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에 일본이 한국경제를 일으킨건 부인하고 싶지만 사실 아닙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몇몇 눈에 뛴다.
언젠가부터 이곳게시판에 요상한 논리로 일본을 우상화 하며 감언이설로 아직 성숙되지 못한 나이어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글을 몇번 보았는데. 저와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략 그런 글들에 현혹된 사람들 같아서 진실을 바로 알앗으면 하는 마음에 몇자 적어본다.
여러분들은 밥먹을때 사용하는 쇠젓가락과 쇠숟가락을 아시죠? 어떤 일본 애들이 한국이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이유가 가난해서 오래오래 닳지않고 쓸수있는 쇠젓가락을 사용하는거라며 한국을 비하 하더군요.
우리나라가 쇠젓가락을 사용한 이유를 아십니까?
일제시대 까지만해두 우리나라에서는 왼만한 가정에서는 거의가 황동젓가락을 사용했다.최하 빈민층에나 나무젓가락을 사용했을 정도며.밥그릇도 황동그릇을 사용했고 물론 도자기와 황동을 같이 사용했는데 도자기는 값이비싸고 파손이 잘돼는 이유로 상류층에서 많이 사용햇고 서민층에선 주로 황동제품을 많이 사용햇다.요즘 항균효과가 탁월하여 인기끌고있는 방짜 그릇이 황동제품이다.
이처럼 서민층에서 고급 황동제품을 사용하는 나라는 당시에도 전세게적으로 몇이 안돼었을 정도다.그러나 일본이 벌인 전쟁이 계획보다 오래걸리자 전쟁물자 보충하기가 어려워지게 돼면서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물건중에서 전쟁 물자로 사용가능 한것은 무었이든 수탈하기 시작하엿으며 급기야 가정에서 사용하는 황동 숫가락 젓가락 밥그릇 세수대야 까지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가면서 수탈해갓다.
알다시피 전쟁에서 가장많이 사용하는게 총알이고 총알의 재료가 구리다(황동) 이처럼 일본의 전쟁 놀음에 우리나라에 잇는 젓가락 숫가락 은 동이 났으며 다시 만들수있는 재료는 물론 구경도 못하고 전부 전쟁 물자로 징발 돼엇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게 쇠젓가락이다.우리가 왜 쇠젓가락을 쓰고 있는지 알겟는가?일본의 수탈은 황동만이 아니다.우리나라 안에서 나오는 모든물자 금광.은광철광,값을 따질수없는 각종 문화재,그리고 목재(나무)까지,우리나라 20~30년 전만해두 산에서 나무 보기가 힘들엇다.산마다 전부 벌거숭이가 돼엇으며 그걸 복구하는데만 대략 50년이 걸렷다.
일본이 한국경제를 도와주고 어쩌구 하는것은 100원 가지고 있던 사람의 99원을 빼앗고 1원을 도로 주면서 그 1원이 너희를 먹여살렷으니 그 1원을 준 나에게 감사해라 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참고로 1905년도의 세계소득수준 자료가 나왔는데.당시 한국이 970불 일본이 1560불 이었습니다. 그러던것이 일제시대를 거치고 해방직후 1945년 한국소득이 단 90불 입니다.
일본에 점령당하기 바로 몇년전 소득이 970불인데 36년간 점령당한후 해방된 직후의 소득이 단 90불입니다. 이래도 일본이 우리나라 발전의 시작이라고 말할분 계십니까?
-세계속의 한류파워에서 (아이디가 어려워서 못쓰겠네요^^) 펌질-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자본이 식민지 조선에 '적극적으로' 자본을 유치하고 공장을 세우고 철도를 놓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선의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서기 1910년 12월(단기 4243년) 회사령이라는 법을 발표하였다. 회사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 1조 : (조선인)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 2조 : 조선 밖에서 설립된 회사가 한국에 본점이자 지점을 둘 때에도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 4조 : 위 조건을 위반할 때, 그리고 '선량한' 풍습을 위반할 때에는 사업을 정지, 금지할 수 있고 회사를 폐쇄하거나 내쫓을 수 있다.
제 12조 : 제 1 조의 허가를 받지 않고 회사의 설립행위를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5천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부실신고를 하여 허가받은 자도 이와 같다.
일본 '본국'의 경우와는 달리,(거기서는 기업을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허가해 주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가 회사를 적극적으로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총독부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회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억제책을 썼다. 외국 기업도 조선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지부를 세울 수 있어 자유로운 무역활동을 억제당했다.
또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회사는 회사 창업주를 감옥에 가두고 벌금을 물려서 회사를 꾸려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조선 안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회사설립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전(기틀을 닦는 일)을 막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발표하여 조선에서 회사가 세워지고 커지는 일을 막았고,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자본주의가 자라나는 일을 막았다. 비록 서기 1920년(단기 4253년)에 회사령이 철폐되기는 하지만, 이때 성장이 가로막힌 조선의 자본주의는 이후로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이런 조치를 취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자본주의화를 도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회사령이 철폐된 이후에, 그러니까 조선에 일본 자본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공장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만주사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에 세워진 공장들은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에 - 경제적으로 - 도움이 되었는가?
회사령이 철폐된 뒤인 서기 1928년(단기 4261년)의 조사에 나온 경성(서울)시내 토막민(식민지 시절에 생겨난 도시빈민)의 직업 분포율이다 :
*토막민(서울의 빈민) 1143명의 직업 분포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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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명(44.6%) : 무직(無職)
이 도표에서는 빈민의 44.6%가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또 일자리가 있는 사람도 공장노동자가 아니라 대부분 "날품팔이, 지게꾼, 상점고용인, 목수, 인력거꾼, 석수, 회사 직공, 과일 행상"처럼 공업생산에 별다른 도움이 못 되는 일을 하고 있다. 만약 총독부가 조선에 자본주의를 '제대로' 심었다면, 식민지 조선의 빈민들을 공장노동자로 충분히 흡수했어야 했다.
하지만 도표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조선 빈민들은 공장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기껏 일자리가 있다는 사람들은 날품팔이를 하거나 인력거꾼이 되거나 지게꾼이 되는 등 공업화와는 관련이 없는 일에만 종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기 1920년대(단기 4253년)의 일본 자본주의는 식민지 조선에 공업화를 크게 일으키지 못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서기 1930년대(단기 4263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래는 토막민에 대한 서기 1931년(단기 4264년)의 통계이다 :
270명(17.6%)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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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가 되었다는 서기 1931년(단기 4264년)에도 대부분의 빈민들은 공장노동자로 일하지 않고 "날품팔이"로 일했고, 그 다음이 "공사장 인부"와 "지게꾼"이었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농토에서 쫓겨난 식민지 조선의 빈민들을 노동자로 끌어들일 만큼 발전하지도 못했고, 조선에 전반적인 '공업화'를 불러오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조선 빈민들이 "공장노동자가 될 수 있는 길은 대단히 좁았던 것(강만길 교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 때문에 '공업화'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군수공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때인 서기 1942년(단기 4275년)에도 조선 빈민들이 종사한 직업 가운데 "제일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인부(人夫)"(강만길 교수의 말)였다.
조선의 공업화를 앞당겼다면, - 비록 군수 공업일지라도 - 공장노동자의 비율이 높아지고 다른 직업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어야지 그 반대로 공장노동자의 비율은 낮고 날품팔이나 인부의 비율만 높았다는 사실은 일본은 식민지 지배가 끝나는 날까지 조선에 참된 '공업화'를 불러오지도 못했고, 따라서 일본에 의해 '공업화'가 되었다는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 조선에 많은 공장이 들어섰고 우리가 징용을 당하면서 노동자로 불려가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노동력 대부분이 전쟁 기간중에만 동원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공장노동자가 되지 않고 돌아와서 그대로 농민이나 실업자가 되었다. 결국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 때문에 농촌에서 강제로 쫓겨났던 조선의 노동력은 해방과 함께 거의 대부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강만길 교수)"이다.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전쟁기간 동안의 군수공업이나 강제 징용도 조선의 자본주의화에 도움을 주거나 간접적인 바탕이 되지는 못했다.
또 강만길 교수의 말을 빌리면 "서기 1944년(단기 4277년)에 조선에서 생산되는 선철(銑鐵)의 89.4%가 일본으로 반출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생산품의 대부분이 군수공업의 원료로서 일본으로 반출되어 조선 자체의 민수용(민간인용) 중화학공업의 발전으로 연결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공업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공장의 대부분은 북한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것조차도 한국 전쟁때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따라서 남한의 공업화에는 일제시대 남겨졌던 공장들이 별 도움이 안 되었으며 한국(남한)과 조선(북한) - 특히 남한 - 은 완전히 무(無)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다. 만약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 때문에 공업화와 근대화가 가능했다면 어째서 일본이 세운 공장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조선(북한)이 지금은 한국(남한)보다 더 경제가 낙후되고 외부의 원조가 없이는 버티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는가?
게다가 식민지 시대 전쟁을 수행하려고 만든 공장을 돌리던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거의 일본인 경영자와 기술자가 담당했고 조선인이 기술에 접근할 기회는 극히 예외적이었다."(주종환 교수의 말) 이 결과로 "전후 일본인 경영자와 기술자가 본토로 철수한 이후에 남겨졌던 공장은 거의 모두 조업이 정지되어 버릴 정도였다."(주종환 교수) 따라서 일본이 아무리 공장을 세우고 돌렸다 해도 그것이 조선인 기술자나 숙련공을 길러내지는 못했으며, 공업을 발전시키려고 해도 공업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단순 노동만을 할 줄 아는 노동자만 있는 상황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공업정책은 공업화를 불러올 만큼 크게 발달하지도 못했고, 공업화에 도움이 되는 기술자를 길러내지도 않았다. 일본의 조선 공업화는 패전과 더불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갈 정도로 허약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의 공업화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과연 조선총독부는 농업근대화를 일으켰는가?
총독부가 조선에서 한 일 가운데 하나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신고하지 않은 토지를 빼앗고 그 토지에 일본인 농민들을 이주시켜서 지주로 만든 뒤 조선인에게서 소작료를 받게 한 지주제를 확립한 일이었다.
토지소유가 지주와 소작민이라는 봉건적인 관계를 벗어나, 오늘날의 농촌처럼 지주에게 매이지 않고 농민들이 마음대로 땅을 사고 팔 수 있으며 이사를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옮겨갈 수 있고 자기 땅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을 농촌의 근대화라고 한다면, 총독부는 농촌을 '근대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봉건적인 토지소유제도를 더욱 강하게 굳힌 셈이다.
게다가 총독부는 농민들이 그런 지주제도에 반항하거나 불만을 털어놓는 일까지도 경찰과 군대로 강하게 억눌렀다. 반(半) 봉건적인 제도에 대한 인민의 저항이나 불만 제기를 '권력'인 총독부가 억누르고 그 제도를 부수지 못하게 막았다는 사실은 총독부가 '근대화'로 가는 과정을 억눌렀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결과적으로(사실은 의도적으로) 총독부는 조선 농민들과 조선의 농촌이 근대화를 향해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만약 농촌을 근대화 시키려고 했다면 광복 이후 이루어진 토지개혁이나 지주제 타파(조선 - 북한 - 의 경우)로 봉건적인 소유제도를 강제력으로 무너뜨리고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농민들이 자치를 하거나 농민들이 자작농이 되는 일을 막고, 대부분의 농민을 소작농으로 삼아 지주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게 만들어 저항을 허락하지 않은 총독부의 조치를 '근대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농촌에서 일하던 농민들은 과연 자본주의에 도움을 줄 만한 존재들이었는가?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답변은 부정적이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쳐야 했는데,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중요한 매개체인 '돈'이 아니라 곡식이라는 '현물(現物)'이었고 그것도 수확량의 50%를 넘었다. 농민에게는 거의 남는 것이 없었다.
소작료를 낼 때 돈이 아니라 곡식이라는 현물로 내야 했던 자체가 자본주의적이지 않거니와, 잉여 생산량의 대부분을 소작료로 바치고 남는 것이(소비활동에 쓰거나 다른 일에 투자할) 거의 없어서 소비자가 될 수 없었던 농민들이 자본주의 경제에 기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신구속관계도 근대적이지 못했다.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관계 자체가 봉건적인 관계였다. 또 지주는 (마치 중세 서유럽에서 영주가 '중요한 노동력'인 농노를 단속했듯이) 농민들이 지주에게 진 빚을 반드시 갚도록 소작인을 '5인조 제도'로 묶어 서로 감시하도록 하고 소작인이 '도당을 만들고' '불온한 언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소작인은 마음대로 이사하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는 일도 엄금했다.(중세 서유럽의 농노제도와 다를 게 무엇인가? 이것이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 인가?)
또 소작인은 지주에게 완전히 매여 있었다. 비료를 사거나, 씨앗을 사거나, 농기구를 사거나, 농사에 쓸 소를 빌리는 데에도 지주에게 기대야 했고 이는 농노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일제의 지주제도는 자작농을 몰락시키고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가 나타날 길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강만길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
서기 1916년에는 자작농 비율이 20.1%, 자소작농(자작농이면서 소작농 - 옮긴이)이 40.6%, 소작농이 36.8%, 지주가 2.5% 였습니다. 소작농 비율이 36.8%인 데 비해 자작농과 자소작농을 합친 비율이 60.7%나 되어 농촌중간층이 그만큼 많았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16년 뒤인 서기 1932년에는 자작농 비율이 16.7%, 자소작농이 26%, 소작농이 54.2%, 지주가 3.7%로 변했습니다. 자작농과 자소작농을 합친 비율이 60.7%에서 42.7%로 감소한 데 비해 소작농이 36.8%에서 54.2%로 크게 증가하고, 지주도 2.5%에서 3.7%로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미증식계획은 또 어떤가? 쌀 생산량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이익은 경작농민층에게 돌아가지 않고 지주들에게 돌아갔다. 또 돈이 아닌 현물(:곡식)로 내야 하는 소작료 제도는 기껏 늘어난 쌀 생산량을 대부분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결과를 불러왔고(산미증식을 위한 토지개량 지역에 과세가 집중됨), 잉여량을 모두 그런 식으로 빼앗긴 농민들은 자주적인 주체로 자라나지 못했다.
결국 조선총독부의 조선 농업정책은 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를 가로막는 반(半) 봉건적인 것이었으며, 조선 농민들에게 근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농노제와 같은' 지주제를 가져다 주었다.
*맻는 말 - '잘못된 신화'에서 벗어나길 바라면서
지금까지 필자는, 간단하게나마 우리나라의 농업과 공업이 식민지시대부터 크게 일어났다는 주장을 통계와 자료를 통해 반박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크게 괴로왔던 점은, 아직도 논의될 가치가 없는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주장이 우리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공업화와 근대화로 이어지지 못한 사실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그저 겉모습만 보고서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행태가 이런 사관을 낳았다.
그러나 나는 아울러 '식민지 = 무조건 수탈' 이라는 등식만을 꼭 붙든 채 '왜,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얼마나' 식민지와 공업화, '근대화'가 연결되어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은 지금까지의 한국 역사학계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구태의연하게 '수탈'만 강조하고 있다가 결국 '자료와 증거를 동원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게 날벼락을 얻어맞은 셈이니까.
앞으로의 역사학은 - 비록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 감정에서만 보는 태도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로 하나하나 따져 보고 반박할 줄 아는 자세를 요구하며,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도대체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개소리를 하는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그 잘난 철도 개설 산미증식 모두 수탈을 위한것아닌가 아니라고 반박해보라... 그리고 고등교육은 시키지 않고 딱 부려먹을만큼만 시키는.. 물론 한인에게는 기술이전도 없었지.. 무엇보다..
일본이 해준것(?) 아니면 남겨놓은것(?). 정확히, 아주 정확히 표현해볼까요? 일본이 제국주의로 조선을 먹구나서 조선을 좀 더 "이용"코자, 좀더 "수익률"을 높이고자, "이것저것"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익률"을 높이며 한참 "재미"보다가 지가 망해서 철수했습니다. 그런데
고마운 존재 아닙니다.........하지만 부인을 할수록 더욱 한국만 비참하게 된다는것을 잊지 마세요 아무리 시대의 대세와 흐름.그리고, 근대화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나..우린 먼저 우리 손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해방 시키지 못한 것을 먼저 뻐 아프게 깨달아야 합니다
샤이링님아 ..;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분명히 우리 힘으로 개혁할수 있었습니다. 일제가 우리민족의 발전을 오히려 퇴화시킨겁니다. 쓸데없는 식민지 사상만 심어놨구요. 근대화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만, 일본에게 돌리지 말자니.......정말 만원 뺏기고 1원 준 놈들 욕을 하지말라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담담할 일이 따로있쬬. 우리가 일제에게 받은 고통은 용량이 모자라 못써요. 아주 작은 영향을 끼치고 훨씬 많은것을 빼앗았다면 그건 없는거나 마찬가지죠..ㅡ.ㅡ; 님 저번에 일본을 제대로 알자는 글 올리셨을때는 제가 그래도 긍정적으로 봤지만,이건 아닙니다. .ㅡ.ㅡ; 일제만큼은..이건 정말 아닙니다. ;;;
하나의 예로 박정희...강제적으로 시행했지만....영향 안 받았습니까? 씨너지 효과 없었습니까? 당연히 일제시대는 박정희와 다르겠지만.. 강제>>라는 것을 두고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전 박정희 싫어요 하지만 장점,단점 있지 않았습니까? 결론은 일본에게 영향 받은거 부인할수 없다는 것이구요
물론 우리가 일본에게 좋은 것보다는 피해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악이 많다고 해서 있던 영향을 받았던 것 까지 모조리 부정 하면 안되겠지요......... 지금 제가 허리가 아파서 (다쳤어요) 오래 이야기를 올릴수도 없구요.. 자료 올리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 주세요......저도 처음에 이 말에 대해서 절대 반대였어요
그리고, 정 궁금 하시다면 이걸 네이버에 올려 보세요.. 예의 있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이야기 해주고, 자료도 올릴것입니다.....더이상 못하겠네요 그리고, 장난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과 진담으로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 판단해서 이야기 하고, 질문을 해보세요 더이상 못하겠습니다.. 다음에 뵐께요 그리고
일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봤을 때 일제시대는 암흑기이자 밑빠진 독의 시기였다. 조선의 물질적 성장은 커녕 경제 파탄 났고, 정신이나 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엉망진창. 36년동안 가만히 있는 조선에 쳐들어 와서 한바탕 휩쓸고 빠져버린게 일제다. 물론 당시 국제 정세에 대응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무능력이
첫댓글 저도 위에꺼 젓가락이야기는 국사공부하면서 들은적있어요 학원에서...^^ 참 힘겹게 여기까지 이룩했는데..양쪽 나라의 시달림과 국회와 정부들이 썩어서..죈장...
하나 더 옷 만든다고 삽살개가 국내에서 당시 멸종 됐죠 -_-;
나는 도대체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개소리를 하는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그 잘난 철도 개설 산미증식 모두 수탈을 위한것아닌가 아니라고 반박해보라... 그리고 고등교육은 시키지 않고 딱 부려먹을만큼만 시키는.. 물론 한인에게는 기술이전도 없었지.. 무엇보다..
그나마 있는 산업시설은 북쪽에 있었고 그래도 남은 찌꺼기는 6.25때 박살났다 이래도 한국의 부흥에 일본이 있다는 개소리를 지껄일것인가...
산미증식때 오로지 쌀만 만들게 하는대 증식이 안되면 오히려 신기하지.... 물론 그쌀은 부산항에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일본에 가져가는...
근데.... 그때의 일본보다 지금의 중국이 더 못사는건가......
하여튼간 박정희 찬양하는 놈하고 일본 찬양하는 넘들은 똑같은 넘들이다. 그들이 행한 악행의 핵심사항은 안보고 부수적으로 딸려온것들을 보고 훌륭하다고 한다. 그런 논리로 하자면 미국이 한국 무력 점령해도 미국 찬양할 놈들이다.
자.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에 들어가면서 일반 사람들의 학력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낮은 학력과 기술이 없어서 제대로된 직업을 선택할수 없었고, 공무원이 된다고 해도 낮은 하급 공무원 밖에는 할수 없었음 >일반 사람
그리고, 회사를 설립하는 기준과 억제 정책은.. 둘로 볼수 있지요 하나는 사회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2..너무 급성장하고, 무분별한 회사 설립과 ...어차피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일본의 이익에 반하게 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밑에 말은 거의 맞습니다.......그러나 대부분 근대 산업화가 되면서 일반 농민(가난한 사람들의 피해가 가는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쩔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겠지요 )
어차피 모든 일에는 앞과 뒤가 있습니다...... 모두 긍정적으로 할수는 없으나.. 영향을 받은것은 부인못합니다.
일본이 해준것(?) 아니면 남겨놓은것(?). 정확히, 아주 정확히 표현해볼까요? 일본이 제국주의로 조선을 먹구나서 조선을 좀 더 "이용"코자, 좀더 "수익률"을 높이고자, "이것저것"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익률"을 높이며 한참 "재미"보다가 지가 망해서 철수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이것저것"을 두고 지금 "해준거(?)", "남겨놓은것(?)" 아니면 아주아주아주 좋게 말해서 '영향을 받은것(?)' 이렇게 말하자는 건가요? 아무리아무리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고마운 존재가 아닙니다. 헷갈리지 맙시다.
고마운 존재 아닙니다.........하지만 부인을 할수록 더욱 한국만 비참하게 된다는것을 잊지 마세요 아무리 시대의 대세와 흐름.그리고, 근대화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나..우린 먼저 우리 손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해방 시키지 못한 것을 먼저 뻐 아프게 깨달아야 합니다
맨날 일본이 ..일본 때문에.. 일본의 잔인성 욕심때문이라고 할수 없구요.. 자꾸 남에게 돌리지 말자구요. 좀 받아들일수 있는것은 담담하게 여유롭게 받아들일줄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샤이링님아 ..;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분명히 우리 힘으로 개혁할수 있었습니다. 일제가 우리민족의 발전을 오히려 퇴화시킨겁니다. 쓸데없는 식민지 사상만 심어놨구요. 근대화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만, 일본에게 돌리지 말자니.......정말 만원 뺏기고 1원 준 놈들 욕을 하지말라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담담할 일이 따로있쬬. 우리가 일제에게 받은 고통은 용량이 모자라 못써요. 아주 작은 영향을 끼치고 훨씬 많은것을 빼앗았다면 그건 없는거나 마찬가지죠..ㅡ.ㅡ; 님 저번에 일본을 제대로 알자는 글 올리셨을때는 제가 그래도 긍정적으로 봤지만,이건 아닙니다. .ㅡ.ㅡ; 일제만큼은..이건 정말 아닙니다. ;;;
애국소녀님.. 제가 일제시대때 우리가 받은 고통과 억울함을 모르는거 아닙니다 그러나 자꾸 과거에 억매여 어떻게 하자는것입니까? 지금 일본보다 중국의 문제가 더 급합니다 지금 이라크다 ..노조다..반미다 반일이다를 떠나서 중국이 더 급하고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 입니다
하나의 예로 박정희...강제적으로 시행했지만....영향 안 받았습니까? 씨너지 효과 없었습니까? 당연히 일제시대는 박정희와 다르겠지만.. 강제>>라는 것을 두고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전 박정희 싫어요 하지만 장점,단점 있지 않았습니까? 결론은 일본에게 영향 받은거 부인할수 없다는 것이구요
물론 우리가 일본에게 좋은 것보다는 피해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악이 많다고 해서 있던 영향을 받았던 것 까지 모조리 부정 하면 안되겠지요......... 지금 제가 허리가 아파서 (다쳤어요) 오래 이야기를 올릴수도 없구요.. 자료 올리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 주세요......저도 처음에 이 말에 대해서 절대 반대였어요
그리고, 정 궁금 하시다면 이걸 네이버에 올려 보세요.. 예의 있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이야기 해주고, 자료도 올릴것입니다.....더이상 못하겠네요 그리고, 장난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과 진담으로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 판단해서 이야기 하고, 질문을 해보세요 더이상 못하겠습니다.. 다음에 뵐께요 그리고
그리고, 자꾸 실망하셨다고 하시는데요 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어요 굳히 일본과 한국으로 나눈다고 본다면 전 한국입니다
일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봤을 때 일제시대는 암흑기이자 밑빠진 독의 시기였다. 조선의 물질적 성장은 커녕 경제 파탄 났고, 정신이나 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엉망진창. 36년동안 가만히 있는 조선에 쳐들어 와서 한바탕 휩쓸고 빠져버린게 일제다. 물론 당시 국제 정세에 대응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무능력이
근본적인 문제였지만 샤이링 말처럼 일본이 긍정적인 영향을 조금이라도 줬다든지 하는 말은 정말 터무니없다. 일본이 없었다면 적어도 해방후 국민소득 90불의 세계최빈국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동아시아에서 정신적, 학문적 선진국이라는 입지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근데 만수 아빠는 도망 갔나봐.. 킥킥
만수 아빠는 다른 글에서 열심히 한류 씹고 있던걸요. 여기나 나타나실 것이지..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