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혜정 시인>>
<<허혜정 시인의 양력>>
* 1966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
*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同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 1987년《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 1995년 《현대시》 평론상에 당선,
*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도 당선되어 시인이며 평론가로 활동.
* 2010년, 제11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수상.
* 시집,『 비 속에도 나비가 오나』,『적들을 위한 서정시』등 있음.
* 학술서 『 혁신과 근원의 자리』, 『 현대시론』(1,2권), 『 멀티미디어 시대의 시창작』, 『 에로틱 아우라』,
『 처용가와 현대의 문화사업』 등 다수 있음.
* 계간『 시와 사상』,『 서정시학 』,『 시인새계 』편집위원으로 활동.
* 현재, 한국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허혜정 시인의 대표 시>>
시인과/허혜정
북적이는 연회장에 아픈 얼굴이 있다
방명록을 들치지도 않고, 기념사진도 찍지 않는
별달리 알아보는 이도
그의 외떨어진 걸음을 좇아가는 이도 없는
아무도 무슨 시를 쓰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그저 수상자를 위해 찾아왔을 하객인 누군가가
특별히 만난 일은 없었지만
그대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진실로 간직하고 싶었노라 말하고 싶다
무어라 할까, 이상하게 오래 남아 울리던 말들
어둠 속에 바삭이는 비밀의 필사본처럼 적막에 싸인 세계
낡은 목조 책상이 놓인 실험실을 떠올렸었다
그대의 책장에서 원소들이 담긴 유리병을 상상했다
마그네슘같이 흰, 또는 붉고 푸른 냄새와 맛을 간직한 가루
얇은 백지에 조심스레 쏟아낸 말들의 결혼을
불꽃반응을 관찰하는 아이처럼
신비스런 말들을 천천히 되새기면
알코올램프에서 팔락이며 피어오르는 휘푸른 불꽃
눈망울을 아리게 하던 불꽃
사각이는 글자를 온기로 물들이며
예민한 불꽃을 피워내는 영혼의 원소들
빛을 향해 끌려가는 침묵과 먼지 냄새 가득한 꿈
그대 언어의 빛은 얼마나 고적하고 슬펐던 것인지
숲속의 파일/허혜정
-산남동에서
그것은 봄날에 들었던 아이의 노래니
봄풀 우거진 매봉산 어귀에서 아이는
유치원가방을 던져두고 쪼그리고 앉았다
나뭇잎을 양산마냥 받쳐 들고 천 년 전의 일을 하는
흙 개미들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석양이 비껴드는 소나무 곁엔
아이가 모아놓은 마노돌이 반짝거린다
푸른 힘이 고여 가는 나무밑동과
노을에 물들어 황금가지가 된 강아지풀들
아이의 머리 위로 해넘이의 하늘은 펼쳐져 있다
여기 위대한 눈빛을 가진 작은 사람이 있어
아 문득 사랑으로 올려다보는 하늘
두유 몇 모금 삼키다 말고
방랑하는 종족처럼 아이는 떠돈다
신비가 바스락이는 숲을 조건 없이 누린다
헛된 질문 없이도 모든 해답을 누린다
내려가는 길, 흙을 밟고 내려가는 길
봄에는 한배 가득 알을 품은 언치 새를 보았다
빌 찌르르 듣고 싶은 대로 들리는 새 울음처럼
아이의 가느다란 허밍을 듣고 있던 것이니
말벗/허혜정
분명 눈매가 날카롭던 그인데
피식 웃음을 날리는 그
처음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맑은 저수지가 내다보이는 실업자의 집
황태랑 막걸리를 먹었다
세상만사가 좀 허무해졌다면서도
단련된 펜은 지방신문 생활칼럼을 쓰고 있다
텃세 심한 세상 눈 밖에 난 돌멩이처럼
어차피 혼자여야 하는 생의 독방으로 돌아온 그는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를 읽고 있다
중세의 어둠은 지금도 지속되는 것인지
부대끼던 아픔 상처투성이 대화도 없이
시골 방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우리는 빛바랜 대학시절 글을 읽는다
어허 좋다, 좋지 이 말 벙벙하게 웃으며
넓고 큰 발로 세상을 짚고 선 산을 보았다
삶이 대단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달디 단 말은 거짓말이 되니까 싫었다
세상 끝에서 시간의 폐허를 지키던 착한 백치는
침묵한 게 아니다. 이름을 고집하는 생을 거부했을 뿐
밤의 스탠드/허혜정
이 아름다운 스탠드는 우리가 고른 것이다
작은 유리구슬을 당기기만 하면 부드러운 빛이 퍼진다
텅스텐 필라멘트처럼 위태롭게 깜빡이며
잠옷 위로 흐린 그늘을 만드는 빛
벽 위에 어슴프레 번져가는 그림자의 금
하나의 시공간에 엄연히 두 개의 삶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
하긴 어떻게 두 사람이 다 만족하는 사랑이 있는가
나날의 타협으로 쌓아올린 흐린 유리성
두 개의 상처를 이어 붙인 솔기처럼
하나의 행은 끝없이 이어진다
밤의 불빛 속으로 다가오는 피로한 얼굴
한 사람은 곯아떨어지고 한 사람은 깨어 있는 침대
이상한 슬픔이 몰려오고 갑자기 섬뜩하도록 차가운 정적
집이 텅 빌 때 느껴지는 그러한 정적
사랑. 누가 그 처음의 뜨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서서히 식어가며 함께 누워 있는 욕조처럼 편안해지는 것
그리고 창백한 타일 위에 고여 있는 물방울처럼
싸늘하게 말라가는 외로움
사랑을 끝내기는 힘든 일이다
어쨌든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상한 그늘 아래 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생활 그렇게 사실적인 그렇게 정확한
마시고 먹고 대화하는 식탁의
그 침대의
그 불빛의
그 외로움의 그늘 아래
아버지의 선물/허혜정
그는 신간서적 하나를 건네주기 위해
낡은 소나타를 끌고 120킬로를 달려왔다
나는 기절할 뻔했다 하기야 오늘뿐인가
골머리를 싸매던 노트를 저 멀리 밀쳐두고
나는 작은 왕녀처럼 성장을 하고
아버지 손에 끌려나왔다
어느덧 성탄의 불빛으로 물든 거리에는
줄무늬 지팡이 같은 것을 매단 커다란 트리
넓직한 테이블엔 팔락이는 촛불과 달콤한 샐러드
커피밖에 모르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먹어라. 건강을 돌봐야지
사람들 속에서도 나만 보고 걷는 아버지 곁에
나는 아이만 지켜보며 걷는다
떨어진 아이의 장갑을 주워주는
이 겸손한 남자의 사랑
그가 건네준 책은 다시 나의 램프다
당신이 사랑하던 책들은 내 책장에 꽂혀 있다
당신의 언어는 나의 말 속에 흐르고 있다
혼곤히 아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맡에 기대어
성탄의 기적처럼 새 작품을 생각한다
별이 빛나고 있다
적들을 위한 서정시/허혜정
다시 의문은 시작되었다
숙맥들은 눈치채지 못할 신호를 돌리다
슬며시 자리를 터는 그들은 어디로 몰려가는 걸까
뒤늦게 홀로 구두를 찾아 신고 내려오는 시간
확실히 내가 모르는 암호가 있는 것이다
악수도 모르고 멀어지던 거만한 그들
무언가 안 보이는 벽 너머에서
내일이 있는 척 웃어대던 얼굴들
나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를
흥나는 대로 지껄여대던 혀들
내심 옆사람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알 수 없는 귓속말을 즐기는 그들
굳게 잠가놓은 안쪽에서 그들이
어떤 세상을 세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함부로 넘겨짚진 않지만,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건
벽 너머 세상, 어쩌면 그 호기심조차
다 똑같은 목적 때문이라 생각할지 모를 그들
그래서 혹 내 꿈을 안다고 재단해왔을지 모를 그들
하지만 성공까지는 바래본 적이 없다
종이가 무엇이란 걸 알기 때문에
목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다
닥치는 대로 쓰고 핸들을 돌리고 돌리다 보면
어디선가 들어맞을지 모를 숫자를 찾아
한 칸씩 한 칸씩 정교하게 조합해 맞춰보는 퍼즐
반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방향을 틀었다
알았다고 생각할 때 바보같이 머리를 쳤다
알 만한 농담으로 웃어넘겼던 말도 생각하며 걸었다
오늘 다시 틀렸다고 생각한 말들을 지운다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떨어져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
차갑고 단단한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단어는 뭘까
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이라면
시 같은 건 손대지도 않았다
라이벌/허혜정
난 그대들의 지식과 용기를 높이 사
어지간해서 꺾이지 않는 고집을 존중해
꽤 시원스런 성격에 날카로운 위트
밤새도록 퍼마셔도 끄떡없는 체력
읽어치우기도 버거운 책들
하여튼, 대단한 인간들
어차피 한 번은 붙어야 할 바닥이지만
오랜 동안 펜을 칼집에 꽂고 있는 하수가
고수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지
조무래기는 상대하지 않는 그들
숨쉬기가 편해지면 끝장난 거야
고요히 스트레이트잔을 쥐고
칠흑의 비바람 속에서도
움켜쥔 검만을 노려보는 자객을 생각한다
울부짖는 정신을 칼 끝에 모으고
우주와 일체가 된 확실한 중심을
그들의 논문, 행간마다 숨어 있는 비밀을
나는 숨막히게 쫓아온다
한 자루 펜을 쥐고
머리꼭대기에서 소리 없이 내려와
대들보 뒤로 바짝 다가붙은 그림자
떨리는 시위줄을 턱끝까지 당겨 쏘아날리는 화살
조심해야 한다는 걸 경고하고 싶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의 급소를 보고
단숨에 손가락에서 튕겨나가는 힘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게 이 바닥이야
허를 찌른 칼날에 흡, 숨을 삼키는 낭패한 얼굴
유연한 무사들이 춤꾼처럼 어우러진 심야의 혈전
칼날 부딪치는 소리를 백지 위에 뿌리고
베어넘긴 문장을 가소로이 굽어보며
고요히 빗장까지 지르고 나오는
나의 복수는 깨끗할 것이다
박경리의 집/허혜정
그가 토지를 탈고했던 집은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실내에는 손때묻은 책들과 앉은뱅이 책상
간소한 저녁상을 마주했을 남루한 식탁
긴 침거의 시간, 그는 그저 원고를 출판사에 부쳤을 뿐이다
처연한 바람소리를 삼키던 창밖에는
거듬거듬 주워온 돌을 박아 만든 오솔길
모든 온기를 가져간 사람들이 떠난 후
그는 홀로 시린 원고지로 남았다
시베리아 북서풍이 유리창을 두드리면
구들장에 가득했을 고뇌의 밤을 생각해 본다
갈 곳조차 잃어버린 마음을 더듬던 날들
바람 심한 가지에서 그는
뿌리째 거둬들일 수 없는 아픔을 읽었을 것이다
저버리지 않고는 때놓을 수 없는 걸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혼자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리라
역사에도 바람이 냉갈령을 부리는 겨울이 있어
못견디게 살다간 얼굴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아픔을 비쳐보던 작품
그저 몇 권의 책이 남아있음에 감사하면서
고요히 정좌해 말들을 기다렸을 고적한 공간
한나절 강쇠바람 물러가는 소리에 귀기울이듯
이따금 수척한 낯빛으로 찾아오는 딸애를 그리워하듯
먹이를 흩어놓고 배고픈 짐승들을 기다리듯이
얼룩진 마음의 요를 펼쳐 말리던 마당에는
기다림이 없어도 쓸쓸한 능선 너머 돌아오던 봄
무슨 뜻이었지? 무슨 말이었나?
문고리를 놓고서도 손가락이 아릴 때
나는 왜 나를 돌아보고, 노래할 수 없음을 알고
오랜 고통이 녹아가는 순간 나는 흐느꼈다
기억과 세상의 모든 것에 의해
우리는 회복되는 것이니
오시리스의 배/허혜정
아직 불빛이 남아 있을까 창가에서 살펴보면
마지막 불빛 한 점 눈을 아프게 했다
늦도록 밤을 잊은 그는 누군지
그 어떤 고통의 자욱들을 지웠는지 아는 이는 없다
얼마나 기나긴 시간이 지나갔는가
오늘밤 나의 노트에는 나일강이 흐른다
아름다운 별빛의 강. 내 사랑의 간절한 고통이 올 때
낡아가는 말들로 빛의 관을 짠다
상실은 영원의 밤으로 출발하는 시작이니
아팠던 심장을 항아리에 봉하고
모든 시간의 이야기를 벽화로 새겼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그대는 먼지요 기억이요
이 한 줄의 문장보다 아무 것도 아니다
말라가던 말들은 가슴 깊이 그림자로 새겨졌다
아팠던 펜을 내려놓고 침대로 돌아가면
손가락을 더듬는 바람의 창백함
피로한 몸은 한줌의 잠을 목말라 하는데
가느다란 유골처럼 자그락이는 말들
침묵이여 다가와 나를 지우라
잠결에 뒤척이던 근심의 물결마저 잠잠해질 때
망각의 강 추억을 싣고 머나먼 우주를 항해하던 사람들
다시는 철석이는 물소리도 이름도 갈망도 없이
어떤 아픔도 손대지 않은 채 남겨두는 곳
수평선의 빛이여, 나를 축복하소서
나의 사랑은 끝났습니다
유리 부는 사람/허혜정
뜨거운 유리액이 필요했을 뿐이다
세상에서 더럽혀지기 쉬운 약간의 숨결이
아직도 기계의 조형을 거부하는 그들은
파이프에 매달린 유리방울에
천천히 숨결을 불어넣었다
싸늘한 겨울이 다가오는 시간
땀젖은 기모노의 장인들을 나는 지켜보았다
불꽃에서 녹아나온 유리액이 부풀어오르는 순간
하얗게 굳어진 숨결의 방이 어떻게 식어가는지
예상치도 못한 파편으로 부서져버리는지
나는 생각하였네, 저 유리의 방에
영원한 숨결이 머물 수만 있다면
부드러운 종이등을 밝히는 일본여인처럼
자그맣게 앉아있을 수도 있겠지
푸른 숨결 속에 꽃과 사진을 담아
고요히 선반에 올려놓을 수도 있겠지
퇴색한 영롱함에 눈이 아릴 때
한때 너무나 가슴을 울리던 말들
누군가 말해주기 전에는 빛나지 않던 말들
어두운 벽 가득 떠오르는 몸짓
이제 어느 곳에도 없는 웃음
휘푸른 슬픔만이 자욱하고
고요히 아사를 꿈꾸고픈 정적
아득한 슬픔으로 금이 가던 방에서
진실로 사랑한다 나는 말해본 적이 있다
바빌로니아의 주판/허혜정
주판을 배운 것은 아주 잠시다
산수를 지긋지긋해하는 아이를
어머니는 주판학원으로 밀어넣었다
연필을 약지손가락에 끼우고
땅돌과 하늘돌을 처음 건드렸을 때
어머니가 기대한 건 무엇이었나
전속력으로 연산공식을 튕기는 아이들처럼
빈틈없는 암산으로 인생의 문제집을 풀어내길 원했는지도
한 줄 한 줄 너무나 정연해 아프던 나무구슬들
덧셈과 뺄셈으로 나뉘어진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헐렁한 소매를 축 늘어뜨린 팔 없는 아이가
묘기 쇼에 나와 발가락으로 주판을 놓던 장면을
알 굵은 주판알 소리만이 정적을 울리던 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을 두드리던 소리
무엇을 위해 필요했는지도 모를
엄청난 숫자를 튕기던 아이
아이의 주판알이
계산기가 되고 싶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복잡한 계산 끝에 언제나 영으로 돌아오던 숫자
주판알처럼 만지작거렸을 단어들이
영원한 의미로 완성될 수 있다면
주판이 놀이가 되지는 못했겠지
확률과 통계의 문법에 춤추던 나무알들
그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밖에 모르는 셈법에 맞춰
내 인생을 튕기던 손가락이 아니라면
놀이가 비명이 되지는 않았겠지
단번에 주판대를 흔들어
모든 것을 헝클어뜨리는 보이지 않는 손
주판알들의 비명을 뉴스에서, 신문에서 본다
살대가 부러지고 주판알들이 튕겨나가는 소리를
외로운 주판알의 눈알로
처음의 주판을 나는 보고 싶었다
그저 모래바닥 선 위에 늘어놓았을 뿐인
바빌로니아인의 돌멩이 하나를
땅돌 하나로 건방지게
하늘을 침범하는 지구라트를 쌓은 고대인들처럼
숫자로 그려낸 천문도까지 꿈꾸었는지 모를 일이다
허락된 크기가 얼마만큼인지 몰라도
하염없이 부풀어오르다 어둠으로 빨려드는 우주
결국 먼지와 가스로 부서져갈 셈법을 알고 있는 별처럼
억에 억을 곱해도 셀 수 없는 별빛의 바다에 눈망울을 묻고
나는 찾고 있었다. 재와 먼지의 이야기
먼지와 재와 슬픔의 이야기
주유소/허혜정
인간은 모험을 사랑한다
새것을 찾아가다 바닥난 기름통을 채우러
주유소로 흘러드는 자동차처럼
유리문 너머 미끄러져오는 한 남자를 본다
바쁘다는 표정으로 차 한 잔을 마시며
시계를 흘낏거리는 동안
기름때 밴 주유기를 꽃아넣고
텅 빈 눈으로 미터기를 응시하는 주유소 직원처럼
이 직업이 아름답다 생각하긴 너무 슬프다
저녁마다 사무원들이 북적이며 몰려나가 식사를 하고
돈과 친구와 쾌락을 찾아 떠도는 도심 한복판에서
그렇다 이건 너무나 외로운 직업이다
언제 집어치워도 미련도 없을
슬프고 냄새나는 일들을 어서 때려치우고 싶어
포켓북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있는 직원처럼
그렇게 날마다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창을 닦아내고 타이어를 손보고
연거푸 엔진오일을 채워주면
검은 매연을 얼굴에 내뿜으며 떠나는 그를
피로에 모지라진 입술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데
한 시인의 노트 위에 함부로 내팽개친 넥타이와 셔츠는
네 진보의 부산물이 아닌가
그렇다 세상, 나의 남편이여
너의 개인주의는 내 삶의 악몽이다
해를 넘길 때마다 시멘크 바닥보다 싸늘한 가슴으로
분노의 폐유는 응어리져가지만
시시한 브랜드 하나 없는 주유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오늘은 낡은 영화를 본다
좌절한 욕망의 아이들이 주유소를 부순다
테이프를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돌려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돌려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부수고 있다
사회생활/허혜정
명함은 받아 챙겼어도 기억나는 이름은 없다
끝내 군중 속에 흩어져갈 얼굴들을 마주보곤 있지만
호기롭게 반말지꺼리부터 하던 그 어르신은 누군지
친필사인이 담긴 신간을 건네준 풋내기는 누군지
침이 튀도록 정치적 식견을 과시하던 그 논객은 누군지
갑자기 선생님, 하며 돌아앉는 해맑은 청년도
기억하지 않는다
뭘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나는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다
마주칠 때마다 악수의 스크럼을 짜며
가장 글러먹은 시대를 자랑스러워하는 악한들
유난히 티를 내며 술값을 계산한 신사가 누군지도 모른다
노래가 빠지면 서운한 뒷풀이도 기억하지 못한다
실력으로 따지면 가수가 맞는 그 화이트칼라는 누군지
천둥치는 킬리만자로의 노래방에서 졸고 있던 그 가이는 누군지
노예의 한이 서린 지식인의 블루스도 기억하지 못한다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들
이런 인간을 불러대는 저들의 정체는 뭔지
삶은 엄청나게 명료하거나 철저히 비통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즐거워야 하는 내게
완벽하게 통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완벽한 타인인데
고주망태로 노래방기기를 혹사하다 나와
인간은 외로운 티를 내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는 이들
만나기 위해 잊어야 하고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
조직에서 처단되지 않으려면 미쳐야 한다
광기의 나날도 질서롭게 보이는
이 따위 생에서는 무엇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미인도를 닮은 시/허혜정
어디 옛 미인만 그렇겠는가
당신들은 내 문턱을 호기로 밟았다고 하지만
한 서린 소리를 즐기던 가야금이 그대들을 위함이라 믿지만
복건을 쓴 유학자든 각대를 띤 벼슬아치든 내로라하는 호걸이든
나의 궁상각치우를 고르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죽어도 당신들은 한 푼 얹어주었기에
내 살림이 목화솜마냥 확 피어올랐다고 믿지만
풀 같은 데 엮어놓은 가볍고 얇은 거미집은
왕후장상을 부러워하는 법이 없다
당신들은 대대손손 선연한 낙관을 자랑하지만
붉은 공단치마를 활짝 벗어 화초도를 치고
흠뻑 먹물을 적셔 제 흥만 따라가던 족제비털 붓은
당신들의 필법을 배우려 한 적이 없다
모든 나들이를 취소하고 빗장을 걸어잠그는 시간
학이든 호랑이든 아닌 건 아닌 게지 되돌려보낸 서찰
혈통과 내력을 캐묻던 그대들이 나는 궁금하지 않다
천생 귀머거리 각시처럼 고개 갸웃거리다
아는 체하는 순간 기가 막히는 듯 웃는 나는
길섶에서 눈맞춤한 눈부신 하늘, 코끝을 스치는 바람보다
당신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곰방대를 물고 대청마루에 누워 바라보면
옥졸의 방망이도 능라의 방석도 소매 넓은 장삼도
구천 하늘 온통 희게 떠도는 춤사위일 뿐인데
팔도유람이 어찌 그대들만의 것인가
서늘한 흙무덤이 두 눈을 덮기 전에
죽음에 시치미를 떼고 멀리 나가 노는 아이처럼
곰팡이가 퍼렇게 슨 족자 속에 표구되어서도
나는 누구의 계집이었던 적이 없다
밤의 스탠드/허혜정
이 아름다운 스탠드는 우리가 고른 것이다
작은 유리구슬을 당기기만 하면 부드러운 빛이 퍼진다
텅스텐 필라멘트처럼 위태롭게 깜빡이며
잠옷 위로 흐린 그늘을 만드는 빛
벽 위에 어슴프레 번져가는 그림자의 금
하나의 시공간에 엄연히 두 개의 삶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
하긴 어떻게 두 사람이 다 만족하는 사랑이 있는가
나날의 타협으로 쌓아올린 흐린 유리성
두 개의 상처를 이어 붙인 솔기처럼
하나의 행은 끝없이 이어진다
밤의 불빛 속으로 다가오는 피로한 얼굴
한 사람은 곯아떨어지고 한 사람은 깨어 있는 침대
이상한 슬픔이 몰려오고 갑자기 섬뜩하도록 차가운 정적
집이 텅 빌 때 느껴지는 그러한 정적
사랑. 누가 그 처음의 뜨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서서히 식어가며 함께 누워 있는 욕조처럼 편안해지는 것
그리고 창백한 타일 위에 고여 있는 물방울처럼
싸늘하게 말라가는 외로움
사랑을 끝내기는 힘든 일이다
어쨌든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상한 그늘 아래 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생활 그렇게 사실적인 그렇게 정확한
마시고 먹고 대화하는 식탁의
그 침대의
그 불빛의
그 외로움의 그늘 아래
열대야 1허혜정
깡통같은 집에서 걸어나와
아무데서나 단추를 열어젖히고
젖꼭지까지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은 밤
몇 잔의 스카치에 더욱 빛을 발하는
대화역 사거리는 오늘
피의 기침을 한다
검은 세단이 몰려드는
비누같은 도로로 사내는 걸어갔다
화끈한 클럽의 전단지가 나뒹구는
알콜의 도랑가엔 미시클럽과 노래방
신축 공사중인 관광호텔들
새벽이면 뒷구멍만 내놓는 철제 셔터 뒤에서
물빛 파란 원피스를 입은 제 여자가
아무런 후회도 없이 유리잔 속에
지폐를 쓸어모을 때
로마 나이트클럽 전광판이 번득이는 골목에서
여자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나오려던 사내는
자신을 난폭하게 떨쳐버린
떡대들 앞에서
다이아몬드보다 예리한 유리조각으로
깊이 삶을 그었다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핏줄기로
하얀 와이셔츠를 흥건하게 적시며
열기와 땀에 젖은 골목길을
새벽까지 노래하며 돌아다녔다
해머절도단/허혜정
그들은 개구멍으로 기어들지 않았다
붉은 핏불의 뿌리에서
성난 망치를 들어올렸다
신문지에서 나의 동일범들을 본다
나는 안다. 먼저 그들은
철제 셔터를 구둣발로 툭 차보았으리란 걸
거리에 나뒹구는 맥주캔을 던져보고
유리진열장을 칼날로 긁어보았으리란 것도
행인이 흘낏대며 지나는 순간
재빨리 주먹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닫힌 대형업소 앞에서 맴돌았으리라
내가 서랍에서 펜을 꺼내는 흐릿한 새벽
망치를 꺼내들고
이동통신 대리점, 금은방을
닥치는대로 두들겨 부수면서
고가품만을 트럭에 옮기고 마지막으로
망치를 조수석에 던져놓았을 걸 안다
그저 전에 먹던 것보다
더 멋진 걸 맛보기 위해
새롭고 근사한 것들을 구경하기 위해
대로변에 위치한 유리벽을 망치로 부수고
순식간에 고가품만을 싹쓸이했다
그러나 그건 이 국가의 재난이다
맛있는 걸 너무 많이 맛본 자들에게는
날마다 물리도록 멋진 것을 구경하는 자들에게는
때로 어두운 창가에서 나는
저 도시를 대형업소처럼 바라본다
재떨이를 비우며 일어서는 황막한 새벽에도
건너편엔 눈알을 짓이기는 휘황한 불빛
이제는 다른 세상처럼 보이는
사내들의 거리에는
돈이 흐르고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이 모이니 사회와 권력이 있고
갑자기 쓸모없는 교도소에
복역중인 재소자로 바뀌치기 된 나는
어두운 스카치잔에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망치를 든 얼굴을 본다
돌아서는 등어리를 본다
낡은 부츠의 지퍼를 올리고
쇠같은 말들을 조수석에 던져 놓고
지도책을 뒤적이다 헤드라이트를 켠다
제땀방울로 개칠하던 상자 속의
텅빈 심장을 채워넣기 위해
술잔과 음악과 모든 것을
신속하고 치밀하게 가져와야 한다
하룻밤 사이에 서너 곳을 털고도
어질러진 현장에 절대 증거를 남기지 않고
그렇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공창을 드나드는 벼슬아치처럼 여자를 갖고
피의 혈세를 변기 속으로 쏟아붓는 사내들처럼
나는 내 것이었던 세상을 되찾으러
도둑으로 내몰린 도둑이다
아무도 조용한 새벽을 누릴 순 없다
나의 망치가 병든 철제도시를 다 두들겨 부수기 전에
남자의 초상/허혜정
고꾸라질 듯 취한 그를
오랜 친구가 자동차에 싣고 왔다
그처럼 컬러셔츠에 조끼를 입은 남자는
거의 제 구두코에 토할 지경으로 취한
사내의 팔을 풀고, 육중한 몸집을
거실바닥에 내려 놓았다
다급히 걸레를 가지러 간 그녀의 등 뒤에서
사내는 굳게 욕실문을 닫아 걸었다
딸깍, 버클이 터지는 소리는
얼마나 적절한 음악인가
여자의 등어리를 밀어 엎드리게 하고
사내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들쳤다
손아귀에서 떨어진 샤워기는
타일바닥을 적시고 있다
꽃무늬 침대보가 구겨박힌 욕조 모서리를 쥐고
여자의 또렷한 눈망울이
핏물같은 제 손톱을 내려다보는 동안
사내의 칼날은 어느덧 여자의 칼날이 되어
숨결이 훅 꺼지기까지 박혀들고 있었다
여자는 냉정히 걸레를 주워들고
먼저 욕실에서 나갔다
미끈거리는 거실바닥에
팔다리를 쭉 펴고 잠든 보초를
재미없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동안
잠시 여자의 어깨를 힘차게 쥐고 있던 남자는
구두를 신었다. 현관에서 돌아서
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꾹 다문 입술로 조끼의 단추를 채우고
사내를 싣고 온 자동차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내가 들어와 거만한 넥타이를 풀 때마다
여자가 두 손으로 힘껏
열어 놓은 창문으로 흘러들던
매몰찬 바람이 없다는 것 뿐
늘 열린 것도 닫힌 것도 아닌 문간 안엔
이미 기다리는 사람도, 돌아오는 보초도 없다
제 토사물로 흥건한 남자의 머리맡에
사내의 팬티를 찢어 만든 걸레를 털어내고
그녀는 웃었다. 음악을 틀고
대단한 사나이의 용기를 음미한다
뇌물과 유서/허혜정
뇌물,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약된 운명이 아니었던가
나는 여자의 손가락을 돌로 짓이겨버리고 싶다
끊어내고 싶었다. 매순간 돌봐주겠노라
달콤한 거짓으로 혓바닥을 적시며
등 뒤에서 지네같이 달라붙는 사내를
영수증도 없이 내어주는 유리컵과 접시를
독거미처럼 거미줄을 치는 피곤한 호출을
언제부턴가 당연히 그의 것이 되어버린 휴식의 뇌물
그렇다 내 손은 공짜로 내어준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완벽하게 재단된 최신형 양복을 입고
짙은 코팅창이 달린 세단을 몰고 가는
평판 높은 그들을 나는 커튼 뒤에서 지켜봤다
음악이 천둥처럼 울리는 밀실의 소파에 주저앉아
머리를 올빽으로 넘기고 귓속말을 주고받는 정치꾼들처럼
조용히 의자를 바꾸고 힘을 틀어쥐는 것을 봤다
왜 세상은 코 앞의 일만 빼고
거창한 뉴스만을 떠들어대는가
제가 받는 뇌물에 대해서는 입을 닦는가
통치자금이라는 헛소리처럼
코 아래 얼마나 많은 뇌물이 흘러야만 하는가
그러나 세상은 내가 밥통처럼 침묵할 것을 안다
제 코를 틀어쥐고 있는 인간을 추켜올리며
안전 하나를 보장받기 위해
전 재산인 카메라를 잡혀둔 사람처럼
물론 나도 한 때는
미끄러운 관계가 재미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특검보다 준엄한 책상에서
목구멍에서 기어나온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혓바닥을 짓이겨버리고 싶다
변기 곁에 깨져나간 반쪽짜리 타일처럼
턱뼈를 부숴버리고 싶다
그렇다 이건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손톱자욱이 패이도록 주먹을 쥐고
가죽가방을 등 뒤에 놓고 걸어나온 사내처럼
황막한 새벽 다섯 시의
싸늘한 어둠을 마주하고 있다
나의 두려움을 제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며
팔찌를 수갑으로 사용하던 손들아
고분고분 길들여진 손가락을 잊어라. 이 글자는
내 시신을 지옥에서 떼매가는 운구 행렬이다
자유시민을 위한 수확/허혜정
그녀는 한달짜리 계집아이를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에 구겨 박힌
검은 양복바지로 대충 덮어주었다
등 뒤에는 불 꺼진 수위실과
얌전히 주차장에 틀어박힌 자동차들
언젠가 저 검은 고급 세단 속에서
허벅지까지 젖어 그녀는 내린 적이 있다
백지보다 얇은 블라우스를 찢어대던 사내는
제 여자의 복부를 걷어차고
따귀를 갈겨대던 뺨에
담배불을 비벼 끄고 걸어나왔다
그녀는 어두운 거실 유리창 안쪽에
기대앉은 부서진 인형을 상상했다
혁대를 매고 있는 사내 앞에
숨죽인 비명을 질러대는 텅 빈 얼굴을
그러나 그녀는 이성적이어야 했다
이런 게임에선 조금 더 영악했어야 했다
코 앞에서 달아오르는 도시를
똑똑히 바라보아야 했다
작은 촛불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슬립끈을 내리고
악마같은 사내가 젖꼭지를 깨물 때
타오르는 구멍을 손바닥에 벌리고 있어야 했다
제 때에 버릴 줄도 알아야 했다
수증기가 끓어오르는 욕조 앞에서 면도날곽을 쥐고
함께 죽자면 벌벌 떠는 사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삶의 등성이를 제때에 기어오르기 위해서는
손톱에 낀 때같은 아이가
번거로운 존재란 걸
한 번쯤 쓰레기통에서 터져나온
울음소리나 실컷 들어보라고
침대로 기어드는 순간처럼 탄성을 지르며
엉덩이에 범벅이 된 월경을
수캐처럼 핥아대던 사내에게 구경해 보시라고
이런 더러움을 우린 견뎌야 한다
쓰레기통 바닥에서 기어나오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건
한달짜리 계집아이도 안다
열대야 2/허혜정
그건 거의 영화였다
전설적인 카페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와인잔을 감아쥔 나의 손에 포개진
와이셔츠 소매를 한 단 걷어올린 사내의 손도
마늘의 수염뿌리 대신
그의 턱수염을 만져볼 때도
무릎보다 약간 짧은 타이트치마를 입고
자동차에 올라 차갑게 선글라스를 내릴 때도
자 집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말할만큼 나는 대담했다
아직도 늦은 것은 아니다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을지도 모를
도청장치에 노출될 위험을 너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왜 스스로의 권리를 부인하는가
세트장을 옮기겠다
우린 총알같이 달렸다
후회와 양심의 가책보다 훨씬 더 멀리
집도 가족도 사라지고 나홀로
나만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완벽한 폭력의 경계에서
제발 좀 침묵하고 싶었지만
거의 자동기술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황홀에 빠진 거다)
그의 가슴으로 기어올라가
똑바로 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순간 이후
아내와 뒹군다면
심장을 도려내버릴 거다
정확이 이 지점을 찢어발긴다는 말이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폭력이 있다
기품 있는 하늘색 커튼이 있고
하얀 콘센트가 있고
웃음소리가 있는
이런 곳에 가족사진을 걸어놓고 싶다
부서지도록 문짝을 닫고 걸어나가는 방보다
맨발을 올려놓고 음악을 듣는 탁자
담배곽, 리모콘, 향그러운 공기
본다, 느낀다
순수의 시대는 갔다
나는 너무나 슬퍼하지 않는다
경찰 하나 얼씬 않는 고요한 커튼을 열고
점잖은 공무원이 인가해 준 합법적인 장소에서
뜨거운 밤공기를 흠뻑 들이마신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저 무수한 헤드라이트를 봐라
저렇게 미친 사람들을 봐라
그러나 나는 더 확실하게 미쳐야
자유롭고 평등한 대한민국 시민임을 망각하지 않는다
우리를 잡지도 않는
위대한 나라를 봐라
한 채의 집을 부숴 호텔의 초석을 쌓는
이 국가가 해온 짓과 할 짓들을 봐라
온갖 건축업자가 기술을 다해 지어놓은
저 솟을 대문들에 비하면
고층 아파트도 쓰러져가는 판잣집같이 보이고
텅빈 베란다는 이 강변의 테라스에 비하면
섬마을의 툇마루가 아니냐
여기에 비하면 아파트는
내겐 일만 하는 사무실이다
예술가의 생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썸머캠프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내일은 공항으로 가야 한다
긴 사막을 행군해야 한다
방학은 끝났다
제발,
왜 너는 알 수 없는 나의 것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라 정의되야 하는가
간혹 흘러간 연인들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영화 속의 우리는
누가 이처럼 네 운명을 틀어 쥐고 있었던가
가정의 평화를 염려해주었던가
나는 지독한 저음으로
속삭였다
네 혀를 지켜라
나의 펜은 칼이다
한순간에 널 죽일 수 있다
칼만이 아니라 죽지를 도려내는
전기톱날이 될 수 있다
가면이 차라리 나은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영원히,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흥분은 숙명이다
미완성의 꿈/허혜정
부서진 눈망울은
다시 네 작은 유고집을 더듬어 찾는다
시퍼런 멍울을 남겨놓던 세월의 채찍도
아프게 부서뜨리지 못했을
여무진 꿈을
너의 하늘은 조개처럼 닫히고
자물쇠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소용돌이치는 세상의 격랑을 따라
하나둘 사람들이 앞질러갈 때
발묶인 꿈은 문턱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 친구여, 작은 딱지집 속에
억지로 팔다리를 웅크려넣고
네 조갈난 침묵은
먼지보다 마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
슬픈 자유의 냄새
파도처럼 가보자던 약속은
매연이 쓸려드는 창가에 서 있었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붙박혀
마른 숨을 몰아쉬던 가로수처럼
잎새와 걸레와 양동이를 버리고
피로한 펜마저 떨구어버리고
너의 손가락은 검은 뿌리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추위와 어둠이
바다보다 새파랗게 칠해놓은 얼굴은
먼지와 악취가 기어드는 강철의 도시에서
끝까지 가보자고
오랜 친구를 바다로 부르고 있었다
피로와 통증에 넝마가 되어
칠흑 같은 모래밭을
괴팍스레 포복하는 가재처럼
뼈들의 황무지와 파편더미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친구여, 아직 나는 모른다
어떤 비밀스런 광기가
일렁이는 수평선을 향하게 하고
핏기 없는 형광등 불빛 아래
분노로 울부짖는 파도와
저 홀로 나부끼는 폭풍을 부르는 것인지
도시의 무덤 같은 창틀 뒤에
으스러진 조개들을 바다의 씨앗으로 묻어두는지
끝없이 제자리에 내리치는 채찍으로
파도의 비명을 새기게 하는지
저 도시 너머 어딘가
우리가 꿈꾸던 땅이 있고
목말랐던 나무가 젖으면서 자라고
절규에 대답할 수 있는 다른 하늘이 있어
절망의 수심 깊이 가라앉은
인생의 진실들을 보여줄 수 있다면
저 흥청이는 불빛 아래 캄캄히 흩어져간
외로운 거품의 말들마저 창망히 엿들을 수 있다면
가슴 깊이 물결처온 부름을 따라
이 작은 나무책상마저
죽음의 물결 위에 띄우리라
시퍼런 침묵을 뒤집어쓴 책상에 몸을 싣고
아무런 도움도 없이
뼈까지 얼어붙는 냉기 속에
피로 가득한 펜으로 다가가듯이
새끼손가락/허혜정
아이는 밥을 굶었다
사내는 소주 한 홉이 그리워t다
천 오백만원 보험금이 나오면
고기도 목을 수 있고
장난감도 가질 수 있다
아이는 황홀하게 듣고 있었다
만약 네 새끼 손가락을 자르면 말야
아빠 근데 지금 무엇을 가지고 싶냐면
가지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아이는 꿈꾸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올지 모른다
벌써 엄마가 데려온 바람소리는
엉망이 된 낡은 문짝을 두들기고 있다
사내는 입에 수건을 물리고 가위를 들었다
강도는 바로 저 문으로 나간거야
그는 처음부터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새벽 두시 너머 커튼을 쳤다
1998년 9월, 잠든 아이를
두들겨 깨웠다
아이는 돈이 되어야 할
양의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두 번째 마디는 가위에서 서서히 끊겨나갔다
아이는 작은 박쥐처럼 장판 위에 몸부림쳤다
솜이불을 덮어씌운 울음은
연습했던 침묵 밖으로 삐져나왔다
약지 손가락까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꿈보다는 가위가 너무 날카로왔다
축축하게 땀과 울음에 젖은
아이의 신음이 잦아들고서야
사내는 수건을 풀었다
죽어가는 아이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껴안았다
밤새도록 피흘리는 새처럼
핏물어린 손톱으로 벽지를 긁을 때도
파리한 침묵의 실을 쥐고
아이는 고요히 통증의 감옥에 갇혀있을 뿐
새끼손가락에 걸려있던 약속들이 사라져갈 순간에도
아이는 떨리는 네 개의 손가락으로
사내의 입술을 만진다
오골계/허혜정
잘려나간 닭머리는 오이처럼 검게 썩어있었다
저무는 복날, 까마귀인지 닭인지 모를 새가
이 우주에 내질렀던 마지막 비명을
방금 들었다. 허기진 일몰
변두리 산야까지 번져가는 울음소리를
빼빼 마른 벼슬아치마냥 뜨락을 노닐던
명색만 남아있는 검은 새
살아있는 창자가 뽑혀나오는 소리
인간의 손이 비틀어 만들어낸 음악을 생각했다
잔인하고 무지한 식칼이 머리통을 도려내는 순간
천장까지 솟구쳤을 핏물이여
아직은 팔딱이고 있을 심장을 산턱에 걸어놓고
끝내 벗어나지 못할 태생의 울타리를 본다
황급히 도망치다 부딪쳤던 주인의 다리
몇 번이었던가, 으드득 죽지뼈가 꺾여나가던 순간
식탁마다 덕지덕지 놓여있는 전단에는
『본초강목』에도 『동의보감』에도 약용이라는 설명
알과 고기는 물론 피까지도 약효가 있다는 너는
그래서 혈통을 중시하는 품종일 것이다
설사 다시 태어나더라도
살과 뼈까지 검게 그을릴 존재
감칠맛이라 하는 것은 분명
메슥거리는 피맛일 것이다
앉을 자리도 없이 들어찬 이층방으로
홍삼까지 고아 넣은 보양식 메뉴셋트가 와도
검붉은 닭피를 뒤집어쓴 아이처럼
진저리치는 핀잔에도 혼자 굶고 있었다
언제나 이 메뉴만은 아니라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분해자들/허혜정
폐차 들어오지 않는 마당은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낡은 세무잠바를 걸친 사내 하나
고철이 된 차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녹슨 쇠철문이 열리고, 제철공장 같은 도시에서
끝없이 자동차가 쏟아져나올 때도
하나하나 잘라낸 문짝들을 쌓아놓고
싸구려 중고차 부품을 뜯어내는 손길이 있었다
바람에 침울하게 덜컹이는 강철 문짝 곁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토록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들과
허망한 폐허로 내모는 소리 없는 위협들
브레이크등이 깨진 채 폭주하는 타이탄 트럭처럼
고통마저 짓밟고 간 무감각한 질주를
모두가 속도의 출혈을 꿈꾸고 있다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무거운 지도책과
메마른 두개골을 쳐들던 일몰의 헤드라이트
때로 트렁크째 벌어져 산산이 튀어오르고픈 도로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못할 격돌의 분노를 수습하면서
온갖 책과 종이뭉치가 무너져 있는
그 척박한 공간을 지켜야 했다
언제부터인지 헤드라이트도 끊어진 도로 끝에
턱턱 갈라진 폐차들의 튼 얼굴이 뒤숭숭하니 드러나는 곳
잡초 뿌리마저 매몰시켜버릴 먼지에 눈이 쓰릴 때
여기 마지막 분해자들이 있다
어두운 슬픔에 담뱃불을 붙이면서
낡은 고철더미를 묶고, 판독조차 할 수 없는
매연이 시커멓게 엉긴 번호판을 뜯어내고
닳아빠진 부품과 타이어를 손보고 넘기는 이들이
바다로 가는 길/허혜정
먼지투성이 마른 도로에서
늙은 여인이 길을 가리켜준다
핏기없는 소년이 신문꾸러미에 주저앉아
빵을 먹고 있는 길
바람에 헝클어진 야윈 가지가
낡은 티셔츠에 그늘을 드리우고
텅빈 공기 속에 안보이는 제단이 서 있었다
소줏병 깨진 유리조각이 박힌
낡은 가옥이 멋없이 늘어선 곳에
마른 안테나는 텅빈 여름 채널을 수신하고
걷고 있는 동안 자전거를 끌고
물가고 내려가는 아이의 머리칼은
바닷바람에 날리고 있다
허름한 민박집, 호마이카상에
교과서를 올려놓던 아이는
엄마가 아파서 아무 데도 못간다고 했다
비좁은 골목길로 흘러든 바람은
녹슨 가재도구를 더욱 녹슬게 하고
한 걸음 나서기도 무거운 다리를 끌고
누렇게 뜬 얼굴로 수돗가로 다가가던 여인
어느 옛날에나 본듯한 파리 날리는 식당
무서운 제국을 바라보는 작을 걸상들
해수욕장도 못될 초라한 해변에는
아직도 남루한 사람들이
낡은 폐선들을 지키고 있었다
바람이 이 모든 것을 쓸어갈 수 있다면
바다로 가는 길은 있으리라
비 속의 유세/허혜정
마지막 한 사내만이 빗물 속에 남았다
육거리 시장통의 불빛이 까물대는 어스름 무렵
야윈 사내 하나가 비젖은 전단지를 건네주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혹시나 잃어버릴
봉지와 아이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로 이 시장통에서 박수를 받던 유세꾼을
어젯밤 뉴스에서 보았건만, 저 사내는 아니었다
어쩌면 가난한 손들이 모아준 동전같았을 말들
제법 필요했을 말이 활자로 박혔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참모도 수행원도 없는
외로운 투사를 믿지 않는다
갈치상 리어카는 봉지불을 밝히며
손님 방해한다고 좀 비켜서라고 했다
어디에도 스며들지 않는 메가폰 소리는
짓무른 자두처럼 바닥에서 쉬어 터져버렸다
그렇다. 우리는 그것이 무참한 헛표라는 것을 안다
가망없는 맨몸의 출사표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비닐봉지들과 부딪칠 때마다 사내는
길목을 잠시라도 비켜주고 있었다
갑자기 우르르 천둥까지 머금은 먹구름을 올려다보며
황망한 귀가를 재촉하는 여인들의 저녁
돌아가는 집에도 이미 선택된 대표는 있다
힘든 유세 없이도 지레 박수를 받고
무언가 될 것이라 믿고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던
벌써 용달차는 막장의 푸른 비닐천을 덮었다
철벅철벅 스며들던 발걸음도 뜸해진 시간
사내는, 내일이 오늘이 됩니다 믿어보세요
비 젖은 한 표를 내게도 애절하게 부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