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세워주면 돼.."
차가 체육관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신호 앞에 도착했을때
소녀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새어나온 말.
그때까지도 눈을 감은채 노래에 맞춰 손가락만 까딱 대던 소년은
이제 가늘게 찌푸려진 눈으로 창밖을 살펴 보았습니다.
"뭐야...벌써..?
"응.여기서 내려서 걸어갈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소녀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 거린뒤 행여 뛰쳐 나갈새라 루이를 품안에 꼬옥 앉았습니다.
그리고 차가 이곳에 오는 내내 계속 줄까 말까 망설였던,
밤새 준비했던 선물을 가방에서 꺼내어 소년의 두 손에 던지다시피 건넸습니다.
"이게 뭐..."
"생일 선물이야!잘가!"
소년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타앙 하고 문을 닫고서 차 밖으로 뛰쳐 나온 소녀.
...
좋아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했다는 사실이 심장을 콩콩 뛰게 만들고
곧 한이를 볼 순간이 다가왔다는 현실이 다시 그 심장을 무겁게 내려 앉혔습니다.
소녀의 가슴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심장소리륻 들으며 루이는 생각했습니다.
- 날 따라다니던 미련한 암냥이들이 바로 이런 맘이였겠군.
하여간 동물이나 사람이나 일단 잘생기고 봐야한단 말이지.
그 뒤로 5분 가량이 흘렀을까.
루이가 자신을 유혹하려 했던 암컷들을 떠올리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동안,
운동화가 벗겨질듯 달리던 소녀의 두 발이 조금씩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
.....
낯익은 옷. 낯익은 얼굴. 낯익은 목소리.
...
....
50미터쯤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 모든것들이 너무나 정확히 보였습니다.
체육관 앞에 무리지어 있는 학교 아이들.
학교에서건 밖에서건 늘 활기 넘치고 씩씩해 보이는 아이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배를 잡고 웃는 아이들.
...
....
그리고 한이....
그 한 구석에 조용히 홀로 떨어져 앉아 있는 한이.
손에 머리를 받힌채 발밑에 뒹구는 농구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한이.
...
....
몇시간동안 온 사력을 다해서 뛴 탓일까
한번도 본적 없는 헬쓱한 얼굴.
땀과 물에 젖어 쓸어 넘겨진 머리카락.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갈곳을 잃은 눈동자.
...
.....
소녀는 루이를 꼭 끌어 안은채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한걸음 그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소녀가 울땐 한이가 소매 끝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고
한이가 힘들어할땐 소녀가 작은 어깨를 빌려주었던것처럼.
힘들어 하는 한이를 위해. 작아져 있는 한이를 위해.
초록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한이의 발 앞에 섰습니다.
..
....
"한아..."
나즈막한 소녀의 목소리에 서서히 고개를 드는 한이.
"미안..해..."
자신없게 말하는 소녀의 기괴한 모습을 흠칫 놀란듯 보았다가,
이내 전보다 더욱 서글퍼진 눈을 아래로 떨구어버리는 한이.
...
.....
"한아..그러지 마..나좀 마.."
"......"
"한이야.....내가 어떡할까..내가 어떻게 해야 용서해줄래.."
이제 소녀의 죄책감 어려있던 목소리는 어느덧 애원조로 바뀌어 가고..
그 사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신나게 떠들던 아이들은
한이 앞에 서있는 괴상한 모습의 소녀를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야야.저것좀 봐 달래야. 한이 앞에 저거 뭐야??
"허얼....뭐야..고양이에 멜빵바지 대박....설마 저 미친년이 한이한테 헌팅 거는거 아니겠지?"
"잠깐만..잠깐만..쟤 해인이 같은데"
"야아!!!!설마!!우리 해인이가 미쳤냐!?"
"너 나랑 내기할래?!?"
아이들은 이제 점점 언성을 높혀가며 괴상한 여자의 정체를 확인 하기 위해
앞다투어 소녀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장충동 체육관 앞으로 가"
한편,
소녀가 내리고 더욱 살벌해진 차안에서 오만가지 인상을 구기며 운전 중이던 덩치는,
뒤에서 들려온 한마디에 자신의 나팔귀를 의심했습니다.
"네..?"
소년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채 머리카락을 만지작 대고 있었습니다.
"위에 뚜껑 까고"
덩치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럼 아까 그 여자애가 곤란해질텐데요.."
"아..여기서 내리고 싶다고...?"
하...아...
...하..아....
덩치는 순간 어렸을적 복싱 선생님이 가르쳐준 복식 호흡을 내쉬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불끈 뻗어 나갈뻔한 주먹과 발을 제어하고,
"네 알겠습니다"
땡겨쓴 3달치 월급을 떠올리며 루프를 오픈하는 버튼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지이이잉.'
그러자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열리는 썬루프.
덕분에 이마를 살짝 덮고 있던 소년의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날리고,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
'저 싸가지 없는 새끼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덩치가 체육관으로 차를 몰며 진지하게 고민에 잠겨 있는 동안,
소년은 두 손을 위로 뻗은채 불어오는 바람을 기분 좋게 맞았습니다.
이 차를 탄지 벌써 4년이나 됐지만 한번도 오픈하고 달린 적은 없었는데..
흠.이거 생각보다 꽤 기분 좋은 거였구나... 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두 눈을 반짝였습니다.
....
......
덕분에 좀전과는 달리 제법 들뜬 목소리로 덩치를 향해 말했습니다.
"저기 앞에 애들 모여 있는거 보이지..??"
"네..보입니다.."
"그럼 그 앞으로 천천히 한바퀴 돌아 나와."
"......."
...
.....
소년의 마지막 말에 이제야 그의 잔인한 의도를 파악한 덩치.
순간 마음 한켠에서 가엾은 소녀를 향한 정의감이 불타올랐지만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윽고 덩치는 자신의 무기력함과 빌어먹을 돈에 한숨을 내쉬며
엑셀을 밟고 있던 오른쪽 발에서 서서히 힘을 뺐습니다.
....
.....
"솔직히 말해봐 생일 갔다 온거 아니잖아!"
"진짜야.."
"이 꼴을 하고 니가 생일파티엘 갔다 왔다고?"
한편 소년이 탄 차가 서서히 가까워 오는 동안
학교 아이들에게 둘러 쌓인채 심문을 받고 있는 가엾은 소녀.
그중 특히 짝꿍 달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떨치지 못한채 계속 무언가를 다그쳐 댔고,
몇몇 아이들은 킥킥 거리며 폰 카메라 안에 소녀의 모습을 담는 중이었습니다.
...
.....
- 넌 대체 뭘 하는거지!계속 그렇게 눈만 깜빡이면서 수컷 망신 혼자 다 시킬거냐!?
그리고 참다못한 루이가 무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던 한이에게 고함을 질렀을때,
그래서 멍한 한이의 눈동자가 그제야 겨우 궁지에 몰린 소녀를 발견했을때,
"빵빵!빵빵!"
그들 모두는 예고없이 울린 클락션 소리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등을 돌리고,
곧 미끄러지듯 눈앞에 등장한 새까만 벤츠 오픈카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다음으론 그 뒷좌석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 마른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
....
소년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더욱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기억이 틀린것이 아니라면 눈앞에 나타난 저 녀석은.. ...
한성고등학교 2학년 강은오.
소문난 성격 파탄자로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집안 빽 믿고 선생님들도 대놓고 무시하는 성격 장애자.
그러나 정작 부모님이 무슨일을 하시는지는 알려진바 하나 없는 미스테리.
엄청난 결벽증으로 여자들이 선물이나 편지를 사물함에 넣으면 손 끝으로 집어 휴지통에 버림.
학교에서 열마디 이상 한 것을 본적이 없고 종례가 끝나면 곧바로 검은색 벤츠에 올라타 홀연히 사라짐.
p.s. 며칠전 같은 학교 양기백 패거리한테 죽도록 맞았다고 하는데 조만간 또 까일것이라고 함.
아이들은 믿을수 없다는듯 두 눈을 치켜 떴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이지.
그런데 바로 그 강은오가 눈앞에서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니.
게다가 우리의 눈이 틀린게 아니라면 분명 이중에 한 사람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듯 한데..
...
....분명 이중에 한...
...
......
"자기야 오늘 즐거웠어!!!!!!집에 들어가자마자 꼭 전화해야돼!!!!!!!!!!!!!"
...........
...................
...보고..있는듯..한데....
...
....
...
이어 모두가 새하얗게 얼어 붙은 가운데
공중으로 솟아나온 소년의 두 팔이 붕붕 흔들리면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져가는 검정색 벤츠
...
그러면 벤츠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던 아이들의 얼빠진 시선이
이내 싸늘히 굳어 소녀를 에워 싸고..
그들 중 하나가 어처구니 없다는듯 웃으며 입을 열려던 찰나에
잠자코 있던 한이가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가자 얘들아"
...
잠깐만 한아..그렇게 가면 어떡해
...네가 그렇게 가버리면 난 어떡해..
...
...
소녀의 간절한 외침이 들리지 않는걸까.
몇몇 친구들이 머뭇머뭇 뒤를 따르는 동안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한이.
단 한번도 뒤돌아 보는법 없이 소녀에게서 멀어져가는 한이.
...
....
"니가 말한 첼로 같이 켜는 친구가 쟤였냐..?"
덕분에 소녀는 짝꿍 달래와 여자 아이들 세네명의 싸늘한 눈동자 앞에 홀로 남아 버리고,
변명에 익숙치 못한 소녀가 말끝을 흐리는 동안
아이들의 배신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덧 커다란 분노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야 정해인. 내가 이런말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
"우린 그렇다 쳐도 그래도 친구라고 끝까지 너 기다린 한이가 존나 불쌍하다"
"미안해...."
"됐어.그럴수도 있지"
"...."
"삐까뻔쩍한 외제차 타는 남자친구면 충분히 그럴수 있지"
...
.....
한번도 들은적 없는 달래의 가시돋은 목소리.
소녀는 믿을수 없었습니다.
대체 왜 은오가 이런 짓을 한 걸까요.
...
....
혀차는 소리와 함께 여자 친구들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 동안.
루이를 꼭 끌어 안은 소녀의 머릿속엔 그 말만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
.....
왜...?대체 왜....................?
나한테 왜 그런거야 강은오...........................?
"아깐 대체 왜 그런 겁니까....?"
PM 5:14
차가 동네 언덕 입구에 막 들어섰을 무렵
참고 또 참으려 했지만 결국엔 덩치의 입을 비집고 나온 한마디.
그러면 선물받은 포장을 거칠게 잡아 뜯던 두 손이 갑자기 멈추고,
당황한 덩치가 '아닙니다' 라는 말로 그 상황을 무마시키려 할때
소년의 붉은 입술에서 즐거운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다들 더럽게 행복해 보이잖아"
"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덩치가 멍하니 입을 벌리면
이제 막 벗겨진 포장지 사이로 드러난 선물을 가만히 바라보는 소년.
...
.....
핸드폰 케이스.
소녀가 밤새 털실을 기워 만든 핸드폰 케이스.
하얀 바탕에 이마에 붉은 점이 나 있는 고양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미친 야옹이.
그리고 케이스 밑에는 반으로 접혀진 노란빛깔의 카드 한장.
'그때 봤는데 핸드폰이 허전해 보이길래.
아 혹시 고양이 좋아해...?
싫어하면 큰일인데..
미리 알았더라면 더 좋은거 준비했을텐데 직접 만든거라 미안해.
그리고 생일 축하해.......'
...
....
젠장..뭐야 닭살스럽게..
초등학생도 이딴 유치한 케이스는 안 쓰겠다..
...
....
소년은 의식적으로 눈썹을 찡그린채
손 끝으로 살짝 집고 있던 핸드폰 케이스를 운전석 쪽으로 휙 던졌습니다.
...
....
이어 놀란 덩치가 자기 무릎위로 던져진 털실 케이스를 바라보는 사이,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카드를 살며시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집어 넣는 소년.
"이..이게 뭡니까..?"
"아까 그 삐에로가 준거. 알아서 버리라고"
"아니 이렇게 예쁜걸 왜 버립니까!!!보니까 직접 만든거 같던데!!"
"아 그럼 그 구린거 니가 쓰던지"
...
....
덩치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짜증 내는 소년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습니다.
'악마야....
나는 지금 이 시대에 한명 태어날까 말까 한 악마를 만났다......'
....
......
그리고 그날 밤.
"으흐..으으으윽...으흐흐으으으윽
모처럼만에 빈 공터로 나들이나 갈까 하고 생각했던 루이는
이불속에서 숨죽인채 괴상한 소리로 흐느끼는 소녀 덕분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녀의 곁을 지켰습니다.
...
....
뭐..곁을 지켰다고 해봤자 무뚝뚝한 루이가 별다른 행동을 한것은 아니지만..
...
.....
- 대체 몇시간째 이러는거냐!아주 꼴사나워 죽겠군!
그런 성격 파탄자는 미친 야옹이랑 단둘이 평생 살도록 냅둬라!
"으흐으윽....왜..그래..루이야..밥..줬잖아...
흐어어어엉..누나가..누나가 아까전에 밥 줬잖아....."
"냐아오오옹!!!!!!!!!!냐아오오오오오옹!!!!!!!!!!냐아아오오옹!!!!!!!!!!"
(그게 아니라고!!!!!이 멍청한 인간아!!시끄러우니까 그만 울란 말이다!!)
그날 밤 소녀가 밥을 더 내놓으라는 신경질로 들었을 루이의 목소리는
그가 할수 있는 가장 다정한 위로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해 본 서투르기 그지없고 터프한 위로.
.....그래서 더 소중한 특별한 고양이의 위로.
그리고 같은 시각.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던 2-8반 아이들 핸드폰에서
예정되있던 경쾌한 벨소리가 울리며 붉은 색깔의 글자가 선명히 나타났습니다.
'거짓말 쟁이 정해인 왕따 당첨'
.....
....................
.....
어서 내일이 오면 좋겠다...
...
....
몇몇 아이들의 입가에 벌써 심술궂은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