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크리스마스 (외 1편)
안영희 우리 집은 바라크로 지붕을 인 피난민 마을과 마을의 뒤로는 긴 둑을 끼고 아득하도록 보리밭이 펼쳐진 광천동에 있었네 이른 아침 약국 문을 열고 비질을 하러 나간 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네 얘, 어서 나와 봐! 누가 너한테 카드를 넣고 갔다아! 함박눈 뭉텅뭉텅 내리던 간밤 햇목화 솜이불인 양 품어 안으며 잠 속으로 미끄러들었던 처마 아래까지 와서 불러주던, 마을 성가대의 크리스마스 캐럴! 밤 깊도록 엎드려서 그리고, 다시 그렸을 카드에 정작 내 이름 한 자를 틀리게 쓴 채, 잠 깊은 유리문 틈새에 끼워 넣고 간 그 남학생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 하며 살까 남도의 그 도시엔 오늘밤도 펑펑 솜사탕 뭉친 양 눈이 쏟고, 은색 금색 초록 빨강 우체국 근처 문방구엔 이국적 풍경의 색색 카드들이 줄줄이 걸리고 캐럴송과 한껏 상기한 행복들 붐비는 거리 한켠, 과묵히 늙은 우체국 앞마당에서 지금도 빨간 우체통은 쏟아지는 함박눈 속에 다리를 묻고 기다리고 있을까 하염없이 하염없이 소만小滿
홍천 가는 국도 아래 남실남실 물이 찬 논배미들과 이내 모내기로 실려 나갈 못자리들이 눈에 묻어올 듯 초록이네 모내기 날 고모집의 툇마루 다져 올린 고봉밥과 간 고등어 한 마리씩이 올라앉은 감자조림의 밥상이, 걷어붙인 일꾼들의 종아리와 갓 터진 햇목화빛 햇빛이 보이네 …지금은 폐가가 된 집,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들의 충만한 생의 풍경들이 부시게 깃을 쳐대고 있네 저녁이 오면 저 물찬 논배미마다 개구리들이 영원처럼, 영원처럼 울겠지 뭐하자고 찾아왔는지 저어만큼서 바라만 보다가 가던 소년들이 있었던 열일곱, 그 저녁들처럼 소만小滿, 믿을 수 없이 차오른 이 물의 절기는 얼마나 많이 죽은 자리들을 다시 채우려나 —갑시다, 거기! 수화기 저쪽으로부터 헛되이 녹슨 빗장 젖히는 소리 약속 방기한 동안 그 가슴자리 되돌릴 수 없는 천수답天水畓이 되어있는 줄도 모르고
—시집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했다』 2023.10 ---------------------- 안영희 / 光州 출생. 1990년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 』로 활동 시작.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 『물빛창』 『그늘을 사는 법』 『가끔은 문밖에서 바라볼 일이다』 『내 마음의 습지』 『어쩌자고 제비꽃』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했다』, 시선집 『영원이 어떻게 꽃 터지는지』, 산문집 『슬픔이 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