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Story:+:+:14(25-28)
(25)
"그 딴말 다시한번 내 앞에서 해봐... 꺼져. 니 년들 노는 바닥에서 잘들 살어.
아.. 그리고 유진이까지 니네 수준으로 낮춰 내리지마. 역겨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우는 카페 문을 나가버렸다. 허무하게 돌아간 얼굴에
아픈듯이 한 손을 뺨에 가져간 태연이 민우가 나간 뒷 문을 무섭게 노려봤다.
그리곤 화악 달아오른 붉은 얼굴로 앞에 놓여진 물컵을 거칠게 들어 벌컥 벌컥
마시더니만,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Rrrrr... Rrrrr....
신호음이 가고 몇번이 울리더니 상대편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야!!!"
-.......
"야!! 김유진인가, 뭔가 하는 기집애. 너 뭐하는 년이야? 내가 언제 민우씨 보고
나오라고 한 적 있었어?! 괜히 나와서 쪽만 당했잖아!! 왜.. 나 만나기가 그렇게
무서웠냐?"
-...넌 모를지도 모르지만,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냐. 더러워서 피하는거지.
너 같은 여자 상대할 시간에게 미안해서 그래. 난 시간을 그리 퍼다 쓰듯이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너처럼.
"...뭐야!!? 너어... 그래봤자 거기서 며칠 살거같애? 아니, 더 정확히 하자.
민우씨가. 널 언제까지 갖고 놀거같애? 그래봤자 몇달.. 길면 1년이겠지.
그 때가 와서 징징 짜면서 매달리고 추한 모습 보이기 전에 일찌감치 떠나라."
- 글쎄... 때가 되면 질릴 지도 모르지. 여자란거 세상에 흔하디 흔한 존재니깐.
"..알, 알긴 아네!! 그러니깐 그한테 그만 찝적대고 떨어져.."
- 근데, 아마 그 때가 오기전에 내가 이민우를 버릴 지도 몰라. 사실 장난감은
내가 아니라 이민우거든.
"....너 미쳤어!? 그 딴 말을... 어따대고 해! 하아... 스스로 밝히는 구만?
너도 똑같은 3류 부류 여자라고..."
- 같은 3류라도 질은 달러. 왜냐면 넌 이민우를 사랑하지만 난 이민우에게
사랑 받거든... 그게 너와 나의 다르점이야. 알겠니?
"야!! 너..너.. 내가 다 말할거야... 니 그런 여자라고.... 그렇게 싸구려
기집애라고...! 돈 보고 들러붙는 거라고..!!"
- ...만약 이민우가 네 말을 믿는다면... 지금까지 내 옆에 있지도 않았겠지...
유진은 전화기를 놓아버렸다. 더이상 대화하는건 쓸데없는 낭비라고 생각했고,
혼자 열받아 쩔쩔매는 상대편 여자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자신이 해본 말이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넌 이민우를 사랑하지만... 난 이민우에게 사랑 받거든...
선택되는건 언제나 한명이다.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 따님 모두들, 왕자를 사랑했지만 정작 왕자가 선택한건
귀족 따님도, 왕가 친척들도 아닌 굴뚝 먼지나 파내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가난한
신데렐라 였다.....
그리고 신데렐라는 끝없는 행복을 누렸겠지...
돈, 행복, 사랑, 지금까지 자신의 고생의 충분한 보답을 받으며.
사랑.....?
신데렐라와 나의 다른점, 그래... 그거였지.
그녀는 사랑을 필요로 했을지 몰라도. 난 내 행복만 있으면 되는거다.
한번의 열기와 후에 식어버리면 그만인 사랑보단...
죽을 때까지 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부유함이 좋아.
그게... 더 좋아.....
(26)
━5년 후...━
"아, 문변호사. 그래... 이번 일은 어떻게 잘 된건가?"
"예. 처음 맡는 일이라.. 약간 긴장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실망스럽진
않습니다. 어설프긴 하지만요."
"허허... 어설프긴! 오랜만에 등장한 혜성같은 젊은 변호사에게 실망은 무슨..!
앞으로 계속 좋은 결과 있길 비네. 허허허..."
"예.. 돌아가십시오."
정혁은 호탕하게 웃는 그 남자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마친 다음 뒤를 돌아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맡은 일은 불법음반 신고에 따른 조취였고
생각보다 빠른 시일내로 끝낸 정혁 덕분에 의뢰인들은 얼굴에 함박 웃음을
띄며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런 의뢰인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띄운 정혁은 변호사란 직업을 택한 자신의 선택에 다시한번
만족스러워 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지금 온거야?"
낮익은 목소리가 정혁의 귓가에 들렸다. 발밑만 내려다 보던 정혁이 고개를
들자 왠 여자 한명이 정혁의 사무 의자에 앉아 생글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아까, 한 10분 전에...? 오늘 일은 제대로 끝난거야?"
"그럭 저럭..... 왜 온거야?"
"이우... 이 목석. -- ... 내가 전번에 말했었잖어. 나 오늘 맡은 일 끝나니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같이 술이나 마시게. 동료들이 같이 놀러가자는거 뿌리치
고 나온거니깐 서비스는 확실하게 해. 나 열받게 만들면 어디로 튈지 몰라.."
정혁은 장난기 섞인 여자의 말에 피식 웃으며 옷걸이에 걸쳐둔 양복 윗도리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생글거리는 여자가 쪼르르 의자에서 일어나 정혁의 왼팔에
자신의 팔을 쏙 집어넣었다. 멈칫한 정혁이 여자의 팔을 슬그머니 빼냈다.
"나 이런거 싫어하는 거 알잖어..."
"...알지. 누구보다 잘 알지. 내가 너랑 몇년 사인데? 자그마치 5년이다! 5년!"
"그러니깐... 장난 치지 말구 우리 조용하게 가자, 응?"
"....정혁씬,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루 보여?"
약간 앙칼진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여자가 더욱 자신의 팔을 세게 죄이며
꾹 다문 입술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피부에 뒤로 깔끔하게 묶은 흑진주빛 머리. 연보라색의 세련된
정장 원피스 차림. 어디 하나 빈틈없는 커리어우먼 스타일의 아가씨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정혁과 같은 동급 변호사 일을 맡은
여자였고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선 칼로 자르듯 똑부러지고 완벽하게
끝내버리는 확실한 타입이였다.
허나, 정혁 앞에 서면 180도 돌변하는게 예사였다. 물론, 도시적이고 세련
된 그녀의 이미지는 어디 가지 않았으나 애교도 잘 부리고 사랑하는 남자
에게만 보이는 해맑고 어린아이 같은 환한 웃음은 사무실에선 찾아볼 수 없
는 독보적인 것이였다.
"알았어, 알았어, 누가 전지현 고집을 꺾을소냐... 껴라"
정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지현에게 팔을 내밀었다. 다시금
그 환한 미소를 띈 지현은 정혁의 팔에 매달린채 생글 생글 웃으며 아래
주차장으로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걸어간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보고 남자 하나는 정말 잘 골랐대, 원래 자수성가
하면서 자란 사람이 정말 됨됨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뭐... 세상이치
를 잘 안다던가? 암튼.. 훗, 우리엄마 벌써 웃겨. 정혁씨 신랑감으로 점찍
어 놨으니깐. 정혁씨 부모님은 어때? 나 맘에 들어 해?"
"신랑감은 무슨... 그냥, 아버지도 너 싹싹하다고 그러긴 하더라."
"정말?! 훗.... 그거 신부감으론 만족스럽단... 그 뜻으로 받아도 되는거야?"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아 입으로 집어넣으려던 정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지현을 쳐다봤다.
"뭐야... 너 설마 너네 어머님이나 아버님한테 문정혁이랑 결혼할 거에요...
다 퍼뜨리고 다닌거냐?"
"응. 그러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니?"
"...너... 확신 있니? 나랑 결혼할 확신? 너랑 나랑 만났을 때 내가 뭐라고
그랬어. 나 독신으로 평생 살거라고 했잖어. 그렇게 막말하다 나중에 안되
면 나 괜히 너네 부모님한테 책임감 없는 놈으로 찍히는 거잖아."
".....어짜피 결혼 할거니깐. 정혁씨, 설마 그런 감정 한번도 못느낀건 아니지?
난 정혁씨 만날 때부터 아, 이 남잔 내 남자다.. 이 필이 팍, 와닿았다구...."
"........"
"...기다릴 수는 있어. 정혁씨가 기다리라면... 10년이고 100년이고 기다릴
자신은 있다구. 그러니깐 그렇게 얼빵한 표정으로 보지 말고 먹기나 먹어."
피식 웃어재낀 지현이 정혁 입가에 묻은 빨간 소스를 닦아내렸다.
재미있는 여자였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배짱이 두둑했고, 의견이 뚜렷하다
못해 당돌한데다 건방진 구석까지 있는 아가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혁은
왠지 모르게 지현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이유를 예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뽀얀 아기같은 피부에, 찰랑대는 긴 생머리. 똑부러진 성격에
도도한 눈빛이나 걸음걸이까지.
그녀는....
정말 유진의 이미지를 가져다 놓은 듯한 여자였다.
정혁은 지현을 통해 유진을 바라봤다. 그녀를 부르려다 유진의 이름을 부른적도
많았다. 지현과 함께 일을 하거나 거리를 나다니거나 이렇게 같이 않아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유진과 함께라는 옅은 착각에서 헤메이곤 했다. 그래서였다.
'지현'이 아닌 '유진'를 여전히 사랑하는데도 정혁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지현을
떼놓을 수가 없었다. 그저... 가끔씩 머리를 감싸고 도는 예전의 기억들을
하나 하나 되새기며, 자신의 옆에 있는 이 여자가 유진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끔씩 씁쓸한 미소만을 띄우며 그런식으로 몇년을 살아왔다.
"지현아."
"왜?"
"너 있잖아... 그 머리, 안자를거지."
"내 머리카락? ...뭐, 자를 생각은 없어. 정혁씨 긴 생머리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일부러 기르는거야."
"아니... 그냥...."
"뭐야, 할말 있지. 뭔데?"
"...그 머리 있잖아... 살짝 갈색으로 염색하면 더 예쁠거 같애."
"염색? 하하.. 정혁씨 무슨 바람 들었어? 왠 염색이야..."
"그냥 해본 말이야... 왜 연갈색으로 햇빛 받으면 부드러워 보이는 색 있잖어."
"....되게 자세하게 안다.. 왜? 누가 그 머리카락 색인데 그렇게 예쁘든?
에궁.. 미안하게 됬네. 난 천연적으로 검은 머리라 그런 색이 안나오거든."
"그냥 해본 말이야. 신경 쓰지마."
지현은 이상하다는듯 정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다가 어깨를 으쓱하곤,
계산대를 지나쳤다.
"참! 돈 정혁씨가 내!!..^^.."
"죄송합니다..."
"너네 지금 죄송하단 말이 쉽게 나오니!? 죄송하단 말 한마디로 끝낼게
아니잖어! 패션쇼 정확히 한달 남았어! 근데 디자인은 이 따위고 끝낸
건 아무것도 없고! 회사 말아먹을 일 있니? 이게 디자인 팀이야?! 니네
가 그 잘났다는 한국그룹 직원들이니!?"
"............."
"휴우.... 미치겠다. 나 혼자 백방 뛰어다녀도 남는건 없고.. 어떻게
할래? 때려 칠까? 이번 여름엔 우리 그냥 회사 접어버릴까?"
"...오늘까지 아이디어 짜낼게요. 무대 디자인이랑..."
"지금까지 해 놓은거 내 책상위에 올려두고 알아서들 해봐."
유진은 앙칼지게 내뱃곤 신경질 난다는 듯 사무실 문을 거칠게 닫아버리곤
나가버렸다. 직원들은 유진이 나가서야 맥이 풀린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뭐야!? 저 기집애... 나보다 한살이나 어린 주제에 너네? 웃겨... 진짜 웃겨."
"낙하산 아니냐고.. 저래봤자, 이민우 빽 믿고 들어온 애잖어."
"...그래도 실력은 있잖아요. 전번 겨울 패션쇼도 극찬에 극찬이였잖아요."
"어쨌든!! 기분 나쁘잖어..!"
유진은 자판기 앞에서 직원들 인사를 받으며 뽀얀 커피 김 속에 속눈썹을 담구곤
잠시 눈을 감았다. 며칠 동안 잠 한숨 잘새 없는 피곤의 연속이였다. 직원들이라고
붙여준 사람들은 디자인이 아니라 자기 치장에 정신이 없는 여자들이였고 한달 반
남짓 남은 여름 패션쇼는 반도 진행이 안된 상태였다. 답답한 마음에 예쁜 미간을
살짝 찡그린 유진은 자판기 근처의 간이 의자에 앉아 오도카니 짙고동색의 커피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또 왜 화가 났어?"
유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온건진 모르겠지만, 자신의 옆에 앉아
희미하게 웃고 있는 민우가 자신과 같은 종류의 커피를 뽑곤 입술에 가져가 댔다.
"이쪽 계열엔 왠일이야?
"어디 갔다 오늘 길에 들렸어. 너 얼굴이나 보고 갈겸 해서. 야아... 아까 보니깐
직원들이 오가면서 너한테 인사 많이 하더라. 이젠 완전히 뜬거네, 김유진 실장."
"그러지 마... 남들이 낙하산이라고 욕한단 말야. 그렇지 않아도 회사 내에서 얼마나
수군덕 대는 입들이 많은데.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 완전히 그 소문 확인 시켜주는
꼴 밖에 되지 않잖아."
"자존심 센건 몇년이 지나도 여전해요~ 점심시간 되지 않았어? 나가자."
자신의 팔을 일으키는 민우를 힐끔 바라본 유진이 픽 웃으며 사무실에 두고 온
핸드백을 가지러 간다며 몸을 돌렸다.
이젠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연갈색 긴 생머리. 워낙 타고난 머리결이라 그런지
오갈 때마다 양 옆으로 흔들리는 찰랑 거리는 모양새가 예쁘기 그지없다. 학생 때
보단 많이 커버린 키와 많이 성숙해진 얼굴. 유진이 들어오고서 말들이 많은건,
'한국그룹 회장의 아들인 이민우의 연인' 이란 뒷배경도 이유가 되겠지만은,
역시나 그런 말들 보단 남성 직원들의 유진에 대한 호기심이 한층 높은게 사실이였다.
모델리아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가냘픈 체구에 마치 손으로 손수 그린듯한 완벽한 외모.
이미 임자있는, 그것도 그 임자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만 아니였다면 유진을
눈독 들이는 남자도 한 두명이 아니였을텐데 말이다.
"유경이 이제 6학년 올라가지?"
"응... 말도 마, 게 요즘 반항끼가 장난이 아니야. 사춘기라고 하긴 이르지 않어?
뭐..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둥, 전번엔 시험을 봤는데 점수가 바닥인거 있지.
뭐라고 하니깐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둥.... 게 웃긴다,?"
유진이 쿡쿡 웃으며 초밥 하나를 입으로 집어넣었다.
"우리도 어릴 때 그랬을 껄..... 나야....."
"어, 우리 더 시키자. 나 배고프다."
유진이나, 민우나. 과거란건 들추지 않는게 약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민우가 말끝을 흐리자 재빨리 주방장을 불러 초밥 한그릇을 더 시킨 유진이 화제
를 돌리며 밝게 웃었다.
"너 그러다가 살찐다. 디룩 디룩. 나 살찐 여자 싫어~"
"뭐야? 전번에 비디오 볼 땐 몸에 살 붙은 여자가 좋다매."
"......."
"난 살 좀 쪄야 되. 난 너무 말랐거든."
킥킥 웃으며 민우의 젓가락에 집혀있는 초밥을 뺏어다가 자신의 입에 집어넣는
유진은 곧 간지럼으로 공격해 오는 민우의 손길에 넘어져 가게의 시선을
잡아야만 했다.
커다란 유리창 앞에서 높다란 회전 의자에 앉아 예쁘게 장식되있는 초밥을
젓가락으로 깨작대는 둘은 나릇한 봄 햇살 아래의 그 이름만큼이나 따스해
보이는 연인이다.
적어도 남들의 눈에는- 인형같은 외모의 여자가 TV 광고에나 볼법한 근사한
청년의 입에 반 쪽 남은 초밥을 다정하게 먹여주는 예쁜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적어도....
"언니!! 치약 다 떨어졌어!!"
"맨 윗칸에 봐바. 여분으로 남겨둔거 있으니깐."
유진은 몇시간 전부터 머리카락을 쥐어싸매며 디자인에 몰두 중이다.
커다란 스케치북을 몇권이나 펴놓고 손이 가는대로 스케치는 해보지
만 예쁘다는 유경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마음에 안드는
지 입술만 잘근 잘근 씹으며 몇장을 찟어 던졌다.
"맘에 안들어....."
"아직도 그려? 3시간 째야. 퇴근하고 밥도 안먹었잖어.. 내가 차려줄까?"
"아냐.. 생각 없어. 먼저 들어가서 자. 언니, 오늘 늦게 자겠다."
"응.. 먼저 들어갈게."
유경은 힐끔 유진의 디자인을 쳐다보고는 혀를 내두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국그룹 계열의 디자인 회사에 들어온건 순전히 민우의 입
김 덕이였다. 대학을 휴학한 학생인데다, 경력 또한 초라한 유진이였다.
들어오자마자 '낙하산'이란 꼬리표를 달고 많은 소문에 소문을 문 유진
이였지만 절대로 굽히거나 숙일줄 몰랐다. 오히려 그 소문을 죽이려는듯
하루종일 디자인과 아이디어에 매달려, 노력과 재능에 승부를 던졌고 그
덕에 '낙하산'이란 배경 없이도 '능력있고 유능한 젊은 디자인 실장'
자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물론 민우의 도움이 전혀 없었던건 아니지만.
"하암....."
'일'이란걸 가지게 된것은 유진에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이였다. 지루한
수업을 듣고 리포터를 써내는것은 12년간이나 해온 학교생활과 별 다를게
없었고 막상 대학이란 간판을 가졌어도 달라지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신입생 시절의 그 흔한 미팅 한번 해보지 못했고 (이유는 설명할 가치 X)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 멋진 선배나, 잘생긴 동료 학생들에게도 눈길조차
주지 못한게 다수였다. 언제나 수업이 끝나면 학교 정문 앞에 민우의 차
가 기다리고 있었던 적이 많았고, 회사 뿐만 아니라 학교서 부터 유진은
'돈 많은 집안 아들과 사귀는 임자 있는 여자' 란 딱지가 붙어버렸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학교 생활에 재미를 못붙이던 유진은 4년 째에 접어들 때
갑작스레 휴학신청을 내버렸고 디자인과인 자신의 전공을 유리하게 이용해
민우를 졸라 회사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실장이란 자리에 오른
건 약간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유진을 믿은 민우의 과감한 투자였다.
그 해 겨울 컬렉션은 극찬에 극찬을 받았고 참신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디자인
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깊은 패션쇼를 남겼으며, 김유진이란 이름은 디자인
계의 새로운 샛별로 자리메꿈했다.
(27)
"머리.. 많이 길었다...."
유진은 화장대 앞에 앉아 중얼대며 브러쉬로 긴 머라카락을 빗어넘겼다. 머리
카락의 길이란건 어느정도 적당선을 넘으면 지저분해보이기 마련인데, 허리까
지 치렁치렁대는 유진의 머리카락은 지저분해보이긴 커녕 동화속에 나오는 예
쁜 공주님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유진의 몸 선을 따라 보기좋게 흘러내
린다. 유진은 한참이나 아무생각 없이 머리카락을 빗어넘겼다.
[ 넌 긴 머리가 가장 잘 어울려. ]
언젠가 민우가 유진에게 던진 말이였다. 언젠가... 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몇번이고 길기만 한 머리카락에 질린 유진이 변화를 주려고 생각할 때면 간간히
머리속에 떠오르는 말. 유진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다 장난스레 잡아당기는
민우의 얼굴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이민우 말에 신경 썼다고.....
피식 웃어버린 유진은 머리카락 끝을 잡아올렸다. 그리곤, 생각했다.
너무 길어버린 머리카락.
이젠 자를 때가 된거 같다고.....
"어? 실장님 머리 자르셨네요. 아깝다..."
"너무 길면 지저분해 보이잖아. 그냥 잘라봤어요."
유진은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마우스를 깨작 거렸다. 활짝 열어놓은 사무실
창문 틈새로 스며든 봄 바람이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살랑, 흔들며 지나
쳤다. 허리에서 더 길게 뻗어내리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가슴 부위까지 짧아진
상태였다. 고개를 숙이면두 팔 사이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아
약간은 허전한 감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일하기에 불편한 모양은 아닌지라 꽤
유진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실장님. 처리해야 할 문제가 생겼는데요, 아직 상부에서 지시는
없는데... 아마 곧 내려올 거에요."
"...뭔데?"
"불법 상표 도용 문제요."
"... 우리 상표 멋대로 가져다 붙이는거?"
"예. 요즘 그거 문제 꽤 심각하거든요. 샤넬이나, 구찌 같은것도.. 요즘엔
진짜같은 가짜가 판을 쳐서 매출이 많이 줄었잖아요."
"후... 가뜩이나 골치 아픈데...."
"변호사 고용한 다음에 돈만 주면 될거에요."
"변호사?"
"예, 요즘 유능한 변호사 분이 계신대 그렇게 일처리가 확실하고 군더더기
없다고 많은 업체에서 부르거든요, 그 분 만나보세요."
"...시간 나면."
유진은 짧게 대답하곤 여자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힐끔 쳐다본
그 사각형 하얀 명함 위엔 낮익은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 변호사 문 정 혁 ]
탁,
은회색 EF 소나타 앞 문을 소리나게 닫은 유진은 뒷 좌석에 둔 빨간 핸드백을
꺼냈다. 그리곤 자동키 버튼을 누른 다음, 고개를 들었다. 아담한 크기의 사
무실이였다. 처음에 '사무실' 이란 말을 들었을 때엔 그냥 5층짜리 건물에 임
대받은 자그마한 공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정혁의 사무실은 방
배동 주택가의 몇 그루의 나무로 둘러싸인 '마치 동네 구청같은' 그런 예쁜
1층짜리 개인 건물이였다.
(왜.. 토마토에서 김석훈네 사무실 있져? ^^ 그거 생각하시면 될거에요.)
들어가는 길목이 산뜻하게 커다란 돌로 징검다리 처럼 꾸며져 있었다. 기다란
나무 팻말에 적혀진 '변호사 문 정 혁 사무실'.. 이것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이 아담한 하얀 건물을 그저 평범한 주택일 거라고 생각했을 듯 하다.
긴 머리를 웨이브로 틀어올려 실핀으로 고정 시킨 다음, 몇 가닥을 목선으로 뺀
헤어스타일이다. 자그마한 유진의 얼굴에 썩 잘 어울렸다. 빨간 정장 치마를 툭,
털어본 유진은 숨을 내쉬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계세요?"
"예. 누구 찾아 오셨나요?"
걸걸한 목소리의 여자가 금새 나오며 유진을 반긴다.
"문..정혁 변호사님 찾아왔는데요. 안 계시나요?"
"계시죠. 이 쪽으로 오세요."
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대단하게 꾸미지 않은 사무실이다. 비서 책상의 윗 쪽에
걸려있는 기도문과 법대 나온 사람 집에는 필수 조건으로 갖춰진 그런 몇개의
나무 책장. 그리고 꼿혀진 백권은 족히 넘을 듯 보이는 책들. 심플한 디자인의
검은 시계. 유진은 찬찬히 둘러보며 벽으로 가리워진 저 쪽의 또 다른 책상을
찾았다.
"변호사님."
"아, 예..."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눈동자를 몇번 껌벅였다. 어쨌거나 유진과
많은 친분이 있던 남자였다. 영영 못볼 줄 알았고 그렇게 믿었던 남자였는데,
지금은 자신의 바로 앞에서 자리를 들썩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많이 긴장되는 일임엔 틀림 없었다.
머리 모양새를 매만진 유진은 벽 쪽으로 살짝 얼굴을 내보이며 정혁을 찾았다.
"오랜만이네. 선배."
유진은 싱긋 웃으며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정혁의 얼굴을 마주 대했다.
"...유진....이...?"
.
.
.
.
"선배, 많이 근사해 졌네. 키도 더 많이 큰거 같아... 아, 나 반말 써도 되죠?"
"어... 그래..."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요. 내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듯이. 후후... 근데 얼굴은
하나도 안 변했네요. 그래서 더 낮설지 않다. 저 사실은 걱정 많이 했거든요. 선
배가 나 못알아 보면 어쩌나 하고.. 사실은 아는 사람 핑계로 약간 의뢰비 줄일려
고 했거든. 하하..."
"어... 그래..."
".... 아까부터 왜 자꾸, 어, 그래, 응, 이런 애기 밖에 안해요? 나 안 반가워요?"
"아니. 그냥..."
"그냥 뭐요?"
"그냥... 적응이 안되서 그래..."
왼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듯 부비적거린 정혁이 휘청거리며 의자에 털썩 기댔다.
그리곤 살짝 실눈으로 방긋 웃고 있는 유진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도대체 적응이
안되는 상황이다. 대체 여기 내 앞에서 와 앉아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
을 꺼내는 이 여자는 유진이 맞는 걸까... 내 심장 전체를 들썩이게 만드는 이
무언가는 뭘까... 어쩌면... 이젠 아예 환상에 절어 사는 내 모습이 아닐까.....
"후....."
"왜요?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요?"
"아, 아니..."
그래. 맞는거다.
이 여잔... 유진이가 맞는거고... 난 문정혁이 맞는거고.. 난 변호사고..
아마 유진은 어떻게 날 알았는진 몰라도 내게 의뢰하는 의뢰인일 테고...
단지, 5년만에 만난것일 뿐이다.
"오랜...만이다."
"지금에서야 그 애길 하는 거에요? 푸훗... 선배 여전하다. 한 발자국씩 느린거."
"..........."
"나요, 한국그룹 디자인 계열 '클라쎄' 거기 다자인팀 실장이에요. 능력으로 된거
에요. 겨울 컬렉션에서 칭찬도 많이 받구-, 신문에도 났었는데.. 몰랐어요?"
"한국 그룹...?"
"아아.. 또 이상하게 생각할려구 그러죠. 민우씨 빽 믿고 들어온거 아녜요.
그런말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단련됬죠. 처음엔 충격이였어도-."
"... 아직도.. 자주 만나는가 보네."
"그냥. 그래요. 헤헤.. 예전이랑 똑같죠. 단지 더 늙은거 빼고."
넌 그대로구나.
언제나 밝고 또랑 또랑한 목소리도.
아래로 시선을 깔아내리는 도도한 눈빛도.
말이 끝나면 습관처럼 입술을 얇게 접히며 옆으로 미는 버릇도.
옷깃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가는 목선도... 그 사이로 흘러내린
연갈색 부드러운 머리카락까지.
변한게... 하나도 없구나. 너.
"많이... 예뻐졌네."
"빈말이라도 고맙게 받을게요. 하하.. 예쁘다는 말 들으니깐 기분 좋네요."
자그마한 공간에 일상적인 말이긴 하지만... 편한 사이처럼 나누는 분위기...
따뜻하게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갓 가져온 커피 두잔과. 서로를 마주대하는
눈빛과 그들의 팔을 받쳐주는 아담한 크기의 원목 책상.
5년전에.
자주 너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편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긴 머리에 교복차림이였던 소녀 티가 물씬 났던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어디로 가고,
이젠 엹은 화장기의 빨간 사무직 정장을 입은 성숙한 차림새의 아가씨가 앉아와있다.
교복차림이였던 짧은 스포츠 머리의 소년 티를 벗지 못했던 소년은 어디로 가고,
이젠 단단해진 가슴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굵은 목선을 지난 남자가 앉아와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서로를 마주대하면서, 두런 두런 애기를 나누었던 지난날의
어느 겨울이 새삼 떠올랐다.
유진을 바라보던 정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 한줄기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정혁씨!"
"..으, 응?"
"뭐야... 아까부터 뭘 그렇게 생각해?"
"아냐. 먹던거나 마저 먹어."
".... 정혁씨가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밥이 지금 넘어가게 생겼어?
뭐야? 뭔데 그렇게 멍한 눈으로 앉아있어? 바보같이."
지현은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를 겹쳐 놓으며 그 아래로 신겨진 하이힐 굽을
따각, 따각 거렸다. 붉게 칠해진 입술 사이로 빨아드린 붉은 빛깔의 칵테일이
목구멍을 적셔갈 때쯤 정혁이 입을 열었다.
"알던.. 사람을 만났어."
"누구?"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후밴데. 어떻게 알았는지 내 사무실을 찾아왔어.
지금은.. '클라쎄' 디자인팀 실장 됬다더라. 일 때문에도 그렇고.. 한번 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기회가 맞아떨어졌다고... 그러더라."
"'클라쎄'? 거기 한국그룹 계열 아냐? 엄청나게 빵빵한덴데, 아직 대학생 신분일
나이로 거기 실장이 됬어? 능력이 무지하게 대단한 앤가보네. 야... 질투심 느
낀다. 나도 왠만큼 젊어서 뛰어오른 여잔데, 나보다 더 대단한 애가 있는거네?"
"후으... 똑 부러진 애거든. 똑똑하고.. 야무지고... 자기 할 일은 다하고...
그럴만도 할거야."
"..잠깐만, '클라쎄' 디자인 실장이면.. 김..유진..이였나?"
"으, 응?"
유진의 이름에 은근히 놀란 정혁이 무언가를 되짚어 보듯한 지현을 바라보았다.
몇분이나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움찔 거리던 지현이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맞부딪친다.
"아! 생각난다, 생각나. 전번에 패션계 화보에서 얼핏 봤었어. 겨울 패션계를
주도한 젊은 나이의 실력파.. 뭐, 이런 주제였는데. 굉장했거든. '클라쎄'가
겨울 패션쇼 개최한 이후로 그 지점 옷들이 불티나게 팔렸었잖아. 나도 몇벌
있어. 디자인이 여간 독특하고 예쁜게 아니던데... 사진으로도 살짝 봤는데
기집애가 얼굴도 보통 수준이 아니더라구."
"....예뻐. 예쁜 애야."
"그런 애가 정혁씨 후배라니, 대단하네. 야~"
"후후..."
"근데... 그거 같고 왜 그리 궁상에 청승이야? 김유진이 오빠 첫사랑이였어?"
"........."
장난스레 농담을 던진 지현이 아무런 대답도 없는 정혁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한 손으론 턱을 괸채 민망한듯 칵테일에 시선을 떨구고 있는 남자. 지현의 말이
여간 신경쓰이는건지 입술을 옴싹달짝 못한다.
"어... 농담이였는데, 진짠가 보네?"
"...아니야.."
"아니긴! 하긴.. 오빠도 남잔에 그런 얼굴에 안 넘어갈리가 없지."
"....얼굴에 넘어간거 아니야."
"원래 얼굴 예쁜 애들이 성격은 볼거 없잖아? 나를 봐. 솔직히 나 그리 좋은
성격은 못되거든. ^^"
"게, 굉장히 도도한 애였어. 우리학교 메이퀸이였는데 넘보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니였거든. 공부도 곧 잘하고, 얼굴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남자애들 중
한명이 나였어."
그냥.. 넘보기만 했던 남자애...
"우왓! 정말? 왠일이야.. 천하의 문정혁 목석님이 그럴 정도였단 말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순종 해바라기 지극형 남자? 새로운 발견인데.."
".........."
"그나저나... 괜히 질투나네, 이거. 난 이렇게 몇년을 들러붙어도 제대로
마음 확인 못하는데. 그 여자애는 오빠에게 관심도 없던 주제에 이렇게
잘난 남자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말야. 건방지게..."
"..........."
"...오빠. 나 봐바."
"....응?"
(28)
정혁이 고개를 지현 쪽으로 돌리자 마자,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인 지현이
정혁의 얼굴에 손을 갖다대 자신의 얼굴 쪽으로 돌리며 그대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부딪쳤다.
놀란 정혁이 두 손을 올리며 지현의 팔을 떼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집요
하게 정혁의 목 뒤에 자신의 팔을 휘감겨 버린 지현은 한참이나 자신의 입술
을 원상태로 되돌려놀 생각을 하질 않았다.
"....하아... 야, 전지현.. 너...!"
"쿡... 진짜 귀여운 남자다. 정혁씨. ^^"
"무슨 짓이야? 사람들 많은데서."
"충분히 떼어놀 수 있었는데 그대로 냅둔거 보면 그리 싫지만은 않았지?"
"뭐!?"
"내 앞에서 딴 여자 애기 하니깐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단 말야. 할수없이
오빠 정신 좀 되돌려 놓고자 이 방법을 택했지. 이젠 나만 눈에 들어오
지?"
"...전지현. 너는.. 진짜..."
"나 뭐? 나 뭐어~..."
"..후우... 나가자, 눈초리 따거워서라도 일어서야겠다,"
정말 원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 멋대로 항상 행동하면서도 웃음으로 넘겨보이는 지현이 원망스러운게 아니라,
그런 지현의 밝은 얼굴에 항상 그녀의 얼굴을 겹쳐씌워 바라보는 자신의 눈동자
가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지현이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입술을 부딪힐 때에도 지
현의 말처럼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던 이유 또한, 마친가지였다.
한순간 자신의 어깨넘어로 내밀려오는 기다란 머리카락에 한순간 누군가를 떠올
리며 잠시동안 행복감에 젖어있던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원망스러워 견딜 수
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듯 오래간만에 만난 선배를 대하는 편안한 유진의 행동에 비해,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눈동자를 정돈시
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함이.
정말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쨘-!!"
"... 왠 꽃?"
"뭐야. 난 좀 더 대단한 반응을 바랬는데..-_-.. 몇 주나 얼굴 못봤던 사람한테
아무런 그리움도 못느꼈나 보네. 특별히 꽃까지 준비해서 오랜만에 놀래켜 줄
려구 그랬는데... 에이~ 김유진 재미 없다!"
"실망한 표정 짓지 말고 들어와요. 새벽같이 달려와선.. 뉴욕 지사로 출장 갔었
다면서. 오늘 온다고 들었는데, 먼저 집으로 들어가서 쉬어야지... 왜 우리 집
먼저 온거야? 피곤하게..."
"여기가 우리 집이잖아.^^"
유진은 장난스레 민우를 노려보며 민우 손에 들린 하얀 백합 꽃다발을 들고선
거실로 들어왔다. 시원스레 열어 재낀 창문 사이로 낮익음의 봄 바람이 새어
들었다. 시원하다는 듯이 두 팔을 쫘악- 옆으로 벌린 민우는 그대로 소파에
엎어지듯 누워버렸다.
"아... 피곤하다..."
"그러니깐 집으로 먼저 들어가야지. 오늘 회사 안나갈거야?"
"나가기 싫다... 그냥 여기서 자구 가면 안되?"
"미쳤어-_- 멀쩡한 자기 집 나두곤 왜 남의 여자 집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자리를 펴. 유경이 조금 있으면 깰 거구 나도 아침 먹고 회사 나갈거야."
"뭐가 남의 여자 집이냐? 내 여자 집이면 내 집이지."
"암튼.. 저 뻔뻔스러움.."
유진은 피식 웃으며 아예 베란다 쪽 커다란 유리창을 활짝 열어재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밀려드는 시원한 내음은 민우를 새벽의 단잠으로 초대하기 충분했다.
"모닝 커피 타줄게. 모카로 해줄까.. 아니면 그냥 블랙으로 줘?"
"..............."
"민우씨."
"..............."
"민우씨... 자?"
"................"
"언제 왔다고 벌써 잠이야.. 빨리 일어나! 잘려면 아예 침대에 가서 자든지.
어휴.. 내가 미쳐.."
"................."
"일어나아아......."
민우의 한쪽 팔을 잡아 땡기며 안간힘을 쓰는 유진의 왼팔이 갑자기 와락- 바
닥으로 재껴져버렸다. 놀라서 발딱 일어나려는 유진의 몸 위로 갑자기 그림자
가 덮쳐 버리더니, 동그랗게 뜬 유진의 눈동자에 장난스레 웃는 민우의 얼굴
이 그려졌다.
"장난 치지! 진짜.. 비켜어!"
"싫어! 이 아가씨야!!"
"에웃.. 팔 아프단 말야! 우잉.. 팔 풀어줘!!"
"싫어! 이 아가씨야!!"
"아...씨....엄마아아아-!!! 꺄하하하..(-_-) 그만해에에!!"
예쁘게 찡그려진 미간을 바라보던 민우는 갑작스레 유진의 옆구리를 간지럼 태
우며 쉴새없이 거실 바닥을 뒹굴 뒹굴 거리는 유진을 놔주질 않았다. 한참이나
울듯이 웃는 유진은 자신을 결박한 민우의 두 손을 잡아 내리려 안간힘을 쓴다.
"후아... 죽는 줄 알았잖아! 나 간지럼 잘 탄단 말야! 뭐하는 거야.."
"야... 김유진 진짜 망가진다... 하하.. 너 표정 무지하게 웃겨-!"
"........."
"어.. 화났나 보네.."
어색하게 거실 안을 감싸고 도는 침묵이였다. 유진은 화난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위로 얼굴을 들이댄 민우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몇분...
조심스레 유진의 연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집어넣던
민우는 그렇게 아래쪽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이윽고 그 사이에 자신
의 얼굴을 묻었다.
맑으면서 코끝을 짙게 만드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그녀만의 향기가
민우의 정신을 헤집어 놓았다.
"유진아."
"..응?"
"나 보고싶었지."
"아니."
이것이 김유진.. 나의 진심이라면...
"진짜 안보고 싶었어?"
"....아니.."
이것은 김유진.. 나의 거짓이다.
살며시 유진의 턱선을 파고든 민우의 입술이 점차 그녀의 입술로 자리매김을 한다.
가느다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붉은색. 민우는 조용히 그곳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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