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섭 폰시아노 신부
부활 제4주일
사도행전 4,8-12 요한1서 3,1-2 요한 10,11-18
예수님의 ‘매력’
교회는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을 ‘성소 주일’로 지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도구로 살아가기를 청하며 그들의 ‘꿈’을 기억합니다.
각 교구와 수도회는 ‘성소자의 급감’을 실감하며 걱정의 목소리를 내놓는 현실입니다.
그에 대한 수 많은 원인을 여러 가지로 제시, 분석하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이런 와중에 저는 가장 완벽한 해답을 프란치스코 교종의 ‘복음의 기쁨’에서 발견합니다.
‘신앙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라는 단락 14항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사회 운동의 한 복판에서 시민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엄청난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원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 역시 많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개인적 희생과 헌신이 바탕이 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교회를 지탱하는 ‘예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대도, 교회도 변할 수 있지만, 오직 하나 변하지 않는 건 ‘예수님이 보여 주신 매력’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보았을까? 그것은 기쁨, 아름다운 전망,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배려입니다. 한 마디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 ‘매력’을 발견한 이들이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수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주사위(주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청년들의 모임)’라는 공소 찬양 봉사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매력을 제대로 느낀 청년들?) 이들이 봉사 때 불렀던 노래 중에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있습니다. 이 노래 중 “그대 나섬은 출가요, 새로 남, 이별, 아픔, 십자가 길. 그 분의 부름과
그대의 선택인 것, 사랑의 길인 것을. 두려워 마오. 그대여, 주저 마오 무너져도 놓지 마오.”
라는 부분이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제성소, 수도성소, 가정성소’라는 모든 길에서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갈릴래아 호수라고 그대 바램처럼 잔잔하지 않고, 가르멜산 오르는 길은
너른 산책길이 아닌 것을, 넘어져도 임의 자락 놓치지” 말고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예수님의 ‘매력’을 풋풋한 향기로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광주대교구 진우섭 폰시아노 신부
2024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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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왕 사도 요한 신부
부활 제4주일
사도행전 4,8-12 요한1서 3,1-2 요한 10,11-18
"관심과 기도"
+찬미예수님
오늘은 제61차 성소주일입니다. 성소(聖召)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으로 축성생활,
사제직, 혼인, 심지어 독신으로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을 받아들여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올해 저는 사제생활 31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신자들은 성소주일이 다가오면 신부님은
어떻게 사제가 되었어요? 어떤 부르심이 있었나요?라는 등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하느님의 신비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 복사를 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지만 당시에는 신학생이라든가
신학교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없던 관계로 그저 사제의 모습이 좋아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 때는 아예 사제가 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갑자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부모님께서는 자녀들 중 사제 수도 성소가 있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기도를 하셨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포기할 무렵 제가 신학교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뻐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그 후 저는 부모님의 기도와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학생 시절 많은 유혹으로 인해 신학교를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때마다 부모님과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도 부모님, 가족, 신자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 다.
저의 마지막 소망은 제의를 입고 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신자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알고 있으며 감히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를 통해 다시금 신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소 주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는 성소 계발을 위해 더욱 많은 관심과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제주교구 양요왕 사도 요한 신부
2024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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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
부활 제4주일
사도행전 4,8-12 요한1서 3,1-2 요한 10,11-18
삯꾼에게도 필요한 인내
전쟁의 참화가 프랑스에 드리웠을 때, 유다인 출신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를 자처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말로 자신이 좋아한 희랍어 단어
‘ὑπομονή’(휘포모네, 인내)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구원을 실현하는 태도는 그 어떤 활동과도 비슷하지 않다..그것은 기다림, 한없이 지속되면서 어떤
충격으로도 뒤흔들지 못하는 주의 깊고도 충실한 부동성(不動性)이다.”(신을 기다리며, 2015년)
오늘 복음은 목자와 삯꾼을 대비시킵니다. 먼저 목자는 양을 소유한 이입니다.
양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봅니다. 양들이 그를 살게 하기에 자신을 돌보듯 양들을 돌봅니다.
그래서 이리의 위협에도 양들 곁에 가만히 머물 수 있습니다. 양과 목자의 목숨은
하나로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삯꾼은 고용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과 양들은
서로 관련이 없습니다. 그는 그저 받은 일당으로 자기 자신만 돌보면 그만입니다.
양은 목자에게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삯꾼에게는 자신의 삶을 꾸릴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인내’하는 태도로 드러납니다. 목자는 양들의 걸음 곁에 늘 함께
있습니다. 자신과 양들은 걸음 폭이 다르고 눈높이가 다르지만 함부로 재촉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인내합니다. 밤을 보낼 집으로 그들을 이끌고, 목을 축일 샘터와 먹이가 있는 풀밭으로
천천히 동행합니다.
양들이 더 살찌고 그들의 털이 더 윤택해지기를 자신의 삶을 담아 희망합니다.
하지만 삯꾼은 기다릴 수도 없고, 인내할 수도 없습니다. 어서 빨리 해가 떨어져 편안한 잠자리로
돌아가 쉬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양이 잘 먹어 살이 찌는 것은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기에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에게 희망은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하지만 삯꾼에게도 양들은 중요합니다.
그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잘 돌본 양들을 보고 목자가 줄 품삯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삯꾼에게도 목자와 같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목자를 닮아, 그가 했던대로 양들을 잘
돌보아야만 좋은 일꾼으로 다시 고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삯꾼은 양들을 잘 돌봅니다.
그리고 양들과 함께 자신의 수고를 알아줄 목자를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부활 4주일인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이 날, 목자의 임무를 맡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선교사와 수도자, 성직자들은 그들의 일로 목자이신 주님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목자처럼 인내하고 기다리며, 희망하기를 기도합니다.
양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걷기를 바랍니다.
비록 삯꾼처럼 주인에게 고용된 이들일 뿐이지만, 목자의 충실함이 그들을 감화시켜
그들도 목자와 같은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양들 속에서, 누구보다 간절히 목자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침내’ 모두가 한 우리 안에 같이 모일 때,
그들이 찾고 또 살찌운 양들 곁에서 목자와 함께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
2024년 4월 21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평화를 빕니다
† 찬미예수님 !!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