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90개나 되는 계단이다. ‘대구의 걷고 싶은 길’로 꼽히기도 한 이길은 3.1운동 당시 계단식 언덕에 층층으로 자연스레 대열을 이룰수 있어, 이 언덕에서 시작된 대구 3.1만세 운동은 계산성당, 진골목, 약전시장을 거처 대구시내 한복판으로 가로지를 수 있었다. .
올라가는 길도 예쁘고, 올라가서 얻는 기쁨도 크다.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들은 동산의료원 초기에 파견되어 온 외국 선교사들의 주택이었다.이곳 청라언덕의 주택들은 20C초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담쟁이를 많이 심은 데서 유래되었으며, 달성토성이 대구의 중심이었을 때 동쪽에 있다하여 동산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정원인 이곳은 챔니스주택, 스윗즈주택, 블레어주택 등 옛 선교사들이 생활하였던 주택과 90계단, 대구 3.1만세운동길, 대구 최초의 서양사과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동무생각 노래비,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묘지인 은혜정원 등이 있다. 또한 청라언덕은 골목투어 2코스의 출발지이며, 드라마 촬영장소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라언덕에 위치한 주택가 한가운데 '은혜의 정원'이라는 작은 선교사 가족 묘지까지 있다. 특히, 이곳에 잠든 선교사 가운데는 미국에서 숨을 거뒀으나 대구에 묻히기를 원해 이장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대구의 더위를 이기기 위해 심은 담쟁이 때문에 청라(靑蘿)라는 언덕 이름이 붙여졌다. 아쉽게도 몇 해 전 문화재청이 주택 보존을 이유로 담쟁이를 제거해 지금을 볼 수 없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이 100주년을 맞았던 지난 1999년부터 스윗즈 주택은 선교박물관으로, 챔니스 주택은 의료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현제명의 <고향 생각>도 그렇고 그 시절 노래에는 '생각'이라는 제목이 많군요. 박태준 작곡가는 고향이 대구다. 여기 나오는 동무는 작사가 이은상님이 청라언덕에서 만난 하얀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라는......
<동무생각>은 1922년에 만들어진 노래로 우리나라 가곡 제 1호라는 사실이 새롭다. (100년 된 노래!) 작곡자 박태준님이 만든 노래에는 <오빠 생각>도 있다.
계산성당이다. 서울 명동 성당, 전주 전동 성당, 대구 계산 성당, 우리나라의 3대 성당 건축물로 1902년 완공된 건물이다. 계산성당은 1899년 로베르 신부가 처음에는 한옥으로 지었으나, 1901년에 불에 타 전소했고 1902년에 프와넬 신부에 의해 설계된 건물이 남아 있다. 한국 근대 역사의 현장으로 1951년 김수환 추기경이 신부 서원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계산 성당 내부의 전겨이다. 예배가 이루어질때에는 출입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이렇듯 일정부분의 통제아래 자유 툴입이 가능하다.
이곳 계산성당에서는 195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혼식이 열렸던 곳으로,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고 읽었다는 농담같은 이야기가 전해진기도 한 이곳의 역사성은, 한국 전쟁 중에는 영국 수상 처칠의 아들인 랜돌프 처칠이 종군기자로 오기도 했다고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대구 출신의 문학인과 예술인의 면면을 알수 있는 이정표들이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그들의 불같았던 인생길의 발자취를 느끼게 해준다
계산성당으로 가지않고 반월당방향으로 가게되면 만나는 골목길에 이상화와 계산성당, 그리고 청라언덕이 그려진 벽화를 만날수 있다
계산성당 주차장을 빠져나오면 오른쪽에 이상화·서상돈 고택과 계산예가가 나타나는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저항시인 이상화는 1939년부터 1943년 숨지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던 곳이다.
고택에는 이상화 선생의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데 계산예가는 깔끔한 한옥형태로 지은 근대 체험 전시관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으로,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나의 침실로'의 12연 중 11연을 새긴 상화시비가 1948년 3월 14일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천안독립 기념관과 대구 두류공원 인물 동산 및 수성못가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를 세우고 두류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1926년 '개벽' 6월호에 발표된 시인의 대표작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강점기의 민족현실을 '빼앗긴 들'로 비유하여 노래한 민족시이다. 비록 국토는 잠시 빼앗겼다 해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준 시로서,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안방내부의 모습이다.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하는데,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간사로 있으며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사건에 연루돼 대구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말년에 위암으로 4년간 투병하시다가 이 방에서 운명하셨다.
서상돈(徐相敦, 1851~1913)고택으로, 선생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