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걷어 놓은 커튼 사이로 한 가득 쏟아져 들어온 아침 햇살.
바스락 바스락 살결에 닿는 기분 좋은 거위 털 이불.
'♪♬♩♬♩♬♩♬♩♬♩♬'
오전 7시 정각이 되면 어김없이 울리는 자명종 벨소리.
...
........
"아함..."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맛본 꿀 같은 단잠일까.
소년은 살며시 한쪽 눈을 뜬 채 힘껏 팔을 뻗어 자명종 벨 버튼을 눌렀습니다.
...
.....
그리고 그 순간 온 몸을 으스스하게 만드는 서늘한 느낌에
아직 잠에서 덜 깬 몽롱한 눈이 천천히 베개 맡으로 향하면,
곧 소년의 방에서 자지러질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부엌에서 밥을 푸고 있던 할머니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곧 우당탕탕 뛰쳐나올 손자를 맞이하기 위해 천천히 앞치마를 벗었습니다.
AM 7:20
"강태수한테 한번만 더 그 미친 살쾡이 내 방에 들이면
가택 침입죄로 소송 건다 그래"
콩!
"아!아퍼!!"
"삼촌한테 강태수라니! 이놈 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입에 계란말이 하나를 넣고 성난 목소리로 씩씩대다가
은수저로 정수리를 맞고 머리를 감싸쥐는 소년.
그 동안 할머니는 소년의 밥그릇에 김치를 얹어주며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니 못된 성질 머리를 싹 뜯어 고쳐 놓을거다.
그리고 편식하지 말고 김치도 쳐먹어 이놈아!"
"아줌마한테 저 이불 드라이 싹 하고 방 소독하는 사람도 부르라고 꼭 말해야 돼.
그리고 난 김치 싫어.이거 안 먹어."
"......뭐야....?"
"새우 젓갈 들어 있잖아. 이 새끼 눈이랑 다리가 선명하게 다 보인단 말이야.."
"너 할미랑 맞는 아침 첫날부터 마빡에 혹 두어개는 달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냐.."
할머니의 서늘한 목소리에 재빨리 입을 다물며 물잔을 입에 가져가는 소년.
"그리고 해인 이는 오늘 뭐하냐?"
"켁..."
"아니 뭘 그리 놀라 이놈아. 니 여자친구 오늘 뭐하냐니까"
...
.....
그리고 소년은 잠시 잊고 있었던 '가짜 여자 친구' 의 존재에 머리가 아파온듯,
들고 있던 물컵을 콰앙 내려 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걔야 뭐 이따 학원에서 보겠지. 나 학교 갔다 온다"
"복싱 배운다는 학원 말이지?"
"어...."
"그거 끝나고는?"
"집으로 바로 가.걔네 집 엄청 엄해서 학원에서 말고는 잘 못 만나"
"아니 그런게 어딨냐!"
"그리고 곧 헤어질거야"
"아니 왜!!!!!!!!!!!!!"
"내 생일날 하고 온 거 보니까 약간 미친년 같애“
....
......
소년은 할머니의 입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나오기 전
의자에 걸어놓은 가방을 낚아 매고 빛의 속도로 현관문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
....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면 정원 한가운데 앉아서 꼼짝 않고 소년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대문까지 함께 달리는 미친 야옹이 미야.
"쉿쉿!!!!야 미친 살쾡이!!너 저리 안 꺼져!!!?안 꺼져!!!!!!!?"
소년의 살기어린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숨 가쁘게 그의 뒤를 쫓아 달리는 미야.
....
......
- 위험하니까 차 조심 하고 점심밥도 절대 거르면 안 돼!
이따 몸단장 하고 마중 나가 있을 테니 빨리 들어와!
"시끄러워!!!!!!!내 앞에서 좀 꺼지란 말이야!!!!!!!!!!"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맞는 소란스러운 아침 등교인지.
매일 아침 아줌마가 해준 밥을 기계적으로 먹고 차 뒷좌석에 말없이 올라타던 소년의 일상은
이제 할머니와 고양이의 배웅을 맞으며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루 아침에 일상이 변해버린 것은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휴 저놈자식 못돼먹은 성질머리 고쳐놓을 생각에 눈앞이 캄캄 하구만.."
부엌 식탁에 남아 소년이 젓가락도 대지 않은 김치를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던 할머니는,
곧 두번째 골칫 덩이를 깨우기 위해 씩씩한 걸음으로 오른쪽 맨 끝편에 위치한 방으로 걸어갔습니다.
...
...
이놈의 집구석은 정말 쓸데없이도 넓게 지었다고 생각하면서.
할머니는 노크도 없이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
.....
"뭐야..태수 너 일어나 있었냐..."
그러면 할머니의 맞은편에 모습을 드러내는건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다 말고 가만히 고개를 드는 소년의 삼촌.
...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황하지 않고 쓰던 것을 덮은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막 일어났어요"
"그럼 진즉 나와서 은오랑 같이 밥 먹지 않고"
"아침부터 그 자식 얼굴 보면 하루 종일 소화 안돼요“
"옳은 말이야. 내가 20년전에 널 볼때 딱 그랬었다"
할머니의 뚝뚝한 말에 작은 두 눈을 더욱 가늘게 찌푸리며
천천히 주위를 살피는 남자.
"고양이는 어딨어요?"
"모른다. 아침에는 은오방에 기어가 잤나보더라.
그 놈이 얼마나 난리 부르스를 떨면서 뛰쳐 나오던지..
어릴땐 강아지만 보면 환장을 하드니 왜 갑자기 짐승을 그리 싫어하게 됐는가 모르겠다 "
그러자 남자는 방 한 켠에 놓여 있던 미야의 밥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사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들릴 듯 말듯 한 신음을 내뱉었습니다.
"병원에 가봐야겠네.."
"병원은 왜!어디가 안 좋냐?!"
"나 말고요"
"...."
"고양이가 입맛이 없는거 같아서.."
이어진 남자의 말에 할머니는 믿을수 없다는듯 입을 따악 벌리고,
남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쑥쓰러운 말이었던지
마른 기침을 두어번 내뱉으며 휘적 휘적 방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
.....
..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굳어선 채 생각했습니다.
이럴수가 ..
안본 사이에 저 놈에게 대체 무슨 변화가 생긴거지..
호랑이를 사냥 하면 사냥 했을 놈이 집 고양이 건강을 챙기고 앉아 있다니..
...
...
.....지금 문제는 은오가 아니야...
바로 저놈이다 저놈...
뱃속에서 낳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혀 속을 알수 없는 저 둘째 아들놈...
...
....
이런 엄마의 걱정을 알리 없는 남자는 정원에서 즐겁게 뛰고 있는 미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AM 9:00
한성 고등학교 2-5반.
자습시간을 끝마치는 종소리가 지금 막 울리자 마자,
여지껏 어떻게 참았는지 의심이 갈만큼 소란스러운 아이들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야야 들었어!?그 양기백 소화기로 내려쳤다는 애 있잖아.
동아 고등학교 1학년 여자애"
"아..걔..?걔 무슨 경찰서 조사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어.근데 어젯 밤에 정당 방위로 풀려났대"
"어떻게..??!"
"대박인게..경찰들이 양기백 입원한 병원으로 가서 물어보니까.
걔가 글쎄 그년을 감쌌다는거야..지가 먼저 칼 들고 위협해서 소화기로 친거라고.
그러니까 걔는 아무 잘못 없다고.."
"어머..그 까까머리 킹콩 그렇게 안 봤는데 멋있다..."
"내말이..그 여친이란 애는 강은오 좋다고 그 짓거리 한건데.."
"야야..조용히 말해..다 들려.."
...
.....
아 시끄러.
하이튼 저 기집애들은 남 얘기 하는거 드럽게 좋아한다니까.
..
...
점점 커져가는 여자 아이들의 수근 거림에
맨 뒷좌석에 앉아 수학 문제를 들여다보던 소년은 인상을 찡그린채 고개를 들었습니다.
...
....
그러자 소년의 눈동자와 마주친 여자 아이들이 동시에 헉 하는 신음과 함께 입을 다물고,
만족스러운 반응에 다시 소년의 눈동자가 문제집으로 향하려 할때.
...
콰앙!!!!!!!!
"야!!!!!!!!!강은오 나와라!!!!!!!!!!!"
....
.....
...
지금 막 열린 앞문 사이로 험악한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
....
..
젠장.문제 한번 풀기 되게 힘드네.
..
...
소년은 이제 입으로 작은 욕설을 중얼 거리며 책상에 놓여있던 MP3 이어폰을 귀에 꼽아 버렸습니다.
...
"하 나..저 새뀌가 주말 이틀 쉬고 나오더니 양쪽 뇌를 분실했나.."
그러면 쫙 벌어진 팔자 걸음으로 소년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양기백의 똘마니들.
전부 합쳐 하나.둘.셋.
혼자 있을땐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셋 이상 뭉치면 천하무적이 되는 똘마니들.
...
....
이어 펜을 놓은 소년이 짧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그들 중 선두에 있던 아이가 소년의 귀에 꼽힌 이어폰을 잡아 빼고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너 돌았냐? 아주 진지하게 뒈지고 싶어 환장했냐!?!?"
평소 양기백의 말을 가장 잘 따르는 털복숭이 녀석이었습니다.
중학교때는 소년에게 말 한마디 붙힐 엄두도 못냈던 약하고 비겁한 녀석.
"......."
"야 씨발 내 말 안 들려 새꺄!!!!!!!!!!!!?"
악에 받힌 아이의 고함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교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아무 말 않은 채 문제집을 바라보고
순간 털복숭이의 거친 두 손이 소년의 멱살을 잡아 올렸습니다.
...
...
꺄아..꺄아..어떡해..
조그맣게 터져 나오는 여자 아이들의 비명에 더욱 힘을 입은듯
있는 힘껏 눈을 부라리며 소년을 노려보는 털복숭이.
"너 어쩔꺼야.앙? 너 때문에 그 썅년이 기백이를 소화기로 후려쳤대잖아
이제 어쩔꺼냐고!!!!!!!!!!!"
"뭘 원하는데“"
"하....나...요 존만이 요거 어떡하니 진짜...
끝까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지 무덤 구덩이 삽질 하는거 어떡해야 되니..."
이어 오버스럽게 울려 퍼진 털복숭이의 말에 낄낄 대고 웃는 양 옆의 남자 아이들.
그러면 분위기가 너무 가볍게 번지는 것을 우려한 털복숭이의 험악한 눈초리가 재빨리 그들을 제지하고,
이내 그의 시커먼 콧수염 언저리 밑에 있는 검붉은 입술이 무겁게 움직였습니다.
...
...
"원하는게 뭐냐고..??"
"...."
"머니다 새꺄. 이게 다 너같은 놈이 세상에 태어난 탓이니까
기백이 치료비 니가 다 물어내."
"그거면 돼?"
"하..뭐라고..?"
"그거면 되냐고"
"그래 이 씨발 놈아 그거면 된다!!!!!!!!!!!!!!!
야!!!!!!!!!너 오늘 당장 치료비 갖고 기백이네 병실로 찾아와!!!!!!!!!!!!!!!
어디 니 잘난 부모가 얼마나 챙겨주나 보자!!!!!!!!!!!!!!!!!!!!!
어설프게 들고 오면 넌 그 병원 중환자실에 바로 입원 이야 알았냐!?!?!?!"
"그럼 이제 할말 다 끝난거지“
"이 새끼가 근데 오늘 날이 더우니까 덩달아 미쳤나.......
야!!!!!!!너 기백이 없으니까 우리가 존나 우스워 보이냐!!?!?!?
그때처럼 또 한번 터져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
....
...
계속되는 소년의 담담한 반응에 걷잡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 듯
이제 소년을 내리칠 기세로 커다란 주먹을 치켜드는 털복숭이.
..
....
"니들 거기 뭐하는거야!!!!!!!!!!"
그런데 그때.
반장의 다급한 요청을 받고 달려온 선생님이 절묘한 타이밍에 교실에 나타났고
...
....
..
"저 씹쌔끼 조만간 진짜 죽여 버릴거야..."
...
...
덕분에 털복숭이와 나머지 두 아이들은
마지막 까지 상스러운 욕을 중얼 거리며 교실 뒷문으로 황급히 빠져 나갔습니다.
...
....
...
....
치료비라......
....
....재밌겠네...............
그리고 소년은 자신에게 모아진 아이들의 수많은 눈동자를 무시하며
잠시 방해 받았던 2차 함수 문제를 풀기 위해 고개를 다시 떨구었습니다.
AM 9:10
그날 소녀가 다니는 동아 고등학교는 두가지의 특급뉴스로 매우 떠들석했습니다.
일단 그 첫번째는 어제 있었던 농구 본선 대회에서 동아 고등학교 남자 아이들이 우승을 했다는것.
...
.....
"그래서 우리 학교 남자 애들 레베루가 아주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는거 아니냐..
특히 관람 왔던 여중생들이 죄다 뻑가가지고"
"어휴 달래는 지 남친 때문에 이긴 거라고 지금 온 반을 돌면서 자랑 중이시드라"
...
.....
그러니 퉁퉁 부운 눈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소녀는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매우 놀랄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녀는 싸늘한 공기가 자신을 둘러싼 것을 알면서도
조심스레 앞자리 아이의 등을 두드렸습니다.
"저기..어제 우리 학교 진거 아니였어...?"
"뭐가?"
"아니..난 어제 농구시합 진줄 알았거든.."
"왜? 한이 때문에..?"
"아......응..."
"아.넌 경기 다 끝나고 와서 모르겠구나. 주영이랑 성빈이가 막판에 잘해서 이겼잖아.
뭐...한이는 누구땜에 한골도 못넣었지만"
...
....
이어 소녀가 대꾸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서로 마주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
...
....
이쯤에서 이제 두번째 뉴스는 바로 소녀에 관한 것이라는걸.
굳이 타이틀을 붙이자면 '정해인이 한성고의 강은오와 몰래 사귀고 있었다' 라는 걸 알수 있었습니다.
"야 진짜진짜?말도 안돼. 쟤가 강은오 여자친구였다고? 엄청 얌전한 애 아니야?"
"난 강은오 걔 대학생하고 사귄단 소문 들었었는데.."
"아니래잖아. 어제 체육관 앞에 벤츠 오픈카 타고 나타나더니 존나 소리 질렀대"
"뭐라고..?"
"정해인 사랑한다!!!!!!!!!!!"
"헐!!!미친거 아냐?무슨 영화 찍냐?“
"내 말이 그 말이야..그 날 한이는 쟤 기다리느라 한골도 못넣었다는데.
쟨 친구 생일 간다고 구라 치고서 딱 걸린거 아냐.."
"무섭다 무섭워....진짜 앞에서 내숭 까는 애들이 더 하다니까.."
..
...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뒷문으로 모여 들어 노골적으로 떠드는 아이들.
특히 평소에 한이를 마음에 두고 있던 아이들은 유독 더 거친 말들로
'정해인' 이라는 이름 세글자에 날카로운 자국들을 새겼습니다.
...
...
그러나 소녀에게 그런 것쯤은 괜찮았습니다.
어차피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수근거림은 일주일 단위로 조금씩 사그러들테고
결국 두 달쯤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테니까요.
...
.....
...
"달래야.지금 밥 먹으러.."
"미안..오늘은 다른 애들이랑 먹기로 했어"
...
...
정작 소녀의 가슴을 짓이기고 있는 것은 어제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달래.
그리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소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반 친구들이였습니다.
...
....
다른 반에서 예체능 반 아이에 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면
하나같이 힘을 모아 그 친구를 감싸주던 2-8반 아이들.
정원이 스물세명 밖에 안 되는 탓에 체육대회건 소풍이건 똘똘 뭉쳐 왁자지껄 웃던 2-8반 아이들.
...
....
그랬던 2-8반 아이들이 이제는 단짝 친구였던 달래를 중심으로 둥그런 원을 형성해
그 원 밖으로 소녀를 소리없이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
....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거나 따져 물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변명이든 사과든 속시원히 해보련만.
...
....
..
소녀는 6교시인 화학 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반 아이들에게 밀려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화장실 한번 갔다 오지 않고 꼼짝 없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
....
"차렷!선생님께 경례!"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오냐 너희들도 오늘 하루 가서 신나게 배워라!"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꼿꼿이 견딘 끝에 어느덧 다가온 종례시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호탕한 목소리로 담임 선생님이 손을 흔들면
들뜬 목소리로 재잘 대며 어제 있었던 농구 시합에 관해 떠드는 아이들.
...
......
소녀는 한번도 펼치지 않았던 교과서와 공책을 가방에 넣으며
그런 아이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말하는 중간에도 흘끗 흘끗 소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꽤 있는 탓에 무슨 말인진 잘 들리지 않았지만
'진짜 너무한다' 라는 한마디만은 분명하게 귀에 들어왔습니다.
...
....
....
순간 아이들의 날카로운 눈동자를 보며 오늘이 마지막이라는것을 깨달은 소녀.
오늘 모든 오해를 풀지 못한다면 2-8반 아이들은 아마 졸업할 때 까지
'정해인' 이라는 아이를 투명 인간 취급 할 것입니다.
...
....
후우.....
그래. 한번 부딪혀 보는거야.
일단 한이와 오해를 풀어야 해.
내가 진심으로 말한다면 한이도 분명 믿어 주겠지.
이어 가느다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결의에 찬 각오로
교실 문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는 소녀.
...
....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못마땅하는듯 수근대는 아이들.
"뭐야.정해인 쟤 뭘 잘했다고 저렇게 파이팅이냐.."
"잘난 지 남친 만나러 가나부지"
"근데 너 강은오 실제로 본적 있냐?“
“아니 나도 말만 들었지. 근데 동아고 내 친구가 그러는데 걔 성격이 진짜...”
달래는 아무말 없이 창가에 기대어 곧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낼 소녀를 기다렸습니다.
PM 4:20
뜨거운 태양이 한가득 내리쬐고 있는 운동장.
하아..하아....
가쁜 숨소리를 내며 그 한가운데를 다급히 가로 지르고 있는 소녀.
...
....
어떻게든 한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소녀는 창문가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을 아이들을 애써 모른척 하며
하늘색 스쿠터가 세워져 있을 학교 앞 상가쪽을 향해 달렸습니다.
....
아..다행이다.....역시 여기 있었구나...
...
.....
그리고 이내 상가 뒷편에 세워진 반가운 스쿠터를 발견한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습니다.
....
......
"비 온다고 했는데..엄청 덥기만 하다.."
이어 들어줄 사람 없는 혼잣말을 중얼 거리곤 해가 쨍쨍 난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는 소녀.
그러더니 퍼뜩 무언가 생각난듯 손뼉을 마주치고
상가 안에 있는 슈퍼마켓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가는 소녀.
...
아이스크림.아이스크림.
한이가 좋아하는 초코맛 아이스크림...
....
........
타이밍도 절묘하게 그때 막 한이와 친구들이 스쿠터 앞에 와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소녀는,
그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찾기 위해 열심히 냉장고 안을 뒤적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
......
"난 그런거 싫다니까!갈거면 니들끼리 가 !"
한편,
소녀가 아이스크림 값을 치루고 있는 사이
짜증섞인 소리를 내는 한이와 그런 한이 양팔을 붙든채 싹싹 비는 시늉을 하고 있는 친구들.
...
한명은 달래의 남자친구인 박주영.
나머지 한명은 농구부 주장이자 한이와 가장 친한 문성빈.
"야 이 새꺄 우리도 그러고 싶지!!
근데 니가 꼭 있어야 가능 하대 잖냐!!
옘병! 우리도 이런 냉정한 현실이 치욕스럽고 속상하다고!"
"그래 임마. 주영이가 달래마마 속이고 알리바이 짜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리고 너 아까 나 너무 좋아서 자다가 박수 치는거 봤잖아!!
그것땜에 한시간 동안 손들고 있느라 죽는줄 알았는데!!
진짜 존니 통통 튀는 얌체볼처럼 이러기냐!!?"
한이는 계속해서 양팔에 매미처럼 매달려 늘어지는 친구들 덕분에
헬멧도 쓰지 못한채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그러다 경찰한테 걸리면 어쩔 건데"
"이 새끼 하이튼 똥겁은 드럽게 많아요..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해준다는데 걸리긴 왜 걸려!!"
"에이씨 그래도 난 싫어!!뭔가 술집 포주한테 팔려가는 기분이란 말이야!!"
"야 이한!!!!!!!!!!!!!!!!!!"
"........."
"내가 진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넌 무슨 말을 고따위로 기분 나쁘게 하냐!!!!!!!!!!!
우리가 한셋트에 세 개 들은 팬티 스타킹이냐!?!?!?
아니면 홈쇼핑에 추가 입고된 라텍스 이불이야!?!?!?
팔려가긴 어딜 팔려가!!
너 친구가 부탁좀 했기로서니 고따위 말뽄새로 우릴 아프게 해야겠냐!?"
"그래!!그리고 너 임마! 양심이 있으면 어제 시합에 니가 한 짓을 생각해야지!!
너 멍때리고 계속 교통 표지판처럼 서있어서 우리 팀 질뻔했잖아!
막판에 나랑 주영이가 3점슛 안 쐈음 그대로 꼴까닥이였다고!!
아이고!!! 그 생각하니까 지금도 뇌가 으스스 흔들리네!!!"
"아 진짜 이 새끼들 되게 치사하게 나오네...."
"치사하다니!!치사하다니!?!!?
야!!!!지금 이 상황에서 니가 냉정을 찾고 곰곰이 생각해봐!!!
우린 어제 하마터면 너 땜에 질뻔했어!!!!!!!!!!
그럼 우리 아빠는 낙담해서 나 따위놈 필요 없다고 집에서 쫓아 버렸을거고!!
덕분에 나랑 성빈이는 대학도 못가고 방황하다가 때되면 군대나 갔겠지!!!!!!
그리고 군대에서도 우리는 쓸모 없는 낙오자라는 생각에
김일성 화이팅을 외치면서 탈영을 했을거야!!!!!!!
그러면 어딜 가!!!!!!당연히 영창에 끌려 갔겠지!!!!!!!
근데 또 우리 성격이 좀 지랄 맞아!?!?
아마 그 영창에서 고참을 들이 까고 십년 동안 더 썪어서.......!!!!!!!!!"
"진짜 구질구질해서 못 들어주겠네!!!!!!가!!!!!!가면 되잖아!!!!!!!!!!!!!!!!!"
그리고 버럭 외쳐진 한이의 고함에
믿을수 없다는듯 입을 헤벌쭉 벌리며 두 눈을 빛내는 아이들.
....
....
"진짜?진짜?진짜?진짜?진짜?진짜?진짜?"
"그래!!그러니까 나 헬멧 쓰게 이 징그런 팔좀 놔!!!!!!!"
"진짜 갈거야?우리를 도와줄거야?우리에게도 드넓은 우주를 탐사할 기회를 줄테야?"
"알았으니까 빨리 이 팔 놓으라고!"
"우하하하하하 우하하하하하하 !!!!아세뵤!!!!=0=
야 박주영!!! 빨리 전화해서 확실히 나간다고 해!!!"
....
.......
...
이어 성빈이의 촐싹 맞고 방정맞은 재촉에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급히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주영이.
한이가 인상을 구기며 헬멧을 눌러 쓰는 사이
일분전과는 180도 다른 굵직한 바리톤의 음성을 내는 주영이.
"아..여보세요..?아 저..아까 통화했었던 박주영인데요..
예..예..오늘 확실히 나갈수 있다고 말씀 드리려고.
네 그럼요!세명 다 갈겁니다...!!
그런건 정말이지 걱정 안하셔도 돼요!하하하하하"
....
......
이윽고 어제 우승 메달을 받을때도 들어보지 못했던
주영이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 퍼지면
한이는 한심스러운듯 그를 바라보고는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
"아 예예.그럼 이따 출발할때 다시 전화 하겠습니다"
......
그러면 재빨리 통화를 마무리 하고 핸드폰을 닫은뒤
한이의 뒷통수를 향해 애절하게 소리치는 주영이.
"야!!!너 이따 진짜 와야 된다!!!!안 오면 넌 그냥 아웃이야!!!
여덟시 홀리가든 잊지마!!!!!!!!!!!!!!!!!!
안 오면 널 평생 저주할테다!!!!!!!!!
나와 성빈이가 평생 니 양 어깨위에 기생하며 살아갈거야!!!!!!!!!!"
....
.......
..
이윽고 저리 가라는듯 휘휘 손을 흔들던 한이의 뒷모습이 작은 점 모양으로 사라지자,
주영이와 성빈이는 음흉한 눈빛으로 마주본뒤
투박한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며 짝짝 박수를 쳤습니다.
"아세뵤!!!!!!!!!!!!아세뵤!!!!!!!!!!아세뵤 짬뽕!!!!!!!!!!!!!!!!!!
드디어!!!우리에게도!!!기회가!!!찾아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그 순간 바닥에 툭 떨어진 아이스크림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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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얘기까지 나온걸 보면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안돼...
난 한이가 위험해지는걸 막아야해..
즐거움에 가득찬 그들이 시끄러운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상가 뒤에는 두 주먹을 불끈쥔 소녀가 숨어 있다는걸 꿈에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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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시각 다른 장소.
"여보세요.."
텅빈 학교 옥상 난간 앞에 위태롭게 서있는 소년.
왼쪽 귀에 핸드폰을 갖다댄체 발을 까딱이고 있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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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강은오라고 하는데."
누구냐고 되묻는 상대편의 목소리에 자신의 이름을 담담히 꺼내 놓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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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핸드폰 건너편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면..
빙긋 미소 지으며 나즈막하게 속삭이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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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오늘 나랑 재밌는거 하고 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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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청명하고 고요 하던 여름 하늘에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