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리
皮西里는 망운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져 있다. 간척사업(톱머리와 청계면 도대리의 머구리 섬과 연결)으로 농경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서쪽은 바다와 접하여 있다. 피서리는 피란지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피동리, 조산, 도무리, 율리와 용교리 그리고 두모리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용교 조산 피동 피서 정착 용호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피동 피서 용호 마을은 무안국제공항 건설에 편입되어 버리고 현재는 용교 조산 정착 톱머리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피서라는 지명은 避世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조선중엽 국정이 혼란하고 민심이 소란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이 세상을 피할 수[避世] 있는 곳이라 여겨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현재 쓰고 있는 皮西로 바뀌었는데 避世에서 皮西로 바뀐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추측컨대 피서리의 주산인 솔개산을 중심으로 하여 피난지의 동쪽을 나타내는 피동과 서쪽을 나타내는 피서로 구분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해수욕장이 있어서 더위를 피하는 마을이란 뜻의 避暑라 했다거나 주변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솔개산을 넘어서 서쪽으로 피난을 왔다는 의미의 避西 마을이라고도 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에 발행된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栗里 皮東村 皮西村으로 나온다. 이어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무안군 망운면 舂橋里 造山里 栗里 皮東里 皮西里 龍湖里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피서리 舂橋里 造山里 栗里 皮東里 皮西里 桃茂리, 1987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피서리 용교 조산 피동 피서 정착 용호로 나온다.
용교마을의 인바윗등에 4개의 고인돌과 조산마을에 효자각과 효자비가 있다.
인바윗등을 안고 있는 방아다리 지형의 마을 - 피서1리 용교
용교는 피서1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에서 쓰는 이름과 행정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다르다. 마을에서는 용교라 부르는데 각종 행정 자료에는 춘교로 나온 것이다. 원래의 지명은 마을의 형국이 방아다리(디딜방아라고도 하며 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를 말한다) 모습이라 마을 이름을 舂橋라 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입구의 지형이 디딜방아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자의 舂은 ‘찧을 용’으로 ‘봄 春’ 字와 비슷하다. 해서 1912년의 지방행정명칭일람이나 1917년 조선면리동 일람에도 심지어 1987년의 행정구역일람에도 피서리 춘교로 나온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강릉유씨와 경주정씨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형성은 조선조 중엽인 1540년경 강릉 유씨와 경주 정씨가 살게 되면서이다. 그 후에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300여년 전에 한두 가구로 시작하여 본격적인 마을의 형성은 조선시대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실지로 최초의 입향조는 강릉유씨 유일철(1807 - ?)이다. 운남면 하묘리에서 1800년대 중반에 이 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1912년의 자료부터는 마을이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새터 방아다리 확골 등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새터는 방아다리 옆에 있는 마을로 새로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확골은 용교와 조금 떨어진 마을로 정착 마을 옆에 있으나 용교와 한 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학동 또는 학골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표기도 춘교와 마찬가지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지명이다. 확골은 확돌(돌절구)에서 나온 말로 예전에 곡식을 갈거나 고추 등을 빻을 때 사용하던 것으로 둥그런 돌을 우물처럼 파내어 그곳에 곡식이나 고추 등을 넣고 갈거나 빻아 사용하는 기구이다. 확골이 현재의 학골로 변한 것은 발음의 편의성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며 臼(절구 구, 확 구)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서는 주변의 지명을 이용한 노래가 전해온다. ‘장재의 큰 부자가 확골에 나락을 넣고 방아다리에서 힘을 주어 찧는데 쌀은 남고 왕겨만 두모의 지잿등(지앙등)에 쌓이더라’는 노래이다.
이 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면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망운-광주 간 고속도로와 무안국제공항의 활주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마을 뒤로는 80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어 주민들 말처럼 마을이 갇혀 있는 형국이다.
확골에 인바윗등이라 부르는 지석묘가 있다. 원래는 광산김씨 문중산으로 큰바위라고 불렀으나 왕망의 전설을 거치면서 현재의 印바위가 되었다. 고려건국에 공이 있었던 왕망은 왕건이 자신의 공을 챙겨주지 않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웅거지였던 신안의 고이도에서 절치부심하며 설욕을 다짐하고 있었는데 그의 계획이 탄로나 도망치게 되었다. 왕망은 도망치면서 그가 사용했던 도장을 망운 두무치의 큰바위 밑에 숨겼는데 그것이 현재의 印바위다.
도장바위의 전설을 안고 있어
원래는 마당 바위라 부를 수 있는 커다란 두 개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어렸을 때 이 바위 위에서 뛰어놀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크기가 상당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하지만 도로 공사 등으로 깨어지고 쪼개져서 현재는 세 개의 바위와 굄돌 1개가 있다. 남아있는 바위 중에서 큰 바위를 재보면 길이가 3미터 10이고 두께가 80센티미터의 규모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지석묘 주위에 고총들이 많이 있었으며 가뭄이 들 때는 바위 주변의 무덤을 파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인바윗등 주변에서 밭을 경작하는 확골 주민은 오래 전 경운기로 밭을 갈다가 원형이 잘 다듬어진 돌도끼와 화살촉 등을 발견했다고 한다. 참고로 인바윗등 옆에 전주이씨 묘가 있는데 묘의 상석에 臼岩이란 표기가 나온다. 臼岩이란 확골의 바위란 뜻인데 바로 인바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마을이 농지가 적고 물길이 좋지 않아 예전에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특히 마을입구에 있는 한길 가의 논은 ‘댓병에 물이 가득 차야 모를 심을 수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늘만 바라보는 논이었다. 마을 앞에 청죽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비행장 공사를 하면서 인부들이 길러다 먹었던 샘으로 수량이 많았고 물맛도 좋았다. 현재는 곳곳의 지하수 개발로 물이 나오지 않는다.
마을 앞 망운에서 운남으로 가는 도로 옆에 길을 따라 150여 미터 정도의 길이의 진구렁이라 부르는 긴 계곡이 있었다. 지금은 메워져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원래는 깊고 긴 계곡으로 소나무를 비롯하여 아카시아 나무 등 숲이 우거져 있어 주민들이 한낮에도 지나다니기가 꺼림칙할 정도로 무서웠던 곳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던 곳이다. 생매장을 당하기도 하고 죽창 등으로 찔려져 버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메워지기 전까지는 여러 기의 무덤이 있었고 자세히 보면 사람들의 뼈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진구렁은 면사무소 뒤 망제라 부르는 곳에도 있었다.
마을이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고 역사가 길지 않지만 주민들의 단합이 잘 되고 있다. 여러 성받이가 살고 있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집성촌보다도 화합과 양보가 잘 이루어져 마을 발전이 기대되기도 한다. 특히 주민들의 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화목함을 이루고 있다.
2004년 무안국제공항 건설 계획으로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에 의해서 발굴되어 용교유적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 있다. 마을 주변 해발 30미터상의 완만한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삼국시대 주거지 6기가 발굴되었다. 마을회관 앞에 용교저수지가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숯골 종실고랑 싯돌방죽 등이 있다. 또한 이 마을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지역 간의 갈등으로 두 명이 희생을 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망운면에서 가장 좋은 조망권을 가진 마을 - 피서2리 조산
이 마을은 원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피동리 조산 도무리 율리와 용교리 두모리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 피서리에는 용교, 조산, 정착, 톱머리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 조산은 율리(밤골)와 함께 피서2리에 속한다.
造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숲이 형성되어 산을 이루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목내에 있는 통샘이 여성의 성기를 닮아 비보를 하지 않으면 목내의 남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해서 통샘에서 마주 보이는 이 마을에 우뚝 솟은 산을 조성했는데 그 이름이 조산이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는 마을 가운데에 산이 있고 그 산 속에 절이 있어서 경관이 훌륭하다 하여 ‘造山’ 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이 마을의 형성은 하율리에서 비롯되었다. 하율리는 비행장 아래에 있는 마을로 人家는 없고 현재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300여년 전까지 그곳에서 주민들이 살았는데 터가 박하여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등 궂은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자 현재의 마을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때 옮겨 온 대표적인 성씨가 김해김씨이다. 현재도 하율리 터에서 농작물을 경작하기 위해 밭을 갈 때면 당시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생활자기들이 많이 나온다.
마을 형성의 다른 이유도 있다. 200여년 전에 돗재 안의 부자인 하동 정씨 정한기씨가 많은 농토를 가지고 살았는데 그 농장에 일하러 왔던 사람들이 일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란 것이다. 해서 대표적인 성씨가 없고 여러 성씨들이 어울려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비행장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 마을 주민들은 망운비행장에 일하러 온 전국의 노무자들을 상대로 밥도 해주고 하숙도 했다. 당시에 방이 두 개 이상이면 반드시 방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노무자들에게 내줘야 했다. 또한 비행장이 황토밭이어서 노무자들이 아침에 들어갈 때는 하얀 옷을 입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붉은 옷이 되어서 나왔다. 해서 비가 올 때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인 살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이 벌건 진흙탕이 되었다.
지금은 비행장에 포함된 곳이 되었지만 솔개가 나[飛]는 고개의 의미를 지닌 솔개재라는 지명이 있었다. 주민들은 구름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망운’이나 ‘솔개재’라는 지명이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설 곳임을 암시했던 말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 마을 주민이었던 고동렬씨가 선진 농법을 구사하여 많은 소득을 올렸다. 특히 고구마 농사에 탁월한 기술을 발휘하여 신품종인 수원42호를 개발하였는데 정읍출신으로 처가살이를 했던 그는 재배 기술 뿐 아니라 저장기술도 좋아 주변 농가에 비해 많은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목숨을 잃었다.
빨치산들이 봉화를 올렸다
톱머리가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 뻘 밭에서 주민들이 낙지 등 수산물을 채취하여 생활하였을 뿐 아니라 굴 양식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둑이 막히면서 뻘밭이 사라지고 생계를 도왔던 양식장도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리 등록을 했던 광양의 박수만(광만)이란 사람은 양식장 운영은 하지 않았으면서도 등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생산현장을 잃은 많은 주민들이 나름대로 대책위를 조직하여 대처하고 있으나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을 무주봉이라 한다. 함평시장에서도 이 봉우리를 볼 수 있다고 할 만큼 높다. 이곳에 서면 주변의 탁 트인 광경이 들어온다. 특히 잘 다듬어진 망운비행장과 현경 동산리의 황토밭 그리고 서해안의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창고가 들어서 있는 이 무주봉은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활약했던 빨치산들이 서로 연락하기 위해 봉화불을 피웠던 곳이다.
운남 망운 지역은 6,25때 좌우 사상 대립이 유독 심했던 곳이다. 해서 무주봉의 봉화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청계 운남 현경 해제 등지에서 활동했던 빨치산들이 서로 연락을 할 때 사용했던 불이다. 무주봉을 포함한 도대봉과 대박산 옹산 그리고 감방산에 걸쳐서 올려졌던 봉화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더이상 올리지않았다.
이른바 ‘피서마을 21명의 비극’에 이 마을 주민도 포함될 뻔한 일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피서리 일대의 주민들이 분주소 습격을 계획하고 서로 변치 않기를 다짐하며 연판장을 작성했다. 그런데 피동 피서 용호동 마을의 주민들은 이름을 썼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사정이 있어 다음에 써 넣기로 하였다. 거사날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행 중에서 배신자가 나왔다. 그 배신자는 연판장을 가져다가 분주소에 신고했다. 그날 저녁에 연판장의 서명자 모두는 죽창에 찔리거나 생매장을 당했다. 하지만 연판장에 서명하지 않은 이 마을 주민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1986년, 2001년, 2002년, 200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지역을 발굴조사 하였다. 여러 개의 옹관묘가 묻혀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적갈색 연질토기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 옹관이나 토기가 많이 발굴되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마을 주변에 여러 기의 고분이 분포하였으나 민가와 밭을 조성하면서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특히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마을에 효자각과 효행비가 있다. 모두 비행장 부지로 들어갔던 피동마을에서 옮겨온 것이다. 효자각은 2001년에 지어진 것으로 안에는 ‘효자남파한양조공정려비’와 정려 현판이 걸려있다. 비는 1943년에 세운 조재형효행실적비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발동기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발동기머리’와 무르들(마을 앞 들), 버드실, 솔개재(현재는 비행장에 속한 곳), 큰 돌, 수문통 등이 있다. 또한 망운시장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수랑골이 있으며 종실골도 있다.
남북통일의 염원이 새겨진 입석이 있는 마을 - 피서3리 정착
정착마을은 망운면소재지에서 운남 방면으로 1㎞ 쯤 가다가 좌회전해서 공항 쪽으로 가면 나오는 마을로 망운국제 공항 비행장 활주로와 병립해서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명은 망운면 피서3리 정착마을이다. 원래는 당산끝머리라는 이름의 마을로 정착민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세 가구가 살았었는데 현재는 한 가구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피난민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한국전쟁 이후 대체로 북쪽 서해안 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내려와 무안을 비롯한 진도나 목포 등 전남 각지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1956년 보사부의 피난민 입주 정책으로 망운면 피서리 산 69번지 98정보의 땅에 100세대 497명이 정착하면서 건설된 마을이다. 원래 이 마을 주민들은 정착이라는 이름을 싫어해서 정착농원이라 부르던 때도 있었다.
당시 이곳은 일본인 산전만길랑의 땅으로 일제강점기 때 비행장을 건설하다가 해방이 되자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곳이었다. 당국에서는 1957년에 이른바 ‘말집’이라 부르는 집을 지어 세 가구가 기거하도록 하여 분양했다. 다시 말하면 집 1채에 3 가구가 들어가 살도록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딸린 구조의 집이었다. 집이 완성되자 1958년부터 주민들이 들어와 살았다. 현재도 그때 지었던 당시의 집들이 남아 있는데 기존의 구조에서 양 옆으로 방을 늘린 구조이다.
현재의 정착마을은 당시에 비해서 마을의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마을의 일부가 공항으로 편입되기도 하고 주민들이 연고지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공항이 들어서 있는 자리에도 정착 마을의 일부로 10여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고 없다. 정착세대도 두 분만 살아있다.
공항건설을 하면서 지금은 공항의 활주로가 된 정착 마을의 일부 지역에서 대형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1999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와 2000년도에 실시된 시굴조사에서 철기시대 수혈과 고려시대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또한 백자 가마 2기와 공방4기 등 전통도자의 공방 구조와 도자제작과정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를 발견했다. 주민들은 80년대 초까지 문화재 전문 도굴꾼들이 마을 주위를 많이 쑤시고 다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전국 각지의 피난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단합이 염려되어서 물어보았더니 ‘어느 마을보다도 주민들간에 강한 결집력을 지녔다’고 한다. 왜냐하면 70년대 80년대 이석호 땅 사기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세청 공무원이었던 이석호가 서류를 조작하여 정착촌 일대를 자신의 친인척 소유로 바꿔버렸는데 그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서 주민들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부 동참하여 이겨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정착할 때 정부가 준 98정의 땅을 갖지 못하고 미적거린데서 이같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한편으로 씁쓸해 했다.
한때는 배뱅이굿으로 망향의 설움을 달래기도
이 마을의 주민들은 초기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환경의 척박함 때문이었다. 분배 받은 토지가 풀도 자라지 않은 박토여서 농작물이 자라지 않았다. 해서 처음엔 호밀 유채 고구마 등을 심다가 차츰 땅을 기름지게 해서 다른 밭작물을 심었다. 특히 주민들은 뻘밭의 뻘을 실어다가 밭에 뿌려서 농사 지은 것을 아픈 기억으로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망운 면소재지에 나가면 주민들이 수군거리며 ‘사람하고 피난민하고 다닌다’라고 할 정도로 이단시 하였다. 또한 굶주림 때문에 큰 곤란을 느꼈는데 국제난민기구인 유섬에서 원조를 받아 근근히 생활할 수가 있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한게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설날에는 배뱅이굿을 하며 망향의 설움을 달래기도 하였다. 고향의 맛을 내는 두부의 엿을 해서 나눠먹기도 했다. 해서 망향단을 이 마을에 있는 당산끝머리에 세우려고 했으나 군에서 현재의 물맞이 공원에 부지를 마련해줘 그나마 아픔을 달래고 있다.
오래 전에 밭농사가 아닌 논농사를 짓기 위하여 실향민 24명이 힘을 모아 지게와 망태를 이용해 간척지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1961년 이른바 용호지선이라는 지역의 만(灣)을 막아서 20여 정보의 농토를 마련한 것이다. 현재는 거의 묵답이 되어버렸지만 당시에는 주민들에게 대단히 소중한 식량 공급원이었다.
주민들은 공항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항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공항 뒤편에 위치해 비행기 이착륙에 대한 피해를 입을까봐 우려되기 때문이다. 또한 비행장 설계에서부터 건설까지의 과정을 놓고 유당농원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현재의 이 마을의 위치는 활주로와 비교해 4-5미터에서 10미터 정도의 높이에 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공항 일대가 같은 높이의 지대였는데 활주로를 만든다면서 언덕을 깎아다가 창포호를 메우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공항 건설이 유당농원을 위한 건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황해도 신천 반공의거 사건(1950년 10월 13일부터 장연의 15일까지)의 주인공이 살고 있었다. 전임 이북5도민 무안군 연합회장과 마을노인회장도 겸했던 이범영 옹인데 ‘매년 5월 8일이면 지역의 실향민들과 함께 임진각의 망향단에 가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제사를 지내고 온다’고 했다. 실향민들은 현재에도 이 마을에서만 40세대 이상이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실향민들이 많이 있어서 북한식의 장례절차나 놀이문화 그리고 음식 문화 등을 개발한다면 마을의 소득원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지역의 좋은 문화도 되어 개발하여 가꾸었으면 하는 마음’이 탐방 중에 머리를 감돌았다.
망운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1985년에 세운 ‘피서3리 정착촌’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 옆에 1미터 50㎝ 정도 되는 자연석에 ‘우리의 염원’이라는 제목 아래 “모든 것이 넉넉해도 한 가지 우리의 부족함은 화합의장, 바로 남북통일입니다”라는 입석이 세워져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의아하게 여겼으나 주민들과 대화를 하고 나서 그들의 절절한 남북통일의 염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마을회관 뒤에 있는 뜰을 화골이라 했으며 현재는 빈집이 많이 있으나 한때는 이 마을의 주민들이 망운면에서 세 번째로 많았었다. 해서 이곳 학생들이 망운 면소재지에 나가면 그곳 주민들이 몰려다니며 와글와글한다 해서 ‘떼까우’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단감이 유명한 해수욕장의 마을 - 피서4리 톱머리
톱머리는 피서4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용호동과 같은 행정구역이었다. 용호동이 무안공항 부지로 편입되면서 2000년대에 분리되어 나온 마을이다. 이곳은 톱머리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해안은 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백사장과 보호림으로 지정된 울창한 해송 숲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창포만 간척으로 인한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톱머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당농원 쪽에서 공항로를 따라 오다가 보면 톱머리 해수욕장과 무안국제공항으로 가는 삼거리가 있다. 그곳에서 해수욕장으로 들어오는 언덕을 넘어 오른쪽에 바위산이 있었는데 이곳에 길이 나기 전에 이 바위의 모습은 동물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코뺑이’라고 부르는 이 바위가 거북이 머리라고 보기도 하고 토끼머리라고 보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토끼머리라고 했다. 탱크의 모습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톱머리는 토(兎)머리에서 비롯된 음운변화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1917년 일제강점기 때 펴낸 조선면리동일람에서 망운면 桃茂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의미로 본다면 복숭아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는 마을이라는 말인데 추측컨대 당시 과수농장에서 비롯된 지명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후의 자료에는 桃茂리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고 2,000년대에 와서야 독립된 마을로 표기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톱머리 일대는 일본인 중기의 소유였다. 공항 앞 낙지 직판장에서 코뺑이라고 부르는 지역까지 약 16정의 토지를 소유했던 중기는 이곳에다 여러 가지 과일을 심었다. 단감을 비롯하여 복숭아 비파 등을 대규모로 심어 많은 소득을 올렸다. 중기는 현재 비치호텔 자리 전에는 송죽식당 자리에다 커다란 집을 지어놓고 과수단지를 운영했던 것이다. 이때 복숭아 단지가 많아 1917년의 자료에 桃茂리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창포를 둘러싸고 있는 지명 중에 동물과 관련된 5머리가 전해져 오고 있다. 여기서 ‘머리’라 함은 바다를 향해서 육지의 맥을 타고 달려오는 반도 형국의 지형을 말한다. 닭머리[鷄頭 - 동산리의 당두], 갈머리[鶴頭 - 학이 목이 말라 목을 추기는 형국, 양학리의 병곡 마을이다], 새머리-쇠머리 [牛頭- 소의 머리 형국을 하고 있다. 서호리 유당농원 입구의 산], 톱머리 - 토머리[兎頭, 土頭 - 토끼의 머리 형국이라고 하는 분도 있고, 지네 머리 형국이라고 하는 분도 있다. 토충(土蟲)은 지네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망운면 피서리를 피머리라고도 하는데 피머리가 어떤 동물을 상징하는지 많은 어른들을 찾아 물어 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처럼 톱머리는 토끼머리에서 연유된 지명이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진주강씨 강효복이다. 그는 망운면 조산마을에서 살았으나 한국전쟁 이후 이곳으로 들어와 터를 닦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이전에는 일본인들이 재배하다 남기고 간 과수원이 있었을 뿐이다.
마을 전체가 전형적인 반도형이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둑이 연결되어 반도의 특성을 잃어버렸지만 원래는 마을 앞뒤로 모래톱이 쌓여 해수욕장으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현재는 톱머리 앞에만 해수욕장이 형성되었지만 예전에는 뒤에가 더 유명한 왕모래 사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특히 잔등이라 부르는 곳에는 아름드리의 해송이 많이 있어 인근학교에서 소풍 장소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상쾡이와 민물장어가 많이 있어 경상도 하동에서 장어를 잡으러 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막기 시작한 창포만이 1983년도에 완전히 막힘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톱머리의 대안 단감은 국내 최초의 육성 품종이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부터 개발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뚜렷한 흔적들이나 특징이 없는 일반적인 지역이었으나 일본인 중기가 들어오면서 해양성 기후를 살려 앵두 살구 복숭아 단감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을 조성한 것이다. 특히 이곳의 단감은 “톱머리 단감”, “오베니”, “극대형 부유” 또는 “대흥사”라 불리며 1988년 원예연구소에서 선발되어 “대안단감”으로 명명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내 육성 품종이다.
이 단감은 세력이 약하여 가지가 옆으로 심하게 퍼지고 밑으로 처지는 성질이 있어 나무가 크게 자라지는 않는다. 과실 크기는 일반 단감보다 크며 형태는 편원형으로 부유 품종과 거의 비슷하나 과실 배꼽 부위에 4개의 엷은 골이 있고 꼭지접합부가 부유보다 움푹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육질이 연하며 과즙이 많고 맛이 담백한 완전단감이다. 또한 저장성이 약하고 수확 무렵의 후기 낙과가 생기기 쉬운 단점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곳에 단감을 재배하면서 그들의 재배 기술을 감추기 위해 한국인들을 의심했던 일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즉 이곳의 단감이 너무 맛있어 한국사람들이 감을 훔쳐가거나 기술을 몰래 배울까봐 일꾼들을 의심하고 단속하였다는 것이다.
이 마을의 자랑인 톱머리 해수욕장은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조 때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백사장과, 보호림으로 지정된 울창한 해송 숲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해수욕장의 긴 백사장을 따라 횟집과 숙박업소들이 자리 잡고 있어 해수욕과 함께 편히 쉴 수 있으며 싱싱한 생선회도 즐길 수 있다. 백사장 길이는 2km, 폭 100m 정도이다.
교통편도 편리한 편으로 가족 단위 피서객이 많이 찾으며, 호젓하면서도 빼어난 경관과 인근 해안에는 감태 뿐 아니라 돔, 숭어 등 어족이 풍부하여 낚시 겸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현재는 팬션을 비롯한 숙박업 횟집 등 음식업이 들어와 관광단지가 조성되었다. 특히 무안공항의 활성화로 중국인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국제적인 관문으로서 역할도 하고 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갈수록 예전의 정다웠던 마을 인심은 없어지고 차디찬 도시 인심이 되어 가는 각박한 세태를 아쉬워하고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공항로의 낙지 직판장 자리를 문간(일본인 중기의 집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라 하고 톱팬션 앞 바다를 감틀이라 한다. 감틀이라 부르는 이유는 감태가 많이 생산되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일본인들이 후퇴하면서 톱머리 앞바다 혹은 목포 소지도 부근에 수많은 무기와 재물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문이 있으나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첫댓글 오랜만에 방문하여 홍정 원장님의 향기를 맡고 갑니다. 이곳에 홍정원장님께서 직접 탐방하시고 자료를 수집하여 게시한 마을 유래기는 우리 무안의 역사를 정리하는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입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좋은 지식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