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대 마르코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4,19-28 요한 14,27-31ㄱ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의 원천
어제 복음묵상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이 전하는 최후만찬 석상에서의 원초적인 고별사는
13-14장으로 끝난다. 오늘 복음이 바로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 미사전례의 복음으로는 봉독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 일어나 가자"(31b절)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고별사를 마감하시고, 자
신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의 몇 시간을 향하여, 즉 유다의 배반과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신다. 제자들도 이 시간을 함께 지내도록 초대받는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된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약속말씀'에
오늘 복음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예수의 다시 오심'이 연결된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27절)고 하지만
사실 세상은 자신이 줄 수 있는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오히려 불안과 걱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평화를 원하고 또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평화란 평온하고 화목한 것으로 전쟁이나 분쟁의 상대적 개념이다.
평화의 내용과 의미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여왔다.
동양문화권에서의 정적·내향적·비정치적인 데 비해 서양문화권에서는
동적·외향적·정치적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근대에 들어 세계평화는 앞의 전자에 해당되는 듯한 반전주의나 이상주의의 한 기둥과,
후자에 해당되는 듯한 국제주의나 현실주의의 다른 기둥으로 도모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한 반전주의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오늘날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은 UN의 정신이 주도하고 있으나,
그 입장은 서양문화권을 대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로마제국주의 시대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중세기 십자군원정과 흡사한 것으로서
제국 내에서는 통일과 질서를 구현하면서도 제국 밖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평화를 준다면 그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며, 하늘이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인 만족에 불과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불안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온갖 악과 고통과 두려움, 믿어지지 않는 세상 사건에 대한 하느님의 기나긴 침묵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는 자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다시 오심'을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곧바로 이어질 사건이나,
어떤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재림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로 한 예수님이 기대한 시간 안에 오시지 않게 되자 세상의 마지막 시간에로
생각을 옮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초대교회가 경험한 '재림지체(再臨遲滯) 현상'이라고 한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불안과 걱정의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의
근거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온갖 불신의 요소를 제공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29절)
이제 마지막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고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란 우선 사탄의 도구로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13,27)와
예수를 체포하러 오는 군대(18,3)를 구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권력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그래서 생명이 없고 죽음만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의 권력이 잠시나마 예수보다 더 우세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30절) 즉
죽음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31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강요에 의해 생명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죽음에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유에서다.
결국 세상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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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우 베네딕토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4,19-28 요한 14,27-31ㄱ
‘말씀’ 대로 살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이 보신 것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전해 주셨다.
그것은 곳간의 열쇠도 보물지도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해졌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아이들은 마치 이솝 우화 같은 동화를 떠올린다.
성경을 너무 글자에 맞춰 경직되게 읽으면,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 그대로
전달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황해도 뭍에 사셨던 장모님이 백령도로 시집가서 보니 시아버지가 서낭당 제주셨다고 한다.
보통 마을 어른이 동제(洞祭)의 제주가 되는데 뭍에서 시집온 새색시,
더군다나 천주교를 믿는 신여성인 장모님 마음엔 이것이 걸렸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심심할 때 읽어보시라며 성경을 베개 밑에 놓아드렸다고 한다.
다행히 책 읽기를 좋아하는 시어머니가 틈틈이 꺼내 읽어보시더니 어느 날
“이렇게 좋은 말씀이 어디 있겠니?” 하며 동네 친지들을 삼삼오오 모아 성경을 읽어주셨다.
결국 백여 명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며 자랑하신다.
학창 시절 시험 때,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자면 밤새 머리에 쏘옥 들어갈 거라는 위안처럼
베개 밑에 넣어드린 ‘말씀’이 그대로 전달된 것일까?
인천교구 이흥우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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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호 베드로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4,19-28 요한 14,27-31ㄱ
마음의 평화
우리는 예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평화를 누립니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 안에서
아무런 걱정과 근심,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계심을 믿고 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부모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젖어들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 희생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으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마음 놓고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쁜 생활 중에서도 조용하게 주님께 머물러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란하고 들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평화를 통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께 머물러 있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주교구 이형호 베드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주님은 위대하신 하느님이로세 *
모든 신들 위에 계신 대왕이시네.(성무일도 참조)
알렐루야!!
평화를 빕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