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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는 일제 통감부가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조선의 운동가들을 투옥시키기 위해 1908년에 경성(京城)형무소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는데 투옥되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서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1912년에 마포형무소로 알려진 또다른 감옥을 세운다. 광복후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자들을 수용하여 1949년까진 이광수, 노덕술등의 친일파들을 수감했으나 이승만정부치하에선 오히려 독립운동가였던 정치인들이 수감된다. 그러나 5.16이후 다시 수용공간이 부족해지자 새로운 형무소(이름이 인상 안좋다고 교도소란 부드러운 이름으로 바꾸어) 안양교도소를 지어 마포교도소는 폐지된다.
나의 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친숙하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계시다가 1963년엔 마포교도소로 옮기게 되셨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어디로 간다면서 트럭에 모두 타라고 간수들이 감방마다 마구 두드리고 다녀 모두 직감적으로 사태를 깨달았다한다. 불과 그 10년전만 해도 흔하던 야산으로 무리를 끌고가 집단 총살을 시켜 암매장하던 장면이. 그때 백성들을 총살시키던 세력과 지금 자신들을 가둔 세력은 다르다 할 수 없으므로.
캄캄한 밤에 어디론가 트럭은 한참 달리더니 차를 세우고 모두 내리라고 하였다. 온통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들판위에 흰 건물이 서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안양교도소라는 곳이었다. 왜 진작 한마디 설명을 안해 주었을까.
그 다음 날 가족들은 여늬 날처럼 마포교도소로 면회를 갔는데 그곳엔 건물에 자물쇠만 채워져있을 뿐 아무도 없고 어느 설명문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들만 안타깝게 우왕좌왕 할 뿐 어느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 역시 그곳에서 서성거리기만 하다 학교수업때문에 그곳을 떠났는데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떨리기만 하고 눈물만 흘러 모든 것이 암울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아버지는 어디에 가 계실까. 나는 3년이나 월반을 하여 또래애들보다 훨씬 어려서 그 때 나는 아직 고등학교 1,2년생이나 다름 없었으니. 그 다음날 사흘만에 드디어 안양교도소로 이전했다는 설명문이 붙어있어 모두 "안양교도소가 어디야!!"하며 망연자실하였다. 거의 서대문교도소 에서 마포로 이감되온 재소자들이라 서대문은 알지만 안양이라니.. 그곳에 교도소라는 것이 있었던가...? 안양교도소로 가는 약도라도 붙여놓던지 당국은 관심이라곤 없이 지극히 무책임하기만 하였다. 박정희는 독립운동가들의 가족이란 빨갱이 가족으로 취급하는 듯 배려라곤 없었다.
그곳은 흰 2층 건물로 돼있었는데 서대문과 마포는 일제의 손으로 지어졌지만 아마도 안양은 처음으로 한국인 손으로 지어진 교도소 아닌가 싶다. 오래된 감옥소 이미지와는 달리 겉으로 깨끗하여 감옥이 아니라 호텔감옥이라 불리웠다. 그곳은 적어도 前교도소에 비해 특수고문실이나 사형실이 없어 한숨 돌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엔 3총각이란 유명한 세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류근일 (柳根一 1938~ ) 이수병(李銖秉 1937-1975) 김을수(金乙秀 1937~ ) 순으로 불리우지만 나는 항상 꺼꾸로 부르고 싶었다. 류근일은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민통학련 민청학련 운동으로 박정희에게 찍혔는데 곱상한 외모로 163센티쯤 될까 어린왕자같은 모습이라 저런 사람이 어찌그런 강력한 활동을 했을까 상상할 수가 없었다.
김을수는 강원도 산골의 빈농에서 태어났는데 너무 가난하여 학교를 못가고 혼자서 글을 익히고 공부를 하여 민족의식과 사상등에 눈을 떴으니 어려서부터 비범하였음에 틀림없다. 나중에 초등학교 졸업장은 스스로 땄다는 소문인데 아뭏든 보통 인물은 아니다. 젊은이가 듬직허니 교도소에 앉아있는 것을 보면 어른들도 그 앞에 고개를 숙였으며 아버지도 그를 상당히 인정하고 계셨다. 출옥한후에 한동안 활동을 좀 한 후에 몸도 안좋고하여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는 범민련에 가입해 활동했다며 구속을 하여 '나는 거기에 가입한 일이 없고 집에서 휴양만 했는데 왜 구속하느냐' 했더니 '너는 학교도 안다니고 가난하니 그것이 바로 빨갱이 조건임에 틀림없다'라 했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잔인무식한 놈들이구나 싶었다. 높은 학교를 나오고 부유한 집안출신이면 괜찮고 반대이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저들의 틀에 박힌 무식한 수법. 그가 장가를 갔단 말은 못들었는데 그 처절하게 외롭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을 조금이라도 보상받도록 잠깐이나마 행복한 생활을 해 보았기를 바란다.
류근일은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이승만 정권말기 서울대 필화사건으로 첫 옥고를 치른 후 5.16직후 민통학련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1968년까지 감옥살이를 하고 1974년 유신직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김지하 등과 함께 세번쩨 투옥된다.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나중에 다시 학사졸업장이 필요하여 서울공대에 입학해 공대졸업장을 딴 후 문리대 정치학과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한다.
그는 초기에는 민통학련과 민청학련같은 쟁쟁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출옥 후 1981년 조선일보에 논설주간으로 재직하며 완전히 돌아선다. 2001년부터는 한국의 뉴라이트의 선봉에 서서 본격적으로 우익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이만저만한 전향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진작에 교도소에 같이 계시면서부터 그를 알아보신 듯 했다. 아버지는 김을수 이수병군들이라면 크게 인정을 하시면서도 류근일에 대해 여쭤보면 '음 재필(才筆)이지'라고만 하시고 더 말씀을 안하시었다.
류근일 칼럼같은 글들을 보면 글에 무게는 없고 재주는 너무 넘쳐 글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선지 그의 글을 좋아하는 부류들도 많다. 그가 중앙일보 조선일보에 있을 때 그의 글은 신문부수를 대단히 많이 늘려 주었다. 2010년 경 그가 한번 TV에 나와 대담을 하는 데 들어보니 열렬한 박정희 찬양이었다. "독재를 했다 하지만 좀 그렇다해도 그보다 더 훌륭한 경제부흥을 이끌어내신 분 아닙니까!" 박정의에 대항해 그토록 악랄하게 당했던 사람이라곤 믿기 어려웠다. 같이 들어갔던 김지하는 1975 년에 석방되자 이수병이 얼마나 잔인하게 당하고있나를 동아일보에 자세하게 폭로하여 박통의 분노를 사서 결국 이수병은 바로 다음날 1975년 7월 4일 새벽에 서대문 구치소(교도소) 사형장에서 교수형으로 갔지만. 제네바 국제 법학자협회에선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한다. 서대문교도소가 없어진지 수년이 지났건만 이름이야 교도소니 구치소등으로 바뀌어도 그 고문실, 사형장은 그대로 기능을 유지하여 생생하게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요는 이름이 무어냐가 아니라 어느 세력이 통치하고 있느냐다.
김을수는 이적단체로 규정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1995 2월 결성됨)에서 핵심간부로 활동하며 국가보안법을 위반(찬양 고무등) 하고 국론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며 구속되었으나 결국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된다. 검찰은 그가 2008부터 2013년까지 집회에서 미군 철수와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고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성명서를 홈페이지에 올리는 등의 혐의기 있다며 구속 기속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특별한 증거같은 것이 없었기에.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남측본부는 '연방제 통일. 주한미군 철수'등 일부 강령을 삭제했지만 여전히 대법원은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판결해 왔다. 그 세력들은 '미군철수'라는 단어만 올리면 경기를 일으키며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핍박해 오고있었다.
나는 이 3총각들과 말은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다. 재소자들과 일반인들과의 대화는 엄격하게 금지돼 있으므로. 면회대기소앞에서 기다리다보면 면회소앞으로 나와있는 재소자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우리 사이의 거리는 1~2미터지만 그냥 쳐다보고만 서있을 뿐 안녕하세요? 라는 말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과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눈 것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건 우리는 눈빛과 표정으로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내게 푸근한 미소를 보내던 이는 이수병이었고 그리고 류근일의 아름다운 미소.. 김을수는 결코 미소를 짓는 사람이 아닌듯 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그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쨋든 우리 네사람은 그들 중 유일하게 젊은 20대였고 그럼으로 우리는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통할 수 었었다 할 수 있다. 65년 말에 대부분의 정치범들은 가석방으로 나왔지만 그 세사람은 제외되어 그로부터도 2년을 더 살다가 나온다. 모두 나가버리고 없는데 자신들만 남는 그 고독과 고통은 어떠했을까. 그 후 세월이 제법 흐른 후 나는 류근일을 두번 서울에서 잠깐 보았을 뿐 두사람은 못보았다. 사실은 그 두사람과 더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류근일은 어떻게 결혼은 하셨느냐 했더니 감옥에 있을 때 누가 위문편지를 보내주어 읽고 있었는데 나중에 석방된 후 보니 남자이름같던 그는 여자라.. 오랫동안 단절되온 환경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고하여 그렇게 결혼을 하였다고. 또 한번은 어는 음악회에서 휴식시간 중 복도에서 마주쳐 잠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길이 너무 길어져 이수병에 대해선 다음 번으로 미루어야겠다.
첫댓글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 그리고 마포형무소
숱한 조선의 혁명가들과 애국자들이
전대미문의 고문과 박해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요
수천수만명의 독립운동자들의
독립의 염원과 피의 원한이
서려있는게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역사의 증거물
적극 찬동합니다~~
문제는 역사의 정의가 전도 된 현상이 계속 되어 왓는데,그것을 지탱해준 미제 군산 세력이 자멸적인 쇠퇴를 추구하는바,이것이 한반도에서 무엇을 결과하게 될지............두렵군요.........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저는 그것이 유일한 희망인데..
@산비탈양 좋은 글 고맙게 잘 보앗읍니다......사필귀정이라 햇으니,잘 이루어 지겟지요.....
아버지께서 훌륭하시네요
그 분의 딸 산비탈님도 그 영양을 받아 의식있는 분이십니다
내 아버지의 딸로서 어떤 실천적
행위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괴로울 뿐입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없는 잔인의 극치를 행했던 그 무리들
편에 섰던 친일파들 그리고 그 악행의 공간..
더 원통한 것은 그 애국자들이 해방이 되어 이승만이후
또다시 그 공간에 구속되어 같은 악행을 당했다는 것.
해방직후 이북의 감옥은
친일한 사람들로 우글우글 했지
미처 남으로 도망치지 못해서겠지
해방직후 이남의 감옥은
항일한 사람들로 빽빽히했지
미처 북으로 넘어가지 못해서겠지
시인 김남주
100퍼 맞는 말씀
괴뢰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뢰란 꼭두각시를 말하는데
우리는 북괴라 했지 남괴란 단어는
안쓴 것 보면 북이 쏘련의 괴뢰란
뜻이지요.
그러나 쏘련은 없어진지 오래고
북의 자립심과 자존감은 현재 세계제일
인 것보면 혹시 미괴라는 남을 뜻합니까.
@산비탈양 당연하지요. 미제의 시다바리 척결할 날이 곧 도래합니다.북은 괴뢰인적이 없어요. 최근에 나온 항미원조란 책을 보며 더욱더 그런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