체중의 한곳인 삼립식품 코알라공장을 지나, 조선무약과 5주구 운동장을 지나 계양전도공구를 우로 돌아 롯데알미늄을 지나 들어가던곳... 그 먼지나고 쇳소리 요란한 공장을 오기위해 나는 아침6시30분부터 이 길을 따라와야만 하였다. 2분이 늦으면 달려야하고, 3분이 늦으면 5천원자리 택시를 타야만하였다. 어쩌다 늦어 택시를 타고온 동료들은 커피값을 아껴 택시비를 보충하기도 하던 그런 노동자의 애환이 간직되기도했던 곳이다.(눈오는 겨울밤의 야간조 출근....이하생략) 17블럭 해안가에는 봄이면 예쁜 꽃들이 철조망넘어에서 피어나 점심시간이면 나는 그 오염되기 시작한 시화호를 한없이 바라보며 자유를 꿈꾸기도 했었다.쇠파이프와 도금공장들과 염색공장과 나염공장, 그리고 농약공장이 즐비하던 냄새나는 그 17블럭을 출퇴근하면서, 안산으로 이사를 와야만하겠다는 생각을 갖게되었다. 나는 당시 2살된 아들과 아내가 소명여고앞에 살고 있었고, 노동운동자 출신의 나는 이곳의 공장에서 받아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친구를 따라 와서 면접을 보는 친구옆에서 그저 성의없이 김부장이라는 사람에게 "나는 노동조합장출신이라 여기오고싶어도 오지못한다"고 의래적인 말을 하였는데 그 김부장은 내가 솔직해서 좋다고 기꺼이 일을 하라고 하였다. 그뒤로 그는 매우 진지한 인생의 선배로서 나와 친밀한 관계가 되었지만, 당시의 부천지역의 노동운동이란 감히 취직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때였다. 나는 부천감리교동지방 청년연합회의 간부일을 하면서 전두환시의 동생인 전경환씨의 조찬기도회에 우리 내동감리교회의 목사님이 나가시는것에, 서울대 문리대학원생이면서 교회지하에서 노동야학을 걋?가르키던 청년회 김복규문화부장과 선언문을 내고, 교단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던 청년회장이던 나와 부천경찰성의 요주의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당시 부천에 소재하던 군중선동의 명수 숙명여대와 위장취업의 명수 연세대, 그리고 야학을 주도하던 서울대생들과 경인고속도로를 가스와 휘발유통으로 막고 투쟁하던 강경파중의 강경파였으며, 그 와중에 나는 손가락을 절단시키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4. 안산을 담다.
나는 언제나 점심시간이면 바다를 보러 나갔다. 안개낀바다와 바람부는 시화호는 언제나 내가 날고싶은 동경의 대상이며 장면이었다. 그러던 나는 어느날 회사로 찾아온 카메라장사에게 삼성미놀타 알파9000 조립카메라를 한대구입하게 되었다. 느려터진 자동포커스가 세계최초로 도입된 미놀타의야심작이란것을 알리가 없었던 나는 그저 신기함에 사로잡혀, 그때부터 눈에 잡히는 모든장면을 찍는것이 취미며 고독이 되어갔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 이를테면 호박의잎이라든가, 길가의잡초라든가, 철조망이라든가, 지나가는버스라든가 일반인들이보기에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을 나는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찍기 시작했었다. 역사의 장면이란 지나가면 영원히 사라진다는 나의 생각을 알아주던말던이었다...
5. 안산에서의 노동운동.
이름만 대면 금방알만한 당시의 방위산업체인 그 회사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렇듯이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악덕기업인들중의 하나였다. 엄청난 노동시간과 야근, 특근에 잔업연장. 그리고 휴일근무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급여는 겨우 몇십만원인 인생, 그것이 그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삶이었다. 사회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공존하여야한다지만, 그때의 노동자들은 부천, 부평, 구로공단, 오류동, 가리봉동등에서 내몰린 오폐수업체들이 대부분인 작업환경 제로의 노동환경이었다. 얼마뒤에 여러군데의 제약회사들이 몰려와 대부분 외국계회상인 제약회사의 여공들이 일찍퇴근하는것에 무척이나 자좀심 상했던 기억도 났지만, 냄새나고 모두들 퇴근한 공단의 공장에서 빵과 커피로 한밤을 달래며 부천으로 퇴근하던 그때의 반월공단이란 인생의 황량함 그 자체였다.
6. 이사오던 날
89년 봄, 아침일찍부터 회사 화물차기사의 도움으로, 원미동사람이던 소명여고앞의 집에서 짐을 꾸리며 12년간의 부천시의 삶을 정리하는 찹찹한 시간이었다. 교회학교교사와 성가대, 청년회장과 노동조합장, 야학선생과 집회주동자, 성가대원인 아내와의 결혼과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2살박이 아들을 데리고 단 한명의 인연도 없는 안산으로 가야하는 나의 마음은 참으로 참담했다. 그것도 일거리가 없는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장출신이라는 무서운 멍에에 스스로눌려, 겁없이 전두환정권에 맞섰던 나의 인생소멸의 순간들이 패배감을 넘어 차라리 슬픈 자학이었다. 여우고개를 넘어 트럭의 뒤에서 짐을 부여잡고 멍한눈으로 뒤로 스쳐지나가는 거리를 바라보는 마음이라니... 누구나 그렇듯이 트럭뒤에서의 한병의 술과 오징어포는 그런 내마음을 잊게해주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것만이 쫏겨가는 나의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원곡동의 월세방은 그래도 나은편이었다. 일명 벌집으로 불리던 원곡동의 다세대 전세방들은 노동자출신의 오리지널 안산시민들이라면 원곡동과 땟골, 선부동을 거쳐, 본오동이나 중앙동으로 진출?하는 엘리트?코스가 있었다. 아예 안산시 개발초기에는 성포동의 스타플라자건너 고층주공과 예술인아파트또는 건너편 주공아파트로 들어오던 부자들의 코스도 있었다. 당시에는 안산의 아파트가 나가지를 않아서 전세부다도 못하게 건설업체가 사정사정하면서 거저주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배가 세번은 아픈 좋은때였다. 지금의 원곡동사무소와 파출소옆으로 돌아 좌측으로 돌아 들어가던 그 집은 전형적인 안산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7. 노집에서 만난 사람들
90년초, 원곡동 군자시장에는 노동자의집(일명 노집)이라는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장소가 있었다. 말이 교육장소이지 몇사람이 앉을만한 침침한 넓이의 탁자와 의자 몇개인 그런 곳이었다. 그것에서는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본에 눌린 착취의 실상을 교육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이 신물이난 나로서는 조금은 상투적인 내용이 마음이 들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곳을 통해서 사람들의 외로움과 정을 막걸리로 나눌수가 있었다. 나중에 시장의 비서관이 되었던 권태근씨가 우리회사 노동조합을 만들게된 계기를 준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때 서경석목사님과 경실련의 필요성에 대해서 서울로가서 1박2일로 교육을 받고밤새워 토론을 하기도 했었다. 나중에 안산에 경실련이 만들어지고 권태근씨는 초대 경실련의 사무국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때는 우리모두 노동형제로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던 동지로서의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철권정치가 사횔ㄹ 억눌렀지만, 정부는 정략적인 정치제스처로 노동자에?유회책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원곡동의 노집은 경찰의방해와 수색으로 이리저리 ?겨다니던 우리들만의 아지트들이 있기도 하였었다.
8. 대부도를 가다
초창기 대부도는 남양에서 돌아들어가는길이 유일한 통로였다. 사실 제부도는 당시 아무도 알지못하던 외로운섬이었다. 갈대밭이 적은섬 여기저기에 자라나고 차량이 들어가지못할정도로 길은 망가지고, 숙박시설은 비닐포장이 유일했었다, 그러다가 방송드라마에서 제부도를 배경으로 촬영하여 나간적이 있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제부도는 불륜의 시초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시간나고 돈있는 남자들은 한번들어가면 물때에 막혀 나오지못하는 기가막힌 여자사냥터?를 외우지 않을수가 없었을것이다. 여자들이야 물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알수가없고, 철저히 계산된 물때에맞춰 들어간 남자들의 속을 알수가 있었으랴.. 대부도 전역은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참으로 아름다운 섬이었다.호안의 모래와 나무, 그리고 해변의 조개들은 당시 원시의 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방조제가 완공되기전 남양에서 들어갈때 입구에서 모든 관광객들을 싹슬이하여 장사를 하던 횟집주인들이, 방조제가 완성된 이후 가장 안쪽에 있던 원주민횟집들과 철천지 앙숙이된것도 시화방조제라는 인공물이 만들어낸, 지역정서의 파괴가 아닌가 한다. 역사란 아이러니의반복이라고 했던가. 이제 다시 남양방면에서 탄도로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많아지는것은 시화방조제가 주말이며 교통이 막혀서 나가지를 못하는 상태가되어, 오히려 주말에는 남양방면의 탄도가 더 사람들로 붐빈다.
9.안산역앞 천막농성
코리아써키드, 서해공업, 금강공업, 의성실업......등등 민노총이 출범하고, 살벌한 집회와 투석전이 라성호텔앞에서 난무하던 그날, 젊은 전경의 죽음들을 우리는 보았다. 라성호텔뒤골목에 진치고 낫과 칼로 노점상들을 위협하던 보성상가 골목 사람들보다 더 살벌했던 그 절규의 물결과 투석전이, 당시 힘없고 ?했던 우리들의 슬픈 일상이었다. 날마다 해고와 제3자 개임금지로 상급단체의 간부들조차 입그로 들어오지 못하겟하여 문밖에 서있던 단병호위원장을 맞아하던 현실과 산업재해로 절단된 몸을 억울함으로 호소하던 그 분노의 현장이던 안산역전, 어쩌면 창피한 얼굴로 시민들의눈을 외면해야만했던 여공들과 아주머니들.. 한잔의 소주와 칼국수가 전부인 당시의 노동자들은 안산역을 삶속에서 결코 잊지않을것이다. 아니. 다시는 찾지않을것이다. 안산의 90년대는 밤의 휘황찬란한 불빛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고통을 동시에 안겨다 주기도 하였다.
10. 선부동으로 이사하다.
아파트건설과 지역의 경제가 마냥 장미빛이던 그때,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집을 갖게되었다. 이사가던 날. 원곡동에서 태어난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부천에서 태어난 ?째를 등에업고, 우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내집을 청소했다. 산새가 지저귀는 뒤동산이 있고, 조용한 밤공기가 있는곳, 라일락의 은은한 향기가 밤공기를 타고 진하게 흩어지며, 아카시아 향기가 고향을 생각하게하는 그런동네에서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선부동에는 다이야몬드공원이 있다. 처음 이곳에는 붕어와 새우가 살정도로 관리가 잘되어있었고, 여름이면 발디딜틈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삼겹살이며, 산책을 즐기던곳이었다. 그러나 취사를 못하게하면서 공원을 텅빈공간이 되어갔으며, 인근의 화랑유원지가 생겨남으로 인하여 다이야몬드공원은 노동조합의 집회현장에서 시민들의 회식공간으로, 그리고 한때는 야바이놀음꾼들이 활개치던 시대를 지나, 오늘날 문화예술단이 공연까지하게되는 역사의 물결이이어져오고 있다. 이제는 제법 단정되어 가꾸어진 새공원에서 밤이면 많은 시민들이 찾아오고 있으나, 반으로 나뉘어진 공간은 돈이 아까울정도로 공간이 쓸모가 없다. 아마도 긴 아치형 인도가 공원을 가로지난다면 상징성이 크겠지만, 언제 그런 캐랙터를 걸설에 반영할지는 영구적으로 미지수다. 이제 전철이 선부동을 지난다면 문화와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들이 선부동을 만들어낼것이다. 갇힌 선부동에서 외부와 통하는 맥이 열리는 역사을 맞이할것같다.
11. 세상속으로
안산은 참으로 아름다운곳이 많다. 계절따라 산과 호수와 바다와 섬이 어우러진 천혜의 관광자원들이 많다. 이루헤아릴 수 없을만큼 대부도와 선감도, 구봉도, 탄도, 풍도와 육도의 자원자원들이 많다. 시화방조제는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만큼 아름다운 영상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일급관광자원이다. 쪽빛 하늘같은 시화호수는 이제 조력발전소가 들어서 바닷물이 원활하게 유입되면, 바다와같은 청정지역이 될것이지만, 빠른 유속으로 요트나 유람선이 운행되기가 위험할것같은 생각도 든다. 시화방조제를 지날때마다 가운데쯤에서 오른편 바다위에 떠있는 큰 섬이 있다. 이곳이 큰가리기섬이라는 곳인데. 항상 멀리서 보기만 하는것보다 보트를 타고들어가보기로 하였다. 불과 3분이면 도착하는 큰 가리기섬에 출렁다리를 연결한다면 연인들의 필수데이트코스로 기가막힌 관광명소가 될것 같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다.... 중간생략)
12. 중앙동, 술과 여자와 쓰레기의 거리
안산시에서 가장 허전한 공간인 시청앞의 100미터의 공간을 지나면서부터 청해수산이 있는 안산천변까지를 일컬어 안산사람들은 대략 중앙동이라고 한다. 전국에 중앙동이 수백개여마는 안산의 중앙동은 초창기 공단의 돈이 직접적으로 유입되는 흥청거리던 거리였다. 건물과 환경은 도시의 한복판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지만, 안산사람들의 의식속에는 2ㅏ는 무조건 중앙동이다. 오죽하면 선부동 일동, 이동, 본오동지역에 유명브랜드옷가게를 열지않을까. 어차피 쇼핑을 하려면 안산사람들은 중앙동인것을.. 그러나 고잔신도시가 들어서고, 대형쇼필몰들이 들어서면서 중앙동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젊음의 거리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이거리가 안산의 청소년들이 꿈을 피우게하는 거리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유흥 1세대의 3차 일번지 코스였던 한국관은 수원 안양 인천등지에서 원정원조를 올만큼 수도권의 명물이었으며, 한때는 이름만들으면 금방알수 있는 유명연예인들이 단골로 출연하던곳이다. 원곡동에 외국인마을이 되면서 벌집촌에서부터 라성나이트까지 외국인들이 점령해버렸지만, 초기의 안산시민들은 원곡동의 향수를 잊지못할것이다. 라성호텔 뒷편의 임금빈씨가 운영하는 충남식당은 구수한 돼지머리국밥을 값싸게 먹으며, 싸구려 노동자들의 주머니에 향수를 채워주며, 회식을 하던 장소이기도하고, 보성시장과 라성재래시장의 명성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당시의 송진섭님은 이곳의 보성시장에서 주례를 서주면서 열성적인 사회일꾼들과 노동형제들에게 삶의 애환을 달래주기도 했던 아련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13. 최세균 시인의 안산의 노래를 듣다.
1.봄의노래
그대는 보는가 안산의 봄 산을
여기 저기 작은 산들을 붉게 물들이며
노적봉, 광덕산, 수리산까지 피어나는 진달래
이 고장 마음 색이 아닌가.
그 꽃 기슭, 별의 호수 차마 못 떨쳐
첨성리가 불렸던 지금의 일동에서 독서하고
금수초목을 돌보던 이익 선생
그토록 큰 인물로 남긴말이 새롭구나.
물길트고 포구 옮겨 방축 쌓으면 짠기 가셔
벼 자라니 옥토가 되네.
2. 여름
그대는 보는가 안산의 여름 바다를
해송의 잔 잎들을 푸르게 흔들며
오이도, 사동포구, 고잔뜰로 달려 오던 바다, 서해의 바람.
그 바람에 실려 오는 대부도 포도향기 그 향기에 실어 보낼
보물창고도 보는가
공산품의 공단과 해산물의 바다 그리고 농산물의 들판을 다스려 감싸고
오대양 육대주로 불어 갈 바람
그대는 듣는가 몽고족이 밀려오는 바람속에서
별망성, 성 쌓던 소리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고장을 지켰던 이야기를,
오손도손 사는 이들의 생활을 싣고가던 협궤열차.
3. 가을
그대는 서 봤는가 안산의 가을 들에
메기 가물치 뛰놀던 고잔벌 수로는 묻혔어도
반월벌은 아직도 황금벌판이라네
그 몇배되는 평야가 담수호 부근에 생기면
우리는 더욱 큰 가을에 설 수 있으리라
들판이 있는 도시에 사는 행복 조선왕 정조도 부러워 했던 안산을
그대는 아는가 자연도, 사람도, 문화도, 예술도 풍년의 고장
강세황의 문인화, 김홍도의 풍속화 이 고장의 밑그림이 전원속에 새롭도다.
4. 겨울
그대는 걸어 보았는가 안산의 겨울 눈길을
각골, 오목골, 감자골, 샘골로 이어지는 길
거기 눈 속에 잎피는 나무도 보았는가
늘푸른 나무 시들지 않는 잎으로 그렇게 살다 간
상록수 최용신 선생의 묘지곁에서 눈에 묻히고 있는 나무들을 보라.
잎들을 보라. 그 나무와 잎들을 닮아 언제나 우리는 푸르겠네.
누가 이 노래를 듣고 안산을 신도시라고 할수있을까?
유구한 역사와 숨결이 살아숨쉬는 상록의도시여, 학문의 도시다.
이 황량한 벌판을 노래로 채우고, 저 넓은 바다를 시로 채웠네.
항구는 황금물결로 출렁이고,작은섬은 갈매기의 날개짓으로 가물거리네. .......
일동에서 공단까지 나는 걸어보았다.
군자역 도일에서 반월동까지 나는 걸어보았다.
방아머리에서 탄도누에섬까지 나는 걸어보았다.
거기 한풀의 자리, 거기 하늘거리는 한송이의 힌 장미가 있는 곳.
갈대와 저수지와 파도와 아침햇살이 있는 곳
자월도에서 붉게피어나는 수평선위의 아침해를 보았는가?
서해에서 보는 동쪽바다의 광할한 일출을 그대는 보았는가?
14. 안산을 말하다.
나는 안산에서 16년을 살았다. 이제는 가끔 걸어서 안산을 횡단한다. 시화공단에서부터 반월공단의 입구沮? 도시건설 당시의 성냥개비같이 꼿혀있던 허허벌판의 수많은 전봇대도 보았다. 텅빈 도시한복판을 자르고 만들어지고 있던 전철길도 걸어보았고, 수암봉계곡에서부터 화정천 원류의 가재들이사는곳까지. 화랑유원지의 쓰레기매립장이 유원지로 변하는것과 박정희대통령의 화랑대원들이 가꾸어놓은 화랑저수지에서의 1미터짜리 가물치도 많이 잡아보았다. 그러나 지금 안산천과 화정천은 엄연히 썩어버린상태이다. 작년에 보이던 잉어가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 2004년 봄에도 안산천과 화정천이 만나는 호수공원의 삼각주에는 엄청난 수의 숭어떼가 물결을 치며, 몰려들고 있지만 위레서 흘러내리는 개천들의 오염으로 숭어떼는 더이상 상류로 올라가지를 못한다.
15. 최용신선생의 상록성지에 올라.
. 한국최고이며 안산시 유일의 정신문화적 자산인 최용신(소설명 채영신)선생님이 계신 상록공원을 나는 힘들때마다 가끔찾는다. 이곳이 왜 공원이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절두산 성지가 있듯이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민족에 대한 애족정신을 희생으로 바친 분을 겨우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형식화한다면 참으로 우리의 역사에 잃는것이 많으리라고 본다. 군대도 상록수요, 역이름도 상록수며, 뉴라성호텔도 중국에서는 상록수호텔이라고 한다. 나는 이곳 최요신선생님이 계신 성지를 오를때마다. 과거 개발이전의 긴 언덕을 그리워한다. 언덕을 돌아 멀치감치 선생님의 묘가 보였었다. 그래서 나는 45년을 샘골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최용신선생님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던 김우경장로님과 같이 선생님이 유언하신 종소리나는곳(지금의 뉴 라성호텔인근)에 선생님이 최초로 묻히셨던 그곳에 묘터석을 심어 놓았다. 최용신선생님의 묘이장을 당신이 직접하신 기억으로 분명히 뉴라성호텔 안의 중간 기둥이있는 커피숍자리였는데, 나는 그곳에 영원한 사랑의 불꽃을 기념동판으로 만들고 밝혀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연인들이 이곳을 전국에서 찾아오게하고 싶었으나, 무지한 관계자들은 자신들에게 엄청난 부의 가치를 가져다줄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였다. 도데체 돈을 어디서벌려고들 그러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존해계신 최용신선생님의 제자분들고 가끔만나서 자료를 만들고, 축적해놓고 있다. 상록수의 정신을 증언해줄 이들이 늙어가셔서 아무도 알아주는이가 점점없어지나. 모두가 무관심하니 남겨놓기라도 해야할것같다. 참으로 안타까운 안산시의 문화유산이다.(상록문화예술제, 상록장학회, 그리고 샘공강습소 복원과 샘골(청석골)애향단을 만들자.. 이하생략)
16. 셋트장과 영화촬영장 유치.길거리서명운동의 분명한 철학
17. 새로운 시대를 맞아, 경쟁보다 앞선 비젼
18. 생각을 변화하자, 생각의 방식을 바꾸자
19. 내일을 준비하는 사회의 절대가치
20. 모두 무관심한것이 가장 소중한 것
21. 선거운동과 전북도민회 행동강령.
22. 모두가 함께 만들어갈 문화관광자원
23. 문화수준과 생활수준.
24. 질서의식과 사회인식론
25. 경제. 이제는 북쪽이다.소프트웨어산업의 천국
26. 고도예향의 도시 안산을 꿈꾸며....
27. 중앙정치와 지역경제의 물리적 역학관계
28. 진정한 변화는 오직 혁명뿐.
29. 속이는자와 속아주는자
다음글: 안산시장님 꼭 공단악취 심한 지역으로 이 사오셔야 되요~
첫댓글 사진이나 그림도 중간중간에 끼었으면 더욱 좋을텐데 책한권 쓰시죠>>>>
정말 징하네요. 안산에서 18년동안을 살다가 나왔으면서도 몰랐던 사실들이 너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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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메 ! 그런 인생의 쓰라린 밑바탕이 있었을 줄이야... 그래도 성공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