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그저 잠잠하게 내적인 한계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굳건한 믿음 안에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기적을 가져오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기적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윤리와 도덕과 철학과 종교 의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용서의 문을, 절망에 있는 사람에게 소망의 문을, 병든 자에게 치료의 문을, 간절히 간구하는 자에게 복의 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외삼촌댁에서 20년 이상 고용살이를 했지만, 결산해보니 하나도 자기의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서, 장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인 태도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이로써,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큰 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인 우리도 과거든, 현재든 자신이 원하는 어느 한 순간만을 집착해서 지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미래를 향해 계속적으로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야곱은, 두 아내를 위한 봉사 기간을 마치고, 그가 맡아 돌보는 라반의 양과 염소 떼 가운데서,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 태어날 경우에는,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겠다는 조건부 분배 방식의 계약을 라반과 체결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체결한 조건부 분배 방식은, 사실적으로 야곱에게 절대 불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스스로 이러한 조건을 제시한 것은, 이에 대해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체결로 인해, 야곱이 많은 가축을 얻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그와 언약을 맺으신 것을 신실하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도된 우리가 복을 받고,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야곱처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간구하며, 미래를 향해 나감으로, 하나님의 놀랍고 큰 축복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9 - 30을 보시면,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본문 앞의 25절을 보시면, 야곱은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라반에게 자신을 고향으로 보내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라반을 위한 봉사 기간을 다 채웠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겁니다. 당시,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사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목민은 목축 환경에 따라 늘 이동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야곱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점에서 야곱은, 현재 비록 라반에게 종노릇하며 살고는 있지만, 12명의 자녀들과 함께 다복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타향살이 14년에 고향에 대한 향수를 못 잊어서 일까요? 이 점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벧엘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야곱은 라반 곁에서 안일하게 안주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비록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된다할지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겁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야곱은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를 볼 때, 과거를 돌아볼 줄 알아야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지나온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점은 유지하고, 단점은 끊어야 미래에 대한 발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세월만 보낼 뿐 아무런 발전이 없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삼촌 라반에게 속으며, 아내를 얻기 위한 의무기간을 지냈기에 아무런 발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의무기간을 마침으로, 벧엘에서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했던 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채워주심을 확신하며, 최선을 다 할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한 순간 위기가 찾아와서 싹 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욕심이 앞선 겁니다. 다윗이 평생,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살았지만, 그에게는 어려움이 항시 있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종으로 놀라운 이적들을 행했지만, 그들에게 또한 어려움이 항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거했고, 보호하심 가운데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열어놓고, 우리의 노력 또한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심으로, 2024년 새 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1 - 32을 보시면,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고 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품삯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야곱은, 라반이 그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제껏 수없이 라반에게 속았기에, 라반이 제안한 일정한 액수의 품삯을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삼촌이 속일 수 없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양과 염소 중에서 무늬가 있는 것을 자기의 소유로 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근동지방에서의 양은 대부분 흰색이며, 염소는 검은색이나 갈색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무늬가 있는 것들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무늬가 없는 것들은 삼촌의 것이 되고, 무늬가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확고한 다짐으로, 본문 이하 33절에서, 나중에 외삼촌이 야곱의 품삯을 조사할 때 자신의 의가 그의 대답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정직함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야곱의 제안이 라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으며, 이번에는 야곱이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행한다고 라반은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삼촌의 소유와 자신의 소유를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줄곧,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열 마리 중에 한 마리도 나오기 힘든 무늬가 있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정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볼품없고 초라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여도 그는 강한 자이며,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양 중에서 아롱진 것은 자기의 것으로 줄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외삼촌의 것이 되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라반은 아주 기쁘게 수락했습니다. 이것을 보며, 성도된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2024년 새해가 됩니다. 새해에는 어떠한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또, 어떤 계획을 세우시겠습니까? 그 계획들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까? 야곱은 그 동안 처가살이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미래를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주권이 외삼촌 라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봤을 때, 자신에게 불리한 무늬있는 것을 선택한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놓여진 상황이나 조건이 우리의 발목을 잡지 못합니다.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포기하지 말고, 우리를 자녀삼고,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2024년에도 하나님께 충만한 은혜를 받아, 우리의 삶에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2 - 43을 보시면,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본문 43절을 보면, 야곱에게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심히 풍부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빈털터리였던 야곱이 이제는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야곱이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이, 단지 그가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이룬 결과였습니다. 야곱은 참으로 있는 정성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이 하란으로 올 때, 벧엘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았던 겁니다. 창 28: 15을 보시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라반의 집에 거할 때,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이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자신의 삶 가운데서 자신과 함께 하시며, 벧엘에서의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했던 겁니다. 그리고는, 더욱더 열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지내온 지난 14년간의 수고가 헛되다고 여겨지는 순간,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야곱은 이제껏 자신을 속인 외삼촌의 간교한 수단과 방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내편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서 양들이 물 마시는 곳에 세워두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믿음대로 무늬 있는 양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러한 야곱을 보면서, 성도된 우리도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전하려면 더욱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적극적으로 기도도 하고, 실천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생활을 결산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서, 새로 맞이하는 2024년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안에서, 계획하고 뜻 하는 모든 것을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