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에 관한 유령학]
김소영 (영상원 영상이론과)
1. 출현해 흔적을 남기다.
프란체스카 우드먼 (Francesca Woodman)은 여성 사진작가다. 그녀는 1958년에 태어났다. 13세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리고 23세가 되던 생일 날,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맨하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사진전을 기획했던 에르베 샹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움직이고 있는 그녀 자신의 몸, 그것의 유령 같은 그리고 사라져 가는 현존을 보게 하면서, 프란체스카 우드먼은 지나가는 것, 일
시적인 것, 변해 가는 것과 부서지기 쉬운 것을 시사한다. 유예된 순간을 잡아내는 것보다 이러한 사진
들은 슬며시 사라져 가는 것 속에서 시간을 보게 한다...항상 사라지기를 원하면서 우드먼은 자신의 주
변 혹은 다른 장소들 속으로 녹아들거나 스스로를 상실한다. 그리고 사지 절단이라는 생각과 희롱하면
서 조각난 몸의 폭력적 평온을 암시한다.
그렇다. 우드먼은 마치 자신이 유령인 것처럼 초상 사진을 찍는다. 프랑스의 작가 필립 솔레르 는 그래서 우드먼을 여마법사라고 불렀다. 솔레르의 이런 이름 부르기는 사실 남성 초현실주의자들
의 관행을 그대로 잇는 것이기도 하다.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처녀, 어린 아이 ,천
상의 피조물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 마법사, 에로틱한 대상 그리고 팜므파탈이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우드먼은 마법사가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유령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유령이 유령
의 자기 초상을 찍는 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재현을 생생하게 유령화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거듭 거듭 돌아와 불안정한 어떤 지점을 보여주며 정체성이 주변에 통합되는 것을 방어해주는 깨지기 쉬운 막을 창조하면서 폭발시킨다.(마가렛 선델) 이런 유령 사진 작가를 불러옴으로써 우리는 여성의 몸에 대해 또한 여성의 자기 재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애나 멘디에타 (Ana Mendieta)라는 사진 작가이자 연행예술가가 있다. 그녀는 흔적으로서의 몸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풍경과 여성의 몸 (내 자신의 실루엣(그림자)에 기반한) 사
이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사춘기 시절 내 고향인 쿠바에서 찢겨 나온 경험의 직접적
결과라고 믿는다. 나는 자궁(자연)에서 추방당했던 감정에 압도당한다. 내 예술은... 모성의 근원으로의 회귀다. 내 대지/몸의 조각을 통해 대지와 하나가 된다. 나는 자연의 확장이 되며 자연은 내 몸의 확장
이 된다.
프란체스카 우드먼이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되돌아온다면, 애나 멘디에타는 자신의 몸을 그림자, 실루엣으로 재현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대지에 인화된 채 사진으로 출현한다. 그녀의 Silu
-etas 라는 연작에서 그녀와 자연의 융합은 무덤이자 자궁의 이미지다. 멘디에타는 1948년 하바나
에서 출생해 1985년 37살에 34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의 남편이던 유명한 조각가 칼 앙드레가 그녀
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 선고를 받았다.
우드먼과 멘디에타라는 여성 예술가가 보여주는 여성의 몸은 현존을 통한 존재론이 아니다. 또한 부정의 힘으로서의 부재의 존재론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작품은 여성의 몸을 실증적으로 경험
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피해간다. 거부한다. 오히려 실종과 회귀, 사라짐과 거듭 돌아옴 ,바로 그 사이 의 공간에서 우드먼 자신의 몸은 어떠한 전사(前史)도 없으며 또 미래도 없을 것처럼 출현한다. 그런가 하면 현재는 현재성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카메라가 잡은 것은 어떤 공간과 시간을 지나가는 한 유령과
도 같은 존재. 그래서 카메라는 그것을 포착하되 포획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유령화 된 것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다. 그녀의 몸의 반은 유령화 되고 나머지 반은 실체로 잡혀있다.
2. 사이의 미학 -교환과 사용을 거부하다
우드먼이 자신의 몸의 자기 재현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사이의 (in-between) 해방이다. 그녀는 간발의 차이를 만들어 상징화되고 고정되는 순간이 요구하는 지속성으로부터 빠져나간다. 질주와 도주와 탈주가 반-영웅적(그래서 여전히 영웅주의에 입각한) 남성의 것이라면 , 사이의 공간과 시간에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러나 거듭 거듭 되돌아오는 우드먼의 유령은 여성적 상상계가 허용하는 역(liminal), 문지방의 형상화다. 반면 멘디에타는 실루엣 , 그림자 , 흔적을 남기고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돌아올 필요가 없다. 그녀는 어머니 대지로 합체되었기 때문이다. 그 융합은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그 융합은 너무 본질적이어서 완결이면서 또한 동시에 텅 빈 것이다. 왜 이러한 형상화로 여성은 드러나는 것일까?
여성의 몸에 대한 지배적 통제와 담론을 살펴보면 이러한 갑작스런 나타남이나 그림자로 남아있음 즉 출현과 흔적 이 가지는 무의식의 정치학을 알 수 있다. 여성의 몸은 인류학적으로는 교환의 상(레비
스트로스)이며 국가적 차원에서는 어머니의 육체로 환원된다. 모성을 갖기 이전 그녀는 사회적 노동에
서 가장 하위질서에 위치된다. 산업 자본 시대에서는 값싼 노동력이며 글로벌 자본시대에는 정규직 노
동자로 서열화된다. 여성의 몸은 신화에서 노래하는 대로 풍요와 다산의 장소가 아니라 늘 교환되고 사
용되는 무엇이다. 우드먼이 유령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몸은 사실 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비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다 유령화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막 유령화 되는 그녀의 몸의 일부가 교환
과 사용 가치의 흔적인 것인지 아니면 아직 구체화 되어있는 나머지가 그것의 흔적인지를 알 수 없다.
반인반수처럼 그녀는 어느 쪽으로 범주로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다.
사진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13세, 이후 23세의 죽음은 그녀가 사용과 교환의 네트웍, 그 외부에 혹은 주변에 머무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지점의 선택이기도 할 것이다. 구체적 몸이 아니라 혹은 완벽하게 투명하게 된 몸이 아니라 반은 추상적이고 반은 구체적인 몸의 재현을 통해 , 우드먼은 사라지고 싶으나 사실 사라질 수 없는 여성육체를 실험장으로 만든 몸의 속박과 해방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유령이 되지만 몸의 반은 그 투명함, 추상화를 거부하면서 구체성으로 남아있다. 유령이 되는 순간 그녀는 여자 귀신, 여귀가 되는 것이며 구체적이 되는 순간 그녀의 몸은 사용과 교환의 기호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사진은 이 이중의 속박의 양날을 밀어내면서 바로 그 사이
공간에서 미학적 자기 배려의 순간을 만든다. 그래서 사라지는 순간이 갑자기 나타나는 순간 인 것같고 또 그반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미학적 숭고함은 그로테스크 하며 바로 그 기이함이 여성적 숭고
의 근간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우드만의 사진에서 여성의 이 같은 미학적 자기 배려가 사진의 프레임과 스튜디
오 외부에서도 지속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의 몸의 재현의 통해 보여주는 것은 구체와 추상이 비껴 나가듯 결합된 여성의 몸에 대한 존재론이며 , 이 존재론에서 출현하는 것이 실험적 여성 형상이며 여성의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