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여성시문학의 사적 고찰 1940년대
1940년대 한국현대여성시의 전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하교 교수
40년대의 시는 민족해방의 감격과 함께 찾아든 순수 낭만주의적 경향과 전원적 목가적 찬가의 내면세계의 침잠으로 되돌아갔고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기쁨만을 선물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다르게 주어진 분단이라는 비극의 현실 앞에 슬픔을 억누를 길 없었다. 또한 분단적 상황은 문인들에게도 분열과 투쟁으로 나타났다. 해방의 문학사적 의미는 이러한 혼란기에 민족문학의 수립이라는 진로의 모색 단계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2차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얻어진 해방은 그러나 완전한 독립이 되지 못하고 남북이 미. 소 양대 진영에 의해 나누어진 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게 되었다. 1948년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는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정치적 혼란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으며, 36년간의 일제 수탈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경제적 파탄은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이러한 가운데 문학인은 해방을 맞은 기쁨보다 앞으로의 자세와 진로 모색이 급선무였다.
첫째로 문인들은 과거 일제시대에 잃었던 문학을 되찾고 식민지시대의 문학적 유산을 청산해야 했다. 과거 친일문학의 잔재를 버리고 민족문학을 수립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현실문제였다. 그리하여 일제 말기에 끊어졌던 문학사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문학사를 정립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다. 둘째로는 잃었던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는 일이었다. 일제 말기 언론탄압으로 잃어버린 국어를 되찾는 국어 순화의 길이 문인들에게는 매우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셋째로는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제기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극복하는 문제였다. 해방과 더불어 1920년대 후반기에 극심한 대립을 보였던 프로문학 대 국민문학의 재판이 벌어진 듯하였다. 사회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문인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먼저 조선문학건설본부라는 간판을 서울 한복판에 내걸었다. 그것은 임화. 이태준. 김남천. 이원조 등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우리의 문학에서 정치적 이념을 몰아내고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것이 크나큰 과제였다. 조지훈은 1946년 4월 4일 청년문학가 협회 창립대회에서 발표한『해방시단의 과제』에서『해방 후 시단은 사이비 시의 범람기』라고 단정, 사상의 예술화를 주장하는 한편『민족시의 세계시에 공헌할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는 우리의 전통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권영민은『해방의 문단』이라는 글에서『해방 직후의 문단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식민지시대의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일제 말기 민족 문학의 정통성을 훼손시킨 친일적 문학행위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족문화의 방향을 정립해 나아갈 수 있도록 문단을 정비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문단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매우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문학단체의 경성에서부터 드러났다.
해방 전 5년 동안은 우리 문학의 공백기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1939년부터 문화말살정책으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어 40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었고, 그 이듬해에는『문장』지가 폐간되더니『인문평론』은『국민문학』으로 개제, 친일문학의 온상으로 둔갑함으로써 사실상 폐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언론탄압으로 문인들은 문학활동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의 문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친일문학만 허용되었던 일이다. 그리고 39년에 결성된 조선문인협회는 군국주의적인 일본에 협력하도록 하기 위하여 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로 이름까지 개칭되었으며, 언론탄압으로 42년 10월에는 한글학회사건도 일어났다.
해방 직후 시단은 계급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과 순수문학으로서의 민족 문학이라는 두 경향으로 대립되어 있었다. 시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계급문학으로서의 민족시를 주장하는 시인과 순수문학으로서의 민족시를 주장하는 시인이 있다. 전자의 경우가 김기림. 정지용 등이라면, 후자의 경우가 조지훈. 서정주 등이다.
이 시기의 특징을 지적한다면 해방으로 말미암아 일제때 잃었던 모국어를 되찾고 모국어를 시어로 아름답게 가꿀 수 있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순수시를 근간으로 하는 민족시의 정립이다. 계급문학과 순수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다. 해방과 함께 맞이한 혼란기이지만 그동안 억압되었던 감정이 일시에 터져나와 많은 작품과 많은 시집이 나왔던 것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시조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시가이면서 정형시이다. 모든 계층이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었던 국민문학이기도 하다. 고려말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랜 동안을 우리 선인들과 함께 해 온 시가이며, 한국 국민의 정서와 호흡, 그리고 가락에 맞는 간결한 형식이다. 진솔한 감정을 압축된 내용으로 담아서 전 사회 계층이 다함께 즐길 수 있었던 시조는, 한국인의 정신이 빚어낸 유일한 시형으로 한국적인 멋과 그 특성이 살아 있는 시가이다. 때문에 시조는 고전문학으로 시작되어 기본 형태를 그대로 오늘날까지 유지하면서 한국민족의 전통을 바탕으로 애정과 한과 자연을 읊었다. 그러나 갑오경장 이후 서구문화의 심각한 유입과정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는 급격한 변모를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 시기에 시조부흥운동을 일으켜 현대시조를 다시 연속시키는 슬기로움을 보여준다.
우리의『현대시조문학사』는 시조부흥운동사로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시조가 김천택, 김수장을 지나 침체를 거듭하다가, 약 150년 후에 가객 안민영의 출현으로 마지막 불꽃을 보이다가 다시 동면의 시기로 돌아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으나, 육당이 1904년 시조형식에 새로운 작품을 쓰기 시작하게 되고, 1917년경에는 춘원의 노력에 의해 현대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은상과 이병기의 시조가 나오게 된다.
1926년『조선문단』5월호에 육당이 발표한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란 논문을 시작으로 시조부흥운동의 깃발을 올리게 되고『백팔번뇌』란 창작시조집을 발간한다. 이 시기는 3.1운동의 실패에서 오는 암담한 현실과 울분이 감상적이고도 퇴폐주의적 낭만주의로 나타났고, 프로문학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민족문학파의 각성을 촉구하게 된 것이다.
육당은 우리의 것을 찾고, 제 본바탕을 찾는 일이 모든 일의 근원임을 전제하고 스스로의 자의식의 각성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때문에 현대시조의 면모가 정립된 시기는 1920년대 후반이고, 활발한 현대시조의 창작은 이은상과 이병기가 활동한 193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폭넓은 시조문학에의 참여는 1930년대의 한국현대여류문학 제2기와 함께 현대 여류시인이 등장한다. 장정심, 김오남, 오신혜 등은 1930년대에 활동하며 시조집을 출간했고, 이어 조애영이 이것을 계승한다. 이러한 여류문학 제2기의 시조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영향을 받으며, 시조의 현대화 과정 속에서 독자들과 친근한 여류시인으로 1940년대에 등장한 사람이 이영도이다.
이영도 시인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슬프도록 외로운 인생을 살면서 투명하고 격조 높은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한 여류시조시인이었다. 오늘날에는 그 자신의 독특한 시조로 알려지기보다 청마 유치환의 사랑하는 여류시인으로 부각되어 있는 모순을 탄생시킨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인생편력보다 이영도 시조의 가치를 문학사적으로 살펴볼 단계에 도달했다고 본다.
그리움이 죄가 될 수 없듯이 시인의 시 속에 승화된 사랑과 한은 시인의 것으로가 아니라 이미 독자들의 것이 된다. 가장 애송되는 시조이기도 하면서 그의 절창이라 이름할 수 있는 <무제 I>은 가장 한국적인 여인의 사랑과 기다림과 망설임을 보여 준다. 민족정서는 이미 민중정서의 폭넓은 수용으로 그 빛을 발한다. 이영도 시조는 첫째 정한을 주조로 하는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둘째 기독교 신앙으로 몰입하는 구원의식과 셋째로 조국과 민족에 바치는 애정과 염려를 담고, 넷째는 명승고적지 탐방시를 통한 자연예찬, 다섯째 사라져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풍습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있다.
『현대문학』1955년 4월호를 유치환 시인이 이영도 시인에게 선물하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현대문학』을 주고받는 정다움과 알뜰함을 보여 준다. 두 시인은 평범 이상의 다정한 사이임에는 분명했으나, 유행으로 나오는 평설이나, 시정에 돌아다니는 얘기들은 오히려 두 시인의 문학정신을 그르칠 위험도 있다.
한국의 민족정서와 잊혀져 가는 한국 고유의 정형시로 그 리듬을 재구성하면서 간결한 형식 속에 많은 정감을 담았던 이영도 시인은 황진이, 장정심, 김오남, 오신혜, 조애영을 이어 1950년대에서 197년대의 현대시조를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이병기, 이은상, 김상옥 등의 시조시인 외에 여류시조시인이 귀했던 당대에 그는 한국여인의 정취를 그대로 시조로 읊고 그리움으로 사랑과 기다림을 키워간 한국적 여인의 인생을 그대로 살다 간 시조시인이라 할 수 있다.
시조의 이영도 외 1940년대 활동한 시인으로는 조애실, 노영란 , 이승자 등이 있다. 노영란은 1947년 진주의 동인지『등불』에 참가,『황혼』『조수』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시세계는 환상적인 언어감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조애실은 46년『한보』에『새벽제단』이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후 <일어서 나아가자> <고지의 장송곡> 등 일선종군 체험을 노래했다. 일찍이 함북 아오지 회암동에서 부녀자 야학을 개설, 계몽운동과 민족사상을 고취하다가 일경에 의해 옥살이를 했다. 1941년 서울에서 비밀독서회의 <학해>지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해방을 맞이했다. 6.25때는 전선종군작가단의 중앙위원을 지내고, 그후 반공투사로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