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내월 에서는 금맥이 거의 소멸을 해서 땅을 파서 물에서 사금을 채취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섣달에 접어들어서 재명이 오한이 들었는지 이불이 들썩일 정도로 떨어서 남순이 강화탕을 한제 지어다 달여서 먹였는데도 오한은 웬만큼 낳았으나 기침을 계속하면서 시간이 가고 1938년 새해가 되어서도 차도가 없었다.
그동안 남순이 푸닥거리에 무꾸리 까지 하였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이제는 객혈 까지 하고 누워서 운신을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금전 방 염사장이 재운에게 이르기를 아무래도 폐병 같으니 경성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고, 그 말을 전해들은 남순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재운은 채근하여 연창이와 둘이서 조군바탕에 요를 내다 깔고 조군바탕에 뉘이고 이불을 덥고 가다가 죽이더라도 간다는 생각으로 경성에 유명하다는 세브란스 병원을 가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남순의 의지는 대단했다. 조바위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앞장서서 나서자 광국도 따라나섰다.
아랫말 뱃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는데 광국이 마침 물이 풀려서 아랫말 뱃터에서 떠나려던 뗏목을 발견하고 가서 보니 산판일을 같이하던 서씨 일행이었다.
광국의 이야기를 들은 서씨는 조군바탕을 뗏목에 오르게 하여서 자리를 마련하고 조군바탕은 연창이와 재덕이 가지고 들어가기로 하고, 남순은 여자가 뗏목에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리는 관계로 멀찍이 서서 있었는데 광국이 뗏목에서 내리는 재덕에게
“조근바탕을 갔다두고 엄마하고 경성으로 오너라.”
하고 재운이와 셋이서 뗏목을 타고 떠났다.
서씨 일행은 고맙게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가서 땅거미가 질 무렵에 뚝섬에 도착하였고 수고비를 주는 광국에게 서씨 일행은 한사코 사양을 했지만 술 한 잔 하라며 오원을 주었다.
그리고 서씨의 주선으로 나뭇짐을 실어 나르는 도락구를 얻어 타고 남대문역 건너 복사골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 도착하여 진찰을 받았는데 입원이 결정되어 입원부터 했다.
한편 남순은 재덕을 앞세우고 아래 나루에서 강을 건너 경성을 향하여 길을 나서서 부지런히 걸어서 해가 노루꼬리만큼 남았을 무렵 마치고개를 넘어서 부지런히 걸었지만 돌팍 고개부근에서 경성으로 가는 짐을 실은 도락구를 세워서 타고 두 시간을 덜컹거리는 길을 한참을 달려서 가는 동안 재덕은 처음 타보는 도락구 정신이 빼앗겨 운전사를 최고의 직업으로 보았고 옆에 탄 조수가 부러웠다.
그리고 청량리에 도착하여 말로만 듣던 전차를 타고 오면서 재덕은 밖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남대문역에 내려서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하였다.
남순은 병실에 남고, 삼부자는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남대문역에서 울리는 기적소리에 잠을 깨어나 조반을 장국밥으로 때우고, 진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 재덕은 살며시 빠져나와 남대문 역에 오가는 기차를 보았고 근처에 달리는 차도 보았다.
오후 늦게 폐렴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남순이 깜짝 놀라서 폐병이냐고 물었더니 전염병인 폐병(결핵)과 달리 한 달 정도 입원하면 낳는다는 설명을 듣고 안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국은 저녁 무렵 재운은 여인숙에 기거 하면서 어머니 남순을 돕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전보를 치라고 이야기 하고 재덕을 데리고 가회동 현우의 집으로 향했다.
문은 두드리니 안에서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간내월 사는 동생이라고 전해 주시오.”
하면서 헛기침 까지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대문이 열렸는데, 대문을 들어서던 재덕은 잠시 머뭇머뭇 하면서 대문을 들어섰다.
너무나 으리으리했기 때문이었다.
안마당 가운데는 정원이 있었고, 벽은 백색타일을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댓돌은 전부 대리석을 깎아놓아 흙 안 묻히고 사는 그런 집을 들어서려니 멈칫한 것이었다.
마침 현우는 집에 있었다.
“어서 오게 이게 얼마만인가.”
하면서 현우가 광국을 맞았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바지, 저고리 차림의 광국 부자에 비해 현우는 깍짓동 같은 몸매에 안경을 쓰고 실내화를 신고 양복바지에 위에 가운을 걸치고 포마드를 바른 머리는 곱게 빗어서 홉사 기름을 머리에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재덕아 인사 드려라 진외당숙 되시는 분이다.”
재덕이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이 녀석이 막내 입니다.”
“그래 올해 몇이냐.”
“열여섯 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진외당숙모.”
재덕이 다시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리고 형수님 제 절을 받으셔야죠.”
“형수님 그동안 평안 하셨어요.”
하면서 광국이 절을 하려 하자 현우 처 명화는 손사래를 치면서
“아유 서방님 같이 늙어가면서 뭔 절까지 제가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하면서 사양을 했다.
그리고 열 살이 좀 넘어 보이는 교복차림에 사내아이와 그보다 두서너 살 더 먹어 보이는 세일러 복 차림에 여자 아이가 있었다.
“윤석아 윤영아 할아버지께 절 해야지.”
하면서 광국에게 절을 올리게 하였다.
“손주들인가요?”
현우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어쩐 일인가.”
“재명이가 아파서 어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래, 어디가 얼마나 아파서?”
“오늘 결과가 나왔는데 폐렴이라고 합니다.”
“그래 얼마나 입원을 해야 하는데.”
“한 달 정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 자내가 고생이 많겠네, 그래 병원에는 누가 있나.”
“ 안 사람 하고 재운이 있습니다.”
“그래 어젠 어디서 잤나?”
“남대문역 앞 여인숙에서.”
“아 집으로 들어오지 그랬어.”
“형님은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야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네만.”
그리고 한참 후
“저녁 올리겠습니다.”
하는 아까 대문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들리고 저녁상이 들어와 식사를 마치고 식모 아주머니가 숭늉을 들여오고 명화가
“아줌마 사랑에 구공탄 불 잘 갈아 넣었죠.”
“예 사모님.”
“손님 주무시고 가실 테니 자리 보아 놓으세요.”
상이 치워지고 이런 저런 이야기 가 있었고, 광국이 내일 일찍 떠난다고 하자 몇 칠 더 묵어가지 그러느냐고 현우가 말했지만, 내일 가서 보아야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현후를 따라 사랑에 안내 되었는데, 이브자리가 한 채가 곱게 깔려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광국이 일어나 이불을 개고 밖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식모 아주머니가 세숫물을 대야에 떠다 주었고 수건까지 가지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삼베수건에 얼굴을 닦던 것에 비하면 엄청 보드라운데 그것도 두 장이나 가지고 나와서 재덕이 세수를 하고 나서 한 장을 더 주었다.
광국 부자는 그런 환대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아침을 마치고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나와서 세종로에서 전차를 탔고, 전차가 동대문을 지나서 안감내를 건너서 조금 더 가니 건물을 새로 짓고 있는데 누군가 성동역이라는 기차역을 짓는 중이라고 했다.
청량리 에서 내렸는데 광국이 알아보니 샘밭 까지 기찻길을 닦는데 시멘트를 가평에 시멘트를 실고 가는 트럭이 있다고 해서 그걸 돈을 주고 타기로 하였다.
덜컹거리며 달린 트럭은 점심때가 지나서 가평에 도착하여서 복쟁이 까지 삼십리를 걸어서 배를 타고 해질 무렵에 간내월에 도착하였다.
재명은 사흘이 지나면서 부터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하여 미음을 시작하여 남순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저녁에 현우 내외가 택시를 타고 문병을 왔다
현우는 양복차림에 오버를 걸쳐 입었고, 명화는 검은색 비로드{(veludo) 또는 우단(羽緞)}치마저고리에 여우 목도리를 하고 모자까지 쓰고 과일 바구니를 들고 왔는데, 무명 치마저고리의 남순과는 동년배 이지만, 십여 살을 어려 보였다.
경성에 남은 재운은 다음날부터 시간만 나면 경성에 이곳저곳을 구경하러 다녔다.
남대문시장을 지나서 미츠코시 백화점 구경을 하고 진고개 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화재로 다시 지어서 서울에서 가장 높은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화신 백화점 에도 다녀와서 남순에게 가보고 오라고 이야기 했다.
이는 당시 서울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내부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고 옥상에 전광 뉴스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입원을 했던 재명이 완치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염사장도 떠나고 폐광이 되었고, 전답을 조금 정리하여 입원비로 쓴 빗을 청산하였다.
그리고 재운은 경춘선 철길을 놓는 공사판에 일을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 서넛이 가평에 방을 얻어서 공사판에 나갔다.
1938년 4월1일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법은 일제의 전시통제법으로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에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 통제할 목적으로 만든 법으로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1조. 국가총동원이란 전시(전시에 준할 경우도 포함)에 국방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전력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하도록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제4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국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다. 단 병역법의 적용을 방해하지 않는다.
제7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노동쟁의의 예방 혹은 해결에 관하여 필요한 명령을 내리거나 작업소의 폐쇄, 작업 혹은 노무의 중지, 기타의 노동 쟁의에 관한 행위의 제한 혹은 금지를 행할 수 있다.
제8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물자의 생산, 수리, 배급 양도기타의 처분, 사용, 소비, 소지 및 이동에 관하여 필요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제20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신문지, 기타 출판물의 게재에 대하여 제한 또는 금지를 행할 수 있다.
그리고 5월부터 시행된 이 법에 의해 전시에는 노동력, 물자, 자금, 시설, 사업, 물가, 출판 등을 완전 통제하고, 평상시에는 직업능력 조사, 기능자 양성, 물자 비축 등을 명령했다.
이 법은 일본 본토는 물론, 일제 강점기 조선과 타이완, 괴뢰국 만주국에도 적용되어 강제징용, 징병(징병은 1943년에 시행), 식량 공출 등 전시통제체제가 시행되었다.
얼마 후 경성에서는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 했고 간내월에서는 얼마 뒤 구장이 동내 회에서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하면서 집안에 유기그릇을 내놓을 것을 장려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평상시 쓰지 않고 있다가 제사나 잔치에 꺼내어 쓰는 유기그릇을 공출하라고 독려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깊숙이 감추고 내놓지를 안차 몇 번에 거처서 독려를 하고 다녔는데 광국이 가경자에 다녀오는 사이에 구장이 황골 물개에 있는 주재소 순사를 대동하고 와서 어머니 연희가 시집올 때 해가지고 왔고 지난 을축년 대홍수 때 간신히 건져내온 노구솥을 걷어가 버린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사정을 들은 광국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 놈 무 새끼들을.”
하면서 식식거리고 면서 노구솥을 찾으러 구장 집으로 달려갔고, 재명과 재덕이 말리려 쫒아갔는데 벌써 광국이 찾으러 올 것을 예상이나 했는지 매로 처서 솥은 찌그러지고 소당은 깨어져 있었다.
다자고자 달려가 일본순사를 멱살을 잡아 땅에 매다 꽂았다.
그러자 구장이 달려들어 말렸다.
“이 사람아 진정하게 나랏일을 하려온 사람을 그러면.....”
“넌 뭐야, 이 왜놈 앞잡이 같은 놈.”
하면서 구장마저 던져버렸다.
“조센징 빠가야로.”
하면서 덤벼드는 순사를 대문간 옆에 세워져 있던 절구공이를 들고
“이 놈 으 무 새끼들 다 때려죽일 거야.”
하면서 달려 나갔고 주재소 순사는 꽁무니가 빠져라 하고 도망을 갔고, 재명과 재덕이 식식 거리며 분을 못 삭이는 광국을 집으로 모시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광국은
“세꼉 하고 빗 내오너라.”
하더니 세수를 하고 세꼉을 보면서 머리를 빗어서 상투를 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차츰 화가 내려앉은 듯 숨소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광국이 머리손질을 하고 있음은 외출하겠다는 뜻이므로 윤희가 옷을 내왔고 그 옷을 남순이 받아들고 사랑방으로 따라 들어갔고 잠시 후 해질녘임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섰다.
아랫말 뱃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복쟁이서 하룻밤을 자고 가평에서 트럭을 타고 경성 현우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현우는 고검 검사를 그만두고 사무실을 냈다고 해서 사무실로 찾아갔다.
간내월에는 황골 지서에서 순사 두 명이 광국을 잡으러 왔으나 출타 했다는 말만 듣고 돌아갔다.
경성에 현우사무실에서 광국의 이야기를 들은 현우는
“사람 성질 하고는.”
하면서 고검으로 전화를 해서 사건을 무마시켜 달라고 청탁을 했고 한 시간도 안 되어 잘 마무리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회동서 하루를 묵고 마석까지 차를 타고 와서 너구내 고개와 가오실을 지나 광대울 고개를 넘어서 방골 사촌동생 형묵의 집에 도착하였다.
일흔이 넘으신 작은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나서 사랑채에 나와 앉으니 당숙이 오셨다고 줄줄이 인사를 하는데 형묵의 큰아들 재천은 벌써 장가를 든 지 오래되 재덕보다 두 살 아래인 손자 경동이 까지 있었고 작은 아들은 재필은 경성에서 공부를 하는데 잘한다고 했다.
막내 재근은 재덕이 보다 서너 살 어린데 와서 절까지 공손히 하고 가는걸 보니 작은댁은 집안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나흘을 묵어서 다시 마석에 나와서 트럭을 타고 가평에서 무쇠 솥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노구솥을 떼어낸 자리에는 먼저 밥솥으로 쓰던 솥을 얹어야 해서 조금씩 넓혀서 솥젖이 얹어질 자리는 짚에 진흙을 뭉쳐서 놓고 솥을 걸고 솥전 부근을 진흙으로 뺑 둘러서 바르고 새 솥은 닦아서 불을 때면서 들기름 찌꺼기를 헝겊에 묻혀서 몇 번을 문질러서 질을 낸 다음 밥솥으로 쓰기로 하고 솥뚜껑도 밥이 되는 동안 기름 행주로 반짝반짝 하게 질을 내면서 남순은 속으로 노구솥이 좀 작아서 많은 국을 끓이려면 넘고, 보름에 한 번씩은 깨진 기와를 주어다 돌로 찧어서 가루를 내어 짚수세미로 닦아야 하는 게 영 성가신 일이 아니어서 며느리 윤희가 시집온 뒤로는 윤희가 했었는데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이심전심이라고 기름행주로 솥전을 열심히 닦아서 질을 내고 있었다.
모두 광국이 때들어 갈까봐 걱정을 했지만 물개 주재소에서는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9월29일에는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수반이 모여서 이른바 뮌헨 회담이 회담이 개최되고 다음날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던 수데텐란트 영토분쟁의 당사자인 체코스로바키아가 배제된 체 유럽열강들만 참석한 채로 체결 되었다.
이 회담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책으로, 이 협정에서 독일의 수데텐란트를 합병하도록 승인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이 회담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뮌헨 협정을 뮌헨늑약(체코어:Mnichovská zrada;슬로바키아어:Mníchovská zrada)이라고도 불리며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뮌헨의 배신(체코어:Mnichovská zrada; 슬로바키아어:Mníchovská zrada)이라고도 불린다.
그렇게 그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재명도 건강이 회복 되었고, 광국과 남순은 옥인과 용동이의 재롱을 보는 것으로 모든 시름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윤희는 옥인이 자꾸 버릇이 없어지는 것 같고 할머니의 응석받이로 커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어른 앞에서 함부로 아이를 꾸짖을 수도 없고 해서 그녀만의 훈육방법이 있었는데 아이를 끌어 앉고 엉덩이를 꼬집으며, 자그마한 목소리고 엄격하게 말을 했다.
“옥인아 할머니 진지 잡수실 때 할머니 무릎에 앉지 말라.”
옥인은 울음을 터트렸고.
“옥인아 왜 울어 이리 온 울지 말고 이리 온.”
하고 남순이 불렀으나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눈물을 떨구었다.
어멈이 부르면 쭈뼛쭈뼛 하면서 끌려가는 것을 본 남순이 윤희의 훈육방법을 모르리가 없었다.
“아니 어멈아 아이를 꼬집고 그러냐?”
“아니 예요 어머니 애가 괜히 울고 그러내요.”
“우지 마 어서 그쳐라.”
하면서 옥인을 달랬다.
그리고 농번기로 접어들 무렵 윤희는 둘째아들 영동이를 낳았고, 재운은 철도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방아리에 규수와 혼담이 오가고 정혼이 되어서 가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7월25일 경춘선 기차가 개통되었다.
그 무렵 간내월에는 모래로 강을 막는다는 소문이 났는데 시멘트가 무엇인지 잘 모르던 때 로 바로 8월에 청평 땜과 화천 탬의 착공식이 있었다.
그해 여름 용동이가 학질에 걸려서 하루거리로 아파서, 남순이 김치와 호박잎 등을 넣고 죽을 쑤어, 안방으로 건넌방으로 찾아다니면서 세 구석에서 “며늘아기! 며늘아기!”라고 외치며 첫 번째, 두 번째 구석에서는 찾아다니는 시늉만 하고 죽을 조금씩 버린 다음, 그리고 방의 세 번째 모퉁이에서는 “며늘아기 여기 있구나,” 하면서 죽을 조금 버렸다. 그러고 나서 바늘에 색실을 꿴 다음 바늘은 헝겊에 꽂아두고, 이를 용동의 머리에 두르고 덤불에 있는 덤불 할미와 덤불 아가씨를 찾아갔다.
그리고 찔레넝쿨이 우거진 밭 가장자리 돌담불 세 개를 찾아다니면서 “담불 아가씨 담불 아가씨 담불 아가씨”라고 부른 다음. 세 번째 담불에서는 “담불 할멈 담불 할멈 며늘아기 골무 가르쳐서 꼭 잡고 있어라”라고 외친 뒤 바늘을 꿴 헝겊은 담불에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며느리 볶음’ 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는데 광국이 가평장에 갔다가 금계랍(키니네)몇 알을 사왔는데 쓰기가 소태맛이어서 몇 번을 토해서 윤희가 김치 껍질을 얕게 벗기고 그 안에 싸서 삼키게 해서 넘기게 하는 우여 곡절 끝에 약을 몇 차례 먹여서 낳았다.
그 후 부터는 집에 금계랍이 떨어지지 않고 상비약으로 향상 비치해 두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구라파 에서는 8월22일에는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나흘 뒤인 27일에는 최초의 제트기 시험비행에 성공을 했고, 나흘 뒤 9월1일 나치독일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 되었다.
이틀 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9월 17일에는 소련도 폴란드를 침공했다.
9월27일 드디어 바르샤바가 함락되고 폴란드는 나치독일에 항복을 했고 나치독일과 소련은 군사동맹에 조인을 하고 다음날 폴란드를 분할점령 위한 우호조약을 채결했다.
일제도 10월14일에 조선징발령세칙을 공포하여 시행에 들어갔다.
10월 16일에는 독일공군이 영국 영토를 공격 하였고 한 달 뒤인 11월30일 소련이 필란드를 침공 겨울전쟁이 발발 했다.
그리고 재운은 연순이와 결혼식을 올렸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해가 바뀐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3월6일에는 필란드를 집어삼키려던 소련에 스탈린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정전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봄이 되고 얼마 후 재운을 비롯한 몇 몇이 화천 땜을 막는 공사판에 나갔다.
어른들 이야기대로 모래자갈로 땜을 막는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열여덟의 재덕도 따라 가겠다고 해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재운이 생각한 것 보다 공사판 일을 살벌하고 재덕을 괜히 대리고 왔나 후회가 되었다.
지난번 철길 공사는 십장을 잘 만났고 공사 구간이 비교적 길어서 일하기가 수월했는데 이번에는 보니 많은 사람들이 좁은 장소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홉사 군사훈련처럼 일을 시키고 있었다.
서있는 형제를 아래위를 훑어보고 덩치 작은 재덕을 보고 일을 시킬까 말까 머뭇거리다가 통과를 시켜서 형제가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재운은 손바람이 좋아서 공사판에서 눈치껏 일을 잘 해나갔다.
지난 번 철도 공사를 할 때의 경험이 도움이 되어서 누구보다도 잡을손이 매서워서 다른 사람들이 일머리를 모를 때는 가르쳐 가면서 하는데 재덕이 에게는 조금이라고 힘이 덜 들고 괜찮은 일을 시키려고 모래나 자갈을 나르는 일 대신에 삽으로 섞는 일을 같이 하면서 삽질의 장단을 맞추어 가며 가르쳤다.
일을 먼저 기찻길 닦을 보다 가혹하게 시키는데 우선 한국사람 들은 일을 할 때는 참참이 참을 먹어가며 일을 하고 그 중간 중간에 일손을 놓고 담배를 피우곤 했는데, 그런 게 없이 계속 일을 시키려고 들었다.
사람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더구나 황갈색 탱크바지에 말 장화를 신고 색안경 까지 쓴 도십장이 위압적으로 돌아다니며 일을 감독 하는데, 그자가 멀리서 보이면 더 열심히 일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점심은 왜놈이 하는 함바집(현장식당)에서 눈 씻고 찾아보려야 힘들게 보이는 쌀이 섞인 강조밥으로 점심을 먹는데, 그 놈의 들척지근한 단무지는 영 비위에 맞지 않아서 겨우 우거지 국으로 술적심을 해서 강조밥을 넘기는데 된장이 아닌 왜간장 부어서 끓였는지 그 마저 들척지근한 게 영 먹을 수가 없고 김치에 시래기 된장국이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 보다 재운과 재덕은 강조밥을 많이 먹어 보아서 그런지 그런대로 먹을 수 있었다.
겨우 점심을 먹고 쉬면서 담배를 한 대씩 피우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계공과 콘크리트공은 좁쌀 한 포 질통꾼은 칠 읍 포 강가에서 자갈 모래를 모으는 사람들을 반포 값을 주는데, 하루 밥값이 좁쌀 세 되 값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반포에서 세 되를 빼고 나면 겨우 네 되 값밖에 되지 않는데 그 마저도 벌어먹으려고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굶으면 굶었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입하나라도 덜려는 욕심에서 일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재운이 눈치 빠르게 재덕에게 얼른 공구리를 가르친 게 주효했다.
그렇게 담배 한대를 다 피우기도 전에 십장이 일을 하라고 독촉을 해 댔다.
일을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나고 임시로 지어진 합숙소에서 잠을 잤고 날이 새면 현장식당에서 조반을 먹기가 무섭게 일을 해야 했다.
몇 칠이 지나자 재덕도 덩치에 비하여 잡을손이 좋아서 같이 일하러 간 사람들이 일 잘하는 작은 김 덕대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기에 광국의 환갑이 되어서 오월 더운 날씨에 단월과 물골안에서 사촌들이 와서 환갑잔치를 했다.
4월9일 나치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이어 5월 10일에는 베네룩스 삼국을 공격을 개시했다.
5월20일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고 21일에는 불로뉴를 점령하여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분리시켰고 6월10일 노르웨이가 독일에 항복을 했다.
6월14일 나치독일은 파리에 진주하고 23일에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시를 방문했다.
7월10일 프랑스 남부에 비시정권이 수립되었다.
8월11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8월12일 독일 영국본토 공습을 개시하였다.
9원13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이집트를 침공했다.
9월 17일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에서 임정 요인들과 현지 한국 거류민 및 중화민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군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함으로서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전쟁물자 즉 석유와 지하자원의 필요성을 느낀 일제는 드디어 9월23일 인도차이나 반도 침공을 개시하였고. 27일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 삼국이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15일 인도의 민족지도자 마하트라 간디가 반영 불복종 운동을 개시 하였다.
날씨가 추워지고 날씨 때문에 땜 공사도 중단 되어서 재운과 재덕은 집으로 돌아오고
그리고 겨울이 다가와 다시 간내월에 와서 그해가 저물어갈 무렵 연순에게 산통이 시작되었는데 좀처럼 아이가 나오지 않아서 재덕이 가경자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왔는데, 약을 들여다보던 남순이 화가 나서
“이놈의 늙은이가 사람을 잡으려 하내 어디 산모에게 패독산을 지어 보내.”
하면서 “재덕아, 재덕아.” 하고 재덕을 불러서
“앞장서라 이놈의 늙은이를 그냥.”
하면서 십리가 넘는 가경자에 달려가 지팡이로 의원 마룻바닥을 치면서 호통을 처대서 의원이 나와서 잘못했다고 한참을 빌어서 보내야 했는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연순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섣달 초사흘로 성동은 앰한나이를 먹었다.
일제는 중일 전쟁의 장기화로 유럽전쟁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방하였으나, 프랑스·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던 1940년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군사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을 빼앗기로 하는 남진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 영국 중화민국 네덜란드 등 ABCD(America·British·China·Dutch) 4개국은 포위망을 형성하여 석유 등 중요한 전쟁 물자에 대해 수출을 금지하여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본은 처음에 미국과의 원만한 교섭을 통하여 이를 해결코자 하였으나 협상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자 급기야 고노에 후미마로의 제2차 내각이 퇴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남진 정책의 실패일 뿐 아니라 패전국으로 전락 하는 게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간내월 광국에게는 걱정이 하나 늘었는데 땜이 완성되면 그나마 있는 닷 마지기의 논배미가 물에 잠기고 집도 물에 잠긴다고 해서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해가 바뀌고 1941년 봄이 되자 재운과 재덕은 다시 화천 땜 공사장에 일을 나갔다.
6월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에게 선전포고, 작전명 바르바로사를 실행해 소련으로 치고 들어갔다.
9월3일 나치독일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서 유대인 독가스학살 시작
9월8일 나치 독일이 소련의 레닌그라드에 대해 포위공격을 시작하다.
이 포위는 900여일간 계속되었다.
9월14일 나치 독일군 소련 레닌그라드 교외로 진격(레닌그라드 공방전)
9월16일 조선 총독부, 중등이상의 학교 남녀학생들에게 학교총결대 결성 지시
10월2일 독일군, 모스크바 총공격 개시(모스크바 공방전)
10월18일 도조 히데키가 일본의 총리에 취임.
11월26일 헐 미국국무장관 일본에 대륙침략에서 손을 떼도록 최후통첩을 내렸다.
같은 날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휘하의 일본 해군 연합함대가 진주만 공격을 위해 일본에서 출발 하여 12월 7일에 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하였다.
그런가 하면 재운 재덕 형제는 날씨가 추워지자 간내월로 돌아왔는데 마침 가평에 큰 구경거리가 들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재덕이 싫다고 하는 남순과 함께 강을 건너 삼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구경을 갔다.
서커스 와 쇼를 겸비한 유랑극단이었다.
남순 으로서는 새로운 세계였다.
막내 딸 같은 처녀애들이 거꾸로 그네를 타지를 않나 외줄을 타지를 않나 거기에 중간 중간 재담을 할 때에는 웃음이 나왔지만 마지막으로 외줄에 나란히 제비처럼 앉아서
강남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어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 밤을 홀로 새울까.
멀고 먼 임의 나라 차마 그리워 적막한 가람 가에 물새가 우내.
오늘 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랑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강남에 달이 지면 외로운 신세 부평의 잎사귀엔 벌레가 우네.
차라기 이 몸이 잠들 리로다 임이 절로 오시어서 깨울 때까지.
라며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듣던 남순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예 재덕아 저 불상한 처자 돈 주고 사가지고 가서 막내며느리 삼자.”
“어머니 저 처녀들 돈 엄청 벌어요.”
“돈을 벌어도 그렇지 저렇게 추운데 홑겹만 걸치고 너무 불상하지 않니 데리고 가자.”
“어머니 노래 끝나면 뒤에 가서 좋은 옷 입고 잘 자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면서 만류를 해야 했다.
그리고 걸어서 오는 길에는 복쟁이를 지나며 강가에 나란히 앉아 쉬는데 건너편 강가에는 백로가 한가로이 강가에서 먹이를 찾다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재덕아.”
“내 어머니.”
“나는 죽으며 새가 되고 싶다.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면 얼마나 좋을 까?”
재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난 죽으면 꼭 새가 되고 싶다.”
재덕이 몇 번 들었던 이야기다 힘든 일을 지나고 나면 남순이 조용히 생각이 잠길 적마다 넋두리처럼 하던 말이었다.
12월25일 일본군, 영국령 홍콩 점령해 버렸다.
광국은 그나마 호구지책으로 삼던 논 몇 마지기가 수몰이 되어 버려서 같은 동성동본의 성씨를 가진 집이 두 집이 있는 황골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고보니 한 십리정도 떨어진 가재골 에도 두서 너 집이 있다고 들었다.
연순은 성동이 엉덩이를 때렸다가 남순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네 새끼라고 네 마음대로 손을 대. 어디 더 때려 어서 더 때려라”
하면서 야단을 처서 연순이 눈물을 흘리며
“아이고 어머니 잘 못했어요.”
하면서 한참을 빌어야 했다.
그리고 1942년 봄이 되어 재운은 화천 탬 공사장으로 일을 나가고 재덕은 청평 땜 공사장으로 일을 나가서 비계공 일을 하게 되었다.
재덕이 도착해 일을 하는 청평땜 공사장 분위기는 화천 땜 보다 더 살벌했다.
이곳 에는 탱크 바지에 말 장화를 신은 왜놈이 두 명이 더 있는데 그들은 도십장 밑에 있는 십장들이라고 했다.
그중 기시무라 라는 십장이 있는데, 이놈은 재덕보다 머리하나는 더 컸고 손에는 가죽 채찍 대신 철사를 길게 잘라서 만든 채찍을 들고 다니는데 하루에도 몇 명씩 채찍세례를 받아야 했다.
채찍을 맞은 자리는 빨갛게 피멍이 들고 어떤 사람을 갈라져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 현장식당 주인은 일본인 인데 일을 도와주는 모녀가 있었다.
돈은 얼마를 받는지 몰라도 여자 아이는 열일곱 여덟은 됨직한 여자애로 얼굴이 예뻤다.
재덕이 그녀를 보게 된 것은 첫날 점심을 먹고 나오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옆모습 이었다. ‘참하고 예쁘게 생겼네.’ 하고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멈칫 하였으나 이네 다른 사람에 밀려서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재덕은 비계공이 일은 위험하지만 힘이 덜 드는 것 같아서 비계공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재덕을 처음 본 것은 다음 날 점심시간에 작고 다부지게 생긴 사람이 시노대(아시바를 매는 쇠꼬챙)갓다(절단기)망치가 들어있는 연장주머니를 차고 들어와 점심을 먹는 것을 보니 대단한 기술자로 보았다.
그녀는 한눈에게 반해서 어떻게 하든 재덕의 눈에 띄고 싶었는데 마침 배식을 하던 그녀의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운명이랄까 그녀가 배식을 하게 되었다.
마침 특식인 선지 우거지 국이 나왔는데 딴 그릇에 들어갈 까봐 밀어 넣던 선지 덩어리를 재덕의 국그릇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재덕과 눈길이 부딪쳐 불꽃이 튀었다.
몇 칠 후 깜깜한 밤 재덕과 그녀는 깜깜한 창촌 강가에 나란히 앉았다.
“저 왜 보시자고 했어요.”
그녀가 종아리를 문지르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재덕이 그녀에게 눈짓을 해서 불러내긴 했지만 막상 그녀를 대하고 보니 먼저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찌 떠오르지 않아서 첫마디가
“이름이 뭐예요.”
“명순이 예요. 장명순.”
명순은 여전히 애꿎은 종아리를 문지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이 지나서 다시 입을 연 것은 재덕이었다.
“집이 어디여.”
“내 저 아래 사기막 이예요.”
“그려 거기우리 작은 증조할머니 친정동내 라고 하던 데.”
“성이 뭐래요? 신씨라고 하던데.”
“거기에 신씨네가 몇 집 살아요.”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지만 그녀도 재덕도 잠을 설치고 말았다.
다시 다음 날 저녁 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명순이
“저 몇 칠 있으면 일본에 가요.”
“왜 일본엘 가?”
“십장 기시무라가 일본 피복공장에 취직을 시켜 줬어요.”
“그래?”
하면서 재덕의 동공이 커졌다.
“얼마 전에 기시무라가 울 엄마한테 일본 피복 공장에 가면 여기보다 돈도 더 준다고 했어요. 여기서는 겨우 밥만 얻어먹는 게 안 돼 보였나 봐요.”
“안가면 안 돼?”
하며 실망스러운 듯 묻는 재덕에게
“가기로 되어있어서 가야 되요. 돈도 벌수 있다 않아요.”
그렇게 안타깝게 그날은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밤 다시 만난 명순은
“저 내일 아침 기차를 타고 서울로 해서 부산에 가서 배타고 일본에 가요.”
재덕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했다.
이번 간조를 타가지고 가서 엄마 남순을 졸라서 명순과 혼례를 올리고 싶다고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헤어지게 되다니 적이 실망 되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재덕은
“그래 잘 가서 잘 있다가 와 기다릴게.”
“인역을 괜히 만났나 봐요. 가기 싫어지네요.”
“그럼 가지말지 그래?”
“그러면 우리 모녀 쫓겨나요. 여기 아니면 먹고 살기도 힘들고…….”
“우리 도망갈까?”
“아 안 돼요 울 엄마 불쌍해서 안 돼요.”
“아버지 안 게셔?”
“아버지 제작 년에 돌아가시고 우리 모녀 밖에 없어요.”
그렇구나, 그 모녀는 겨우 밥을 얻어먹는 처지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재덕이 해결해 줄 수 있는 힘도 아버지가 결혼을 허락 할 만큼 녹녹하지도 않고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달빛아래 검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 밤이 이슥하여서 헤어져 돌아왔다.
명순은 다음 날 일찍 청평서 기차를 타고 성동역에 내려서 경성역에 도착해 기시무라가 하라 하라는 대로 양 갈래로 딴머리를 왼쪽은 뒤로하고 오른쪽은 앞으로 하고 앉아있으니.
“장 명순 이니까?” 하면서 서툰 한국말로 말을 걸어오는 일본여인이 있었다.
“예.” 하고 고개를 숙이니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가 보니 그녀 외에도 취직을 가는 처녀는 둘이 더 있었다.
그렇게 셋 이는 서먹서먹한 가운데에 일본 여인이 기차표를 끊어오고 따라서 쫄래쫄래 개찰구를 빠져나가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서로 한동안 말이 없이 눈치만 보다가 명순이 먼저
“저 저는 장명순 이라고 하는데. 서로 동무하여 같이 가는데 이름이나 알고 지내요.”
“저 나는 백학에서 온 이 길례라고 하는 데요.”
“그래요. 저는 퇴촌에서 온 동내에서 부르기는 간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은 한 옥심이 예요”
그렇게 세 처녀는 조금씩 이야기를 하면서 집에서 싸 가지고온 주먹밥을 나누어 먹으며 금세 친해져 친구가 되었다.
세 처녀는 어두워진 부산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다른 일본여인에게 인계되었는데 그 곳에는 다른 곳에서 온 네 명의 처녀가 또 있었다.
다시 일곱 명의 처녀들은 곤고마루[金剛丸]호를 타고 다음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였는데. 그날 제일 나이가 어려 보이는 처녀 둘은 불러서 데리고 가고 다섯 처녀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틀이 지나도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그 무렵 4월18일에는 미 육군 항공대 지미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16대의 미 B-25 폭격기 16대가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오사카, 와카야마, 고베, 나고야, 욧카이치, 가와사키 등 일본의 주요도시를 폭격한 이른바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작전으로 일본은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의 손해를 입었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이 바삐 숨는걸 보니 전쟁이 이런 거구나 하고 실감이 갔다
그러더니 다음날 나오라고 하더니 커다란 배에 태워졌다.
군함이었다. 두려움에 떨던 다섯 처녀를 태운 군함은 두 시간 후 출항을 했고 망망대해 선실에서 일본군 장교들에 의해 저고리 옷고름이 뜯겨지고 성이 하나씩 유린되었다.
한번 유린된 성은 다음 날은 다시 짓밟혀 졌다. 명순은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하는 마음이 소록소록 샘솟던 재덕에게 받치기라도 할 걸 하는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였다. 다시 밤이 두려워 졌다.
민간 주도의 군위안소는 이미 청일전쟁부터 있었지만 일본군이 주도하여 처음 군위안소를 만든 시기는 1932년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해군이 1931년 말 상해에 있던 대좌부(貸座敷)를 기초로 1932년경 해군위안소를 만든 후 이를 본받아 오카무라(岡村寧次)가 육군 파견군에도 위안소를 창설하였다.
원래 목적은 확전으로 통제되지 않은 강간에 의한 성병확산을 막고 군 감독 통제하에 군인과 '군위안부'를 둠으로써 군의 사기 진작 등 효과적인 군사활동을 꾀하려는데 중요한 목적을 두고 군'위안부'제도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일본 육군성이 체계적으로 군위안소 설치한 것은 1937년 말부터로
점령지뿐 아니라 격전지마다 군위안소를 설치하려는 계획도 미리부터 세우고, 육군성 병무국. 의무국 등에서는 위안소를 설치하는 목적이나 군위안소의 경영 감독과 군위안부 동원 및 모집인원에 대한 원칙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성립한 일본군 위안소 내의 합법적인 강간 행위는 강제로 위안부가 된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엄연한 성폭력으로 여성을 비인간화하고 그 행위를 하는 군인들도 비인간화되었다.
명순은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하고 있는 선상에서 그렇게 유린당해 모두가 당한 일이라 서로가 얼굴을 대할 때에는 서먹한 면도 있었지만 이내 같은 처지를 실감 했는지 고개만 숙이고들 있었다.
또 일본 육군과 해군은 각각 위안소를 둔 경우가 많았는데 위안소 운영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육군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위안소 사용을 시간대로만 구분할 뿐 장교와 사병간의 구분이 없었다.
이에 비해 해군은 되도록 신분과 계급에 따라 장교, 사병, 군속, 인부, 관리 등으로 구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일본군인의 민간인 여성들에 대한 강간 근절은 결코 근절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군위안소는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이 기거하며 인권을 유린당한 공간이다.
위안소는 일본군 문서상 '군위안소', '군인클럽', '군인오락소', 은어로 '위생적인 공중변소' 등으로 불렸다.
위안소의 크기나 형태는 일본군이 어느 시기, 어느 지역, 그리고 점령지이냐, 격전지이냐 등에 따라 달랐다.
군부대가 주둔지에 신축하기도 하고, 원주민 가옥을 고쳐 이용하기도 했다.
부대가 이동하거나 전쟁 중일 때는 군인 막사나 초소, 참호, 군용트럭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위안소에는 위안부가 한 명이나 서너 명만이 있기도 했고, 많게는 수십 명이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군이 신축한 위안소의 경우에는 간이용, 임시용으로 널 판지로 칸을 막아 방이 좁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으며, 방문은 담요로만 둘러쳐 있기도 했다.
파라오 등 더운 지방에서는 야자수 잎으로 대충 위안소를 만들기도 하였다.
위안소에는 일본군'위안부'와 관리자와, 그곳을 출입하는 군인이 있었다.
붙박이 위안소의 문밖에는 ㅇㅇ위안소라는 문패가 있기도 했다.
2층도 있었는데, 아래쪽에는 홀이 있었고, 위층에 칸칸이 방이 들어 있어 홀에서 대기하던 여성이 군인을 만나 2층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방 문 밖에는 방 번호나 위안부의 일본식 이름이 쓰여 있기도 했다.
위안소 안에는 군인의 군표나 돈을 받는 접수처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삿쿠와 막휴지가 돈과 교환되기도 하였다.
또한 위안소 규정과, 위안부가 군인을 얼마나 받았는지를 표시할 수있는 그래프가 벽면에 붙어있는 곳도 있었다.
또 민간관리자들은 군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일본말로 '身も心も棒ぐ 大和撫子のサ-ウス(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패랭이꽃의 서비스란 뜻)'이라거나 '聖戰大勝の 勇士大歡迎(성전대승의 용사 대환영)' 등의 선전문구를 써 붙이기도 했다. 또 질 세척용 소독약(붉은 색)과 대야 등이 있는 별도의 세면장이 있는 곳도 있었고,
방안에는 위안부의 일상용품 외 삿쿠(콘돔)가 있었고 대야가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군막사, 참호 등에는 아무런 물품 없이 오직 위안부와 군인만이 존재하기도 했다.
위안소는 크게 일본군의 군위안소 운영방식이나 이동 여부에 따라 그 형태를 나눌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군직영, 군지정 위안소 등으로 구분하는데, 군위안소 운영에 가장 깊숙이 개입한 것이 군직영 위안소로 군이 감독 통제한 것만이 아니라 운영과 관리를 직접한 것으로 여기에는 군속이나 군고용인이 운영하는 것도 포함된다.
중일전쟁 초기나 전선지역에 많이 설치되었는데, 군지정위안소는 군이 설립한 위안소나 민간 매춘시설을 지정하여 경영은 민간에게 맡기고 군은 감독과 통제만 하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선 곳에 따라 현지 일본인에 의해 조직된 사업통제회, 기업연합, 실업단을 내세워 이 시설의 책임자로 삼았는데, 이러한 군위안소라도 이를 관리 감독, 통제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또 군위안소는 이동하는지 여부에 따라 붙박이식. 이동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붙박이식 위안소는 일본이나 식민지, 그리고 일본군이 오래 주둔한 점령도시 등 전투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설치되었고, 이동식은 중국 오지의 전쟁터와 같이 경계가 불안정한 지역에 주로 설치되, 주거공간이나 식사 등 생활상태가 더 열악하였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 받기도 하였다.
이동식 위안부들의 민족별 구성은 주로 조선인, 일본인이 많았다.
명순과 갑이별 (-離別)을 한 재덕은 몇 칠 동안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공연히 기시무라라는 녀석을 미워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꿈틀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숙소를 쓰고 있는 신만수 만기 형제 중 같은 도비 일을 하던 만수가 운이 나쁘게 발판(아나방) 끝에서 곰방대에 담배를 넣어서 피우며 앉아 있다가 재수 없게 기시무라의 눈에 띠고 말았다.
“야 조셍징이노 농땡이노 피우고.”
하면서 예외 없이 반생으로 만든 채찍을 휘둘러서 한 대를 맞고 다시 날아오는 채찍을 피하다 이층 높이가 넘는 곳에서 강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재덕이 낙엽송 아시바(비계목)를 매고 올라오다 목격을 하고 비계목을 내려놓고 급히 내려가 찾으려고 강가로 뛰어 내려가자. 기시무라 가
“긴상, 긴상, ”
하며 불러서 다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는데, 재덕은 몸을 부르르 떨며 분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만기와 둘이서 강가를 한참을 뒤져가며 만수의 시체를 찾아다닌 끝에 서덜말 건너 강가 바위틈에 끼어 있는 만수의 시체를 거두어 양지 바른 언덕에 묻어주었다.
만기는 반미치광이가 될 만큼 흥분을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만기는 그렇게 이틀을 일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기시무라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 있었는지 만기에게는 콘크리트 작업에 투입을 시켜서 긴 장화를 신고 긴 대나무 막대로 거푸집 사이에 타설된 콘크리트가 잘 들어가도록 쑤시는 일을 시켰다.
그리고 재덕은 발판을 운반하여 콘크리트를 비비는 일을 하는 곳에 발판을 보강하거나 다음 콘크리트를 작업을 할 곳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래로 발판을 가지러 내려가는데 저 아래서 기시무라가 올라오고 있었다
순간 저 자식을 비계목으로 처서 보내 아니면 이 빠루로 그냥 처 버려 비계목으로 치다가 실수로 설맞으면 아니지 이판사판이지, 하는 사이에 기시무라는 재덕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다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 저녁 재덕을 만기에게 농담 삼아
“만기야 아까 기시무라 처 죽여 버릴까 하다가 말았다.”
“난 아직도 이가 갈리고 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더라.”
“난 저번에 네 형이 맞아서 떨어져 죽었을 때 피가 거꾸로 솟고 부아가 치밀어서 혼났어.”
“누가 죽여도 죽여 버렸으면 좋겠어.”
“죽여서 공구리 속에 쑤셔 박아 버리면 누가 알께 뭐야.”
“그렇지 않아도 아까 그런 생각을 했어 네가 공구리를 받으며 일을 하고 있어서 그래 버릴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참았어.”
“기회가 좋았었는데 놓쳤네.”
“그러게 말이야 기시무라 그 자식을 장아찌를 박아 버리는 건데.”
그렇게 농담을 하면서 지나갔고 다음날 재덕이 발판을 가지고 오르다 서서 곰방대에 담배를 넣어서 피우다가 마침 콘크리트 타설하는 것을 보러 올라오던 기시무라에게 걸렸다.
“조센징 농땡이 노 피고.... ”
채찍이 날아와 순간 얼굴을 돌렸지만 등이 화끈하며 순간 피가 거꾸로 솟고 이가 갈렸다.
비계목에 몸을 의지하고 아래를 보니 그날도 만기가 혼자서 긴 장화를 신고 대나무를 들고 콘크리트 쑤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의 채찍이 재덕의 등짝을 유린하고 나서 기시무라는 투덜거리며 올라갔고 재덕도 발판을 가지고 올라가 다음 콘크리트를 비비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곳에 설치를 하면서 기시무라가 내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서는 외사촌 연학이와 황골서 같이 간 태봉이가 자갈 모래 시멘트를 넣고 콘크리트를 비비고 있었는데, 물을 부우면 물이 흐르지 않게 잽싸게 비벼야 하는데 시멘트 물이 철판 밖으로 조금 흘러가자 기시무라가
“류 상 빨리 노, 해야 아까운 시멘트 물이 빠져 노, 가지 안하지.”
하면서 간내월에서 같이 온 외사촌 연학의 등에 채찍을 날렸다.
재덕은 이를 부드득 갈며 분노를 참고 있었다.
그리고 기시무라는 더운지 잠시 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덕이 바로 빠루를 들고 뒤따라 내려가는데, 놈은 만기가 콘크리트를 제대로 쑤시는지 보려고 발판 끝에서 비계목 의지하여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덕은 뒤통수를 빠루로 쳐 버렸다.
비명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대로 만기가 있는 곳으로 떨어졌고, 만기는 깜짝 놀라 위를 보니 재덕이 박아버리라는 신호에 얼떨결에 기시무라를 콘크리트 속으로 쑤셔 박고 발로 눌러버렸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기시무라가 제 구멍을 찾았는지 철근이 없는 가운데로 처박혀 만기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말 그대로 기시무라를 된장에 무장아찌를 만들어 버렸다.
그 위로는 계속 콘크리트가 부어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기시무라를 찾느냐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청평주재소에서 일본도를 찬 순사가 나와서 인부들을 세워놓고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쏘아보아 가며 못 보았느냐고 물었다.
누구 보다 재덕과 만기는 마음을 졸여야 했는데, 재덕 앞에 서서 머리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처다 볼 때 만기는 조마조마 했다
그리고 만기 앞으로 와서 유심히 살펴 볼 때에도 재덕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게 날이 어두운 관계로 얼굴 표정을 들키지 않아서 지나갔지만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하는 생각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심전심이라고 만기 역시 잠 못 이루는 밤이 지나고 이튿날 아침 인부들을 풀어서 양쪽 강가 오리 가량을 뒤지며 찾았지만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황골에 남순은 재덕을 청평 공사장으로 일을 보내고, 지나새나 막내아들 재덕을 그리워하며 지냈는데, 꿈자리가 뒤숭숭 한 날은 더 근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