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안과 피안 모두 던져버린 ‘도심의 난야’ |
출가 수행에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한국불교계는 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비구니 스님들이 많다. 이들을 이어 수많은 제자들이 전등을 이어가고 있다. 대전 시내의 세등선원도 대표적인 비구니 선원으로 손꼽힌다.
“출가수행인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다.
공부를 통해
중생을 교화해야한다”
세등선원은 산속 깊은 고요한 장소에 위치한 다른 선원과 달리 대전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1972년 선원 건립 당시만 해도 야산이 자리한 조용한 곳이었지만 유성지구 개발로 도심 속 사찰이 되었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바뀌었을 뿐 생사윤회를 끊고 금생에 성불을 이루겠다는 납자들의 금강석처럼 굳은 원력만은 변하지 않았다.
하안거 결제가 한창이던 지난 8월 초 찾은 세등선원은 도심 속 사찰 답지 않게 깊은 고요속으로 침잠했다. 장마가 지난 뒤 불볕 더위가 내리쬐는 가운데 풍경소리조차 잠이 든 세등선원에는 수좌들의 신발만 이곳이 공부처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세등선원은 전강스님과 스님의 제자인 송담스님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다. 출가자는 오로지 공부해야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거듭 강조 했던 세등스님은 한 곳이라도 더 선원을 개원하여 납자들에게 공부처를 제공하겠다는 원력아래 선원을 지었다. 당시 스님은 송담스님과 전국을 두루 살피다 이곳 대전시 탄방동에 선원을 개설했다고 한다. 기와 한 장에도 손수 정성을 담았던 스님은 선원을 개설한 뒤 전강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제방에서 모인 22명의 수선 납자들과 정진하기 시작했다.
세등스님은 선원을 건립하여 참선 납자들의 수행공간을 확보하는 한편 법우회를 조직하여 정법수행을 본분으로 삼는 재가불자도 키워냈다. 이후 대웅전 정묵당 봉향당을 확장하여 1988년 세등선원을 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전강스님이 입적한 이후에는 송담스님을 모시고 납자들과 재가 대중들이 수선안거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결제철에는 송담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으며 공부를 연마한다. 선원 이곳 저곳을 보고 있는데 스님들이 나왔다. 오전 정진을 마친 스님들이다.
세등선원은 대중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정진하는 큰방 삼보전 법당과 객실 및 다각실로 이루어진 3층짜리 요사 1채, 그리고 간병실인 봉향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구니 스님들의 공부처는 늘 그렇듯 정갈하며 단정하다. 좁은 공간이 자칫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대전 시내를 내려다 보고 서 있는 선원터는 시원하기 그지없다. 선원 앞쪽에는 도심의 신생사찰답게 설법전 노전 유치원 어린이집 등이 자리잡았다. 이 곳 세등선원에서는 재가불자들도 스님들과 똑같이 참선한다고 한다. 스님들을 만나 이것 저것 여쭙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출가자 본분은 오로지 공부” 가르침 따라
결제 때마다 20여 비구니스님 용맹정진
‘번뇌 활활 태우는’ 정갈한 공부처로 유명
좋은 스승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길을 가다보면 많은 난관을 만난다. 그럴 때 눈밝은 스승은 필수적이다. 선지식은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과 같고 길잡이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른 선지식을 만나는 일은 도(道)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선어록 곳곳에 제자가 스승을 만나 깨치는 과정을 수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등스님도 한암스님을 만나 확고한 공부의 길에 들어섰으며 고봉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자신을 더욱 연마하게 됐다. 하지만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공부를 멈추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혼자서라도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좋은 스승을 만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삶과 부처님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구도의 길을 갈 수도 있다. 부처님이 평생을 걸어가신 길은 곧 수행자의 삶이기도 하다. 선지식들의 어록과 육성 법문도 좋은 의지처가 된다.
세등선원의 납자들 역시 선지식을 좌표로 삼아 길을 간다. 입적하신 스님의 뜻을 좇아 안거 해제 상관없이 늘 공부에 여념이 없다. 공부를 강조했던 은사스님의 뜻을 이어 두 달 동안 산철결제를 하는 것이다. 선원 개원 후 1984년까지는 반결제 기간에 조실 전강스님이 법문을 하며 수선자들을 제접했다. 그 이후 송담스님이 납자들 공부를 점검했다. 스님이 계신 용화사로 가서 법문을 듣기도 하고 스님께서 직접 세등선원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제자와 스승의 끈은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생전 전강스님의 법문 테이프도 의지한다. 매일 하루 일정 중에서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1시간 동안 전강스님의 법문 테이프를 들으며 수행정도를 점검하며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전강스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기 전의, 모양도 빛깔도 이름도 성도 없는 그놈을 깨달아야한다.” “온 곳도 갈 곳도 없는 미(迷)해버린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세상사람들이 ‘나’를 잃어버리고는 설사 문무 기술을 겸비했다해도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세등스님도 ‘부모미생전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고’를 화두삼았다. 이를 깨치기 위해 목숨을 건 공부를 놓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 굶주린 사람이 밥 생각을 하듯,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어린애가 엄마 생각하듯” 그렇게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화두를 임했다. 이는 모든 수좌들의 자세이리라.
선원은 다시 고요속으로 접어들었다. 선문(禪門)에 들어 수도하는 것은 죽을 병에 걸린 환자가 편작을 만난 것과 같다고 했던가. 굳게 믿어 용맹스럽게 공부하지 않으면 천추에 만가지 한이 되어 남는다 했으니 오늘 선원에 든 스님들은 행복할 것이다. 일주문을 나서다 뒤돌아본 선원이 말없이 내려다 보고 섰다. “세간의 번뇌는 활활 타는 불과 같으니 그 불길이 어느 때나 멈추겠는가. 시끄러운 곳에 있어도 대나무 의자와 방석 위에 앉아 공부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한다.” 세간에서도 공부를 멈추지 말라는 〈서장〉의 가르침을 나는 얼마나 따르고 있는가. 햇볕아래 나서기가 무서웠다. 대전=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세등선원 창건 세등스님은…
“태산처럼 높은 기개와 바다처럼 깊은 신심과 허공처럼 넓은 자비심으로 참된 행을 일관했도다.” 현재 최고의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송담스님(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의 세등스님 영결사 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13년전 겨울 일이다. 1926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한 세등스님은 1935년 서울 보문사에서 봉완스님을 은사로 득도, 고봉스님 회상에서 공부에 매진해 비구니계를 대표하는 선사로 우뚝섰다. 선학원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비구니들의 수행력과 화합을 고양시키기위해 뜻을 같이하는 도반들과 우담바라회를 조직하는 등 비구니스님들의 화합과 권익에도 큰 기여를 했던 스님의 뜻을 이어가는 참선도량이 대전의 세등선원이다. 세등(世燈)이란 법명은 한암스님이 ‘세상의 밝은 빛이 될 것’이라는 뜻에서 부여했다고 한다.
1935년 봉완스님 은사로 득도
고봉스님 회상에서 수행정진
세등선원은 1972년 창건하고 1988년 재단법인으로 등록하여 스님이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93년 서울 보문사에 입적하니 69세의 나이였다.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지낸 광우스님을 비롯, 능환스님 상득스님 등을 상좌로 두었다. [불교신문 2258호/ 9월2일자] 2006-08-30 오후 12:50:47 / 송고 |