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 甲 辛 壬(건,1922년 11월 12일 양력)
寅 申 亥 戌
79 69 59 49 39 29 19 9
己 戊 丁 丙 乙 甲 癸 壬
未 午 巳 辰 卯 寅 丑 子
임자대운 : 신미,임신,계유,갑술,을해 // 병자,정축,무인,기묘,경진
계축대운 : 신사,임오,계미,갑신,을유 // 병술,정해,무자,기축,경인
갑인대운 : 신묘,임진,계사,갑오,을미 // 병신,정유,무술,기해,경자
을묘대운 : 신축,임인,계묘,갑진,을사 // 병오,정미,무신,기유,경술
병진대운 : 신해,임자,계축,갑인,을묘 // 병진,정사,무오,기미,경신
정사대운 : 신유 ~~~~~~
김종희는 아버지 김재민과 어머니 오명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종희는 4남1녀중 둘째로 비록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구김살이 없고 명랑했다.
아버지를 닮아 남에게 지기 싫어하며 강직했다.
부친의 직업은 날품팔이 였으며 아이들을 학교에도 못 보낼 만큼
하루 하루가 고된 삶의 연속이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다가 부친의 4촌 동생 봉서씨의 도움으로 광산에서 일하게 되어
가계가 조금씩 나아지자 그곳에서 번 돈으로 차곡차곡 농토를 장만했다고 한다.
그때서야 태어난 고향 직산리를 떠나 상덕리로 이사를 하게 되고
그 지역에서 유명한 직산 공립 보통학교에 편입한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을해년 말에 경기공립상업학교 시험을 봤으나
떨어지고 말았다.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자년에 재수를 감행하여
그해 말에 당당하게 합격해서 정축년 3월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학창시절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자기집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통근 열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멀고 먼 기차 통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침 5시 50분 집을 떠나서 서울역 도착 8시 30분
효자동까진 전차로 15분,,,그리고 도상(학교)까지 도보로 10분 이런 행군을 했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통근 열차가 5분이라도 연착을 하게 되면 그날은 영락없는 지각이었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던 4학년 2학기 중반 무렵 (임자대운 경진년)
패싸움(일본인대 한국인)에 말려 들어 퇴학 처분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당숙인 봉서공의 주선으로 원산 공립 상업 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1941년 12월 원산 상업 학교를 졸업한 김종희는 조선화약공판(주)에 입사했다.
(회사는 남대문 부근 3층 건물에 있었고 일본 회사였음)
김종희는 회사 취업후 열심히 업무를 파악하고 수행한 결과 채 1년이 지나기 전에
사내 입지를 확실히 다지면서 화약 산업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1944년 1월 김종희는 생산부 다이너마이트계 계장으로 승진했다.
1945년 9월 광복을 맞이하여 모든 일본인들이 총 퇴진하고
김종희 지배인 중심의 조선화약공판 주식회사 체제가 들어섰다.
1946년 4월 28일 김종희는 강태영 여사와 화촉을 밝혔다.
또한 1946년 4월 30일(병술년) 그렇게 원하던 꿈이 이뤄졌는데 그건 바로
미군정청이 임명하는 조선화약공판(주)의 정식 관리인 자리였다.
1952년 10월 9일,,김종희는 대망의 한국화약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3년 6월 10일,,김종희는 화약공판 매수 대금의 절반(1,172만 8,400환)을 납부하고
조선화약공판 소유권을 인수했다. 그리고 자본금을 기존의 두배(1천만환)로 증자하면서
한국화약(주)의 기반을 확충했다.
경기공립상업학교의 위상 : 지금의 특목고 정도의 실력 있는 학교로 추정.
중고등학교 시절 :
을해년에 경기공립상업학교에 떨어지고 병자년 재수를 거쳐 그해 12월에 시험합격
정축년 3월에 경기공립상업학교 입학 ~
경진년 11월에 패싸움에 말려들어 퇴학 처분
그런 다음 다시 원산 공립 상업 학교로 편입하여 신사년 12월에 졸업.
1935.03 직산 공립보통학교 졸업
1936.03 성환공립심상소학교 고등과 1년 수료
1940.11 경기공립상업학교 4년 중퇴
1941.12 원산공립 상업학교 졸업
1952.10 한국화약㈜ 설립. 現 ㈜한화/화약
1955.10 인천화약공장 인수
1956.04 초안폭약 생산 개시
1957.10 NG 시험 생산 성공
1958.06 다이너마이트 생산개시
1964.01 신한베어링공업㈜ 인수
1965.08 한국화성공업(현 한화케미칼 및 한화첨단소재) 설립
1966.07 태평물산㈜ 설립. 現 ㈜한화/무역
1968.09 제일화재해상보험㈜ 인수
1969.11 경인에너지㈜ 설립
1972.09 경인에너지 정유공장 및 발전소 준공
1972.12 한국프라스틱공업 설립
1973.02 대일유업㈜ 인수
1973.09 동원공업㈜ 인수
1973.12 태평개발(현 한화호텔&리조트) 설립
1974.09 유니온포리마㈜ 설립. 現 한화폴리드리머㈜
1975.05 학교법인 북일학원 설립
1976.05 성도증권㈜ 인수. 現 한화투자증권㈜
1976.09 서울프라자호텔 개관
1977년 11월 이리 폭발 사고
1981.7.23 숙환으로 영면(향년 59세)
경력 및 상훈
경력 및 상훈 1967.09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1967.09 주한 그리스 명예총영사
1970.10 대한사격연맹 부회장
1971.03 동탑산업훈장
1972.01 그리스 금성십자대훈장(그리스 정부)
1972.12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73.04 은탑산업훈장
1974.11 철탑산업훈장
1977.04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981.10 금탑산업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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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차에 실려 있던 다이너마이트용 화약 800상자, 뇌관 36상자, 초안폭약 200상자,
흑색화약 3상자 도합 30.28톤의 폭약이 폭발했다.
한국화약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세)이 화차 속에서 켜놓은 촛불이 신씨가 잠든 사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대폭발로 이어진 것이었다.
기차의 쇠바퀴가 수백 미터까지 날아가 떨어졌고 이리역 부근은 폭격을 당한 듯 초토화됐다.
사망 56명, 중상 293명, 경상 717명, 가옥 전파 675채, 반파 1289채, 재산피해 80억원,
이재민 9천여 명이 발생했다.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구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로 통과시켜야 하는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킨 철도청의 ‘안전 불감증’이 빚은 사고였다.
김종희 한국화약그룹 회장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은 충혈되고 핏발이 섰다. 한국화약은 끝났다는 것이 각계의 시각이었다.
“지난 30년간 모두들 잘 해주었다”는 말로 직원들에게 작별을 고한 김종희는
삼청동 총리공관의 최규하 총리를 찾았다.
“보상책임을 어떤 방법으로 지겠다는 것입니까?” 최 총리가 물었다.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저의 전재산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요.”
“실례지만 김 회장 재산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약 90억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김 회장의 뜻을 각하께 전하고 한번 의논해보겠습니다.”
사흘 후 각 신문들은 ‘한국화약 김종희 회장 폭발사고에 90억 보상 확약’이라는 제목으로
중앙재해대책본부의 발표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55세의 회장 김종희는 다시 맨손으로 돌아가 새 출발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재계는 자진 확약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철도청의 과실도 있는데 90억원이라는
피해보상금을 한국화약이 왜 전부 뒤집어쓰느냐는 비판도 일었다.
김종희는 오히려 초연했다. 사고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고 다시 맨손으로 돌아가
새출발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리역 폭발사고의 충격은 김종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으로 다가왔다.
과로가 겹쳐 건강에 이상 징후가 확연히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런데도 입원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일부러 몸을 혹사시키듯 일했다.
그의 건강은 교환 수혈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당뇨 증세가 신장 기능을 떨어뜨려 급기야는 신장병(네프로제)을 유발했다.
네프로제가 심해지면 혈액 속에 쌓인 노폐물을 걸러내는 투석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투석 치료를 받는 네댓 시간만 병원에 붙어 있었다.
“아버지! 오늘은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데, 이대로 병원에 누워 쉬시지요?”
“병원에 누워 있으면 괜히 죽을 병 들린 것처럼 헛소문만 난다.”
아픈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심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남 승연과의 대화다.
그의 시력은 더욱 나빠져 서류에 사인할 때 결제란 밖에 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러던 그는 1981년 7월 23일 밤 9시 향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첫댓글 삼가명복을비옵니다-()- 직산은 저의 외가이고 회장님께서는 외가의 가족같은 분이셨지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1958.06 다이너마이트 생산개시
1964.01 신한베어링공업㈜ 인수
1965.08 한국화성공업(현 한화케미칼 및 한화첨단소재) 설립
1966.07 태평물산㈜ 설립. 現 ㈜한화/무역
1968.09 제일화재해상보험㈜ 인수
1969.11 경인에너지㈜ 설립
비겁대운에서 다이나마이트 생산으로 큰 수입이 있었고 여러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대체할려는 노력이 있었다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명진사해님
자평진전을 읽었으면 이런사주에서 써먹어야 할터인데 아무도 언급을 안하네요 격용신 해월임수를 파괴하는 시기에 폭발과 사망
看命提綱(三綱)
팔자지중(八字之中)
이일위주(以日爲主)
좌하지신(坐下支神)
선구기의(先求其意)
책속에 책에서
운의 작용은 년 월 일 시 순차적으로
辰대운 辛酉년이든 丁대운 辛酉년이든 어차피 합충의 변화에 걸려든 것은 마찬가지라
별반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참고로 몇 마디 덧붙이자면 대운을 5년씩 끊어 볼것인지,
아니면 붙여 볼것인지 ,,붙여 본다고 할 때도 비율을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1:1로 볼것인지
어느 누구도 왜 그러는지 구체적인 명조를 가지고 명확하게 정리를 해 놓은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지요.그러다 보니 다양한 설들이 난무한데
그렇게 밖에 볼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쏠림현상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속도가 붙은 물체는 정지하기 까지 시간이 더 걸리고
무기력한 물체는 조그만 저항에도 금새 멈추는 것 처럼 말이지요.
현실에서도 정권 교체기가 되면 전국이 심하게 요동치지 않습니까?
특히 여,야의 정권 교체기때는 더욱 그렇지요.
물론 일반 가정사도 마찬가질 겁니다.
본인은 이러한 생각에 착안해서 다양한 가설을 세워 오래전부터 검증를 해 오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결론은 정권 교체기의 레임덕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에
따라 적용시기를 달리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네요.
마당이 있으므로
놀 구석이 있고
하기사
요즘에
마당이란
시멘트
세상사 흉한것은 화살같이 오고 기다리는것은 더디오더라 적천수에서도 그리 말하더라 행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