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 스님이 새로 조성해 영각에 모시는 응암낭윤(應庵郞允, 1718~1794) 선사 진영에 올린 영찬이다.
응암스님은 15세에 칠불암으로 출가해 18세에 송광사 풍암세찰(楓巖世察) 문하에 들었다. 풍암 스님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묵암최눌(默庵最訥), 응암낭윤(應庵朗允), 제운해징(霽雲海澄), 벽담행인(碧潭幸仁)을 세상에서는 “풍암하사걸(楓巖下四傑)”이라 불렀다.
응암 스님은 특히 사형인 묵암 스님과 사이가 돈독했다. 응암 스님은 묵암 스님과 함께 제산(諸山)의 종장(宗匠)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으며, 운수행각을 마친 후 스승인 풍암 스님에게 돌아가 함께 건당식(建幢式)을 했다. 두 스님은 이후에도 서로 아끼며 일생의 도반으로써의 삶을 같이했다. 응암 스님이 쌍봉사에서 개강을 하자 묵암 스님은 곁에 머물며 강학에 도움을 주었으며, 1750년에 풍암 스님이 영해약탄(影海若坦)을 회주로 청해 송광사에서 화엄법회를 개최하자 묵암 스님을 도와 대회를 마무리했다. 또한 1759년 묵암 스님과 응암 스님은 풍암 스님을 회주로 모시고 송광사에서 화엄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송광사의 학풍을 대외적으로 드높였다. 이에 풍암 스님은 두 스님에게 신의(信依)를 전수했다. 출가한지 62년 되던 1794년에 응암 스님이 입적하자 제자들이 정성을 모아 진영을 제작해 송광사와 칠불암에 모셨다.
20세기 초 송광사 부휴문도들 간에는 선대 스님의 진영과 승탑을 세워 추모의 예를 다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1911년 응암 스님의 7세손인 보정 스님은 함호(湖)장로와 뜻을 모아 스님의 진영을 새로 제작하고 풍암 스님 진영 아래 묵암 스님 진영과 좌우를 이루는 곳에 봉안하여 부휴문중에서 응암 스님이 지닌 위상을 견고히 했다. 응암 스님의 행장과 진영이 새로 조성된 사연, 그리고 영찬은 금명 스님의 시문집인 <다송문고(茶松文稿)>와 <다송시고(茶松詩稿)>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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