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F 충격 속보
IMF 보고에 의하면, 대한민국 부채증가
세계 1위!.. 망해가고 있다.
문죄인 정부가 다 털어 먹다!
IMF 한국 국가 부채 5천 조 원!
국민1인당 1억 원씩 감당해야!
IMF 발표된 재정 보고서 GDP대비 부채비율로 5년간 계속 지속적으로 상승 전망!
🔹 2021년 53.2%.
🔹 2026년 69.7%.
🔹 재정 경제정책실패!
민간 정부는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빚더미 속으로.
️ 특히 20-30세대에게 과대한 빚 폭탄.
문죄인 중심 운동권 정치인들 대한민국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경제, 안보, 정치, 코로나, 부동산, 탈 원전,
일자리, 세금 문제 등에 대해 어느 하나 도대체 잘한 것이 하나도 없다.
문죄인 정부 4년간 F학점도 아니고 그냥 퇴학감이다.
문재인 정부 집권한지 4년 만에 세계 경제대국 제11위에서
지금은 세계 30위로 국격을 추락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을 세계인의 비웃음 조롱거리 만들었다.
그리고도 퇴임 몇 일 앞둔 이 시점에서 뭘 잘했다고 희희낙낙 파렴치하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 만들어 가기위해 동분서주 매진하지도 말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을 더 이상 엉망진창 거덜내지 말고 대한민국을 위해 진즉 용퇴했어야!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 김광수👊
☎ 김세형 매경 논설고문.감사
페북글 ('56년생)
ㅡㅡㅡㅡㅡ
🌳공병우 박사를 아시나요?🌳
1906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공병우(公炳禹) 박사의 삶은 '최초' 라는 수식어로 가득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의사! 최초의 안과 병원 개원! 최초의 쌍꺼풀 수술!
최초로 콘택트렌즈 도입!
이같이 화려한 경력으로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다.
하지만 공병우 박사는 애초에 돈 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어떻게 사용할까 였다. 그런 그의 삶에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눈병 치료를 받으러 왔던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과학적이고 우수한 우리의 한글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
이후 공병우 박사는 한글 타자기 개발을 시작한다. 병원도 그만두고 얼마나 온 정신을 기울였던지 사람들은 '공병우 박사가 미쳤다' 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한 열정 덕에 공병우 박사의 한글 타자기는 미국 특허를 받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병우 박사의 도전은 멈춤이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한글 타자기도 개발해 내었다. 누구보다 한글을 아꼈던 공병우 박사는 그의 나이 82세가 되던 해에도 그 열정을 잃지 않고 한글문화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좀 더 편리하게 한글 자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구하였으며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과 정보를 나누며 프로그램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열정을 쏟은 결과 지금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문서입력 프로그램인
'아래아 한글' 을 만들어 내게 된다.
한글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지만, 의사로서도 본분을 잊지 않았던 그는 미국에 갔을 때 보았던 구급차를 수입해 전국을 돌며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학교도 세웠다.
그렇게 한없이 베풀고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한평생 자신에게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 공병우 박사의 성품은 그의 유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마라.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시신은 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라. 유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위해서 써라."
그의 유언대로 공병우 박사의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었고, 시신은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되었다. 또한, 그의 죽음은 이틀 후에서야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1995년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신문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빈소도 없고, 장례식도 없고, 묘지도 없었다.
살면서 그리고 죽는 순간에도 또 죽어서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길 바랐던 공병우 박사님!
세상 모두가 그 같은 삶을 살 순 없다.
그러나 지식이 될 수도 있고,
능력이 될 수도 있고
웃음이 될 수도 있고,
경제력이 될 수도 있고
나눌 수 있다면 나누세요.
인생을 충분히 잘 살다 간다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 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 공병우 박사 ㅡ
1993년 3월 10일 초대 국모 프란체스카 영부인 소천
프란체스카 영부인이 1988년 88세에 남긴 뒷이야기.
프랜세스카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1. 첫 만남. 내 나이 어느덧 올해로 만 여든여덟, 나 자신 내세울만한 공덕도 없이 아들 인수내외와 국민들의 보살핌 속에 이토록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어서 동작동의 남편 곁으로 가야 될 텐데 염치없이 더 오래 살고 싶은 핑계가 생긴다. 남편의 소원이던 남북통일, 우리 손자들이 더 장성하여 장가가는 것, 그리고 남편의 사료 및 유품전시관과 기념도서관이 건립되는 것 등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사실을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나는 늘 사양해 왔다. 그것은 내가 "여자란 말이 적어야한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온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서 며느리가 [건강장수 하셨던 아버님을 보필하시는 중에 그 생활이나 식사관리, 건강상의 비결 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다면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듯 싶은데요]하고 조르는 바람에 나의 두서없는 말을 며느리가 받아쓰기로 하여 이글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지금으로 부터 55년 전 1933년에 내가 리박사를 처음 만나게 된 곳은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호반에 있던 호텔 [드 라 뤼씨]의 식당이었다. 그 때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프랑스 빠리를 경유해서 스위스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리박사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던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학정을 또다시 받게된 만주의 한국동포들의 애절한 입장을 호소하고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이용해서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역설하며 각국대표와 신문기자들을 만나는 등 각방으로 활약 중이었다.
우리가 이 호텔에 여장을 푼 이튿날 저녁식사를 하려고 4인용의 식탁에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앉아 있을때 이미 만원이 된 식당에서 리박사도 식사를 하려고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지배인이 우리에게 와서 정중하게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하고 양해를 구해서 우리는 승낙 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온 리박사의 첫인상은 기품 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성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바로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높은 신분으로 보였던 이 동양신사가 주문한 식단을 보고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사워크라우트(sauer kraut)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와 감자 2개 그것이 주문한 메뉴의 전부였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귀빈들의 호화판 식사와는 달리 값싼 음식만 골라 주문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런지 이 동양귀빈의 너무도 초라한 음식접시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숙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서양신사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식사를 하기 전에 불어로 [본 아뻬띠!](맛있게 드세요!)하고 예의를 갖춘 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나는 이 분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게 되어 무안해서 미소를 마금고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분은 힘 있게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행하기 직전에 우리 독서클럽에서 보내주어 읽어있던 [코리아]라는 책속의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한국말이 생각났다. 내가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하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이나 놀라면서 반가와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을 알아주는 외국인이 드물었고 또 알아도 일본의 악선전으로 잘못된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자기 조국 [코리아]를 그것도 아름다운 금강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분을 무척 기쁘게 한 것 같았다.
그때 지배인이 베른에서 온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그 분은 [덕택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례합니다.]하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나는 신문에 실린 그분의 사진과 신문 한 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분은 [한국이 독립해야 아시아의 평화는 이룩될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나는 그 기사를 오려 봉투에 담아서 내 이름은 쓰지 않은 채 그분에게 전해달라고 호텔 안내에게 맡겼다.
그런데 답장이 왔다.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내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리승만] 다음날 다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기사가 또 실려서 보내드렸더니 답례로 차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어려운 여건속에서 정식국적과 여권도 없이 동분서주하며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
58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지닌 한국의 독립투사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면서도 외로운 한국 독립운동가의 바쁜 일손을 돕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33세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가 특기였다.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세딸중 막내인 나를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하여 사업을 계승 시키려고 나를 상업전문학교에 보내고 언어수업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유학까지 가게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연마해온 나의 특기를 가지고 자금과 일손이 한없이 필요했던 이 항일 독립투사를 위해 무료봉사를 자청한 것이었다.
한편, 나의 어머님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한국의 애국자에게 마음을 쓰며 성심껏 봉사하는 딸이 못마땅하였다. 더욱이 시간과 경비를 줄이기 위해 식사대용으로 날달걀에다 식초를 타서 마셔가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저명인사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예정을 앞당겨 곧바로 나를 데리고 [빈]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그분과 작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몰래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김치 맛 나는 사워크라우트(sauer kraut) 한 병을 그분에게 전해주도록 호텔 고용인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 후 나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회사를 수신처로 하여 제네바의 그분과 서신 연락을 했다. 바로 그 해 7월초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왔던 리박사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한국의 독립문제로 만날 사람이 많아 늘 바빴고 나도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빈]의 명소와 아름답고 시적인 숲속을 거닐기도 했다. 어린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 없는 그분의 성실한 인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돋우어 주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을 알게 되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을 했더니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을 보내게 되다니]하며 회한 섞인 한숨을 지으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나는 그분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나는 수많은 고통의 나날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음해인 1934년 10월8일 하오 6시 30분 뉴욕의 몬트클레어 호텍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님과 존.헤인즈.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분의 동지들과 동포들이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실망과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때 우리들의 인간적 고뇌가 얼마나 깊고 컸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채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과 애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고 고생을 안 해본 나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모든 것을 참고 이해와 믿음으로 극복하며 노력함으로써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 ㅎㅎ ◇◇ 수수께끼 유머 시리즈
Q. 파리가 커피 속에 빠져서 죽으면서 남긴 말?
→ A. 쓴맛 단맛 다 보고 간다.
Q. 못 생긴 여자가 계란으로 마사지를 하면?
→ A. 호박전 만든다.
Q. 금세 울고 또 우는 여자는?
→ A. 아까운 여자
Q. 커피숍에서 창이 없는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는?
→ A. 창피한 남자
Q. 장님과 벙어리가 싸우면 누가 이 길까?
→ A. 장님이다.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Q. 소방관과 경찰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 A. 소방관이다. 물・불을 안 가리니까.
Q.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누가 하는 말인가?
→ A.^🌇^~~~ ㅎㅎ
◇◇ 서울대학교 시험문제의 정답.
1. 갓난아기는 울어도 눈물이 없는 까닭은 ?
: 세상물정 몰라서...
2. 사람의 발바닥이 두꺼운 까닭은 ?
: 인생은 가시밭길 이어서...
3. 여자의 가장 큰낭비는 ?
: 예쁜 여자가 화장하는것...
4. 갑돌이와 갑순이가 결혼 못한 이유는?
:동성동본이니까.
5. 눈코 뜰새없이 바쁜 때는?
: 잠을 잘 때...
6. 도둑이 정문으로 들어가는 집은 ?
: 교도소...
7. 여자는 왜 수염이 없나?
: 화장할 때 불편하니까...
10. 세월을 속이는 약은 ?
: 머리 염색약...
11. 뒷걸음질 잘해야 이기는 경기는 ?
: 줄다리기...
12. 한번 웃으면 영원히 웃는 것은?
: 사진...
13. 깨뜨리고 칭찬 받는 것은?
: 신기록...
14. 얼굴이 못생긴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
: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15. 자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은?
: 우선 두 눈을 감는 일...
정답은 모두 합격입니다.
🎉🎉
. ◇◇ 수수께끼 유머 시리즈
Q. 파리가 커피 속에 빠져서 죽으면서 남긴 말?
→ A. 쓴맛 단맛 다 보고 간다.
Q. 못 생긴 여자가 계란으로 마사지를 하면?
→ A. 호박전 만든다.
Q. 금세 울고 또 우는 여자는?
→ A. 아까운 여자
Q. 커피숍에서 창이 없는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는?
→ A. 창피한 남자
Q. 장님과 벙어리가 싸우면 누가 이 길까?
→ A. 장님이다.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Q. 소방관과 경찰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 A. 소방관이다. 물・불을 안 가리니까.
Q.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누가 하는 말인가?
→ 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