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명파 시인
『포구에서 외 9편 / 고안나』
예시원(시인․문학평론가)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는 ‘시는 강한 느낌의 상상적인 표현으로서 리듬감으로 저절로 넘쳐 나온 것’이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시를 개인감정의 표현으로 보았다. 시를 쓰게 되면 은하수를 사랑하게 되고 바다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니 주위의 풀과 나무, 짐승과 새의 이름을 많이 알아야 시를 잘 쓸 수 있다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론의 근원은 시대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맑은 바람을 읊고 밝은 달을 즐긴다는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은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 함께하는 문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건강과 자연’, ‘건강한 문학인’으로 순수문학을 표방하며 문학단체 활동을 함께 해온 고안나 시인은 시 낭송가로서도 오랫동안 문단에서 활동해온 이력이 있다.
문학적 지향점이 동일하거나 세대적 동질성이 합치되는 문인들끼리의 동행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동인(同人)이라고 한다. ‘한 패를 이룬 사람들의 무리’라는 뜻의 ‘동아리’와 비슷하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순수성의 차이가 있다.
오랫동안 같은 동인으로서 고안나 시인의 작품과 활동방향에 대해서 보면 그녀의 심상은 외적 사건보다는, 시인 자신의 정서와 사상을 노래한 서정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 불순한 요소를 제거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차원을 개척한 시로서 그 어느 유파나 사조에 휩쓸리지 않은 맑고 깨끗한 서정성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늘 새로워져야 한다. 진부하고 식상한 재료로 요리를 해 낸다면 독자들에게 금방 외면 받고 만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안나 시인은 상상과 통찰력에서 늘 사색하며 솟아나는 샘물처럼 새로워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심상은 늘 푸른 파도와 산골의 푸른 녹음에서 강가의 풍경과 도시를 오가며,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시적 재료를 가진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시 낭송가로서 활동해 온 시심(詩心)의 결과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모처럼 2020년도에 중국 할빈 송화강 문학지에서 해외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포구에서 외 9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을 같은 시인으로서 큰 기쁨과 함께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고향의 도랑물이 넘치듯 주고받았던 이야기와 말들이 사라지고, 만남도 사라져 기억과 추억마저 사라질까 두려워 새록새록 작품으로 기록한 시 10편을 감상해본다. 코로나19로 오랫동안 서로 단절되었다가 오작교에서 다시 이어지는 지금, 시와 함께 작은 통로가 돼주어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고안나 시인에게 오히려 신선한 감성을 일깨워줘 고맙다는 인사를 해본다.
묶인 배와 묶이지 않은 배가
서로 열심히 바라본다
마음의 팔은 분명 저 만큼 뻗어 몸을 묶고 싶지만
무정타 생각 바뀐 포구여
박탈당한 자유와 완전한 자유가 공존하는 그 사이 개펄이다
미쳐 물과 묶지 못한 불찰이다
습관은 정신을 묶었다
목 사슬 묶인 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안일한 행동을 묶었다
고삐 묶인 소, 맞다
이랴 그러다 말뚝에 묶인 채
꼼짝 않고 하염없이 시간의 풀만 뜯는다
자꾸 돌아 봐도 엄연히 갈 수 없는 출렁이는 풀밭이여
나 그대와 묶여 오도 가도 못한다
묶인 글에 칭칭 감겨 숨이 찬다
시詩에 연루되어 혐의에 묶인 지 오래다
사랑보다 더 질긴 너를 풀까 말까
한 잔의 커피 향에 묶인 시간은
가서 돌아오지 않는 바퀴처럼 방향에 묶였다
창밖 수평선에 묶인 하늘과 바다
그대와 나를 묶고
태양은 또 완벽한 하루를 묵는 중이다
-〈포구에서〉전문
항구에 정박한 배와 떠나간 배의 행로가 어쩌면 1연의 포구에서 홋줄(계류삭)에 묶인 배와 묶이지 않은 배처럼, 박탈당한 자유와 완전한 자유가 공존하는 곳이 개펄이다. 2연의 ‘시에 연루되어 혐의에 묶인 지 오래된’ 오도 가도 못하는 그대와 나는 어쩌면 ‘나의 배후는 너다’처럼 같거나 나의 배후는 나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너와 나는 오래된 연기법(緣起法)의 인연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씨줄과 날줄로 바짝 촘촘하게 연결된 하나의 공간일 수 있다. 그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서 인과법칙(因果法則) 혹은 인과법(因果法) 또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3연의 ‘한 잔의 커피 향에 묶인 시간’도 시공을 초월한 특정 시간과 장소이고 싶지만 ‘그대와 나를 묶고/태양은 또 완벽한 하루를 묵는 중이다’로 귀결되고 만다.
포구 바닷길 따라 나오면 경계선 너머 흔들리는 갈대와 수초들처럼 바람굽이에 마음마저 쓸쓸해진다. 경계선 너머 난바다로 가고 싶지만 날지 않는 새들에겐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법이다.
완전한 자유를 누리려면 경계를 넘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포구에 묶인 배와 묶이지 않은 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경계와 시공을 넘나드는 연습이 쌓인 노련한 세월의 조련사들일 수 있다.
그 시공의 느낌은 3연 5행 ‘태양은 또 완벽한 하루를 묵는 중이다’로 휴식의 마무리를 짓고 있고, 세월의 사이클은 ‘가서 돌아오지 않는 바퀴처럼 묶인’ 시간을 커피 향으로 풀어내고 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사람의 운명이 같은 식으로 반복된다는 평행이론(Doppelgänger)의 원리처럼, 포구에는 서로 다른 타인들이 마치 동질류의 인간들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대화훼단지 둘러
노란 국화 화분 하나
덥석 안고 돌아오는 길
뭐가 그리 좋은지 오므렸던 작은 입들
일제히 벌린다
닫혀있던 내 입도 한 몫 거든다
함께 정 붙이고 살아보자 했다
차보다 더 빨리 달아나는
산은 어디로 가는지
엉덩이 들썩이며 줄줄이 따라가는 가로수
목줄 메인 채 끌려가는 전봇대
저들은 또 어디까지 가는지
물끄러미 쳐다보는 초승달
엉겁결에 놓쳐버린 석양 탓하며
잡지 못한 그 무엇 생각하는지
나는, 피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헤드라이트 불빛에 깜짝 놀란 밤하늘
노란 국화꽃 피우기에 한창이다
-〈국화꽃 피우기〉전문
문학은 언어예술(wortkunst)이다. 언어학에서는 회화나 조각을 형상예술(bild kunst), 음악을 음예술(tonkunst)이라고 하며, 문예(文藝), 문학은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라 규정하고 있다. 미적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시적구성이 필수적이다.
국화 향은 해마다 돌아오는 가을의 계절 감각처럼 시간을 각인시키며 일깨워주지만, 어쩌면 시공을 초월해 시작과 끝을 구분 짓다가 또 다시 이어주는 삶의 촉매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 계절의 형상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주며 종합예술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연에서 ‘노란 국화 화분 하나’에 입이 싱글벙글한 것도, 이정표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생의 가운데서 노란 개나리나 해바라기처럼, 시각을 자극하며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국화잎에서, 새로운 출발과 희망의 미소를 함께 지을 수 있으니 즐거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연에서 ‘차보다 더 빨리 달아나는’ 산은 우리네 인생살이를 시적 표현인 알레고리(allegory)로 비유하고 있다. 어느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에 의해서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산은 어디로 가고 ‘목줄 메인 채 끌려가는 전봇대’는 내남없이 삶의 목표와 목적 없이 무작정 앞만 보며 달려가는 현대인들의 좀비 같은 모습을 비유해 놓은 것일 수 있다. 그런 삶은 2연 7~8행 ‘엉겁결에 놓친 석양’을 두고 멍하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망연자실하는 도시인들의 모습일 수 있다.
국화향기 가득한 계절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떡 한 접시와 국화차의 절묘한 조화를 느끼다 보면 ‘나는 피고 있는지/지고 있는지’ 조용히 정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연 3~4행 ‘헤드라이트 불빛에 깜짝 놀란 밤하늘/노란 국화꽃 피우기’는 명멸하는 불꽃이 아닌, 새로운 희망의 삶에 에너지를 북돋워주는 창발하는 불꽃이 되어 밤을 낮처럼 수놓고 있다.
바람의 각 누이며 써내려간 사연
시간을 앞세워 바삐
지워지고 있습니다
쓰다 지우다
포기한 채 나뒹구는 글자들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미처 조립되지 못한 언어들이
마음의 각을 세웁니다
읽지 못할 내용 하나도 없습니다
붉은 혀의 유희 보다
검정 펜의 글씨 보다
가슴 깊숙이 각인되는 연서입니다
지워지기 싫은 단어들이
꼼짝달싹도 않은 채
엎드려있습니다
내 마음속 그대처럼
-〈은행나무 연서〉전문
가을이란 계절은 마른 잎 떨어져 숲을 덮으니 이불을 삼고, 은행알 굴러서 몸부림을 쳐도 부질없는 애욕만 불태우며 짙은 고독의 냄새만 풍긴다. 가을은 무언가 애타게 바라거나 집착하며 끈적이는 게 아니라, 하나씩 조용하게 정리하며 사색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하심(下心)으로 방하착(放下着)하며 마음 정리하는 시간이다.
세월의 강에 지나간 추억은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가을비처럼 빈 가슴 더욱 시리게 하고 구름에 가린 달그리매만 강물 위에 떠 있다. 나뭇잎이 바싹 마른 계절임에도 마음의 물기는 속일 수 없는 것이 가을이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질 무렵엔 ‘바람의 각 누이며 써내려간 사연’이 더욱 더 그리워지기만 한다. ‘붉은 혀의 유희보다/검정 펜의 글씨보다’ 더 깊이 각인되는 그리움의 맛은 가을 연서보다 더 하얀 밤을 지새운다.
부질없는 애욕만 불태우며 모진 비바람 맞는 외로움의 향기와 오욕칠정의 번뇌는 내 마음속 그대처럼 꼼짝달싹도 않은 채 눌어붙어 있지만, 가을날의 바람은 어느새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쓸쓸한 찬바람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가을날의 은행나무 연서는 ‘완성되지 못한 채/가슴 뜨겁게’도 하지만 쓰다 지우다 하는 글자와 문장들처럼 언제나 미완성으로 아쉬움을 남긴다. 어쩌면 사고치고 싶은 여우처럼 아슬아슬한 가을날의 전율을 미완성으로 남겼을 수도 있다.
상상은 감각적 체험을 심상으로 파악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릿속에 심상을 만들어보고 또 여러 존재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심상은 사실이나 실재의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꾸밀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 능력이다.
고안나 시인의 ‘은행나무 연서’는 해마다 쫓아오는 가을날의 설렘처럼 다시 또 찾아올 먼 가을의 서성임으로 한 페이지를 넘기며 뒷장을 여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지난 가을과 지금 가을의 시간, 앞으로 다가올 가을의 연서는 또 그렇게 현재와 미래진행형으로 무한반복 하며 시공을 초월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 너무 많아
열두 개 입 가졌지
한 개의 공명통
오동나무 심장에는
소리들 숨어있어
열두 줄로 말하지
희미한 기억 깨우며
공명통 열고 나오는 소리들
멈춘 바람이다가
다투는 구름이다가
파닥이는 날개였다가
허공 뚫고 올랐다가
아, 황급히 날아 사막 넘다가
뜨거운 모래바닥 추락하다가
당신 손에 잡혀
나 목청 가늘어졌지
무엇 때문 우는지
무슨 일로 웃는지
아슬아슬한 줄에 잡혀 생각중이야
여전히 뜨거운 피
당신 마음 훔치고 있지
열두 줄 떨림 위
위태위태 꽃 피우는 현의 말
팽팽한 긴장감 쥐었다 놓았다
기러기 발 가진, 나는
-〈가야금〉전문
여기서 시인의 생래적인 외로움과 고독한 정서는 가야금 열두 줄의 공명에도 투사되고 있다. ‘희미한 기억 깨우며’ 나온 공명통의 소리들은 그저 계절의 변화에 따른 자연현상일 뿐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는 ‘팽팽한 긴장감 쥐었다 놓는’ 위태위태한 현의 말로 비유하고 있다.
시인은 가야금을 자연과의 교감을 넘어 자신의 고독과 연민을 감정이입 시켜 1~3행 ‘하고 싶은 말 너무 많아/열두 개 입 가졌지/한 개의 공명통’으로 비유하며 객관적 상관물로 투영하고 있다.
고안나 시인은 이 작품에서 대부분 격정의 그리움과 정한(情恨)의 세계를 은근한 비유법으로 에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을 13~14행처럼 ‘아, 황급히 날아 사막 넘다가/뜨거운 모래바닥 추락하다가’처럼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열두 줄 떨림 위로 나타나는 그리움과 정한이 주류인 작품이다.
해석에 따라서 독자 감흥을 위한 시적 장치나 시인의 기교에 따라가자면 화자는 페르소나(persona)를 차용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고비사막에서 흩어지는 모래바람처럼 사라지지 않기 위해 19행에서 ‘아슬아슬한 줄’에 잡아놓고 생각을 정리 중이다.
이 작품에서 서정적 자아와 화자의 ‘하고 싶은 말’의 심미적 거리는 ‘오동나무 심장’과 ‘열두 줄 떨림 위’에 잡아놓고 있는 열두 줄의 현이며 열두 개의 입으로 울리는 ‘공명통’에 있다. 그 생각들을 잡아놓지 않는다면 벌써 먼지가 됐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이미 사라지지 않는 안정감 즉, 안족(雁足) 또는 브리지(bridge)로 현을 지지하고 음의 높낮이를 조정하는 기러기발에서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자신감인 것이다. 그 자신감을 마지막 행에서 ‘나는’으로 마무리하며 방점을 찍고 있다. 모든 인생의 즐거움은 마음자리에 있고 그 마음자리 중심엔 자아(自我)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줄 공명통에 현을 얹는 건 장인의 혼을 얹는 것이고, 그 공명통을 울리는 건 영혼의 교감이 없이는 좋은 소리를 낼 수가 없다. 맑은 바람과 맑은 영혼이 합일돼야 울림을 줄 수 있고, 그 울림을 천상의 소리처럼 느낌 그대로 고안나 시인이 작품에 실어 전해주고 있다.
식어버린 몸 추스르고 있다
임시 휴업중이다
할일 없는 연장의 서글픔
목줄 뚝뚝 끊어지는 설움도 봤다
잃어버린 열정
남아 있는 힘 깡그리 무시당한 채
더 큰 힘에 밀렸던 기억이 있다
멀쩡한 육신 저당 잡힌 채
땀 흘렸던 어제는 추억이다
빈주먹으로 서서
황량한 들판처럼 무너지는 사람이 있다
채워주고 싶은 입들 주렁주렁 거느린
가장의 한숨 소리
넘어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바람과
비밀스럽게 사투중인
저 무거운 빈손
-〈빈손〉전문
모든 인간은 돈, 명예, 쾌락, 부귀 등을 꿈꾸며 희로애락 속에 살아간다. 그 욕망들을 오욕칠정(五慾七情)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달려가며 시기 질투하고 아귀다툼을 벌이며 살아가는가?’ 하는 반성의 메시지를 고안나 시인은 ‘빈손’으로 투영하며 작품을 풀어내고 있다.
‘빈손’의 한숨은 그 모든 욕망의 한 곁에서 조용히 진실한 상태로 돌아와 ‘가장의 한숨 소리’라는 현실감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힘없는 가장들은 5~7행처럼 ‘잃어버린 열정/남아있는 힘 깡그리 무시당한 채/더 큰 힘에 밀려났던’ 짙은 페이소스(pathos:고통, 연민)의 기억이 있다.
세찬 비바람에 나무가 휘고 흔들릴지라도 비가 그치면 나무는 바로 선다. 중심만 바로 잡으면 온갖 풍파로 굴곡진 우리 삶도 바로 설 수 있다. 하지만 멀쩡한 육신마저 저당 잡힌 채 할 일 없는 연장처럼 빈주먹으로 서서 속절없이 시간만 죽이며 세월을 보낸다면, 그것이야말로 식물인간처럼 무너져가는 것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시한부인생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고안나 시인은 한 가장의 삶을 통해 좌절과 허무감을 노래하는 것이 아닌,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장 적나라한 현실을 드러내고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to be or not to be)를 물으며, ‘비밀스럽게 사투중인/저 무거운 빈손’을 보여주고 있다.
인생 종착역은 아직 멀었는데 아직은 쓸모 있는 저 빈손 빈주먹을 어이할 것인가 하고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행의 ‘저 무거운 빈손’은 2행에서 ‘임시 휴업중이다’며 일찌감치 제시해놓고 있었다. ‘임시휴업’은 말 그대로 잠시 쉬고 있음이다.
인간해방의 썰 풀이는 인간을 죽이지 않으며 완전한 거세를 당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제시해두고 있다. 한 세상 치열하게 살아보면 부귀영화도 별 것 아니요, 헛된 꿈이라고 말하는 죽은 내시들처럼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 아직 죽지 않은 ‘임시휴업’임을 빈주먹으로 강조하고 있다.
빈주먹은 여기서 인간해방의 의지와 함께 살아있는 주먹이다. 그 빈주먹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비밀스럽게 사투중이다.
고집 속에 갇혔다가
몸 허물며 나선 길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세월 앞에 덥석 주저앉은 앉은뱅이걸음
비바람 천둥 번개소리 무섭던 날
지렁이처럼 땡볕에 말라가던 그 즈음
그늘자리 만들어주던 산을 지나
갈대 숲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거기는 어디였던가
가고 또 가고
쉬지 않던 흐름이로
웃음 뒤에 숨어있던 젖은 마음으로
대물릴 수 없는 물의 길
밑그림 완성되면서
바다로 가는 강물처럼
-〈역류할 수 없는 길에서〉전문
역류(reverse flow)란 압력이 높은 하류 쪽에서 낮은 상류 쪽으로 유체가 흐르는 현상을 말한다. 역류가 계속되면 가득 차서 넘치게(overflow) 된다. 유체가 가득 차면 넘치든 폭발하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기계장치에선 안전을 위해 역류방지기 또는 드레인밸브(drain valve)를 설치하여 역류를 방지하고 기계장치 내에서 생긴 응결수를 외부로 미리 배출시킨다.
사람들의 육체적 심리적 억압기제도 마찬가지다.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충분한 방어기제로 내성을 다지긴 하겠지만, 예방조치와 함께 스트레스와 트라우마(trauma) 해소를 위한 심리치료도 있어야 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로 압박(pressure)이나 억압(repression)의 과정이 길어지면 폭발(explosion)은 필연적이다. 원하지 않는 생각·욕구·감정 등을 의식으로부터 끌어내어 무의식 속으로 억눌러버리는 과정으로 방어기제를 작용시키겠지만, 중요한 건 치유와 회복의 단계다.
고안나 시인의 작품 ‘역류할 수 없는 길에서’의 역류는 1연과 2연의 1~2행처럼 ‘고집 속에 갇혔다가’,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세월 앞에 덥석 주저앉은 앉은뱅이걸음’으로 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천라지망(天羅地網)에 빠진 상황을 말하고 있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이란 하늘과 땅에 그물이 쳐져 아무리 몸부림쳐도 몸과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의미로 손, 발이 묶여 구속돼 있음을 뜻한다. 마치 낚시에 걸린 물고기와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데 없는 3연의 상황처럼 ‘쉬지 않던 흐름으로/웃음 뒤에 숨어있던 젖은 마음으로’ 시인은 과거의 시간과 현재, 미래의 시간을 오가며 정면 돌파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내고 있다.
주저앉아 있기 보다는 앞을 향해 전진할 수밖에 없다. 물의 길은 큰 바다로 가는 것이 물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큰 해방의 길이다. 웅덩이에 갇혀 고인 물처럼 썩어가기 보다 대해(大海)를 향해 힘찬 전진을 하는 것이, 역동적인 혈액순환이나 자본의 선순환처럼 사람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 또는 생물을 뒤주 속에 장시간 가둬두면 결국 숨을 멈추고야 만다. 그것은 아주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행위를 고문이라고도 표현을 한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지만 모든 것은 예방이 최우선이고 피치 못할 땐 후속조치로 치유의 과정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살강 댓살 사이로 꽃잎이 피고 지는 것도 자연과 인간의 삶에서 순환에 해당한다.
한 아름 꽃송이를 가슴에 안고 등불로 밝히며 밤을 보내는 것이나, 넓은 바다 위로 황금빛 햇살이 가득 퍼진 한낮의 시간이나 모두 대자연의 순환에 해당한다.
역류할 수 없는 길에서 ‘고집 속에 갇혔다가/몸 허물며 나선 길’은 다시 한 번(again) 새로운 시작과 부활의 길이다. 부활(Resurrection)의 의미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닌, ‘정의는 불의를 이긴다, 역사의 승자는 선이다’라는 것을 각인시켜주는 것이다.
이 가벼운 우주의 알
어떤 날개로 하늘 날지 몰라
어떤 힘과 어떤 기술이
심장의 힘줄 비틀 수 있다면
움츠린 박동소리 펴질 때
그 연약한 손 과 발
세상 움켜쥘지 몰라
이 두려운 입속의 말
어떤 노래의 사연 말할지 몰라
종달새 떠서 흐르는 웃음소리
구름 속 밀고 다니면
참지 못한 입술 벌어질 때
그 여린 혓바닥과 목청
당신 마음 훔칠지 몰라
나는, 신성하고
마력 지닌 땅속에 묻힌 타임캡슐
이 어둡고 좁은 세상
웅얼거리는 소리 억제하며
단 하나의 사실만 인정하지
스스로 일어 설 수 없는
어둠과 나만이 남아
바깥소리에 귀 기울이지
-〈씨앗〉전문
산다는 것은 시간과의 술래잡기다. 1연 1행의 ‘이 가벼운 우주의 알’에서 인간은 물론 우주만물에서 가장 균등하게 주어진 것이 시간이다. 고안나 시인이 추구하는 자아성찰과 구도자적 열정은 바로 우주의 가벼운 씨앗이라는 화두에서 나오고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항상 조심하며 두려움 속에서 입속의 말을 감히 입 밖으로 내밀지 못하는 벙어리 냉가슴 같은 시간 속에서도, ‘조심해 다쳐!’라는 마음으로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천근같은 무거움의 내밀함을 교차하며 번뇌와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1연과 2연에서 제시하는 화두는 ‘말하기’와 ‘보여주기’ 사이에서 오가는 두려운 ‘까기’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소외된 인간군상과 사회현상을 어디인지 모르는 우주공간 즉, 주변의 사각지대에서 나왔을지도 모르는 씨앗을 언급하며 그림처럼 펼쳐내 주고 있다.
3연의 ‘마력 지닌 땅 속에 묻힌 타임캡슐’은 드러내지 못한 비밀 이야기를 언젠가는 ‘지금은 말 할 수 있다’처럼 당당히 보여줄 수 있는 시간으로 포장하며, 신비감으로 감싸고 합리화시키는 것이 바로 ‘타임캡슐’이라는 물건이다.
4연에서 시인은 여지없이 ‘까기’에서 ‘가면 쓰기’로 포장해 내밀한 신비감을 더해주며 아예 꽁꽁 파묻어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둡고 좁은 세상’, ‘웅얼거리는 소리’, ‘어둠과 나’, ‘바깥 소리’들은 유폐된 공간을 의미하고 있다.
어쩌면 거대한 권력이나 공포에 속절없이 당하는 인권유린 같은 이중성을 빗대고 있긴 하지만, 다시 보면 해방의 썰 풀이는 본인 의지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내도 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2연 3연으로 돌아가 다시 보면 ‘나는 신성하고/마력 지닌 땅속에 묻힌 타임캡슐’에서 알 수 있듯이 1인칭 ‘나’와 그 어떤 힘과 기술에서 누구든 비밀의 파괴가 가능함을 제시해주고 있다.
시인이 제시한 내밀하게 내장된 슬픔과 차단된 삶의 원동력은 결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주체는 이미 내밀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2중 구조를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무렵이다
누구나 한 번쯤
다른 나로 살고 싶은 때
그러나 변할 수 없는 본질과
카멜레온처럼 달라지는
현상은 어쩌란 말인가
함께 가는 길이라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알고 보면 언제나 혼자 가는 먼 길인 것을
꽃들이 진 자리엔
사람꽃밭 이더라
어깨와 어깨
손과 손의 거리가
너와 나 우리의 사이였던
그 강변의 이야기를 기억하는지
술렁이던 물살의 주렴은 헤아려 보았는지
저도 저 혼자 노을빛에 붉어지던 그 때
붉어지던 마음은 어디에 숨었는지
살면서, 몇 번이나 더 붉어질 수 있는지
물살을 가르는 유람선 위의 젊은이들은
카멜레온처럼 붉게 속삭이고
노을이 서럽게 풀어지던
그 무렵이다
-〈노을빛에 붉어지던〉전문
‘누구나 한 번쯤/다른 나로 살고 싶은 때/그러나 변할 수 없는 본질과/카멜레온처럼 달라지는/현상은 어쩌란 말인가’
2연에서 제시하는 화두는 전형적인 페르소나(persona:가면)의 갈등 상황이다. 마치 2000년에 상영했던 영화 ‘화양연화’에서 끝내 페르소나를 찾지 못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끝까지 두 사람은 페르소나를 찾지 못했던 연극이 바로 삶이 된 두 사람의 ‘아름다웠던 시절’은 창문 너머 붉어지던 노을빛일 뿐이었다. 고안나 시인의 작품도 한 사람일 때 느끼던 감정과 두 사람이 함께였던 시간 속의 추억도, 어쩌면 삶 속의 연극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내밀한 감정을 슬며시 드러내고 있다.
6연에서 제시하는 ‘물살을 가르는 유람선 위의 젊은이들은/카멜레온처럼 붉게 속삭이고/노을이 서럽게 풀어지던/그 무렵이다’처럼 우리네 삶도 애쓰지 않아도 연극무대와 같이 가면을 쓴 배역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내비치고 있다.
삶에 대한 진정성을 고민하기 전에 현실에서 무대와 삶의 구분을 없애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며 연극무대의 주인공으로 살아본다면 진정성의 진위여부 따위는 무가치한 해묵은 논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네 삶에서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들, 사랑스러움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을 애써 이분법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향기처럼 이미 우리네 현실의 삶 속에 깊이 배어있을 수 있다.
타오르는 모든 것은 화광(火光)이다. 정염(情炎)도 타면 시가 된다고 했다. 화자는 5연에서 ‘붉어지던 마음은 어디에 숨었는지/살면서, 몇 번이나 더 붉어질 수 있는지’ 반문하고 또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 붉은 마음은 화자나 독자 모두 어쩌면 공통적으로 찾지 못하는 페르소나(persona:가면)일 수 있다. 서로의 진정성을 알면서도 애써 감추고 또 다른 진정성을 찾으려는 ‘까기’를 시도하는 연극의 과정일 수도 있다. 끝내 밝힐 수 없으니까 더 서러운 것이고 끝내는 붉은 마음으로 눈물짓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게 붉은 마음이다. 밝히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힘들어지는 게 바로 그 마음일 수 있다. 노을빛에 붉어지던 그 마음은 살아가면서 그러려니 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그 무엇의 작업이 필요 없는 것이기도 하다.
너 또한 누구의 사랑이더냐
떨어져 나간 살점
쳐다보기조차 시린데
살아보지도 않고
못살겠다고 울먹이는 여자 보란 듯
바다는 흰 피를 토하며 울어 샀는다
방목하던 소떼들 보이지 않고
야성을 잃은 목 쉰 갈매기떼
목장의 노래도 잊었다
누가 살자 한 것도
누가 살아보라 한 것도 아니라고
갈매기가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뱃머리 돌리는 여객선
마주 선 눈빛 또한 사랑이어라
파도가 뜯다 만 살점이
해무에 가려 너덜너덜 하다
누군가 한세상 질펀하게 살다가고
또 누군가 한세상 뜨거워 몸 닳을 때
떨어진 살점 위로 청보리가 피겠지
-〈가파도를 지나며〉전문
어느 시인이 별이 밝은 까닭은 그 별이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평생 가슴이 뜨거웠다고 했다. 그 시인과 권커니 잣거니 한잔 하다보면 함께 몸이 뜨거워져 불타는 듯 했다. 가파도의 황홀함에 고안나 시인은 끝내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너 또한 누구의 사랑이더냐’ 하고 화두를 던졌다.
내륙의 바다에서 바람이 잔잔할 땐 갯바위를 간질이며 젖감질하는 어린 아이처럼 희롱하며 웅얼거린다. 하지만 제주의 바람과 파도는 늘 거세고 거칠기만 하다.
2연 ‘살아보지도 않고/못 살겠다고’ 앙탈부리는 여자 보란 듯 ‘바다는 피를 토하며 울어 샀는다’처럼 제주의 바다와 섬은 단 한 번도 살갑게 치대기보다는, 늘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때리다가 끌어당겼다가 ,사흘에 한 번씩 북어포 명태포 두들기듯 우당탕탕 부부싸움이 잦은 사이로 지내온 세월이 오래 되었다.
때문에 늘 ‘파도가 뜯다만 살점이/해무에 가려 너덜너덜’해지며 슬픈 사이일 수밖에 없었던 섬이기도 하다. 고안나 시인은 보다 못해 그 서러운 섬의 한 서린 넋두리를 대신하여 6연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슬픔을 달래주고 있다.
‘누군가 한세상 질펀하게 살다 가고/또 누군가 한세상 뜨거워 몸 닳을 때/떨어진 살점 위로 청보리가 되겠지’
무의식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감정, 갈등, 욕구 등을 꿈 분석, 자유연상, 유도요법, 심리극, 예술 활동 요법으로 긴장을 발산시켜 정화(淨化), 배설하는 것을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 한다.
배설에는 육체제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있는데, 문학에서는 정신적인 심리치료 효과가 높아서 무의식 속에 잠겨있는 마음의 상처나 콤플렉스를 말이나 행위로 풀어내고 정화를 시켜준다.
사랑을 하려면 목숨 걸고 뜨겁게(hot) 하든지, 아니면 차갑게(cool) 식어버리든지 강한 이분법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랑을 잘 하는 이들은 냉정과 열정을 잘 버무려 아슬아슬한 고도의 줄타기를 하면서 즐기기도 한다.
고안나 시인은 이 작품에서 오히려 격렬한 때리기를 하며 6연에서 화끈하게 마무리 해주고 있다. 그러면 오히려 상처가 치유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떨어진 살점 위로 청보리가 피길 염원하며 가파도를 위로해주고 있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인 이심전심(以心傳心)의 투사로서 시인 자신의 흥미와 욕망들이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지각되거나, 자신의 심리적 경험이 실제 현실인 것처럼 통각(痛覺)되어 작품에서 강렬하게 폭발하고 있다.
불이야 꺼지면 다시 지피면 되겠지만 떨어져나간 살점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이왕 하려면 뜨겁고 질펀한 사랑을 한번 제대로 해 보라고 시인은 화끈한 주문을 해본다. 누구에게? 바로 가파도와 일심동체가 된 시인의 마음이다.
그리움의 빛깔이다
애월의 바다는 풀냄새가 난다
누군가 쉴 새 없이 밀어 보내는
녹색의 잠언들
누가 난해하다 했던가
물가에 앉아 푹 젖어 살자
달의 입장이고 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물에 빠진 달이 되거나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마음을 긁어 본 사람은 안다
내가 먼저 푹 빠져
심장 깊숙이 한 문장 한 문장 새기다 보면
덩달아 초승달도 파도소리에
흠칫흠칫 놀라며
바다 속으로 긴긴 연서를 띄울까
침묵의 소리까지 깨우고 싶어서
내 발목이 젖는다
어두움이 채 오기도 전에
애월이다
가슴 한 쪽이 아릿한
에메랄드 빛 그리움이다
-〈애월에서〉전문
애월의 그리움은 짙은 핑크빛 와인의 향기와 노을빛이다. 애월의 바다에선 풀냄새가 나지만 그리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붉은 노을에 두둥실 타고 수평선 너머 난바다로 나간 태양과 어둠을 타고 오르는 달이 교차하며, 하루의 이쪽저쪽이 휴식과 또 다른 희망을 기대하며 계속 무한 반복되는 사이클이기도 하다.
하루를 바재다가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삣낙질 하루 볕이 어떻게 부서지고 애월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자물리는지 마음을 긁어대며 긴 한숨을 쉬어본다.
하루의 노동이 씻기는 붉살의 저녁에 불소주 크게 한잔으로 묵은 감정이 널펀히 녹아내리고 이쪽저쪽의 열기도 이제 곧 뒤바뀌는 시간이다. 거뭇발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맑은 술 기운에 하루가 익는다.
상처받은 심연의 바다에서 긴 한숨과 어둠이 채 오기 전에 부지런히 상념은 걷어내야 할 시간에, 애월 바다에서 여전히 시인은 가슴 한쪽이 아릿한 에메랄드 빛 그리움을 털지 못한다.
붉살이 내리는 애월에서는 그리움의 자락을 노을에 흘려버리고, 시뻘건 핏빛 석양 밑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멈춰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불 같이 뜨거운 사랑 한번 해보지 못했다면 애월의 노을을 깊이 들이마시며 사랑해보는 것이다.
바다 속으로 긴긴 연서를 띄워볼 것이면, 노을을 마시고 뱉어내며 긴 장마 같은 징한 세월의 묵은 것들을 씻어내는 것이다. 가슴 한쪽이 아릿한 에메랄드 빛 그리움은 그렇게 털어내 본다.
평생을 멀게 또 길게 돌아다녔지만 세월만큼 징한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푹 익은 장맛처럼 숙성 잘된 와인 한잔에 늑골 깊은 곳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지나간 시간을 하품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시간도 여유 있게 가늠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후회의 연속이기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지 않았을까. 가슴 속의 불을 잘 익은 와인과 석양에 실어 다 토해내고 나면 잔잔한 미소가 나올 것이다. 꽃 진 자리에 애월 바닷가는 우리네 모두의 바닷가이고, 질 좋은 포도주를 무시로 마시고 보면서 즐길 수 있는 대자연이 준 천혜보고(天惠寶庫)의 바다이다.
눈물이 시가 되어 흐를 때, 그리운 바다 성산포 못지않게 뜨거웠다 식었다 하며 일심동체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애월이고, 지친 그리움에 위로를 주는 것도 그곳의 노을이다. 고안나 시인은 그 뜨거운 바다에서 느낀 그리움을 다시 그리워하고 있다. 그 마음은 바로 애심(愛心)이다.
▶예시원 : 시인․소설가․문학평론가
▶1987년 시 ‘청춘 양구에서’ / 2002년 수필 ‘막걸리 예찬’ / 2008년 소설 ‘고래심줄’로 등단 / 2019년 국방FM 국방광장 수요문학 소설『살수, 아! 청천강』발표
▶바다시인상 / 한용운문학상 / 다선문학상 평론대상 / 한국현대문화포럼 평론상 / 문예춘추문학상 / 문학세계문학상 / 대한민국 시인대전 대상 / 대한민국 디지털문학상 대상 / 대한민국 베스트작가상 수상
▶시집『아내의 엉덩이』외 다수 / 수필집『양복입고 자전거 타기』외 다수 / 소설집『토영 통구미 아재』외 다수 / 평론집『달빛 속의 시』『화채 한 그릇의 이야기』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 계간 시와늪 주간․심사위원 / 한국문학세상 특별심사위원 / 현대문학작가연대 중앙위원 /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 (사)문학그룹 샘문 이사
주소 : 우편 52214
경남 산청군 금서면 친환경로 2436. 한국항공우주산업
예시원(010-3371-7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