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광평)이씨]:우리 성산이씨 도용
☆경남의 마을 아, 본향!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상검마을☆ |
(임진왜란 때 전국 첫 의병 일으킨 ‘충절의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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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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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순당 종중 이쾌권 총무가 동산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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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 의병장의 충의를 찬양하기 위해 세운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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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정 앞 550여 년 된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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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 선생의 제사를 지내는 별묘인 성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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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단종 시대 무신 이호성 선생 정착 후
현재 65가구 중 50여 가구가 성산이씨
후손 이령 장군, 임란 발발하자 의병 모아
김해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
장군 모신 충순당·충의 찬양한 정려각 등
마을 곳곳 호국충정의 기운 가득 서려
정월대보름을 사흘 앞둔 지난 21일, 푸릇푸릇 옅은 봄내음을 맡으며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성산(경북 성주의 옛 지명) 이씨 집성촌인 상검마을을 찾았다.
생육신을 모신 서산서원과 모은 이오 선생의 고려동이 있는 함안은 충절의 고장으로 불린다. 임진왜란 때는 수많은 의병장이 나왔고, 3·1독립만세운동이 8차례에 걸쳐 일어나 전국 최고로 꼽히고 있다.
이런 함안에서도 상검마을은 문무를 겸비한 선비가 나라가 위급할 때 과감히 일어서서 다른 이의 표상이 됐던 곳으로, 누구나 한 번쯤 찾아볼 만한 소중한 마을이다.
해발 216.7m의 검암산에 둘러싸여 있는 이 마을은 임진왜란 중 최초 의병장이었던 이령(李伶)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앞으로 함안천이 흐르는 600여 년의 연륜을 지니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함안IC에서 가야읍 시가지를 거쳐 국도 79호선을 따라 함안면으로 가다 보면 왼쪽 검암산 아래 보이는 마을로, 길가의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함안천을 지나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해 마중나온 성산이씨 충순당 종중 이쾌권(67) 총무의 안내로 마을을 둘러봤다.
◆마을 입구에 창시자 기리는 동산정 우뚝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정자가 한눈에 보이는데, 1513년에 이희조가 자신의 조부인 동산(東山) 이호성 선생이 상검마을에 처음 정착한 것을 기념해 세운 동산정이다.
이호성(1397~1467년) 선생은 1419년 무과에 급제해 40여 년간 나라를 위해 한평생 군무에 봉직했다. 세종·문종·단종의 세 임금을 모시면서 책무에 성심성의를 다해 임금이 행차마다 항상 선생을 앞세워 인도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선생은 1459년 은퇴 후 물 좋고 경치 좋은 이곳에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겼으며, 연산 을축년(1505년)에 손자인 옥포만호가 그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동산정을 단장하고, 1935년 집을 현 건물로 중수했다.
동산정 앞 국가지정 보호수인 느티나무도 이때 동산선생이 심었다고 전하며, 550여 년 세월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동산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로 2008년 2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441호로 지정됐다.
◆상검마을은 성산이씨 집성촌
동산 선생이 정착한 이후 대를 거듭해 살면서 현재 상검마을의 65가구 중 50여 가구가 성산이씨이다.
동산정을 내려와 마을로 들어가면 승용차를 몇 대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성산이씨 종택이 눈에 들어온다. 1535년 태어난 황곡 이칭 선생이 살던 곳으로, 1586년부터 1588년까지 함안군수를 지낸 한강 정구가 학문을 논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밤마다 찾아온 곳이라고 전한다.
이는 이칭 선생이 첨모당 임운의 외조카인 관계로 외숙과 함께 퇴계 이황에게 수학했고, 남명 조식 선생에게도 배워 유학의 경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명호, 명신, 명경, 명여를 데리고 곽재우 장군의 수병장인 오운과 함께 싸웠고, 정암진(함안-의령 경계지점)전투에서 승리하자 이정, 조종도, 박제인과 함께 5000명의 의병을 모아 함안군수 류숭인에게 인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칭의 둘째 아우 이령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왜적이 14일 부산성, 15일은 동래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17일 김해에 도착하니 이것이 곧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 의병이었다.
김해부사가 용맹함을 알고 동문장을 시켰는데 4월 18일 왜적이 밀려오는데도 서예원 부사가 도망치자 집안 종형인 이간, 박진영, 이숙, 신초와 함께 남은 군사를 독려하며 왜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20일 성이 함락되고 말았는데, 다른 사람의 탈출을 도와주기 위해 피 묻은 적삼을 둘째 아들 명화에게 벗어주며 이걸로 장사지내라 하고는 끝까지 적을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전쟁 후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해 적삼을 놓고 혼을 불러 검암산에 무덤을 만들었으며, 나라에서 복호를 명했고 1869년 충신의 정려가 내려졌다.
종택 옆에 있는 재실은 충순당(忠順堂)으로, 곧 충순당 이령(李伶) 장군을 모신 곳이다. 충순당은 53.19㎡의 목조와가로 2011년 4월 28일 경남도문화재자료 제530호로 지정됐으며, 충순당에 딸린 성인사는 매년 음력 4월 20일 이령 선생의 제사를 지내는 별묘이다.
◆호국충정의 의기 후대에도 전해져
충순당과 성인사를 둘러본 후 함안천을 건너 7~8분 걸어내려오면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정려각이 있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길이 바뀌어 지금은 마을 앞 들판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정려각은 이령 의병장의 충성을 높이 평가해 고종 6년(1869년)에 충의를 찬양하고자 세워진 건물로, 내부에는 ‘통정대부이조참의’ 벼슬을 증직했다는 목판이 걸려 있다. 2011년 4월 28일 경남도문화재자료 제531호로 지정돼 임진왜란 전국 최초 의병장의 호국충절을 빛내고 있다.
성산이씨 충순당 종중 총무(이령 장군의 직계 13세손) 이쾌권 씨는 “후손들이 미약한 탓으로 선대의 훌륭한 업적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며 “마을에 건립된 정려각, 동산정, 충순당, 성인사 등이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서는 행정적인 지원이 이뤄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조용한 시골마을이지만, 호국충정의 기운이 가득 서린 상검마을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출처: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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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광평)이씨]:우리 성산이씨 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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