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03년 2월 3일 ~ 2월 6일
참가자 : 창평고등학교 산악회원과 그 가족 49명
작성자 : 김명주
작성일 : 2003. 2. 17.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고등학교에는 산을 좋아하는 동호회가 있는데 월 1회 등반을 하는 친목단체이다. 나도 일년에 두어 번씩 참여하여 그 회원 및 가족과는 두텁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안면이 있는 사이이다. 그런데 약 일 년 여전부터 중국여행을 위한 준비가 있었나보다.
고등학교의 여러 가지 學事日程 관계로 舊正 직후로 날이 잡혔다. 고3이 되는 작은 아들놈을 두고 가기에는 좀 석연치 않은 감이 있었지만 훌쩍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국명 :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 북경
면적 : 980만Km2(한반도의 약 44배, 세계 3위)
인구 : 약 13억 (인구 정책의 일환으로 1가구 1자녀 갖기로 하여 2명이 태어나면 호 적에 올리지 않아--호적에 오르지 못한 아이들을 ‘흑해자’라 부른다.--
사실은 더 많다고 한다.)
2월 3일 월요일(첫째 날)
상해로 가는 비행기가 光州 空港에서도 출발하여 비교적 쉽게 中國과 접하게 된 듯하다. 12시에 광주 공항에 도착하여 여러 가지 수속을 밟고 1시 30분에 중국 항공기 동방항공으로 출발한다. 날씨가 매우 淸明하여 구름바다가 된 서해안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비행기만 올라타면 무슨 먹을 것을 그렇게 주는지...
상해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여서 1시간 20분만에 상해 포동 공항에 도착하였다. 포동공항의 건축물의 美的 아름다움을 專門家가 아니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規模의 대단함과 建築 樣式의 특이함에 일단 기가 죽었다. 규모로는 인천 공항과 비슷한 듯한데 건축양식이 훨씬 독특한 것 같다.
상해는 우리나라보다 한시간이 늦어 시계는 현지 시간으로 오후 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계림은 상해의 서남쪽(中國 廣西省)에 위치하고 있어 다시 비행기로 2시간 여를 가야 하는데 오후 6시 20분에야 비행기가 있으니 공항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은 멤버들과 낯이 설어 장충효 선생만 졸졸 따라 다녔다.
포동공항을 출발한 지 2시간만에 桂林 공항에 도착하였다. 지은 지 5년 되었다는 계림 공항은 상해의 포동 공항만은 못했지만 그런 대로 괜찮았다. 현지의 조선족 가이더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림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안내자는 계림에 관한 槪括的인 설명을 하였다. 桂林山水甲天下(계림의 산수가 천하 제일)와 계수나무가 많아 계림이라는 것이다. 계수나무는 노란 꽃이 피는 金桂, 하얀 꽃이 피는 銀桂, 빨간 꽃이 피는 丹桂 등 대략 8가지가 있는데 그중 金桂를 으뜸으로 치며, 10월 중순쯤 피어서 이곳의 거리거리를 노랗게 물들인단다. 시내로 가는 길의 오른쪽에 커다란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대만인이 3억위엔(1위엔 == 150원)을 투자한 ‘雄虎산장’이라는 동물원이라는데 곰 400마리, 호랑이 300마리가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쇼를 하는데 우리 일정에는 없나보다. 이러저러한 설명을 들으며 40분만에 조그만 식당에 도착하였다. 중국의 山海珍味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기름기 투성인 저녁을 먹고 호텔을 향하여 가는데, 중국의 조그만 도시에 불과한 계림의 夜景도 그럴 듯 했다. 멋진 호수로 둘러싸인 桂湖 호텔(여기서는 飯店, 酒店, 大廈 등으로 호텔을 표기하고 있었다.)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이내 발 맛사지를 받으러 간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발맛사지하는 곳은 지저분한 간이 寢牀이 50 여개 놓여 있었다. 20여세 안팎의 남녀가 여자손님에게는 남자가, 남자손님에게는 여자가 발맛사지를 시작한다. 어쩐지 어색하고 계면쩍었으나 이내 익숙해진다.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한국말을 하고 있었는데 3개월의 훈련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발맛사지를 한다고 한다. 저녁 12시까지 근무한다는 그들은 우리가 마지막 팀이여서인지 매우 피곤해 보여 안타까웠다. 맛사지하는 것이 상당히 아프긴 했지만 그런 대로 하루의 피로가 풀린 듯 하다.
2월 4일 화요일(둘째 날)
"북경에 가면 발이 아프고, 서안에 가면 귀가 아프고 계림에 가면 눈이 아프다"는 말이 있다. 北京의 萬里長城을 둘러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하고, 서안에 가면 진시황릉의 역사를 줄기차게 들어야하는데, 계림에서는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는 뜻이다.
"桂林山水甲天下"'계림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계림은 그 풍치가 빼어난 곳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한유는 계림의 풍경을 보고 "江作靑羅帶, 山如碧玉簪---강은 푸른 비단 띠를 두른 듯하고, 산은 벽옥으로 만든 비녀 같구나"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5시 30분에 모닝콜이 왔다. 계림 전체를 구경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다. 호텔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이강 유람을 위하여 서둘렀다. 호텔에서 이강까지 가는데 버스를 타고 鋪裝이 되지 않은 시골의 황토길을 굽이굽이 돌아 船着場에 도착하였다. 비교적 날림인 여러 가지 물건을 주렁주렁 들고 한국말로 ‘천원, 천원’을 외쳐대는 이곳 주민들의 얼굴에서 어딘지 모르는 애환이 느껴졌다. 통대나무로 만든 땟목을 볼 수 있었는데 옛날에는 이 땟목을 타고 가마우지를 이용해 고기를 잡았단다. 지금의 가마우지는 사진을 찍기 위한 돈벌이에 불과한 듯 하다. 배를 타긴 탔는데 키가 굉장히 큰 여성이 중국말로 무엇이라 떠들어대면서 유람선의 출발을 막고 있었다. 인원수가 맞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상당 시간의 是是非非 끝에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유람하는 동안은 잠시라도 눈을 다른 데로 떼지 못한다. 옛날 중국 화가가 그린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은소와 말이 모여 있는 것 같은 구우령(九牛嶺), 강을 향하여 관(冠) 같은 암동(岩洞)이 입을 벌리고 있는 관암유경(冠岩幽境), 부부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안고 있는 망부석(望夫石), 선명한 색실로 자수를 놓은 것 같은 수산(繡山), 마치 용의 머리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용두산(龍頭山) 등 끊임없이 기암절벽이 視野에 들어온다. 이 기암절벽은 파란 하늘, 대형 거울을 깔아 놓은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 비추이는 맑은 물, 그 물위를 유유히 떠도는 오리 떼, 안개 낀 신비로운 분위기와 어우러져 유유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게 한다.
국어를 전공하신 양신석 선생님은 ‘이곳이 혹 소동파의 적벽부의 배경은 아니었는지’라고 말씀하신다.
모두들 사진을 찍기에 餘念이 없지만 사진기가 古物인 우리는 다른 선생님이 찍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배에서 내려 冠巖동굴을 구경하였다. 정문규 선생님께서 ‘갓바위’라고 재치 있게 말씀하셨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을 위하여 가마를 운행하기도 했는데 상당히 비싼 가격이리라. 어여쁜 중국 소녀들은 그들 소수민족의 고유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는데 천원씩의 거래를 하고 있었다. 원래 계림은 바다였으나 지각 변동으로 솟아올라 육지가 되었고, 이때 지상으로 나온 석회암이 침식작용을 거치면서 독특한 카르스트 지형을 형성하게 되었단다. 그 결과로 생긴 奇妙한 形形色色의 봉우리와 거대한 종유석 동굴 등은 우리나라의 성류굴이나 환성동굴은 鳥足之血이다. 관암 동굴의 길이는 12Km로 약초 캐는 사람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굴의 규모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종유석이 얼마나 큰지 굴을 구경하는데 발품으로는 다보지 못하여 모노레일, 동굴 속을 흐르는 물을 거스르는 보트, 엘리베이터 등을 이용할 정도로 크다. 그 거대한 종유석들을 그냥 보기만 하고 사진으로 남기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관암동굴에서 나오는 방법은 우리를 상당히 신나게 했다. 모노레일을 스스로 운전하며 타는 것인데 상당히 긴 코스로 상쾌한 느낌이었다. 모노레일 주변에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의 중국식 한자(保持 距離)를 읽고 나와 장충효 선생은 깔깔거리고 웃었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요산으로 향한다. 높이는 906m. 계림 주변에 散在해 있는 10만여 개의 이름 없는 봉우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요산 頂上으로 가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장난이 아니었다. 기다리면서 주의사항을 적어놓은 게시판을 읽는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漢字와는 사뭇 다른 글자여서 어려움이 있지만 그런대로 짐작할 수 있었다. 요산 頂上에서 바라본 계림 주변의 봉우리들은 안개에 싸여 확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 오히려 신비함을 준다. 여기는 마치 몇 년전 인기리에 방영된 대하드라마 ‘黎明의 눈동자’에서 최재성이 光復軍으로 활동한 무대는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려오는 길의 절반은 케이블카로 절반은 봅슬레이로 오는 방법이 있는데 여러번 망설이다가 그냥 케이블카로 내려왔는데 다와서야 후회막급이었다.
시내로 이동하여 이곳 소수민족의 민족쇼를 구경하였다. 각 민족의 고유 의상을 입은 아리따운 중국 남녀들의 민족쇼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어느 나라나 고유의 멋이란 아름답고 진한 鄕愁가 배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고유의 것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어제 저녁과 같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신현동 선생님의 걸죽한 농담에 식탁의 즐거움이 더하고, 우리 장충효 선생님은 엄청난 식사량을 자랑한다. 내가 농담으로 배기량(몸체)이 크니 기름이 많이 들어간다고 하였다. 나는 중국의 독한 술을 한잔 했다. 민생고를 해결한 다음 계림의 夜景과 象鼻山을 구경한다. 도화강(桃花江)과 이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이 바위산은 강으로 기어드는 돌산에 굴이 뚫려 있어서 옆에서 보면 마치 코끼리가 코를 담그고 강물을 들이키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의 정상에는 明代에 세워진 높이 13.5m의 보현보살탑이 서 있다.
또한 水月洞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조를 소개한다. “물아래 밝은 달이 있어 물위로 밝은 달이 떠있네. 물이 흘러도 달은 가지 않고, 달이 가도 물은 흐르지 않네.”
이곳 중국은 지금이 설 연휴(땅덩이가 넓으니 고향을 가더라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하여 설연휴가 일주일이란다.)여서 가는 곳마다 축제 분위기다. 상비산 주변에서도 이밤에 폭죽을 펑펑 터뜨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구걸을 하는 모습이 못내 가슴이 아프다.
중국의 계림 사람들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상당히 신경을 쓴 듯하고 投資도 많이 한 것이 역력하다. 관광 적자만 애석해 하면서 뚜렷한 노력도 보이지 않은 우리나라의 文化觀光部도 苦心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오늘밤도 桂湖 호텔에서 묵는다.
2월 5일 수요일(세째 날)
어제보다 조금 늦게 모닝콜이 왔다. 집에서와는 다르게 우리 장충효 선생은 부지런을 떤다. 나는 여행 나와서는 밥보다는 게으름이 더 좋다. 밥은 기호에 맞지 않은 부분도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시내 관광을 하고 오후에 상해로 향한다.
伏波山으로 향한다. 파도를 잠재운다는 복파산은 시내를 흐르는 이강의 서쪽 연안에 있는 산으로, 市內를 내려다보기에 좋은 장소이다. 모퉁이에는 후한시대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제사지내는 정총사(定悤寺)가 있고, 밑에는 지하동굴인 환주동(還珠洞)이라는 동굴이 있다. 복파산 입구에는 말을 탄 복파장군의 거대한 동상이 있다. 수많은 계단을 걸어올라 정상에서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댔다. 환주동굴에서는 중국의 고유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는데 10위웬(1500원)을 받는다. 나도 하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했으나, 장충효 씨는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고 만다. 또 이 동굴의 한 켠에서 한 노인이 조그마한 현악기를 연주하고 한 노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현악기는 우리 아들 현민이와 앙코르 왓을 가서 산 현악기와 똑 같았다.
복파산을 뒤로하고 가이더가 안내한 곳은 玉 박물관. 검찰청 내지는 법원과 같은 정부기관인데 이것을 운영한 수익금으로 기관의 財政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는 남편이 말이다. 많은 사람이 선물을 사느라 분주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眞珠 박물관 여기도 무슨 군인 부대 같은 곳이었다. 반지라도 하나 사라고 장충효 씨는 이야기하지만 나는 도통 패물에는 관심이 없다. 또 중국의 茶를 파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여러 종류의 차를 다 마셔 보았다. 나름대로 독특한 맛이 다 달랐다. 하나 살까 했지만 그만 두었다. 나는 솔직히 修養이 부족해서인지 그저 씁쓸할 뿐 차맛을 전혀 모르겠더라. 다음으로 간 곳이 계림 민속 박물관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안내인의 설명이 재미있다. 중국은 총 50여족의 民族이 사는데 그중 漢族이 90 %를 넘게 차지하고 나머지는 소수 민족이란다. 계림 인구 60만은 11개의 소수 민족이 사는데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장족. 장족은 여자아이가 어릴 때부터 공을 골대에 넣는 연습을 한단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맘에 드는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방법이기도 해 공을 넣는 것을 실패하면 안되니까 말이다. 요족이 있는데 이들은 검정 바지를 입는 사람과 흰 바지를 입는 사람으로 나뉜다. 묘족은 맘에 드는 남자의 발을 세 번 밟아 請婚을 하는데 세게 밟을수록 좋아하는 정도가 깊다는 것이다. 요로족은 母系社會로 우먼파워가 대단하단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여자이고 남자가 異見을 잘못 내놓으면 쫓겨난다니 살기 괜찮은 곳인가? 걸로족은 11개의 소수민족 중 그 숫자가 가장 적어 현재는 1290명 쯤 된단다. 왜냐하면 이 민족은 近親結婚을 하고 그 결과로 기형아 내지는 정상인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니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단다.
소수민족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안내원이 데리고 간 곳은 역시 중국 사람들의 기막힌 商術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이 박물관인지 아니면 特産物을 판매하는 곳인지 분별이 안될 정도로 그들은 가는 곳마다 觀光客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물건을 사는 것도 정신이 없다. 중국은 도무지 ‘정찰제’란 상상도 못할 정도다. ‘정찰제’라고 해도 딱 잘라 50 % 이야기하면 몇 번의 실갱이 끝에 통과하고 만다. 그러니 물건은 성급히 먼저 사는 사람이 비싸게 사는 것이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이형순 선생 사모님의 호텔 팁이야기로 한바탕 웃었다. 내가 조심스러운 구성원 사이에서 너무 진한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닌지...
중국식 점심을 먹는데 총무 선생님께서 가져오신 매실주를 장충효 씨와 두어 잔 했다. 시간이 촉박하여 급히 먹고 계림공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틀 동안 우리를 안내해준 남자 가이더와 헤어졌다. 오후 3시15분에 비행기는 상해를 향해 구름 속을 날았다.
상하이는 양쯔강 하구에 위치하는 중국의 최대 도시이다. 유명한 산이나 큰 강, 이국적인 계곡과 같은 세계적인 名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곳곳을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장소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역사적인 도시로서의 상하이는 현대적이며 서구적인 스타일의 수많은 건물들을 자랑한다. 그것들은 지난 세기부터 계속된 상하이 변화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국제 건축 전시장'으로서의 명성을 대변하고 있다.
두 시간 후에 상해에 도착하니 예쁘장한 여자 안내원이 나타났다. 그녀는 朝鮮族으로 연변이 고향이고 대학을 나온 Miss 박이란다. 비교적 상냥하고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자세하고 친절하게 안내를 했다. 그의 말투에는 북한 語調가 묻어 있었으며 간혹 이상한 말투의 중국어도 가르쳐 주어 동행한 중학생들의 재미를 더해 주었다. 오후 5시 반부터 빠듯한 일정이니 절대 규칙을 지켜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먼저 간 곳은 김구 선생이 활동한 임시정부청사 우리의 아픈 歷史가 깃든 곳이어서 어딘지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였고, 나라를 위하여 애쓰신 분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1층에서 짧은 비디오 시청을 하고 2층과 3층의 전시관을 관람한다. 倭警을 피할 수 있는 비밀통로도 있을 법한데 보이지 않았다. 늦게나마 정부(아니면 민간 ? )에서 신경을 써 이나마 임시정부청사가 보존되고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간 곳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속 폭탄을 터뜨렸다는 홍구공원. ‘梅亭’이라는 현판이 붙은 집에 義士의 사진 몇 장이 걸려 있고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는 글이 새겨진 커다란 돌이 누워 있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은 이곳에는 중국의 魯迅의 묘가 있어 그 묘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현장이라는 곳도 편의상 만든 것이란다. 아무튼 동행한 모두, 특히 꼬마들에게 좋은 歷史的 敎訓이 되었음 한다.
다음으로 간 곳이 비단을 만든다는 明紬 공장. 이곳에 오니 본의 아니게 내 이름
(金明珠)과 同音인 곳을 많이 듣게 된다. 明紬 공장, 동방 明珠탑 등등. 누에고치에서 8 가닥의 실을 뽑아 하나의 명주올이 된단다. 그 올을 만져보니 참으로 가늘고 섬세하다. 명주솜을 讚揚하는 일행의 어머니 말씀도 들었다. 결국 이곳도 中國人의 商術은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명주이불솜, 명주로 만든 各樣各色의 의상과 머풀러(스카프). 머풀러를 하나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 아가씨는 우리에게 오이와 상추를 넉넉하게 갖다 주어 담백하게 우리 입맛에 맞게 먹을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외탄 관광을 한다. 외탄은 과거 100여 년간의 상해의 역사를 보여주는 축도이다. 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 상해가 개방된 이후 외탄 일대는 외국의 조계가 되어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소련등 열강의 각종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 1920년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고층 빌딩가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 건축물은 당시 서양의 복고주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그 숫자, 집중도, 다양성면에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차를 타고 중국 最高의 서커스를 구경하러 간다. 완전히 밤이 되어서 상해의 기막힌 夜景을 볼 수 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하늘 높이높이 솟은 빌딩 숲. 여기가 바로
우리가 皮相的으로 생각해온 중국이란 말인가? 마치 뉴욕의 맨하탄 거리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상해는 으리번쩍하다. 서커스를 구경하는데 그 여리디여린 여자아이들의 몸매에서 웬지 서글픔을 느낀다. 訓練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酷毒한 훈련을 받았으며, 또 얼마나 그만 두고 싶었을까? 서커스의 絶頂인 지구공 속에서 5명이 타는 오토바이를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은 서둘러 나왔다. 동방 명주탑에 올라 상해의 夜景을 보기 위해서다. 동방명주탑은 외탄 맞은편 황포강변에 위치한 탑으로 높이가 468m로 아시아 1위, 세계 3위에 해당하는 방송관제탑이다 상해는 황포강을 사이로 浦東과 浦西로 나뉘는데 포동을 향하는 길이 황포강 속에 있다는 사실에 놀랍다. 우리는 강속을 자동차로 달려 동방 명주탑에 도착했다. 중국은 아직도 共産主義라 私有財産이 許容되지 않는다 한다. 등소평의 개혁 정치로 차츰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도 전기, 땅 등 經濟의 대부분을 國家에서 共同으로 관리한단다. 10시가 되면 시내의 네온사인을 모두 꺼버린다니 서두를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교통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하더니 동방명주탑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을 서고 있었다. 마침 이곳이 설 연휴여서 국내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았다. 초고속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276m까지 오른다. 그곳에서 상해의 기막힌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시계는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으나 다행히 설연휴라 네온사인을 끄는 시간을 늦추었단다. 한시간 줄을 서서 짧은 시간에 상해의 야경을 구경한다.
다시 浦西로 와 중국 동방항공에서 운영하는 호텔에서 중국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2월 6일 목요일(네째 날)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6시에 기상하여 식당으로 갔으나 음식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호텔 投宿客의 많은 수가 한국인이고 또 이 한국인들이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 하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준비가 늦었다는 것은 그들의 커다란 실수라고 생각한다. 상해 포동 공항에서 9시 50분에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20여분을 날아 光州에 12시 10분에 도착한다. 한국 시간이 한시간 빠른 관계이다.
참으로 빽빽한 일정의 거대한 나라 중국 여행이었다. 중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底力의 나라이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에 世界를 左之右之하는 나라가 될 것 같다. 우리도 個人的으로나 國家 차원에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좀더 깊숙이, 그리고 가깝게 接近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이 50이 되기 전(참고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밝힌다)에 白頭山의 일부분이라도 등반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음을 창평고등학교 산악회에 피력하면서, 거대한 나라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산악회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