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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차 세계대전 이야기
5.1. 전쟁의 시작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 소속의 단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 부부가 암살당하면서 이에 분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이 열리게 된다.
그 뒤 세르비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고 무시되자 다음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최초로 주변국을 침공한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고, 1914년에 8월에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3일에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한 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4일부터 침공해 점령한다.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었으나 영국이 독립을 인정했던 벨기에의 중립이 무시당한 것을 이유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한 뒤 프랑스로 지상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하였으며 발칸 반도의 국가 등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전포고를 교환한다.
8월 7일부터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국경 전투를 열어 승리해 파리 50여km 앞까지 진격할 정도로 선전한다. 한편 러시아가 급하게 8월 중순부터 독일을 공격했지만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동부전선 우위를 내줬으며 오스트리아군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9월의 마른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영국 연합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된다. 결국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키는 것에 실패하게 되었고 우려했던 대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면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 당시 독일의 상황을 나타내주는 근대사 유물. 이 회중시계는 1차세계대전중에 빌헬름 2세가 오토 폰 보겐 호프 (Otto Fon Bogenhoff)장군에게 수여한 IWC회중시계다. 시계케이스에 적혀있는 독일어는' FELDZUG GEG FRANKREIC RUSSLAND ENGLAND usw'로 FELDZUG는 전역이란 뜻이고, GEG는 ~에 대하여란 뜻이며, FRANKREIC RUSSLAND ENGLAND는 프랑스 러시아 영국, usw는 영어의 etc 기타 등등의 의미이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도 유럽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독일과 영국 식민지에서는 종전까지 현지 병력들의 전투가 계속 일어났다. 8월 말에 일본 제국도 영국과 함께 독일령이었던 칭다오를 침공해 점령했다.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을 시도했지만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다가 포클랜드 해전에서 괴멸되었다.
5.2. 참호전의 수렁
더 진격할 수 없게 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프랑스 방면의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서 참호를 팠고 연합군도 독일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측면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끔찍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참호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나라에도 참호전이란 교리가 없었으며 의도된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관총, 야포, 철조망 등 방어에 유리한 무기는 발달했으나 참호 돌파를 위한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기에 양측은 효과적인 전진을 하지 못하고 인명피해만 늘어가는 소모전을 치루며 대치하게 된다. 대전기간 그 어느 쪽도 참호전 양상을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다만 서부전선을 제외한 동부전선이나 발칸, 캅카스, 중동 전선에서는 참호전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 자체가 없었다. 이쪽에서는 철도와 기병을 동원해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고 있었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는 병력밀도가 차이나는 것이 컸다.
오스만 제국은 이 시점까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7월에 영국에서 만들어지던 오스만 전함 두 척을 동맹국 병기라는 이유로 영국이 부당하게 압류하자 오스만의 영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으며 8월에 독일은 오스만에게 비밀리에 동맹을 추진하고 전함 두척을 양도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해줘 환심을 산다. 그리고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되었음에도 독일 해군이 지휘하던 이 두 전함은 10월 말에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기습 공격해 버렸고 러시아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여 캅카스 방면을 공격하기 시작해 오스만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곧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영국령 인도군도 자치권을 강화시켜준다는 영국의 꼬임에 넘어가 영국군에 가세한다.
1914년 12월, 대부분의 군인들이 집에서 보내리라 생각했던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자 서부전선에서 대치하던 연합군과 독일군은 암묵적으로 휴전한 채 각자의 참호에서 조촐한 축하행사를 가졌으며 기적적으로 서로 총을 거두고 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가 가자 다시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5.3. 정체되는 전쟁 상황
1915년 1월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영국과 영국령 인도의 연결을 끊어버리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공격하였으나 점령에 실패한다.
2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해 연합국의 상선 등을 무차별적으로 격침시킨다. 하지만 5월에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며 미국인 100여명이 죽자 미국의 참전여론이 거세졌고 이를 두려워하던 독일은 미국에 사과하고 작전을 중단한다.
영국은 꽉 막힌 서부전선의 교착을 풀어줄 돌파구를 찾을 겸, 독일에 고전하면서 오스만까지 상대하던 러시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한 함대를 보내 2월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거센 저항 때문에 실패했고 4월부터 다시 지상군을 동원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란 결과를 본 채 이듬해 1월에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일은 윈스턴 처칠의 가장 큰 흑역사가 되었다.
한편 4월의 연합국의 공세를 조용하게 지켜보던 이탈리아 왕국은 결국 삼국 동맹을 공식적으로 배신하여 연합국에 가담한 뒤 바로 5월에 전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를 공격하자 오스트리아는 고전하게 된다.
동부전선에서는 8월에 독일군이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바르샤바를 점령할 정도로 독일이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이 러시아 제국의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하기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병력은 많았으며, 거리도 너무 멀었고 애초에 동부는 독일의 양면 전쟁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10월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가 고전하던 세르비아 방면의 전투는 물론 발칸 반도 지역의 정세가 동맹국에게 유리하게 넘어온다.
영어권에서 일명 Going over the top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진. 참호에서 올라와 기관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영국군을 찍은 사진으로, 솜 전투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일 것이다.
1916년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투는 격화되지만 상황은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특히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만 200만명이 살상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전황은 크게 변한게 없었다. 다만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은 전력이 약해져 서부전전에서 방어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독일 해군은 5월에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영국 해군과 유틀란트 해전을 벌여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과를 올렸지만 애초에 체급이 다른 해군이었고 봉쇄는 그대로였다. 이후 독일은 드레드노트 함대전을 포기하고 잠수함만 바라보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2월에서야 세르비아 왕국을 힘겹게 점령했다. 게다가 6월에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동맹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약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여전히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으며 피해는 꾸준히 누적되고 있어 1916년 말까지 500만의 병사가 사상당했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국내의 불만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중동의 아랍 부족들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을 영국이 지원하여 6월에 아랍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서 수세에 몰린다.
전쟁기간 동안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숱한 신병기와 전술이 개발되었다. 현재까지 사용되는 거의 모든 보병전술의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어느 국가의 병사도 철모를 쓰지 않았으나 점차 너나할 것 없이 채택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1915년 4월부터 시작된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해 효과를 봤고, 6월에 화염방사기를 첫 배치했다. 영국은 전차를 발명해 마크 1이 솜전투가 펼쳐지던 1916년 9월에 실전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기들로도 참호전의 양상을 궁극적으로 타개하지는 못했다. 독가스는 사용조건에 제한이 있는데다 화학전 방호장비가 보급되면서 효력이 감소했고, 전차는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나 초기 전차는 성능이 부족한데다 전차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에 참호전을 궁극적으로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의 전차는 거의 움직이는 엄폐물 정도였다. 전쟁 말기인 1918년에는 MP18 등의 기관단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항공기의 군사적 활용의 발전도 두드러진다. 전쟁 초에는 단순히 정찰, 그리고 상대 국민에 대한 테러 목적으로 미미한 폭격이 있었으며, 비행선을 이용한 폭격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공냉식 기관총과 동조식 발사장치의 개발로 1-2정의 기관총을 가진 빠르고 민첩한 전투기가 상대의 기구, 비행선, 정찰기를 격추시켜 나갔으며, 이에 따라 폭격용 비행선은 빠르게 사라지고 보다 빠르고 크기대비 폭장효율이 좋은 대형 폭격기가 등장하여 상대국의 도시를 노리게 된다. 이에 따라 자국 방공망 구축보다 효율적인 항공기 운용을 위해 1918년부터 영국 공군이 세계최초로 결성되었으며, 다른 참전국들도 따라간다. 대전 말 전략폭격의 이론이 영국의 트렌차트, 미국의 미첼, 이탈리아의 두헤에 의해 서서히 탄생하기 시작한다.
5.4. 미국의 선전포고와 러시아 혁명
독일은 2월부터 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한다. 결국 이것과 독일의 테러들, 치머만 전보 사건 등을 견디다 못한 미국은 4월에 독일 등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동맹국은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징집한 병사들의 훈련 등을 이유로 미국은 전쟁 참여에 조심스러웠고, 6월부터 프랑스에 훈련이 끝난 소규모의 미군 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1918년 5월까지도 큰 교전을 하지 않았다.
1917년에 들어서 러시아 2월 혁명이 터져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러시아의 체제가 전복된다. 하지만 새 정부는 여전히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려 하였으며, 내부적 불만 요소는 그대로였기에 사회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1917년 3월에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도시였던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곧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된다.
1917년 4월에 독일은 혼란한 러시아로 망명중이던 대 러시아 최종병기 레닌을 기차에 태워 귀국시켰다. 레닌의 혁명이 성공하면 독일과의 전쟁을 그만둘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의 내부 상황이 혼란으로 치닫자 프랑스와 영국은 초조해졌고, 서부전선에서 4월부터 연이은 연합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며 7월의 치열한 파스샹달 전투까지 펼쳐졌지만 대량의 인명이 소모된 것에 비하면 작은 승리였으며, 전략적으로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한편 이탈리아 왕국과의 연이은 전투에서 압박을 느끼던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전선에만 집중하려고 동부전선에서 발을 뺀다. 이후로 사실상 동부전선은 독일 혼자 담당하며 이탈리아 방면의 전선마저도 독일이 지원해야 하는 눈물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10월에 펼쳐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전투로 이탈리아가 주춤하며 방어로 돌아서자 독일은 마무리하고 서부전선으로 집중한다. 하지만 1918년에 들어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공세를 펴다 이탈리아에게 수십만의 사상자를 연달아 내버린다.
1917년 10월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 체제가 전복되고, 11월에 레닌은 자신을 지원했던 독일과의 전쟁을 멈춘다. 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나 영국은 큰 위기감을 느꼈지만 사실 독일 역시 이미 인적 경제적 손실이 누적되어 국가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러시아에도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러시아 내전이 시작된다.
1918년 1월에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평화 14개조를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이는 핍박받는 민족과 국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나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게는 종전 후 분열을 가져오는 치명타가 된다.
5.5. 동맹국의 항복
1918년 3월, 독일의 경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쥐어짜 서부전선에서 루덴도르프 공세를 펼쳤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고 얼마 못 가 주저앉게 된다. 이 공세에서결국 미군도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5월에는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한 첫 승리를 거둔다.
결국 1918년 8월부터 미군은 하루에 만 명씩 프랑스로 들어오게 되고, 90만명의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바로 독일을 상대로 백일 전투를 펼쳐 전례없던 속도로 전선을 밀어내며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주요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을 붕괴시킨다.
결국 희망이 사라진 동맹국들은 내부적으로 패배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한다. 9월에는 불가리아가 연합국과 휴전했으며 10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11월에는 혁명이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였고 독일도 킬 군항의 반란을 시작으로 반정부운동이 다발적으로 일어난 11월 혁명으로 정부가 무너져 같은 달에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항복 직전의 독일은 전선의 병사들도 굶주림에 못 이겨 연합군 참호를 습격해 음식을 약탈해 오고, 후방의 민간인들은 순무 말고는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가 마침내 전선과 후방에서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 한 1년 정도는 더 버티더라도 패전을 면할 길은 전혀 없었다. 이는 힌덴부르크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시 계획경제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너무 치중하다가 식량 생산 등의 기본적인 요소에서 일이 틀어진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경제 전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일의 경우 오히려 관료들이 자원을 비교적 유능하게 잘 배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을 완전히 탕진할 때까지 끌고 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식량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프랑스도 독일보다 먼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식량 원조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이 때 식량 원조분이 4일만 늦게 도착했으면 프랑스 전역에서 식량이 고갈될 상황이었다. 물론 이것은 춘궁기의 일시적인 상황으로, 이는 프랑스가 식량이라는 요소를 경시하다가 문제를 겪은 것을 보여줄 뿐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전반적인 농업생산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전체적인 인구수와 공업생산력에서 독일에 심각하게 밀렸던 프랑스가 유일하게 비교우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압도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조차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정도로 충분히 생산하지는 못해서, (전쟁 중이니까) 미국은 1914~24년 사이에 프랑스에 842만 톤이나 되는 식량을 보냈다. 이를 보면 외부 지원 없이 붕괴하지 않고 버틴 것에서 독일 관료들은 오히려 경제를 잘 운영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자원을 창조할 능력이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연합국의 상태도 막장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신세계와의 교역이나 지원으로 물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연합국은 전반적인 경제 운영에 훨씬 여유가 있었고 여기에 미국 병력까지 쏟아져 들어오는 상태라 독일은 항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다만 독일은 항복하는 순간에도 프랑스 영토 안에서 서부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국 영토에 적군을 한 발짝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맞은 패전은 많은 독일 국민들에게 분노와 의심을 안겼으며 일명 배후중상설이라는 도시전설이 폭넓게 퍼지게 된다. 이것이 후일 히틀러와 파시즘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6. 종전
1919년 6월에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영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뇌이 조약이 체결되어 패전국들은 많은 영토가 민족별 국가로 나눠저 독립해버렸다.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연합국과 신생 독립국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가지고 있던 식민지도 토해내야 했다. 독일 황실과 오스트리아 황실도 무너젔고 오스만 제국도 사실상 멸망했다. 러시아 제국도 혁명으로 붕괴했고 발트3국이나 핀란드, 폴란드의 독립도 이루어젔다.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은 식민지를 더 가지거나 영토를 일부 할양 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할양 받고 지중해랑 터키 쪽에 세력을 폈으나 애당초 의도했던 트리에스트, 이스티리아, 달마티아(미수복 이탈리아) 등은 얻질 못하는 등 생각외로 많은 이득을 얻지 못해 이에 불만을 품은 국민이 파시즘을 지지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땅을 합쳐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일본은 1차 대전으로 경제호황 및 독일의 아시아, 오세아니아 식민지랑 중국의 이권들을 조금 획득하였지만 역시 대공황으로 불황을 겪자 군국주의가 대두하였다.
우드로 윌슨은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베르사유 조약 1조에 국제연맹의 창설에 관한 조항을 넣었으며 1920년 1월에 첫 국제연맹 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되었고,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 종결이 되었다.
6.1. 이후의 영향
제1차 세계 대전의 가공할 피해는 대전 직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염전사상을 확대시켰다. 전쟁에 대한 가공할 공포는 열강들에게 더 이상의 1차 대전과 같은 재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이 염전 풍조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영-불의 독일에 대한 소극적, 유화적 외교시책의 원인이 되었다. 당대의 이러한 염전 풍조 확산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제1차 세계 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더욱 거대한 전쟁의 전초전이 되고 말았다.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면서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20년 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군사학적으로는 승자와 패자에게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쳐 2차 대전 초기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승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1차 세계 대전의 전훈을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자의 우세로 결론짓고 방어 위주의 군사사상을 도입, 마지노 선 건설 등의 뻘짓을 벌이지만, 독일은 그 우세를 극복하기 위한 기동전 연구에 힘을 써 결국 1940년, 20년 전에는 4년 동안 점령하지 못했던 프랑스를 단 6주 만에 점령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또한 제정 러시아와 독일은 정부가 무너져 각각 소련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다시 탄생하였고, 독일은 단치히와 주변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겨준다. "폴란드 회랑"으로 불리우는 이 지역은 내륙국 폴란드에게 해상로를 열어주었지만 훗날 나치 독일은 이를 빌미로 폴란드와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그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받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이탈리아의 범위에 속하는 영역을 다 받진 못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은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이 잘 이용해먹는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음에도 전쟁 이후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제국 해체의 발단이 된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 측면에서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되는 성인 청년 인구들의 1/3(부상자 포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전쟁 후유증은 심대했다. 근대 이전까지 프랑스의 인구는 영국과 독일을 압도했지만 19세기 무렵에 독일에게 크게 추월당했고, 이런 상황에서 두 번의 세계 대전 동안 인구 증가가 정체되면서 영국에게도 뒤쳐진다.1990년대까지는 영국보다 적은 인구를 유지했으며 이는 프랑스가 과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찾지 못하게 된 한 원인이었다.
유일하게 일본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태평양(남양청)과 중국에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이 전쟁은 이전 전쟁과는 달리 전쟁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국가들이 감당하기 힘든 경우였다. 무기체계의 발달, 특히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간 전쟁 양상과 더불어 새롭게 개발된 야포와 기관총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속도로 병력이 소모되게 하였으며, 이에 반해 나이 많은 고령의 지휘관들의 생각은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전의 경우 비교적 엉성한 화망과 포를 뚫고 닥치고 기병 or 보병이 진격해서 적군을 유린하면 되는 반면, 1차 대전 초기 전선에서는 기관총에 병력을 돌진시켜야 하는 상황임에도 양군의 지휘관들은 돌격하여 상대의 방어를 분쇄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같은 무모한 돌격명령은 지휘관들의 '공격낭만주의'와 더불어 공격하여 적의 진영을 탈취하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자 커다란 전공으로 여기고, 방어선을 굳게 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불명예스러우며, 계집애 같은 행위로 여기던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일본 군대에서 이 공격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을 여전히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나 1차 대전 당시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투 교리는 공격만능사상식 돌격이 아니었으며 포격이 주축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력만 강조하는 교리가 일본군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1920년대를 넘어서인데 이러한 교리가 성립되는 데는 러일전쟁 당시 독일식 화력전에 입각한 포격이 당시의 기술 부족에 의해 영 시원치 않았던 경험과 1차 대전의 탄넨베르크 전투와 총력전 양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산업능력으로는 1일당 수십만 발을 쏟아붓는 서구 선진국의 "사치스러운" 전투를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식의 전투를 지향해야 한다"라는 무대포스러운 결론으로 이른 것이다.
초기 전선이 고착된 이후에 무모한 돌격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 최근에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지휘관들의 무능력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지휘관들이 전선이 아닌 후방의 성에서 체류하면서 작전 지시를 했던 것도 전선의 크기나 결정해야 할 사항 등을 고려할 때 몸을 사렸다기보다는 불가피한 지휘 방식이었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선 시찰 과정 등에서 일어난 고위급 지휘관들의 사상률 역시 상당해서 몸을 사렸다는 주장 역시 부정확하다고 한다. 1914년 전쟁 초기를 지나서 참호선이 구축되고 전선이 고착될 때까지만 해도 보불전쟁의 전훈으로 구축된 보병 기반의 기동전 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전황이 참호전으로 고착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교리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포격을 비롯해서 적의 진형을 보병의 돌격 이전에 무너뜨려야 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단지 참호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적의 진지에 충분히 빠르고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포격이나 화학전, 공습, 전차의 개발 등 당시에 할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으며 그러한 시행착오의 결과 전쟁발발 당시인 1914년의 보병 기동전술과 전쟁 후기의 1917, 1918년에 독일군이 보여준 후티어 전술이나 연합국이 보여준 제병 합동 전술의 수준은 천지차이였다.
문제는 이러한 학습이 무수한 병사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과 향상된 전술이 효과를 보는 상황에서조차도 높은 손실률 자체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한계는 있었다. 진격조차 못했던 무의미한 희생이 그나마 진격은 가능한 유의미한 희생으로 바뀐 정도. 무엇보다도 매끄러운 작전 연계를 위한 통신 기술, 특히 무선통신 기술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렀기 때문에 포격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보병을 돌격시켜 적을 섬멸한다는 것은 책상 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실제로는 아군에게 포격을 하는 불상사에 대한 염려로 쌍방의 매끄러운 연계가 거의 부재했다. 존 키건은 자신의 저술에서 과학기술이 인명을 살상하기에는 충분히 발전하였으나 인명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에는 미흡하였다고 하였다. 즉, 세상을 밝게 해줄 것처럼 여겨졌던 과학기술이 인간을 죽이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지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기관총이나 가스탄 같은 병기가 너무도 쉽게 인명을 살상하는 반면에 철도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계속된 징병을 통해 전선의 병력을 바로바로 보충하였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전선이 유지되었다. 결국 동부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독일이 서부 전선에 총력을 다 했을 때에도 발전된 전술에 힘입어 전선의 돌파는 가능했지만 그 돌파를 확대시킬 역량은 없었고, 이후 제병합동전술로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연합국에 대항하여 더는 싸울 수 없을 만큼 자원이 소모된 이후에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이런 시체의 산을 손쉽게 쌓아올리는 지옥도 같은 전쟁 양상은 이전 과학기술이 평화로운 풍경 하에 발전하던 시절에 품었던 벨 에포크적인 과학과 이성으로 가득 찬 희망차고 밝은 미래상의 붕괴를 불러오고 그 과학이 미치광이 같은 전쟁 상황에 동조하고 도리어 더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을 불러오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미흡한 군사 기술에 대한 연구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하였으며 이후 이어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말의 희망마저 꺾이게 된다.
여기에 또 다른 문명의 발달인 국가 관리 체계의 발달과 민족주의에 의거한 국가 총력전으로의 변화는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대량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앞서의 요인 등으로 도리어 인적 손실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양심적이고 지성을 갖추었던 젊은 세대의 20~30대 엘리트들이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엘리트로써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에 능력여하를 불문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장서서 전장에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상당수가 장애를 입거나 PTSD 상태가 되었다. 영국의 이튼 수상 같은 경우 이 시기 입은 부상으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했으며, 명문대인 영국 캠브리지나 옥스포드의 전사자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한다. 당시 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계층의 참전자수 대비 전사자수 비율은 8:1이었는데 귀족층은 5:1이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 엘리트들이 초급장교로서 공격의 선두에 서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2~30대 남자 석사나 박사가 소위, 중위 계급장 달고 나라를 위해 군에 입대했다가 되도 않는 닥돌전략으로 1/3이, 철조망에 막히고, 기관총과 가스탄에 맞아 전사했고, 또 다른 1/3이 중추신경계 손상, 실명, 사지의 일부 절단 등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하지만 이것 때문에 다른 효과가 나타났는데 사회의 지도층들 또한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경험하고 그 참혹함과 끔찍한 만행들을 뼈져리게 채감했다는 것이다.
엄청난 소모전이 끼친 또 하나의 영향으로는 바로 진정한 귀족계층의 몰락이다. 당시 많은 귀족들이 하급 장교로 참전하였는데 위와 같은 끔찍한 소모전을 거치면서 전멸하는 바람에 귀족의 대가 끊어져버렸다. 소위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몰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도 구체제의 잔재가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허나 이 전쟁으로 인해서 정말 다 죽어버려서 비로소 진정한 구체제의 종말을 가져왔다. 당연히 과거 지배계층이 몰락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제국 또한 종언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 동반하여 민주주의 사회가 발아하게 되었다. 위의 계층이 전멸하는 것과 동시에 후방에서 갖은 군수물자 동원을 통해 대중들의 발언권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성들이 남성들을 대신해서 공장에서 일했는데 이것이 여성들의 사회적 발언권을 키운 것이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스스로의 권리와 힘에 대해서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점 역시 대중들을 선동하는 형태인 파시즘의 탄생을 가져왔고, 이 파시즘 발흥의 맥락에서 나치즘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나치즘은 다시 한 번 극단적인 팽창주의를 지향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더 끔찍하고 더 참혹한 전쟁이 터지게 된다.
이렇게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희생시켰으니 국가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국가의 지배세력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움직이므로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 국가를 만들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살자고 주장했고, 자유주의자들은 국민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극이 있으면 또 다른 극이 있듯 이와는 반대로 국가에게 모든 권력을 실어주고 국민들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총 단결하고 자신의 국가와 민족만 잘 살자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지만 이기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으니 군대가 국정을 좌우하는 군국주의가 패전국은 물론이고 일부 승전국에서도 보여졌다. 20세기 사상의 대립과 충돌의 시작이다.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들이 이 전쟁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종전 전에 국회에서 공표한 14개조 평화원칙, Fourteen Points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민족의 운명은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상이 널리퍼지게되면서 대한민국을 포함한 식민지 내의 독립 운동에 큰 불을 지폈다. 또한 소련의 레닌은 이 전쟁을 극단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게 되는데 이런 공산권의 지지 또한 혁명에 불씨를 당기는데 일조하게 된다. 식민지를 전 세계에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도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해외 영토를 그나마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마저도 유지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전부 독립시키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던 자유주의 무역에 기반한 100년의 세력균형 평화시대는 전쟁이 아니었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종결될 기미를 보였으며, 1차 대전은 단지 그 부산물이었지 결코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칼 폴라니가 대표적.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면도 있는데 히틀러를 비롯한 추축국 수뇌부들의 똘기로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과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 과정은 당시 기준으로 수뇌부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결과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 때문에 국제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떠올랐고 그 성과로 인류는 과거에 비해 대규모 총력전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바바라 터크먼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정을 연구한 저서인 "8월의 포성"은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고 인류를 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가 2014년에 들어서면서 1차 세계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에는 종전 100주년을 맞게 된다.
7.1. 전쟁 관련
• 당대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명피해가 독보적이진 않다. 군인들이 수 없이 죽긴 했지만 이전에 벌어졌던 대규모 전쟁에 비해서는 기간이 짧았고 민간인의 피해도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 사상자로 본 전쟁의 순위. 반면 제2차 세계 대전은 발달한 무기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조직적인 학살 등으로 인해 훨씬 많은 인명피해를 내었다.
• 공식적으로 밝혀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최후의 사망자가 있다. 이름은 조지 로렌스 프라이스(George Lawrence Price)로 캐나다군 소속이었다. 그는 1918년 11월 11일 종전을 단 2분 남기고 독일군 저격수에게 총을 맞아 전사했다. 다만 이날 그 한 명만 죽은 것은 아니고 종전까지 양측 도합 1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이 예상보다 악착같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 프랑스와 영국은 미군을 자신들의 지휘 아래 보충병력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미국이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369 연대만은 프랑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다. 이들은 프랑스 장비를 지급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16사단이나 161 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열심히 싸웠으며 백명 단위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받았다.
•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유색인종도 수백만명이 참여했던 전쟁이다.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2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전했으며 독일과의 인구 차이와 인적 피해로 고심하던 프랑스는 세네갈 등지에서 시민권과 훈장을 미끼로 아프리카인 자원병들을 모아 유럽의 서부전선에 참전시켜 수만명이 사망하였다. 프랑스는 이들을 거칠고 야만적인 총알받이 전사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위험한 임무에 우선 투입했고, 부대의 사망률이 프랑스 백인들보다 월등히 높아 항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영국은 인도나 뉴질랜드 등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었고, 이들은 영연방의 일원이란 자부심과 자치권, 돈 등 다양한 동기를 위해 참여했다. 그나마 이들의 사망률은 영국 백인들보단 절반 수준으로 낮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프랑스처럼 인종차별적인 전투민족론에 따른 편지 검열이나 부실한 장비 지급 등의 문제가 존재했다. 중국에서도 수십만명의 노무자를 보내 전쟁터에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세계 대전: 제국의 잊혀진 병사들(The World's War: Forgotten Soldiers of Empire)> 등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러한 유색인종 병사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독일은 백인이 아닌 인종을 전쟁에 투입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강해 적극적으로 식민지의 병사들을 유럽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군의 세네갈인 부대는 라인란트 등에 주둔했고 라인란트인들은 아돌프 히틀러나 오이겐 피셔같은 우생학을 신봉하는 나치에게는 아리아인의 피를 더럽히려는 음모의 결과로 받아들여져 불임 수술 등을 당했다.
• 이 시기에 국가들은 최신 무기뿐 아니라 구식 대포는 물론이고 군마, 군견, 전서구, 낙타 등 동원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해서 전쟁을 치렀다. 오죽하면 동물원의 코끼리를 징발해서 물자 수송에 쓸 정도였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많은 동물을 동원한 전쟁으로 기록을 세웠다.사진들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전쟁을 직접 겪어 본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집안에 통조림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전쟁을 겪었던 젊은 시절에 하도 먹을 것이 없어서 가족들이 굶고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다고...
• 장성 중 브루실로프, 페탱, 힌덴부르크는 각국에서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페탱과 힌덴부르크는 전쟁 후에 심각한 정치적 실책을 저지르게 되어 현대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
• 독일군은 파리 대포(Paris-Geschütz)라는 이름의 초대형 대포들로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영토 안에서 파리를 포격했다. 사거리 130km. 이때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 등장한 구스타프 열차포의 싹수가 보였다.
• 전쟁 초기 리에주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독일군은 신무기인 크룹사의 420mm 곡사포를 동원했다. 이는 곧 빅 베르타(Big Bertha)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사람들은 종종 다른 독일군의 대형 포도 그냥 빅 베르타라고 불렀다. SF RTS게임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에 등장하는 초장거리 방어탑인 빅 베르타는 여기에서 명칭을 따왔으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 Big Bertha라는 치트키를 입력하면 말도 안되게 긴 사정거리와 데미지를 지닌 특수 투석기 하나가 소환된다.
•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은 붉은 남작(Red Baron)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이다.
• 본격적인 위장 개념이 탄생한 전쟁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경험으로 위장의 중요성을 알게 된 군인들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군복을 검게 만드는 식이었으나, 1차 대전부터 국가적으로 위장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우선 전쟁이 일어날 무렵부터 이미 각 국가의 군복은 어두운 색이었으나 충분치 않았고, 여러 색이 쓰인 위장 무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것의 선구자는 프랑스로, 화가들을 대량으로 징집해 손으로 페인트를 칠해 전차나 군복 등에 위장무늬를 그리게 하였으며 카모플레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위장용 모형이나 위장망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프랑스에서 등장했던 입체파가 위장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다만 대량생산되는 제식 위장 군복은 2차 대전에서야 나온다) 한편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잠수함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심했으며, 노먼 윌킨슨이라는 저명한 해양 화가의 제안에 따라 다즐 카모플라주(dazzle camouflage)라는 독특한 패턴을 배에 칠하기 시작해 큰 효과를 보았다. 이 위장은 배 자체를 감추는 것은 아니고, 배의 진행방향이나 속도를 알기 어렵게 만들어 어뢰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 것에도 역시 입체파의 작품 들이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7.2. 문화 관련
•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Otto Dix)는 전쟁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 강도높은 표현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반면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는 위장무늬를 그리다가 베르됭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에곤 실레는 1년간 징집을 피해다녔음에도 운 좋게 프라하에서 복무할 수 있었지만 종전 직전 독감으로 사망. 영국의 에릭 케닝턴(Eric Kennington)은 의병 제대를 하고도 재입대 하며 종군 화가로 일했다.
•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활동한 혐의로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고 강사직에서 쫓겨났으며, 1918년에는 미국의 참전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한편 그의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탈장으로 면제를 받았으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에 자원해서 입대했다. 게다가 거기서 더 나아가 최전선의 관측병으로 자원하는 등 만용에 가까운 행위를 하였으나 운 좋게 살아남았고, 장교로까지 승급했으며 전쟁터에서 중요한 철학 논문인 <논리철학논고>까지 집필하는 업적을 이룬다. 그러나 러셀의 지인이었던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아들 에릭 화이트헤드는 전쟁에 자원해서 입대했다가 사망하였다.
• 미국의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1차 대전에서 서구 문명에 환멸을 느끼고 관련된 시를 여럿 발표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나 영국을 거쳐 이탈리아에 정착한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유대인 자본가들로 인한 전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고대 그리스, 로마를 질서와 존엄이 존재했던 문명으로 동경한 탓에 두 취향이 겹치는 파시즘과 나치즘을 찬양하며 미국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두 세력은 제 2차 세계 대전의 원흉이있고, 전후 에즈라는 미국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0년간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동료 문학인들의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다. 1차 대전의 환멸로 인해 완전히 잘못된 길로 들어가버린 아이러니한 사례. 다만 미국에서 에즈라의 시는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걸작들로 취급된다.
• 참호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야 했던 병사들은 심심풀이로 탄피, 방탄모 등에 조각을 했다. 이는 후에 ‘참호 예술(trench art)'이라고 불리며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트렌치 아트는 1차 대전 병사가 만든 것 만이 아니라 전쟁 중의 민간인이 제작한 것, 전후에 만들어진 기념품, 나폴레옹 시절의 작품 등을 광범위하게 지칭하기도 한다.
• 트렌치 코트(trench coat)는 연합군이 겨울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참호의 병사들에게 지급한 옷이 시초다.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육군성의 요청을 받고 레인코트로 이 코트를 개발하였다하여 버버리(Burberry) 코트라고도 한다. 전후 인기를 끌어서 토머스 버버리는 부자가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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