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통권 031호) - 북한 판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가는 지하교인들을 살려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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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판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가는 지하교인들을 살려내자
이민복
1. 서 두
북한은 오래 전부터 종교를 없앤 세계 유일한 나라라고 공언했다. 이것은 그만큼 종교적 존재인 인간의 권리를 없애려고 얼마나 가혹한 제재를 가하였겠는가를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없앨 수 없듯이 지하에 종교인들은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어떤 악조건에서 신앙을 견지하며, 발각되는 경우에는 어디에 끌려가 죽어가고 있는가를 그곳에 살다가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북한인들의 체험을 근거로 고발하려 한다. 이와 함께 그들을 살려내자는 운동을 남한과 전세계 종교인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2. 체험한 북한 지하 종교인들의 실태
1) 탈북자 강철환(92년 남한도착)의 정치범수용소에서 체험한 사실
북한에는 삼대에 이르기까지 멸족시킬 타도의 대상의 하나로 꼽는 것이 종교인들이다. 정권수립이래 북한정권은 무자비하게 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박해를 피해 많은 종교인들이 남으로 갔다. 북에 남아 있는 종교인들 중에 노출된 종교인들은 처형되는 한편 모두 수용소에 끌려갔다. 내가 있던 함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에도 몇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미친 사람으로 불리 우는 모욕과 다른 정치범들 보다 더 혹독한 강제노동을 받아야 했다.
기독교인으로 낙인 찍혀서 수용소에 끌려오면 다시 살아 나갈 수 없는 데도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단 한번만 부인해도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들을 끔찍한 수용소생활에 맡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한에 와서 기독교인이 된 후로 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탈북 과정 생사 시점에서 구원을 위해 그렇게도 기도 드렸던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를 양자로 삼아주신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새 삶을 시작하였다.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 기관잡지 [생명과 인권]1999년 여름 호, 18∼19페지)
2) 탈북자 이순옥(1995년 남한도착)의 북한 교화소에서 체험한 사실
1990년,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그의 남편 장성택의 개인 예언가로 있던 김연옥이라는 여인이 내가 갇혀있던 개천수용소에 끌려왔다. 그는 36살로서 남포지구에서 애기 무당으로 앞날을 잘 맞춘다고 소문났다. 이 소문으로 중앙의 간부와 부인들이 찾아오다 못해 김경희 부부의 귀에까지 들어가 단골무당이 되었다. 매년 12월31일이면 평양에서 벤츠가 와 이 무당을 데려갔다. 무당은 0시를 기하여 그들의 새해운세를 봐 주었다. 이 대가로 칼라TV와 냉장고, 옷감 등의 선물을 받아 왔다. 한편 생활이 어려워진 주민들도 앞을 다투어 앞날을 잘 맞춘다는 이 무당에게 찾아왔다. 날이 감에 따라 그 수가 늘어나자 많은 사람들에게 미신을 믿게 한다는 이유로 결국 아기 무당을 체포, 수용소에 끌어왔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함북도 길주군에서 온 김옥순(60세), 새별군에서 온 김명희 등 20여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일괄적으로 중형인 10년형을 받고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을 시키는 낙후자반에서 노동, 실례로 변소 푸는 일을 전담시킨다. 수시로 사상투쟁을 할 때마다 미신을 섬기지 않으면 똥 푸는 일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하지만 그 들은 울면서도 하늘에서 그런 계시가 오니 우리가 하기 싫어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 하며 승복하지 않았다.
( 이순옥 저.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 228∼230페지. 1996 도서출판 천디미디어)
3) 정치범 수용소 경비대원 출신 탈북자 안명철(94년 남한도착)의 증언
저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 경비대원으로 있으면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인권유린 만행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정치범수용소라는 데는 종교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는 곳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수감자들 중에서 저는 제22호 집단수용소의 38노동분대의 한 노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와서 다른 수감자 보다 더 혹독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70대의 고령 이였던 그 노파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작업 중이나 잠자리에 들어서나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정치보위부원들의 눈총을 샀습니다. 하루는 어린아이가 노역에 동원 되여 옥수수를 차에 제대로 싣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위부 요원에게 매를 몹시 맞고 있는 것을 본 그는 나직히 기도했습니다. 저들이 하는 행위를 알지 못하나니 용서하소서. 곧바로 요원들은 군화발로 그 노파를 짓 발부며 이 미친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무지하게 맞은 노파는 그 날부터 여러 날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김일성 부자가 북한의 유일한 신이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이단일 뿐만 아니라 미친 것으로 간주됩니다. 또 모든 종교는 아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남한에 와서 한동안 교회 나가기를 꺼렸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똑바로 알게 해준 교회와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 잡지-[인권과 생명] 1999년 여름 호, 14페지)
4) 탈북자 안혁의 정치범수용소에서 체험한 사실
황북도 사리원에서 목사의 딸이라는 여인이 자녀들과 함께 내가 있던 요덕 수용소에 끌려왔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후에 알고 보니 기독교를 몰래 전도까지 하다가 체포 되여 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목사인 아버지는 처형되고 가족은 추방 되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으로 받은 신앙 충만으로 유배지에서도 전도한 것 같다.
남정들도 굶주림과 고역으로 견디기 힘든데 아 여자에게 가장 더럽고 힘든 일을 시키면서 기도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강압하였다. 특히 생활총화 때마다 집중적인 사상투쟁대상이 되어 비판무대에 세워지군 하였다. 그 때마다 그 여인은 기도를 안 하겠다 거나 하나님을 안 믿겠다 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단지 일을 더 잘하겠다는 말만 반복하였다. 사실 그 여인만큼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 막막한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그 만큼 평안한 얼굴로 살고 품행과 인사성 좋은 사람은 없었다.
기도를 한다고 혹독한 제재를 가하는 것을 보아 기도라는 것은 간첩 흉계나 꾸미는 것만큼 나쁜 행위인가 하고 우리는 생각하였는데 지내보니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견디기 힘들 때에 그 여인은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 주여, 주여하며 속삭이듯 하는 것이 기도인 것 같았다.
...어느 날 새벽 아이들과 여자의 비명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정치보위부 측은 그 여인의 가족을 강제로 차에 태우고 있었다. 다시는 살아 나올 수 없다는 수용소 안의 수용소인 완전 통제구역에로 끌고 가는 중이였다. 정이 메말라 버린 수용소 사람들이지만 그 날만큼은 이상하게 모두 나와 멀어져 가는 그 여인가족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안혁 저. 요덕리스트. 1994. 도서출판 천디미디어)
3. 북한 종교정책의 양면성
1962년 김일성은 노동당 제4기 4차 전원회의에서 기독교, 천주교 집사이상의 모든 종교간부를 처형, 그 밖의 일반종교인들은 개심(改心) 하지 않으면 수용소에 가두었다고 언급하였다. 이 한마디만 가지고도 종교탄압의 정도를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골적인 종교말살정책으로는 대외, 대남 사업에 지장이 있다는 것을 느끼자 전술적으로 다음과 같이 종교정책을 펴고 있다. 그것은 1975년에 한 김일성 비밀교시의 내용에서 잘 나타나 있다.
교시를 요약해보면 남조선과 국제사회에 많은 종교인들이 있는바 우리가 종교를 다 없앤다고 하면 그들이 싫어하여 적이 많아지므로 중앙종교조직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종교를 왜 믿지 못하게 하느냐는 외부사람들의 질문에는 인민들이 각성하여 믿지 않을 뿐 종교는 허용한다고 변명하였다고 실토하였다. 이러한 종교정책으로 종교의 자유를 북한헌법에 명시해 놓았으며, 당 핵심들로 구성된 조선 기독교연맹, 조선 불교도연맹, 조선 천도교연맹 등 종교단체들도 있다.
그러면 진짜 종교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존재하며 단지 숨어 있을 뿐이다. 북한당국은 이들을 찾아내지 못해 혈안이 되고 있으며 찾아내면 곧바로 아우슈비츠와 같은 국가정치범 수용소에 끌어가 고통 속에 죽게 한다. 전쟁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평화시 이와 같은 수용소가 북한에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아우슈비츠보다 더하다.
4. 호소하고 싶은 말
위의 체험사실들이 말해주듯이 북한당국의 탄압 속에 지난날에도 이 순간에도 죽어 가는 신실한 우리의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종교암흑지대, 우리에게 있어서는 집안 선교지인 북녘 땅을 등한시하고 해외선교를 부르짖는 것은 어쩌면 자기기만일지도 모른다. 반세기이상 그들을 잊어 왔고, 혹은 알면서도 아무 대책 없이 지금껏 지내왔다면 우리는 진정 회개하고 그들을 살리기 위한 기도와 행동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수용소에서 죽어 가는 교인들을 살려내는 운동을 하루빨리 벌려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적인 서명운동(인터넷 포함)과 언론을 통하여 공감대를 불러 일으켜야한다. 한편 종교 지도자들이 적극 나서 국제 종교조직과 유엔 인권위원회, 엠네스티, 국제 적십자사 등에 이 문제를 상정하여야한다. 북한당국의 반 종교정책과 전략에 휘말리거나 위축되지 말고 오히려 원칙적으로 적극 대처해 나가야한다. 그러자면 국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야 한다. 정보통신시대에 맞는 조직형성도 좋다고 본다.
종교계의 대북 지원이 많은 것만큼 그 때마다 신앙인의 점잖을 갖추고 끈질기게 수용소 교인문제를 상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종교인들의 많은 방북이 있었지만 견학을 할지언정 이런 문제를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볼 때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지하교인들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는가. 북한 지하교인과 달리 방문객으로 온 종교인들을 죽이거나 수용소에 끌어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믿음의 형제가 수용소에서 죽어가고 있는 데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 초보적 인간성의 문제일 것이다.
지난 반세기이상 그냥 지내왔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반성하며 이제라도 적극 분발하여 그들을 살려내자고 호소하자.
첫댓글 큰교회 목사님들은 지금 용천에 돈을 보냅니다. 김정일이 중국에 빌며 달라고했던 400억원을 용천하나로 끝장 냈습니다. 교회가 헌금으로 돕는 이미친짓은 그나마 김정일을 실용주의로 돌아서게 하는 중국의 노력(?)마저 무색케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